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내세우는 중립성의 신화가,실제로는 부르주아 프로테스탄트 규범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세속주의 이외에 미국 내외의 관용 담론을 연결시켜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자유주의 관용 담론의 중핵에 위치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이다.도덕적 자율성의 관념은 미국의 안팎 모두에서 관용할 수 있는 주체와 관용 불가능한 주체를 나누는 기준이 되며,자유주의와 문명 담론을 은밀히 결합시킨다.-27쪽
근대 초기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오늘날 인종주의적 법률의 입법화를 저지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관용 담론이 때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하지만 역으로 관용에 대한 호소가 반드시 폭력과 종속을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예컨대, 오늘날 동성애자에 대한 법적 평등의 완전한 실현 대신에 이들에 대한 관용에 호소하는 것은,동성애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항하여 이들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후자가 관용을 잔인함과 폭력,공적인 배제와 대립시키는 데 반해, 전자는 관용과 평등을 대립시키년서,관용을 통해 동성애자의 종속적인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33쪽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불쾌함을 유발하는 것들에 대한 행동이나 발언을 참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그것은 사회적,정치적,종교적,문화적 규범들을 부과하는 행위이며,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하는 일인 동시에,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하는 기제이다.더 나아가 정치적 담론으로서 관용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정체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생산 그 자체에 관여하며,문화를 종족 혹은 인종과 뒤섞고,믿음과 신념의 문제를 유전적 형질과 결합시키는 데 일조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탈정치화함으로써,자연스럽게 정체성 그 자체를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한다.-38쪽
탈정치화의 공통된 방식 중 하나는,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40)어, 그 현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현상을 조건 짓는 권력의 문제를 배제하는 것이다.-40,41쪽
두 번째 탈정치화 방식도 존재한다.이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정치적 언어를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들로 대체해버리는 방식이다.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관용으로 대체될 때,타자에 대한 정의의 문제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존중의 문제로 대체될 때,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통들이 단순히 차이와 공격성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 고통이 개인의 감정의 문제로 여겨질 때, 정치적 투쟁과 변혁의 문제는 특정한 행동과 태도,인정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접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긴 하겠지만,불평등과 배제 같은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관용을 제시하는 것은,정치적으로 생산된 차이를 물화하는 것일 뿐더러, 정의의 추구를 단순한 감수성 훈련 혹은 로티가 태도의 개선이라 이름붙인 해결책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정의의 추구는 이제 태도와 행실을 치료하고 개선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42쪽
정리하자면 오늘날 "정치의 문화화"는 비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삶 전체를 소위 문화의 문제로 환원시키며,이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문화와 무관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논리 속에서,관용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의 일부로서 문화적 영역-즉, 섹슈얼리티에서 종족성에(53)이르기까지 모든 본질화된 정체성들을 포괄하는 영역이자 현대 자유주의 체제내에서 차이의 문제를 담당하는 영역-에 적용된다.즉, 관용은("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이며, "본질적이기에"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문화적 정체성과 이러한 정체성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이 과정에서 관용은 이러한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스스로를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충하는 도구로,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이다. -53,5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요소를 주인 안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그 대상의 타자성otherness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타자성 관리 방식이다.바로 이 점이 관용을 한편으로는 동화,흡수와 다른 한편으(62)로는 배제,부정과 구분시켜준다.관용의 대상은 전체 내부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표지된marked채 남아 있다.관용의 대상은 주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거나 주인 속으로 용해되지 않기 때문에,이것이 가진 위협적이고 이질적인 특성은,주인의 신체 내부에서 계속 유지된다.-62,63쪽
관용이 차이에 대한 적대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관리할 뿐인 한, 관용은 각종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된다.관용이 무엇에든 적용되는 이데올로기이자 통치의 요소가 된 오늘날,이 심리적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백한 사회적 효과를 가진다.오늘날 관용의 대상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주변적 대상으로 표지됨과 함께, 시민과 비시민 혹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에 자리 잡게 된다.이와는 반대로,관용을 실천하도록 종용받는 이들은,시민윤리와 평화,진보의 이름하에,적개심과 분노를 억눌러야만 한다.-6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적이고 탈정치화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에서만,즉 이를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만,관용 가능한 대상이 된다. 관용 대상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정치화된 정체성이면 추구하기 마련인 인식론적,정치적 입장과 충돌할 뿐 아니라,"차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비표지된 문화,종족,인종,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계층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 속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와 원칙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88쪽
근대적 주체 형성은,한편으로는 표지된 주체의 차이를 존재론화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이 표지된 주체가 유사한 주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민족-국가의 추상적인 시민권 담론이,여타의 다양한 주체 생산 담론들-즉 기독교인,부르주아,백인,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존재들을 분류하고 규제하는 담론들-과 긴밀히 결합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배제되어 온 이들을 추상적 시민권 담론을 통해 내부로 편입시키는 과정-다시 말해, 배제된 자들의 일탈적 성격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과정-은, 곧바로 이러한 지위를 재기입하기 위한 좀 더 강력해진 규제와 표지의 방식을 만들어 냈다. -124쪽
타자의 종속과 비체화abjection가 이러한 종속의 사사화나 경제 영역에서의 종속의 제도화를 통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즉 더욱 완전한 평등이 시급한 문제가 되는 곳에서,관용은 종속과 배제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소환된다.관용은 헤게모니적 규범이 일탈적 타자를 손쉽게 식민화하거나 내부화할 수 없을 때,혹은 직접적 종속이나 편입보다는 새로운 주변화와 조절의 테크닉을 통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호출된다.따라서 오늘날 대중 정치 담론 속에서,이성애 여성은 평등의 후보자가 되는 반면, 레즈비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전자의 종속적 차이는 이성애적 사회 질서와 가족 질서에 의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130쪽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통치는 만약 조직되지 않는다면 그저 비생산적으로 남아 있었을,개인과 대중 그리고 초국적인 신체의 힘들을 이용하고 조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더 나아가 주체들의 욕구와 능력,욕망 역시 통치성에 의해 관리되고 지도된다.따라서 통치는 푸코가 "행위의 지도"라고 부른 것,즉 개인의 신체와 사회적 신체,정치적 신체의 행위를 지휘하고 지도하는 것과 관련된다.둘째,행위의 지도로서 통치성은,개인에서부터 인구,신체와 정신의 특정한 부분에서부터 윤리와 노동,시민적 실천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지점을 통해 작동한다.셋째,통치성은 법이나 여타의 가시적인 권력에 한정되지 않으며,광범위하게 펼쳐진 비가시적 권력들을 통해 작동한다.푸코는 사목권력을 통치성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부는 전형적인 예로 보았다.-140쪽
넷째,통치성은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이나 국가와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담론에 침투해,이러한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여기에는 범죄학,교육학,심리학,정신의학,인구학,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 담론과 종교 담론,그리고 여타의 대중 담론이 포함된다.이와 같이 통치성은 집중화나 단일화,체계화에 기대는 것이 아(140)니라,근대 사회에 분산된 광범위한 권력과 지식을 통해 작동한다.-140,141쪽
정치적 갈등의 원인을 불관용에서 찾는 관용 담론은,불평등과 지배 같은 문제를 개인적인 편견과 증오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개인화하고,그 원인을 특정한 태도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탈정치적 접근이다.개인과 그 태도가 갈등의 이유로 제시되자마자,권력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진다.이러한 관점에 따르면,다양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의 원인은 편견을 가진 개인이고,관용적 개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233쪽
주체나 사회의 법칙이 문화와 종교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는 이제 유기체적 사회와 동일시되며,자율적 개인의 등장은 이러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력을 소멸시킬 것으로 간주된다.여기서 사실상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란,바로 문화와 종교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극복 과정을 거친 자유주의 주체에게 문화란,먹을 거리,의복,음악,라이프스타일과 같은 것들일 뿐이다.과거 권력으로서의 문화는,이제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로 대체된다.자유주의 사회에서 사적 공간이 "비정한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안식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개인을 억압하던 문화는 이제 개인의 즐거움과 안식의 원천으로 변화한다.과거 지배와 비합리성의 원천이었던 종교 역시, 이제 개인의 위안과 자기 충족,도덕적 지침을 얻기 위한 주체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변형되어야 한다.-24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