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한 영화를 처음으로 본 건, 어릴 때 TV에서 방영한 주말 영화프로그램이었다. ‘내일을 향해 쏴라였다. 그 영화에는 지금도 레전드로 꼽히는 유명한 사운드 트랙과 장면이 있다.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흘러나오며 폴 뉴먼과 캐서린 로스가 자전거를 타는 씬이다. 나 역시 그 장면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 음악과 영상이 너무 좋았지만, 그때부터 난 폴 뉴먼이 아닌 로버트 레드포드의 팬이 되어버렸다. 보는 순간 그냥 처음부터 이 배우에 홀딱 빠져버렸다. 느끼하지 않게 잘 생긴 것이 매력 있었고, 그리 정열적이지도, 과하지 않은 담백한 연기도 좋았다.

 

그 뒤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영화는 거의 본 것 같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출연한 추억과 메릴 스트립과 함께 출연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역할이 너무 차갑고 이기적인 것 같아 마음에 조금 들지 않았지만, 이 배우를 탓할 수는 없었다. ‘추억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사운드 트랙과 영상 역시 내 인생영화이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더 좋았던 점은 그가 배우로만 머물지 않고 감독과 영화 제작자, 그리고 저예산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선댄스 영화제를 설립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전공한 딸아이는 올 초 미국 유타주의 파크시티에서 열린 ‘2025 선댄스 영화제에 자원봉사자로 다녀왔다. 혼자 짐을 꾸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걱정되어 반대하기도 했지만, 내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니었다. 비록 자비로 비행기 티켓을 끊어 갔지만, 무료로 제공되는 훌륭한 숙소와 여러 인종과 나이가 섞여있는 다양하고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딸아이는 좋은 영화도 많이 보고 우정도 쌓고 왔다. 그 경험이 플러스가 되었는지 딸아이는 올해 계속해서 한국의 여러 영화제에서 일하고 있다. 오늘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한다.

 

너무나 더웠던 올 여름의 무더위도 어느새 물러나고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이 변하지만 아직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한 번씩 적잖은 우울과 마음의 허전함을 겪는다. 누군가를 보낼 땐 매번 힘들다.


주말에 자주 같이 영화를 봤던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이다.


-사진출처:네이버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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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17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르는 강물처럼>에 그가 나왔나 싶어 찾아보니 감독이었군요.

페넬로페 2025-09-17 20:27   좋아요 0 | URL
감독으로도 성공을 거둔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감독상도 수상했고요^^

다락방 2025-09-17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쩐지 흐르는 강물처럼이 제일 먼저 생각났어요.

페넬로페 2025-09-17 20:28   좋아요 0 | URL
<흐르는 강물처럼>도 정말 레전드죠^^

바람돌이 2025-09-18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일을 향해 쏴라하고 스팅
여기서도 연식이 드러나는군요. ㅎㅎ 제게는 나이 들수록 더 멋있어졌던 배우입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시기를.....

페넬로페 2025-09-18 23:07   좋아요 1 | URL
저도 연식이 많이 된 사람임이 확실해요 ㅎㅎ 할리우드 키드로서 미국 영화를 엄청 본 것 같습니다. 로버트 레드포드 배우는 정말 나이 들수록 멋있었어요. 자기 목소리도 확실히 내었고요^^
 













샬럿 브론테의 소설 빌레뜨는 비극에 가깝다. 고대 그리스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장중하거나 극적이지는 않지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여성이 겪는 은근하고도 끈질긴 힘듦과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노동계급보다 아래인 이급 시민으로 취급받은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으로서, 특히 부모님은 물론 후견인 한 명 없이 홀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야하는 여성의 여정은 당연히 위태롭고 벅찰 것이다. 작가 샬럿 브론테는 별 다른 설명 없이도 조실부모하고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소설의 주인공 루시 스노우를 통해 그런 환경에 처해진 여성의 삶을 자세하고도 절절히 묘사한다.

 

작가는 지나치게 세밀하고 자세한 문장을 통해, ‘루시 스노우의 생각이나 행동을 말해준다. 제인 에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샬롯 브론테는 여성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시대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스스로 이루기 위해 매번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사랑일지라도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곳은 절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언제나 감정보다는 이성을 통해 자신을 지키려는 인내심은 보통 사람이면 갖기 힘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층계급이 아닌 여성이 생계수단을 획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가정교사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심리적인 면에서는 일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 유모나 하녀의 일까지 겸해서 해야 했으며, 또한 고용주의 다른 피고용인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위치 때문에 고립만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작품 해설 중에서]

 

이 힘든 것을 묵묵히 견디는 루시 스노우지만 한 번씩 그녀에게 엄습하는 우울과 외로움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 고통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은 주저앉거나 광기의 행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샬럿 브론테는 역시나 이 소설에서도 그것을 극복해내는 또 한 명의 강인한 영국 여성을 만들어낸다. 소설 빌레뜨는 루시 스노우가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결국 뽈 에마뉘엘이라는 남자가 만들어 준 것이며, 뒤늦게 찾아 온 유산을 받아서이다. 아무리 의지와 행동이 이성적이고 단단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도 보여준다.

 

작가 샬럿 브론테는 동생 에밀리와 함께 1842년 벨기에의 브뤼셀에 위치한 에제 부인의 기숙학교에서 학생이자 영어 교사로 생활한다.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워 하워스에 학교를 차릴 목적이었다. 소설 빌레뜨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여러 면에 걸쳐 상상도 하지 못할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샬럿은 또한 에제 교수에게 연정을 느낀다. 뽈 에마뉘엘은 에제 교수가 모델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느낀, 작가가 이해 못한 것들은 이 소설에 그대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여러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지나치게 장황하고 세세한 묘사로 많이 지루했다. 다만 문장의 표현만큼은 기막혔다. 적절한 상징과 비유가 뛰어났고, ‘루시 스노우로 빙의한 샬럿 브론테의 지혜와 위트, 귀여움이 너무 좋았다.

 

[‘이성에 따르면, 나는 빵조각이나 벌려고 일하며 죽음의 고통을 기다리면서 평생 낙담한 채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이성이 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이성을 무시하고 이성의 채찍을 벗어나 상상에게 달려가서 빈둥대지 않는가. 밝고 부드러운, 이성의 적이자 우리의 상냥한 구원자이며, 신성한 희망상상에게 말이다. 끔찍한 복수가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따금 한계를 넘어서기도 하며, 또 그래야 한다. ‘이성은 악마처럼 복수한다. ‘이성은 늘 계모처럼 내게 독기를 품고 대했다. 내가 이성을 따르는 것은 애정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이성은 겨울밤 차가운 눈 위로 자주 나를 내쫒으면서 개들이 갉아먹다 버린 뼈다귀나 먹으라며 던져주었다. 자기 창고에는 내가 먹을 게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 더 나은 음식을 요구할 권리가 내겐 없다고 모질게 굴면서

-빌레뜨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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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09-17 0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수>에도 벨기에 사람들을 폄하하는 이야기들이 꽤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빌레뜨>는 그 뒤에 읽었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 같네요.. ^^;

페넬로페 2025-09-17 00:55   좋아요 1 | URL
<빌레뜨>에 엄청 그런 내용이 많았어요. 물론 작가가 경험한 것들을 서술했겠지만, 영국인의 우월주의가 많이 들어 있더라고요.
<교수>는 괜찮나요?
<셜리>는 빌레뜨보다는 제 취향인 것 같더라고요^^

건수하 2025-09-17 10:23   좋아요 1 | URL
<교수>는 초기작이라 좀 거칠고 여성도 별로 진취적이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재미있지도 않았어요.. ^^
저는 <셜리>를 아직 안 읽었는데, 조금 기대해봐야겠습니다.

바람돌이 2025-09-17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레뜨는 장황하죠. 그래서 사실 저도 좀 읽기 힘들었어요. 뭔가 딱 이거다 하는 임팩트가 없었던.... 하지만 제인 에어가 이래서 나올수 있었구나 하는 마음을 줬어요. 그것만으로도 제인 에어의 팬으로서 감사하답니다. ^^

페넬로페 2025-09-17 15:13   좋아요 1 | URL
네, 끝까지 맥락과 임팩트가 부족해서 읽기가 지루했어요. 제인 에어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어요.

책읽는나무 2025-09-17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책표지가 다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책표지가 넘 예뻐서 기대하고 읽었는데 좀 어려웠어요. 그래서 좀 대충 읽고 넘어갔었는데…문체가 몇 군데 끌던 곳이 있었어서…꼭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지. 찜해두긴 했는데 언제 읽을지?….

페넬로페 2025-09-18 08:38   좋아요 1 | URL
책표지가 예쁜데 뭔가 내용과 잘 맞지 않는 느낌도 들었어요. 소설이 너무 장황해 읽기가 지루하기도 ㅎㅎ
책나무님, 굳이 재독까지는~~

새파랑 2025-09-18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론테 전문가 페넬로페님~! 제인에어에 이은 읽기군요. 이 책은 잘 안읽히나 봅니다. 저는 표지가 예뻐서 구매후 초반부만 조금 읽다가 포기했었습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5-09-18 19:02   좋아요 1 | URL
너무 안 읽혀 조금 힘들었어요. 샬럿 브론테 작품의 주제가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표지는 넘 예쁩니다 ㅎㅎ
 
















예전에, 나를 둘러싼 세계를 그냥 나 자신의 시각으로만 봐도 되었을 때, 마음에 드는 소설 속 주인공을 만나면 그들을 닮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나에게 부족한 여러 종류의 것들을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메꿔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에서야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내가 읽은 것들과 그 안에 있던 인물의 성질로 조금은 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제인 에어는 그런 나의 롤 모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단함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따뜻하고도 쿨(cool)한 제인 에어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사실 이런 자질은 갖추기 힘들다. 대다수의 사람은 주변 환경에 휘둘리거나 감정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이런 면에서 그때 나는 이 소설을 한 여자의 성장과 자의적 사랑의 선택으로만 읽었던 것 같다.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버사 메이슨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었다. 나에게는 오직 제인 에어만 존재했었다.

 

이 소설을 재독하기 전 걱정되었던 건 제인 에어에 대한 내 평가였다. 혹시 그때의 감정이 살아나지 않거나 제인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읽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여전히 좋았다. 그녀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고, 이제는 많은 것을 비워낸 내 자신 안에 닮고 싶지 않아도 스스로 끄떡없이 존재하는 제인이 있어 반가웠다.

 

 

게이츠헤드와 로우드 기숙학교에서 힘든 시절을 보낸 제인은 처음으로 손필드에서 가족 같은 따뜻한 정을 느낀다. 그런 환경에서 제인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로체스터 역시 자신의 불행했던 삶을 보상해주고, 새로운 희망을 준 제인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재산, 계급, 그리고 사회 인습(p.28)’을 뛰어넘는 그들의 사랑은 그런 이유로 완벽할 뻔 했다. 하지만 페어팩스 부인의 불안한 눈빛, 큰 벼락에 의해 두 쪽으로 갈라진 거대한 칠엽수 나무를 보며 제인은 알지 못할 어떤 불안에 사로잡힌다.

 

로체스터가 결혼하고 일 년이 지나면 모두 이야기해 주겠다고 한 것은 결혼식이 있는 교회에서 미리 밝혀졌다. 그는 이미 결혼한 남자였고 그의 아내 버사 앙투아네트 메이슨은 손필드 3층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는 제인과 이중결혼을 하고자 했다.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자기 나름의 변명을 한다. 자신은 속아서 결혼했다는 것과, 버사는 3대째 내려오는 정신병 유전력을 갖고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것, 현재까지 여전히 짐승 같은 여자에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로체스터의 입장(그의 억울함과 철없고 미숙했던 젊은 날의 경솔)으로만 서술된 과거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로체스터는 유부남이었고 아내가 있음에도 제인과 결혼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버사의 존재를 숨겼다. 결국 버사는 감금되어 없는 존재로 살아가야만 했다. 로체스터는 버사를 미친 여자로 묘사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알고 인식할 수 있었다. 제인을 찾아오고 불을 지르는 것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려는 방식이었고 로체스터에 대한 반감의 표시였다. 로체스터와 버사는 서로를 혐오한다. 그 혐오의 원인이 단지 일방적인 이유일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제인에게 빠져있는 독자는 경악하지만, 그 뒤의 험난한 제인의 여정을 따라가기 바빠 이 부분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거나, 아니면 로체스터와 버사의 과거를 유추해야만 한다.

 

 

진 리스는 샬럿 브론테가 제인 에어에서 왜 크리올 여성을 광녀로 묘사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인간 이하의 동물로 그려낸 것에 대해 화가 났다고 한다. 또한 고향 도미니카를 다시 방문했을 때, 많은 크리올 상속녀들이 영국 남자와 결혼한 후 광녀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작품해설 중에서) 리스는 버사 메이슨에게 생명을 주기로 작정하고 앙투아네트를 탄생시키며, 제인 에어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 보기로 한다.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단순히 로체스터와 버사 메이슨의 관계로 압축하기보다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사실에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대항해시대 이후 서인도제도 역시 유럽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대농장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났고, 진압과정에서 잔혹한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결국 1833년 영국은 노예제도 폐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소설의 배경인 자메이카는 1834년 노예해방이 시행되었다. 영국 정부는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백인 농장주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839년에서 1845년 사이가 배경인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이 노예해방령에서 시작되고 있다. 노예해방으로 백인 농장주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본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지 못해 가난해지게 되었다. ‘크리올은 원래 식민지에서 출생한 영국인이나 유럽인의 순수 혈통을 의미하는 말이다. 19세기에는 식민지의 백인과 원주민,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도 크리올이라고 부른다. 크리올인 앙투아네트와 그의 어머니 아네트는 노예해방령 이후 사회에서 고립되어 가난하게 살고 있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는 백색 바퀴벌레라고 불리고, 유럽인들에겐 백색 검둥이로 불리며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존재로 살아간다. 그들은 이웃들에게 언제든지 공격당할 위기에 있다.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네트는 부유한 영국 상인 메이슨과 재혼한다. 메이슨은 그 지역의 특성이나 역사적 사실로 인한 불안해진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 메이슨은 집안의 하인들이 있음에도 동인도에서 노예를 수입하겠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이다. 적개심이 가득 찬 이웃들의 방화로 그들이 사는 집이 불타고 그 과정에서 백치로 태어난 아네트의 아들인 피에르가 죽자 아네트의 정신 상태가 나빠진다. 메이슨은 요양을 목적으로 시골에 집을 사서 어떤 흑인 부부에게 아네트를 맡겨버린다. 앙투아네트보다 먼저 방치되고 감금된 아네트는 유럽 사람들을 증오하는 흑인 남자들로부터 수시로 성적 학대를 당한다.

 

로체스터가 주장하는 그들의 유전력에 의한 광기는 진 리스에 의해 연속적인 힘든 일련의 과정으로 인한 결과로 설명되어진다. 1870기혼 여성의 재산에 관한 법률이 발령되기 전 여성은 혼인 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은 결혼과 더불어 남편의 재산이 되고 친정부모가 딸에게 준 수입원도, 심지어 이혼 후에도 남편이 받도록 정해져 있었다. 여성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존재였다. 게다가 크리올인 아네트와 앙투와네트는 정체성이 모호해 소속과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았다. 불안정성과 공동체로의 소속감의 결여는 여성을 위기로 내몰고 우울증을 앓게 만들었다. 요즘에야 약이라도 먹으면 되지만 그 당시의 여성에게는 그런 상황을 극복할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다.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여성들은 광기를 가진 사람으로 치부되어 스스로, 또는 물리적으로 감금될 수밖에 없었다. 감금된 순간,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은 폭발해버린다. 그것을 단지 여성들만 가진 광기라고 할 수 있는가?

 

에드워드 로체스터는 장자상속으로 인해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형에게 빼앗긴다. 앙투아네트는 계부인 메이슨으로 엄청난 재산의 반을 물려받는다. 돈이 필요한 로체스터는 단지 돈을 얻기 위해 앙투아네트를 사랑하는 것처럼 꾸며 결혼한다. 결혼으로 인해 앙투아네트의 재산은 모두 로체스터의 소유가 된다.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그이지만 처음에는 정열적으로 앙투아네트와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그는 앙투아네트에게 성적인 쾌감이 뭔지를 알게 한다. 그 후 앙투아네트가 계속 성적인 관계를 원하게 되자 로체스터는 그것을 무시하며 결혼 전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로체스터는 그냥 기분이 나빠지고 앙투아네트가 달갑지 않기 시작한다. 그녀의 돈을 가로챈 사람으로서 더 이상 아쉽지도 않고, 다정해지기도 싫어진 것이다.

 

성적인 관계를 원하는 앙투아네트는 단지 색정에만 미친 여자일까? 로체스터와 앙투아네트에게는 서로에게 공감할 만한 것들이 거의 없다. 영국과 자메이카라는 문화적 차이에서부터 모든 것이 그 두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서로의 삶과 문화를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으며 영국인의 가부장적인 관습에 맞는 행동을 앙투아네트가 해낼 수 없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 그런 것을 배우지 못했다. 로체스터는 은근히 앙투아네트가 크리올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무시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공통적인 행위는 성적인 것밖에 없었으며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도 로체스터에게 관계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체스터의 고정관념은 이질적인 문화를 넘어서지 못하고 이해해 보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이방인으로 치부해버린다. 앙투아네트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도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버사라고 부른다. 앙투아네트는 버사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아내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앙투아네트는 절대 영국으로 가서 살아갈 수 없는 여자다. 2장에서 로체스터가 화자가 되었을 때, 진 리스는 앙투아네트의 말을 괄호 속에만 넣는다. 이것은 더 이상 로체스터에게 앙투아네트의 말이 먹히지 않게 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점점 앙투아네트의 말은 의미를 잃게 되고 자신의 표현에 자유를 얻지 못한다. ‘앙투아네트 코즈웨이- 앙투아네트 메이슨- 앙투아네트 로체스터’, 앙투아네트의 이름은 남자에 의해 계속 바뀐다.

 

로체스터가 잘못한 것은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것이고 그녀의 재산을 갈취했다는 것이다. 앙투아네트를 존중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다정하지도 않았다.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아네트를 데려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친 여자로 비난했다. 앙투아네트가 옆방에 있는데도 하녀와 관계를 가졌다. 그가 가장 잘못한 것은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 와 감금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아무에게도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로체스터는 그녀와 이혼해야 했으며 다는 아니더라도 재산의 반은 그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앙투아네트를 자메이카에 남겨 두어 그녀를 자유롭게 해줘야 했었다. 로체스터는 형과 아버지의 사망으로 그들에게 엄청난 재산을 물러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앙투아네트의 재산도 포기하지 못해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와 감금한다.

 

[곧 그녀도 비밀을 알지만 말하지 않는, 아니 말하지 못하는 다른 여자들의 대열에 낄 것이다. 그들은 말을 해보려고 노력하겠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런 여인들의 모습은 두드러져 눈에 뛴다. 하얀 얼굴, 멍한 눈빛, 허망한 몸짓, 고음으로 쏟아놓는 웃음, 그들은 괜히 왔다 갔다 하고, 재잘거리고, 비명을 지른다. 만일 그들을 조롱하면, 자살을 하거나 우리를 살해하려고 할 것이다. 맞아, 항상 그들을 감시해야 해. 때가 무르익어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 그들은 사라지게 되는 거지. 그러나 다른 여자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길고 긴 줄을 서 있는걸. 저 여자도 그중 하나인 거야. 나는 기다릴 수 있어. 그녀가 단지 피해야 하고 가두어버려야 하는 하나의 기억이 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기억처럼 결국 전설이 될 때까지, 혹은 거짓말로 치부될 때가지, 나는 기다릴 수 있어. -P.269]

 

 

그런데 로체스터보다 더 골 때리는 남자가 있다. ‘세인트 존 리버스이다. 로체스터는 그래도 제인을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얻고자 거짓말을 했다는 정상참작이라도 있다. 세인트 존은 제인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필요에 의해 제인의 전부를 원한다. 종교를 무기로 가스 라이팅을 하며 제인을 옥죈다. 제인을 불안하게 만들어 노예처럼 복종하게 만든다. 제인이 자신의 협력자가 되기를 원하면서 결혼까지 해 완전히 지배하기를 원한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기쁨이 아닌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서라는 기만적인 주장을 한다. 세인트 존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적 사상을 가진 남자이다.

 

제인 에어는 버사의 존재를 알고 무작정 손필드를 뛰쳐나온다. 만약 제인에게 삼촌의 유산이 없었다면 제인은 영원히 열악한 환경에서 교사생활을 하거나 아일랜드까지 가서 가정교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인트 존의 요구를 받아들여 인도로 가 생이 다할 때까지 그에게 복종하며 살았을 것이다. 제인에게 주어진 삼촌의 유산은 단지 해피엔딩을 위한 소설적 장치뿐만 아닌 그 당시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책이었다. 제인은 그것으로 자신의 삶과 심지어 사랑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작가 샬럿 브론테는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이나 그 당시 제국주의 사고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여성 작가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에서 제인 에어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시켰다. 이 소설이 낭만주의 소설이나 고딕 소설로 평가받고 있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계속 한 여성의 성장소설로 읽힌다. 진 리스는 소설 제인 에어를 다른 시각으로 해체해버린다. 두 작가 모두 대단하다. 다만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고 난 나에게 제인 에어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씁쓸하고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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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8 1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제인과 버사의 연대에 대한 책도 나오면 좋겠어요
시대적 상황때문에 쉽지 읺겠지만... 제인도 앙트와내트도 저는 모두 매력적이었어요.
말씀하신대로 존이라는 남자 진짜 골때리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 지 신념을 위해 타인이 희생하는걸 당연히 여기고 가스라이팅까지.... 로체스터만큼 나쁜놈이었는데 이 시대에는 이런 생각을 나쁘다고 하지 않았을듯요
그게 더 화나요. ㅠㅠ

페넬로페 2025-09-08 13:03   좋아요 0 | URL
제인과 버사는 그 시대에서 똑같은 여성이었는데 단지 서로의 조건이 달라 삶이 달라진 것 같더라고요.
존 같은 사람은 지금의 전광훈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종교로 사람들에게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거죠 ㅠㅠ
바람돌이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로체스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ㅎㅎ

건수하 2025-09-08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어야지 하고 사두었지만 사고 나니 마음이 느긋해져 읽지 않았는데, 페넬로페님 요즘 올려주시는 글 보고 눈에 잘 띄는 곳에 꺼내두었습니다.

제인 에어에서 그 유산이 없었더라면..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아찔해 했었죠.
<빌레뜨>에서도 그런 장치가 있었는데.. 그렇게 예외적인 상황을 써 두는 것이 샬롯 브론테의 희망이고 위안이었나 싶네요.

페넬로페 2025-09-08 15:11   좋아요 1 | URL
기대한 것 보다 훨씬 더 진 리스의 소설이 좋더라고요.
사실 저는 이 소설이 제인 에어를 너무 꼬아 놓은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근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굉장히 설득적으로 잘 쓴 소설이더라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본은 돈인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요즘 빌레뜨 읽고 있는데
이 두 소설에 비해 재미도 없고 뭔 말을 하려는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끝까지 가면 맥락이 잡히려나요.

건수하 2025-09-08 15:30   좋아요 1 | URL
최근 제인 오스틴의 <엠마> 를
읽었는데, 돈이 많으니 확실히 좀더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

저는 진 리스의 소설이 일부 지역의 상황을 확대한 것은 아닌가 생각을 했었는데 비슷한 상황은 어디에든 있는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님도 좋다고 하시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빌레뜨> 저도 좀 장황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도 끝까지 완독하시면 보람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

새파랑 2025-09-08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인 에어 보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더 취향이었습니다~!! 페넬로페님의 연관된 책 읽기 너무 좋네요~!!

페넬로페 2025-09-08 18:48   좋아요 0 | URL
제인 에어만 읽었으면 큰 일 날뻔 했어요. 연결되면서도 다른 시각이라 좋았습니다^^

책읽는나무 2025-09-08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 리스의 소설을 읽어봐야 겠군요.^^
책이란 것은 어쨌거나 다 읽어 보면 모두 다 나름의 장점은 있는 것 같아요.
완독이 힘들다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만.ㅋㅋㅋ
빌레뜨 저도 읽을 땐 뭐지? 하고 읽었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빌레뜨 책을 재독하고 싶단 생각이 들더군요. 그 책에서 작가의 독백 같은 말들이 좀 많았었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던 것 같아요.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진 리스의 책과 빌레뜨 일단 찜해두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5-09-08 22:57   좋아요 1 | URL
정말요. 세상에 읽어야 할 좋은 책은 왜이리 많은지요. 책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드라마와 영화도 많고 글도 써야하고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서인도제도의 역사적 사실도 알 수 있어 유익했어요. 문화와 생각이 다르니 로체스터와 버사는 맞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음~~아직 빌레뜨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계속 읽으면 좋아지겠지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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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사 메이슨에게 ‘생명’을 주기로 작정하고 쓴 진 리스의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에서 먼저 출발해야만 한다. 제국주의가 남긴 무수한 폐해는 여성뿐만 아니라 약자를 광기로 내몬다. 작가는 ‘제인 에어‘를 다른 시각으로 읽힌다. 생각을 전환시키며, 타자를 이해하도록 설득한다. 깊은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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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4 2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고 두고 생각나는 울림이 있죠. 이 책 읽고 제인 에어가 더 좋아지는 면도 있었어요. 로체스터는 더더더 미워지고요.

책읽는나무 2025-09-04 22:39   좋아요 2 | URL
아. 로체스터여!ㅋㅋㅋ

바람돌이 2025-09-04 22:41   좋아요 2 | URL
로체스터는 제인에어에서는 그냥 찌질이였는데 사르가소 바다에서는 사악한 찌질이더라구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5-09-04 23:19   좋아요 2 | URL
앗. 진짜요?

페넬로페 2025-09-04 23:44   좋아요 2 | URL
로체스터와 앙투아네트는 그냥 처음부터 만나서는 안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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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별한 맛이 두드러지게 느껴지기보다, 전체가 아주 조화롭다. 단맛과 신맛이 적절하고 거기에 살짝 쓴 맛이 들어있다. 모든 것이 연하고 부드럽게 잘 어우러진다. 다만 무더운 여름, 진하게 카페인이 필요할 때의 강력함이 없어 아쉽다. 가을바람이 시작될 때, 따뜻하게 마시면 더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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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8-27 0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사서, 아직 미개봉입니다. 기대만빵입니다!

페넬로페 2025-08-27 08:28   좋아요 1 | URL
저처럼 연하게 마시는 사람에게 좋습니다.
산미도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