6.2 지방선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의 ‘깨갱’모드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이 자만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시, 이번 선거의 주요 코드였던 ‘심판’이란 단어를 복기해보자. 적어도 투표에 참여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이 ‘예쁜 자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머리말로 달았다. 자식들 다 고놈이 고놈이지만, 그나마 괜찮은 놈이 민주당이기에 찍었다는 원칙. 역사는 민주당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소위 ‘반(反)의 정서’로 국민들이 도와준 경우가 몇 번인가를 세어보자. 아니 횟수가 중요하지 않더라도, 민주당이 ‘깨갱’할 때, 국민들이 투표로 도와줬던 그 순간의 농도를 측정할 때, 민주당이 처한 위기의 농도는 꽤 짙었다. 
  

되감기 버튼을 누른다. 결과론적이다, 누구의 탓이다는 6.2 지방선거를 둘러싼 주요 ‘뒷담화’의 틈을 뒤집고 내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장면은, 민주당의 성배를 위해 독배를 들었다는 민주당의 서울시장 경선후보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다. 이계안을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의 ‘아쉬운 패배’를 분석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보다 내가 촉구하는 것은 민주당의 어떤 태도이다. 앞에서 말한 ‘반(反)의 정서’로 대체 언제까지 일관할 것인가. 누군가는 플러스 - 마이너스, 영이라는 이 제로섬 게임의 틀을 깨야 한다. 나는 이 게임의 틀을 깨지 않는 한, 한나라당, 민주당에 대한  ‘도찐개찐론’을 여전히 철회할 마음이 없다.  

 

심판론 앞에 초조해진 또 하나의 정당, 민주당

 

 'MB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이계안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워낙 ’심판‘이라는 모토가 주는 준엄함 때문인지, 당의 결정을 따른 이계안의 태도에 대해 언론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요 프레임은 “이제 우리를 위해 오실 심판자 한명숙님이여!”였다. 많은 사람들은 “두고봐라, 이명박과 오명박”으로 대동단결한 듯 했다. 심판이라는 정서가 주는 도전자 정신의 주입과 공유는 한명숙과 오세훈의 TV토론과 출구조사의 관련성에 대해 의외의 결과를 내놓았다. 한명숙은 생각보다 준비되지 않았고, 오세훈은 회가 거듭할수록 의기양양했다. 오히려 이 의기양양함으로 빚어진 마지막 TV토론에서의 오세훈의 태도는 분명 마이너스 였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손실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출구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 한명숙이 TV토론에서 보인 어눌한 태도는 그리 중요한  감점 요인은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내가 잘 가는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 점을 안심하고 있었다. “거 봐요, 뭐 TV 토론 사람들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요.”

 하지만, 국민들의 안심과 정당의 안심은 달라야 한다고 본다. 민주당은 분명 ‘심판’이라는 모토를 잘 ‘이용’하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판을 ‘구성’할 줄만 알았지, ‘창작’할 여력은 역시 없었다는 걸 입증했다. 한명숙의 선전 뒤에 숨은 민주당의 불성실함을 우리가 애써 덮어줄 이유는 없다.

 

 ‘사람특별시’라는 이번 선거의 모토 안에서 기획된 공약들의 논리를 점검해보자. 공약의 논리를 관통하는 것은 철저히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반(反)의 정서’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다. “여러분, 오세훈식 행정이 이러저러 했습니다. 너무나 엉망이에요”에 주렁주렁 달린, 반대 이야기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그럼으로 우리는 이렇게 하겠습니다의 논리. 상식적으로는 맞다. 근데 민주당은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내세운 분석안을 그럴듯하게 잘 포장은 했지만, 이 포장의 약발이 이번 선거뿐인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반대’를 넘어서, 그것에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식의 공약은 넘쳤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서울을 고민할 수 있는 공약은 빈곤했다. ‘반대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함으로써 국민들이 ‘그래도 이 친구들이 비교적 상황 판단을 잘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심리선에 적당하게 걸쳐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선거에도  국민들을 ‘헉!’하게 하는 민주당의 의외성은 없었다. 선거 준비를 정말 잘했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또 한 번 국민들의 동정에 업혔다고 봐도 무방하다. 혹자는 이번 정부의 행보를 통해 정말 “‘운빨’ 장난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당의 ‘운빨’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민주당의 의외성이 돋보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 특히 이계안과 한명숙의 경선 과정이다. ‘정권 심판’이라는 모토의 농도가 워낙 짙어, 대중들이 봐 준 측면도 있지만, 경선 과정에서 tv토론을 거부한 채, 여론조사 형식으로 후보를 추대한 일은, 민주당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민주당은 후보 추대 과정에서, 사실 “우리에겐 한명숙 ‘씩이나’ 있다구!”를 외칠 정치적 전술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정작 민주당은 조급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인물이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우리에겐 한명숙 ‘밖에’ 없다구!”였다. 물론 이 결핍과 빈곤의 절박함이 한명숙이라는 인물론을 돋보이게 한 건 유효했지만, 만약 ‘심판’이 그리 지배적인 테마가 아니었다면, (좀 더 세게 말해서, 이 ‘운빨의 코드’마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리 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계안의 정책이 한명숙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가? 그것을 장담할 순 없다. 다만, 이런 몇 가지는 적어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거다. 내가 봤을 땐, 민주당에서 경선 과정 안에 토론을 넣었더라도, 한명숙은 이계안을 이기고 후보가 되었을 게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를 없애고, ‘심판’을 준비하는 시간 절약의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토론을 통한 서울 시정에 대한 학습 효과였을 것이다. 이계안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생각, 한명숙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그것들을 주고 받으면서, 한명숙이 나름 서울을 학습할 수 있는 시간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 민주당 이미지 전반에도 심판이라는 선거 전략과 더불어, 민주당이 현실 정치 안에서 어떻게 한국 사회를 인식하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민주당은 장기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전술 하나를 놓친 셈이다.

 

 민주당마저 웃을 이유는 없어

 다행히(?), 사람들은 적진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좀 모자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덮어 주었다. 그 안에 이계안도 들어가 있다. 그 또한 이 정서의 논리에 수긍해야만 했다. 예상대로 민주당은 힘을 얻어, ‘중단’과 ‘촉구’의 정치적 수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래, 이러라고 뽑아준 것이다”라고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확히 이 시점이 민주당에게도 역풍이 올 수 있다는 위기의 징조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체감한다. 민주당이 야당으로 내세우는 그 ‘반(反)의 정서’가 남은 2년을 채운다면, 변덕 심한 대중들이 또 얼마든 다른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노무현 탄핵 이후 총선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들의 태도는 결국 자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절망했다. 그 절망이 지금 이 정부를 찍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뉴 민주당 플랜’이라는 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혹시 이게 위기 때만 쓰이는 민주당 스스로의 자위 기구가 아니길 부디 믿고 싶다.

 결빙 효과를 깨야 한다

 특히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단일화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 진보정당을 ‘이상주의’로 매도했던 프레임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 내 현실 정치를 구성하는 정당, 언론, 시민의 노력에 대한 어떤 고민을 이야기하게끔 만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라는 영화를 비평하는 진보주의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그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면 철이 지났거나, 너무나 생뚱맞다고 힐난한다. TV토론에서 노회찬이 오세훈의 입을 납작하게 해주길 바라는 대중의 욕망이, 정작 표로 이어지지 않았던 현실이 아직 한국 사회의 진실이다. (많은 네티즌은 답답한 tv토론을 지켜보면서, 오세훈의 복지를 입만 살아 있는 ‘오랄 복지’라고 평가하면서도, 또한 노회찬의 ‘입만을’ 빌리고 싶어 했던 듯하다) <백 분 토론>에 나오는 진보적 달변가와 한국 현실 정치에 뛰어든 그들이 다르다고 혹은 아직 모자라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덧씌운 편견이 아닐까. 우리는 정작 추구할 수 있는 정치적 쾌락 앞에 그 현실이라는 ‘구성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먼저 타이르는 건 아닐까. 민주당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민주당 자체에 또 하나의 기대감을 갖는다는 것으로 우리의 생각이 이어져선 안 될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귀결되는, 정치사회학에서 설명하는 ‘결빙 효과’를 깨기 위해선, 우리는 꾸준하게 진보 정당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공간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보 정당 스스로의 노력 또한 필요함은 물론이다. 
 

<온라인 당비의생각(http://dangbi.tistory.com/61)>에 게재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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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6-08 00: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마기님. 다행히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주당이 자만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칼럼들을 계속 써주고 계시더군요. 다행이에요.
 

 

 온라인 당비의 생각(http://dangbi.tistory.com/) 에 실렸습니다. 

 

'없음'을 위한 민주주의

- 욕망의 교차 공간, 신도림역에 서서


김신식(당비의 생각 간사)

 

 나는 운동화를 비교적 빨리 바꾸는 편이다. 운동화 뒷쪽이 빨리 벌어져 너덜너덜해지기 때문이다. 내 운동화와 신도림역은 상극인 듯하다. 학교 위치상, 꼭 신도림역을 거쳐야 하는데, 지하철 안에서 신도림역 이름만 나오면, 미리 인상이 찌푸려진다. 오늘도 조심조심 걸어야지. 사람들이 날 밀더라도 짜증내지 말아야지. 걸을 때 되도록 내 뒷사람 구두 굽에 안 닫게 해야지. 하지만, 세상은 결심과 반대의 장면을 나에게 선사한다. 작년이었나. 킬 힐을 신은 여학생에게 역 계단에서 한 번 밟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산지 얼마 안 된 신발의 뒷 굽이 확 벌어져 신경질이 난 적이 있었다. 싸게 산 덕분이라 자신에게 위안을 보냈지만, 그런 경험이 갈수록 쌓이다보니, 신도림역은 나에게 '신경질역'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이 역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신촌 방향과 강남 방향으로 갈리는 두 플랫폼. 이곳에 오면 어떤 욕망이 보인다. 내가 살면서 추구해야만 하는 그 욕망. 그것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통로가 여기 있다. 서울에 진입해야만 하는 사람들. 갈수록 이 진입로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정치인들은 "지읍시다, 세웁시다, 만듭시다!"라고 주절대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은 없어져야 할 것이 많다. 기술이 늘어나고, 매체가 늘어나고, 사람들의 감각이 늘어난다. 내가 '발산형 사회'라고 부르는 현상. 모든 에너지들이 발산되는 구조. 이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그 피로도가 더해진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피로도를  '있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안이 시민들의 행복을 위한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음'을 위한 민주주의다.

‘질서적’ 민주주의를 벗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혼란이라고 생각하며, 민주주의는 이 혼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 시대의 권력을 잡은 자들이 질서라는 개념을 민주주의의 가장 큰 효과라고 강조하면서, 그들은 이 질서가 주는 가지런한 자유를 자신들의 노력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적한 것은, 사람들의 불안이다. 사람들은 늘 '있음'에 친숙해져야 하며, 이 '있음'에 기반을 둔 사회적 구조에 천착한다. 그러하여, 자신들의 일상에 '있음'을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고로 '없음'은 늘 민주주의의 적으로 여겨진다. 

 정전이 일어난 당신, 그리고 이웃의 집을 상상하기. 사람들은 정전이 일어났을 때 발생하는 그 고요함의 에너지를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있음'이 천착하는 존재론적 안전의 구조. 그러므로, 사람들은 '있음'에 대한 사고만으로 이 세상이 움직인다고/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라는 말, 이 말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각자의 사연은, 늘 '있음'안에서만 작동해야 하는 규범이 발생한다. '없음'에 대한 삶을 늘 혼란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그 '없음'의 삶이 주는 행복을 비현실적이라며 몸부림친다. '발산형 사회'안에서, 사람들이 저절로 표출하게 되는 언어 그리고 감정들. 이 언어와 감정을 배출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불안한 판단과 자기 검열. 

 

 결국 '극단적 없음'을 경험하지 못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삶 안에서, 그 삶을 유지하는 에너지 흐름이 중단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발산형 사회'의 비극에 동참한다. 이 비극 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언어들이 나의 몸 안과 밖에 넘쳐난다. 현대인의 고독과 무관심을 반영하는 메일 함 속 스팸 메일의 홍수, 나와 타인의 모호한 감시 경계 속에서 불안과 의심의 언어를 조장하는 '뒷담화'라는 현대 사회의 고도화된 안식처. 지나치게 큰 웃음과 울음. 방 안에 무엇 하나라도 틀어놓지 않으면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 걱정하게 되는 미디어 환경과 장소의 합일. 이것을 추동하는 도시들. 

 '있음'에 기반을 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상상력.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상력이란 개념은 늘 현재의 '있음'을 둘러싼 포장의 언어가 되었다. 그 포장을 풀었을 때 사람들이 확인하는 것은 냉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있음'이 주는 위험을 발견할 때라도, 그 '있음'을 경고하고, 성찰하는 이들의 시선은 '극단적 없음'을 늘 불온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단순한 절약/ 검약 정신을 챙기기?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정비식'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직은 사람들이 '비방할' 가능성이 큰 '파괴적' 민주주의. 나는 이 민주주의의 현실적 실천의 언어를 여기서 제시할 순 없다. 다만, 꿈꾼다. 작은 프라이드 차 안에 몇 명이 들어가는지 기네스북 기록을 세워보려는 자들이 채운 풍경 같은 이 곳, 신도림역. 나는 차라리 이 사람들을 안전하게 수용하기 위해 구획을 짓는 민주주의가 아닌, 이 공간을 파괴하여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이다. 

 

‘있음’의 굴레를 탈출하자

 강수돌 선생이 말하는 '팔꿈치 사회'를 살아가는 타인이, 상대방을 이리저리 치면서 길을 갈 때, 그 길로 인해 생기는 짜증을 안 생기게 해달라는'나'의 요구는, 기존의 '있음'을 확장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공간의 '없음'으로 인하여, 욕망의 흐름 자체가 완전히 절단될 때. 그 절단이 주는 충격과 파격은 진보진영 특유의 '묵시록 효과'가 주는 과장된 경고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 안에 스며든 생각보다 무덤덤한 현실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상상과 실천을 관계 맺는 것을, '혁명'과 '급진'이라고 쉽게 부르는 진보들도 문제고, 그것을 '불안'과 '혼란'이라 지적하는 보수도 문제인 지금. 실천의 언어는 갈수록 타인의 눈치를 보고, 사유의 언어는 계속 '있음'이란 상품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윤리적 선만 긋는다.  '있음'을 위한 민주주의에서 내가 늘 느꼈던 불안함이란 건, 내 운동화가 타인의 움직임 때문에 너덜너덜해졌다는 게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느껴지는 창피함도 아닐 것이다. 내가 맨발로 이 땅을 걸어갈 수 있다는 행복. 그것을 행복이 아니라, 현실적 불안이라 보는 사회적 시선의 감옥에 스스로가 나오길 싫어한다는 것이 아닐까. 고로 이 행복 자체를 상상하는 게 점점 더 희미해진 현실.  '있음'을 위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라고 설득하는 이 감옥 안에 산 지 꽤 된 것 같은데, 나는 오늘도 자발적으로 이 감옥의 창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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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9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30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비의 생각>03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출간을 기념하여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주관, 웅진씽크빅 산책자 후원으로 조촐한 좌담회가 지난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저녁에 열렸습니다. 

패널엔  

송인혁 (연세대 국문학 석사과정) / 

한윤형(『뉴라이트 사용후기』저자) /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이  

사회엔 한보희 당대비평 기획위원이 

정리는 저(얼그레이효과), 김신식 당대비평 책임간사가 했습니다. 

1부, 2부로 구성했는데, 

오늘은 1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의 의미와 파장', 책에 대한 관련 소감'을 올렸습니다.   

2부 용산 참사의 의미와 2010년 한국 정치 전망은 2월 1일에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dangbi.tistory.com/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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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당비의 생각>에 두번째 글을 올렸다. 

 http://dangbi.tistory.com/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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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경향에 당대비평 신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대한 서평이 올라왔네요. 최재천 변호사의 글입니다. 혹시 민주당 전 의원? 최재천?  

원문 :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0912171045541&pt=nv 

 

공동체의 문제를 정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로 풀어나가지 못하는 정치가 주범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바로 정치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무덤은 그 자체가 핑계이다. 죽은 자를 상징적 질서 속에 기억으로 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합당한 핑계, 그것을 망각하거나 기억하기 위한 핑계이다(김성태).” 이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할 것 같다. 며칠 전 용산참사 미사 현장에서였다. 신부님의 강론을 듣다 말고 나치 시절을 담은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떠올렸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의 사유 구조도 비슷했다. ‘당비의생각’ 3권이 ‘누구에게나 기억되는 죽음’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제재로 불길하고도 불편한 질문을 던져 왔다. 애도도 아니고, 회고도 아니고, 생뚱맞게 무슨 ‘기억’이냐고? “기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진작시키는 역할을 수행(정진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대의 젊은 논객들이 2009년 한국 사회 일상의 죽음 가운데 ‘정치적 공간을 배회하던 죽음’을 비판적 반성의 무대로 불러올렸다. 초혼제다. “죽음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삶의 정체성을 헤아리고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적 정치를 지속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를 찾아보려는 의지(서동진)”에서다.

먼저 죽음의 성격을 정리했다.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적’ 죽음이라면 김대중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었다. 그리고 용산은 ‘정치 자체의’ 죽음이다.(엄기호)” 그렇다면 애도와 기억이라는 관점에서는 어떤 차이를 드러냈을까. “김대중과 노무현의 죽음은 기억할 만한/기억해야만 하는 죽음이었는 데 반해 용산의 죽음은 침묵되는 죽음”이었다. 용산은 애도를 거부당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됐다. 개인과 집단의 전반적인 삶 자체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시민이 되고자 했던 용산 철거민들의 투쟁을 “국가가 각 사람을 계급과 계층에 맞게 자리와 기능을 분배해 위계를 유지시키는 협상과 관리의 기술인 ‘치안’의 대상으로 환원(정용택)”시킴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여름 ‘6·9 작가선언’은 “용산 참사로 상징되는 ‘벌거벗은 삶’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작가들의 한 줄 서명으로 표명하면서 ‘이명박 정권 하의 한국 사회를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로 명명’했다(권명아).” 그렇게 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만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렇다면 용산의 불길을 회피해 온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는 어떠해야 한다는 걸까. 애도와 기억이면 되나?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부끄러움’ 역시 실상 ‘죄의식’이기보다 우울증적 증상의 변형(정용택)”에 불과하다고 했다. “애도의 광장에는 ‘종교’만 있을 뿐 ‘정치’가 보이지 않고, 그러므로 문제는 더 이상 ‘죽음’만이 아니(김성태)”라는 것. “슬픔의 연대만으로는 아직 정치학이 아닌 것처럼 애도 역시 아직 적절한 정치학에 이른 것이 아니(김영민)”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문제를 정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로 풀어나가지 못하는 정치가 주범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바로 정치다. 애도와 기억을 뛰어넘는 정치의 복권이다.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조직화(김원)”다. 이렇게 되는 순간 애도와 기억의 대상은 전복된다. “오히려 추모받아야 하는 이들은 노무현이나 김대중이나 용산 철거민 열사들이 아닌 살아 있는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궁핍과 무지와 나약함인지도 모른다(송경동)”는 논리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노여워할 줄도 모른다. 분노를 잊은 지 오래다. 이런 슬픔과 노여움과 수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오늘도 용산을 우회한다. 애써 망각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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