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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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작가가 대한민국의 소설가로 분류되지만 정작 난 그녀의 소설보다 두 권의 에세이를 먼저 읽었다. 다정한 매일매일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서의 작가의 문장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잔잔한 바다의 수평선 같은 것이었다. 단 하나의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은 것 같은, 꽉 찬 문장이 좋았다. 거기다 다정하기까지 해 백수린의 에세이는 나에게 힐링을 주었고, 나도 이런 문장과 비슷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이번에 처음 읽은 백수린의 소설은 에세이를 읽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단정하고 잘 정돈된 문장은 그대로였지만, 백수린의 글은 섬뜩하리만치 나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바늘같이 뾰족한 뭔가에 계속 찔리는 기분도 들었다. 여름의 빌라에 수록된 8개의 단편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한 번에 직접적으로 다가왔고, 작가의 이력 때문인지 글로벌한 다양한 소재의 글이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어떤 종류의 만남이라도 사람과의 관계는 지속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사실 상대방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시간의 궤적에서 서른 살의 나이에 직장을 그만 두고 파리로 공부하러 온 나와, 대기업의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언니는 어학원에서 만나 급속도로 친해진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의 어려움과 외로움에 공감하며 서로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던 여름의 빌라에서의 주아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스와 베레나부부의 따뜻한 친절을 받는다. 뜻밖의 만남은 우정으로 이어지고, 그것으로 인한 웃음은 사랑보다 더 끈끈해 질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토해질 만큼의 끈끈함은 식민지 사관에 젖은 독일 남자의 생각에, 술만 마시면 이미 유부남이 된 전 애인에게 전화하는 여자에게 그것은 옳지 않다고 이해시킬 수 있는 부드러운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부당함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나와 지호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고 만다.

 

 

내 삶에서 지나온 무수한 관계(우정)를 생각해본다. 따뜻했고 기뻤던 순간들이 쌓여 나를 풍요롭게 하고 내 인생의 추억을 만들어주었지만 모멸감으로 인해 끝난 관계는 절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 그 누군가는 더 불행할 수 있다는 것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다. 그럼에도, 내 힘듦의 울분을 토해내기 위해 모멸감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 순간 대체 왜 언니에게 그런 말이 하고 싶어졌는지......그리고 언니의 눈빛도. 행복에는 정해진 양이 있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다급히 내가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라고 언니에게 말했을 때의 그 눈빛.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만 끝내 물에 녹아내리는 물감처럼 한없이 희미해지던.

-p.56, ‘시간의 궤적중에서]

 

아무리 애쓰며 살아도 경계에만 머물 수밖에 없는 삶도 있다. 차라리 어느 한쪽에 완전히 속해있다면 그 삶이 주는 관습과 터부에 얹혀살면 그만이다. 아파트로 가득 찬 도시의 외곽, 조만간 재개발이 이루어질 곳에는 언제나 적나라한 극단이 존재한다. 그 경계에서 냄새나지 않는, 안전한 삶으로 넘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시민은 희망만을 보아야 한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그 결과는 경계 밖에 남겨질 것들을 외면해야만 얻어진다.

 

고요한 사건, 아주 잠깐 동안에의 나와 그는 마음으로는 가난과 약함을 돌아보지만 끝내 자신을 대문 안에 가둔다. 용기도 없을뿐더러 귀찮음과 내 손에 더러움을 묻히기 싫은 이기심이 더 강해서이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항상 뭔가에 쫓기듯이 살며 내가 사는 동네 주변에 들어서는 더 늘씬하고 높은 새 아파트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동안 난 뭐하고 살았나?’라는 자괴감만이 내 속에 가득 차 있다. 이 소설들이 내 마음을 시리게 한다.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p.104, ’고요한 사건중에서)’에 확인 사살 당한다.

 

 

엄마로서의 삶은 무엇일까? 20년이 넘도록 엄마로 불리며 살고 있지만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도시의 외곽이 물리적 삶의 경계를 나타낸다면, ‘엄마라는 것은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경계이기도 하다. 엄마에게 들러붙는 무수한 단어들이 내 본성을 바꾸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 존재보다 더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사랑보다는 책임감이 더 큰 상태로 아이를 돌보았다.

 

사랑을 위해 아이를 떠났던 폭설에서의 엄마, 아이를 안고 있던 순간에, 낯선 남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아이의 존재보다 자신의 욕망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혔던 아주 잠깐 동안에의 엄마를 나는 이해한다. 아이를 떠났지만 평생 그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살 것이 분명하고, 다른 남자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몰입했지만 곧 아이에게로 다시 집중하는 사람이 엄마인 것이다.

 

오디오북으로 들었던 나의 할머니에게에서 흑설탕 캔디가 제일 맘에 들었었는데, 책으로 읽은 이 소설은 역시나 좋았다. 작가도 이 단편집에서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열여덟 살 때 쓰다 만 습작 장편의 서두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이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흑설탕 캔디의 주인공인 난실 할머니는 내가 닮고 싶은 노년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다. 독립적이지만 자식이나 손주에게 이기적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침묵할 수 있는 할머니, 물리적인 늙음은 받아들이지만 낭만과 자기 자신은 한순간도 잊지 않는 그런 멋진 할머니.....

 

딸아이가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떠날 때 엉뚱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딸아이가 프랑스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한다고 하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것인가였다.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면 난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을 거지만, 처음엔 반대했을 것이다. 언어와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과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노력해야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위랑 말 한마디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웃프다.

 

난실 할머니와 프랑스 남자 브뤼니에 씨와의 관계는 사랑이기보다 잠깐 동안의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흑설탕 캔디가 녹아 없어져 슬픈 게 사랑이라면, 그 달콤함이 지속되어 난실 할머니의 나머지 생에 기쁨을 주는 것이 우정이라 믿고 싶어서이다.


며칠 전 도서관 가는 길에서 본 남자 고등학교 담벼락에 있던 텅 빈 자전거 거치대이다. 그곳 좁은 공간에서 매미는 큰소리로 합창을 하고 있었다. 온통 매미 소리만 들렸다. 순간 나 혼자만 있다는 느낌이 들며 백수린의 이 책이 생각났다. 더위를 피해 모두들 떠난 그곳에서 오히려 여름을 생각할 수 있었다.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 나온 여러 사람을 떠올리고, 그들의 삶을 그려보며 나 자신도 그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천진한 달콤함이라니. 각설탕을 입안에서 굴리자, 단맛이 서서히 퍼지고,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그러다 탑이 무너져내릴 때까지. 각설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p.200~201, ‘흑설탕 캔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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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8-21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 흑설탕 캔디는 백수린 소설 중에 손에 꼽히게 좋더라구요. 할머니 소설 장인 ㅋㅋㅋ

페넬로페 2023-08-21 16:39   좋아요 2 | URL
저도 좋았어요.
배경이 프랑스라 더 낭만적이었던 것도 같고요.

얄라알라 2023-08-23 00:17   좋아요 2 | URL
할머니 소설 장인...ㅋㅋ열반인님, 열반인님 서재에서뿐 아니라 이젠 페넬로페님 서재에 놀러와서도 제가 뿜고 갈 뻔요 ㅎ 즐겁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페넬로페님, 저는 백수린 작가님의 잘 모르고 알려 하지도 않았었는데, 덕분에 감사드려요^^

페넬로페 2023-08-23 01:04   좋아요 2 | URL
얄라알라님!
아마 이 소설이나 에세이 읽으시면 백수린 작가의 문장을 좋아하시게 될거예요^^
그리고 좋았으면 좋겠어요.

서곡 2023-08-21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집 잘 읽었는데요 성실하고 세심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편은 어떨지 다음 기회에 읽어봐야겠습니다 오후 마저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08-21 16:48   좋아요 2 | URL
이번에 장편도 같이 읽었는데 단편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날씨가 계속 더워요.
건강 잘 챙기시길요^^

독서괭 2023-08-21 1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흑설탕 캔디 참 좋았어요~^^ 단편은 금방금방 잊히는데, 페넬로페님이 언급한 작품들 다 생각나는 거 보니 역시 인상깊은 소설집이었다 싶습니다. 작품에 나오는 엄마들을 이해한다는 말씀에도 공감이요!!

페넬로페 2023-08-21 20:12   좋아요 0 | URL
‘흑설탕 캔디‘ 넘 좋죠.
이 단편집에 있는 소설이 다 좋았어요. ‘폭설‘에서 엄마에게 퍼붓는 장면과 그것을 묵묵히 듣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울컥하기도 하고요^^

독서괭 2023-08-22 09:42   좋아요 0 | URL
오늘 1년전 오늘 쓴 글로 이 책 리뷰가 뜨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별 네개를 줬었네요. 이토록평범한 미래가 다섯개고 이 책이 네개인건 안 맞는데 ㅋㅋㅋ 제가 최근 별점이 후해진 건가 싶습니다 ㅋㅋ

그레이스 2023-08-21 1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름의 빌라>가 좋았어요. 우리에게 덧입혀진 의미들을 다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만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하면 그 가까이에라도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단편이예요.
다시 펴보고 싶지만 ...!

페넬로페 2023-08-21 20:14   좋아요 3 | URL
여름의 빌라에서 생각할 거리가 많더라고요. 캄보디아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게 더 맞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미미 2023-08-21 20: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글 정독하려고 PC를 켜고 들어오길 잘했네요 ^^
글을 읽으면서 ‘바늘같이 뾰족한 뭔가에 찔리는‘기분 저도 좋아해요!
거기다 ‘확인 사살‘이라니 찜해야겠어요. 그러고 보면
페넬로페님도 마조히스트적 독서를 하시는 것 같아요ㅎㅎ
(사드를 읽어내신 저 위에 열반인님도요ㅎㅎㅎ)


페넬로페 2023-08-21 21:45   좋아요 2 | URL
네, 미미님!
제가 그런 독서와 책을 좋아해요.
그래서 요즘 연애소설이 잘 안 읽혀요.
이 책 읽고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어렵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 오더라고요^^

희선 2023-08-22 0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흑설탕 캔디>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소설 앞부분을 보고 영감을 얻어 쓰다니... 대단하네요 할머니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름이지만 서늘한 이야기기도 하군요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남한테 상처주는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말이 하고 싶을 때는 잠시 말을 안 하는 게 좋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08-22 07:13   좋아요 2 | URL
작가들은 그 어떤것에서도 얘기를 연결시켜 쓸 수 있는 사람들인가봐요.
이 소설집의 내용도 그렇지만 그걸 읽은 제 맘이 서늘해질 때도 많았어요.
네,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3-08-22 0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흑설탕 캔디> 단편을 할머니 관련 소설집에서 처음 접하곤 아...이 작가는 찜해야겠다.로 시작해 <여름의 빌라>를 읽고서 와, 이 작가는 최애작가로 등극시켜야겠다.란 생각을 품게 만든 소설이었습니다. 제겐^^
페넬로페 님 리뷰도 꼭 백수린 작가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듭니다. 소설 하나, 하나 느끼신 그 감동을 저도 다시 전해 받게 되네요.^^
한 달 전 딸이 <여름의 빌라>를 읽고 있길래 어떤 게 맘에 드느냐고 물었더니 <폭설>이 조금 이해가 안 간다는 거에요. 폭설이 내렸을 때 엄마와 딸의 대화에서 딸은 원망을 하는데 엄마는 어떻게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안 할 수가 있냐구요. 그래서 엄마의 입장에서 내가 뭐라고 설명을 해주긴 했었는데....어린 딸은 딸의 입장이라 완전 이해가 안되는 것 같은..ㅋㅋㅋ
딸에게 이야기를 해주면서 문득 백수린 작가는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중년과 노년 여성들의 감정선을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란 생각이 들어 뒤늦게 놀라웠습니다. 마치 그 삶을 살아본 사람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곤조곤 소설을 엮어나가면서 인생의 의미를 턱하니 얹어 놓는 게 좀 지혜롭단 생각도 했구요.
백수린의 소설은 줄곧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란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3-08-22 12:48   좋아요 2 | URL
이 책에 대해 쓸 말이 많았는데 너무 많이 쓰기가 그랬어요.
폭설도 좋았어요.
따님의 의견도 이해하겠어요.
따님의 입장에서 당연히 그 엄마가 이해가 안되겠지요.
저의 딸아이도 이 책 읽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느낄지 궁금한데요.
그래도 제 리뷰를 보여주기는 싫어요 ㅎㅎ
저도 책나무님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다 경험하지 못한 것 같은데 어쩌면 이리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했을까 생각하고 작가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