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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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심리 단위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감정은 문화 단위이자 사회 단위이다. 곧 감정이 표현되는 장소는 구체적 , 즉각적 관계이되 항상 문화적,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관계이며, 이로써 우리는 감정을 통해서 인간됨 personhood의 문화 규정들을 구현enactment하게 된다. 요약해보자면, 감정이란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문화 의미들과 사회(15)관계들이며, 감정이 에너지를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덕분이다(감정이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이 반성 이전pre-reflexive상태, 때로 반의식semi-conscious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감정이 행동의 여러 측면 중에 고도로 내면화되어 있고 비반성적인 측면인 이유는,감정에 문화와 사회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15,16쪽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행동을 "안"으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해석학적 사회학은 행동의 감정적 색조에, 그리고 실제로 무엇이 행동을 추동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16쪽

이 책에서 나는 두 가지 주장을 펴겠다. 첫째, 자본주의가 형성된 과정은 고도로 특화된 모종의 감정 문화가 형성된 과정과 궤를 같이 했다. 둘째, 자본주의의 여러 차원 중에서 바로 이 감정의 차원에 초점을 두게 되면, 자본주의의 사회조직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7쪽

실용서는 1920년대에 영화와 함께 문화산업으로 부상했고, 나중에는 심리학의 개념들을 유포하고 감정 규범들을 설명하는 가장 튼튼한 발판이 된다. 실용서는 여러 가지 요건들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야만 한다. 첫째, 실용서란 일반적인 어법을 사용해야 한다.다시 말해 법칙 비슷한 언어로 법칙 비슷한 명제를 진술해야 한다. 그래야 실용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다양한 내용의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일정하게 소비되는 상품이 될 수 있다. 셋째, 초 윤리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나 사회관계에(31)서의 처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중립적 관점을 제공해야 한다.그래야 가치와 시각을 달리하는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다.끝으로 신용할 수 있는 적법한 출처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31쪽

엘튼 마요는 두 가지 점에서 경영이론에 혁명을 일으켰다. 첫째, 자아됨이라는 윤리의 언어를 심리학이라는 냉정한 학문의 용어로 개조했고, 둘째, 한창 기세등등하던 합리성이라는 엔지니어들의 수사를 "인간관계"라는 새로운 어휘로 대체했다. -40쪽

많은 사회학자들은 기업에서 심리학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을 새로운 노동 통제 방식, 곧 교묘하고 따라서 더 강력한 통제방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심리학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한 이유는, 그것이 권력 관계였던 노동자-경영자 관계를 민주화하고, 사회적 지위와 무관한 인성이 사회적,경영적 성공의 열쇠라는 새로운 믿음을 주입했기 때문이다.-45쪽

언어학적 소통모델은 (문화도구지아 문화 레퍼토리로서)행위주체들이 외적 관계(동등한 존재로 간주되며 동일한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및 내적 관계(외적 관계들의 조율에 필요한 복잡한 인지 장치 및 감정 장치)를 조율하게 해준다는 용도를 갖는다. 요컨대 "소통"이란 자기관리의 테크놀로지로서, 언어와 올바른 감정관리에 광범위하게 의존하며, 대인적 감정inter-emotion의 조율과 내부적 감정intra-emotion의 조율을 모두 포함하는 감정 조율의 엔지니어링을 목표로 삼는다.-50쪽

감정 자본주의는 여러 감정 문화들을 재배치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아를 감정적이 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들을 좀 더 도구적 행위에 종속되게 만들었다.-55쪽

친밀성의 문화 모델에는 20세기에 여성적 자아를 구성한 두 가지(곧 심리학과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문화 설득 담론)의 핵심 동기들과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다. 곧 근대적 친밀성의 이상은 평등, 공정,중립적 절차,감정 소통,섹슈얼리티, 감춰진 감정의 극복과 표현, 언어적 자기표현의 중시 등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65쪽

치료학이라는 설득 담론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행복의 문제를 의학적 은유를 동원해서 표현했으며 평범한 삶들을 병리화했다.(94) / 건강한 관계는 친밀한 관계였고, 친밀성은 건강함이었다. 이렇듯 친밀성 개념이 건강한 관계의 규범 내지 기준으로 설정된 후에는, 친밀성의 부재가 새로운 치료학적 자아 내러티브의 편성 틀이 될 수 있었다. 곧 이런 내러티브에 따르면, 친밀성이 없는 사람은 이제 감정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친밀성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94,96쪽

감정 장이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병리의 영역을 구축,확대하는 것과 감정건강의 영역을 상품화하는 것이 하나이고,이른바 감정능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능력에 대한 접근권을 규제하는 것이 또 하나다. 곧 문화 장이 문화능력-문화물과 관계할 때 내가 상층계급에 의해 승인된 고급문화에 정통해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 장은 감정능력-심리학자들이 정의,판촉하는 감정양식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규제된다.-126쪽

치료 내러티브는 특화된 시장을 창출한다. 시청자는 잠재적 환자 겸 소비자로 정의된다. 치료학관련 직업,출판 산업,텔레비전 토크쇼는 "너무 사랑하는"사람(105)들 혹은 "옛사랑을 못 잊는"사람들을 소비자 겸 환자로 구성한다.둘째, 치료 내러티브는 감정-이 경우에는 죄의식-을 공적 대상, 곧 발현의 대상, 토론의 대상, 논쟁의 대상으로 만든다. 주체는 "사적"감정들을 구성,발현함으로써 공적 영역에 참여한다. 셋째,내가 내 인생의 이야기를 치료 내러티브로 다시쓰기 하는 원동력은 바로 이야기의 목표이다.-105쪽

이렇듯 감정지능은 자아수행을 경제적 수행의 핵심으로 하는 경제에서 요구되는 능력일 뿐 아니라 심리학자들의 강도 높은 전문화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심리학자들은 감정 생활을 정의하고 규제할 자격을 독점해왔으며, 이로써 감정생활을 장악하고 관리하고 계량하기 위한 새로운 척도를 세워왔다.-131쪽

마이클 왈처나 수전 오킨 같은 페(133)미니스트 이론가들이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한 것처럼,정의의 이론은 각각의 생활 영역들의 가치를 설명하고 존중해야 하며, 시장에서 중요한 재화들과 가정에서 중요한 재화들을 구분해야 한다.우리가 가족과 사랑을 자율적인 의미 및 행동 영역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이어서 우리는 이것들을 윤리적 재화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아와 행복의 내용이다-로 분석할 수 있게 된다. -133,134쪽

다시 말해 부르디외의 모델을 거꾸로 적용할 때 우리는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특정한 감정 아비투스 쪽으로 사회화되는 방식들, 그리고 특정한 감정 아비투스를 가진 사람이 친밀한 관계의 영역에서 특정한 형태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행복,웰빙)에 도달하는 방식들을 탐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친밀성과 우정이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분배되고 할당되는 방식들을 탐구할 수 있다.-134쪽

전통적인 비판론, 특히 문화연구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비판론은 이른바 "순수성에 대한 갈망"을 그 특징으로 한다.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문화를 그토록 중시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문화를 아름다움,도덕성,정치의 이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발견해야 하는)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순수한 비판론은 문화를 정치 영역 안에 포섭하는데, 그러다 보니 순수한 비판론이 결국 하는 일은 문화가 어떻게 해방의 수단이 되거나 억압의 수단이 되는지, 문화가 어떻게 "쓰레기"를 만들어내거나 "보물"을 만들어내는지 그 방법들을 열거하는 일이 되어왔다.이러한 입장은 우리의 문화 분석을 자칫 빈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175쪽

문화를 정치로 포섭하려 할 때 발생하는 마지막 문제는 비평가가 신의 자리와도 같은 머나먼 자리로 쫓겨나게 된다는 데 있다. 문화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이러한 비평적 거리는 점점 그 근거를 잃고 있다. 아도르노가 재즈를 거부했던 것도 문화의 토양인 구체적(178)경험과 의미로부터의 급진적(그리고 잘못된)거리두기의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비판론이 위력을 발휘하는 때는 신적인 순수성을 버리고 평범한 작용주체들의 구체적 문화 실천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모색할 때이다.그러다 보면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비평가는 고도로 상품화된 전장을 비판하면서도 비평가 자신도 (선택이든 필연이든)전장 안에 자리매김되어 있고, 그런 만큼 순수성은 더욱 훼손돼야 한다.19세기 지식인은 자본주의가 미치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 물러서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오늘날의 비판론 가운데 자본주의 제도들 및 기구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178,179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판론을 포기하고 온갖 사회 영역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맞서고자 하는 시장 세력 못지않은 교묘한 해석 전략들을 계발해야 한다. 비판론의 힘은 대상에 대한 친밀한 이해에서 나온다. 이는 비판론을 없애자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오히려 우리는 비판론이 필요하다. 요컨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비판론은 문화가 일정한 정치적 아젠다(평등,해방,가시화)를 어떻게 증진하는가(혹은 증진하지 못하는가)를 "열거"하는 비판론이 아니다.-179쪽

약속날짜를 합리적으로 결정하려는 이 환자를 나는 초합리적 바보hyperrational fool라고 부르겠다. 초합리적 바보란 판단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선택을 내리는 능력이 비용편익 분석(통제를 벗어나는 비교 대상들을 합리적으로 계량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손상되어 있는 사람을 뜻한다.-211쪽

지(212)금의 문화는 판타지를 끊임없이 엔지니어링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판타지는 전에 없이 풍요롭고 다양하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는 판타지를 점점 현실에서 유리시켜 초합리적 시장 세계(시장과 관련된 선택 및 정보로 구성되는 세계)내부에서 조직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판타지가 오히려 빈약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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