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사라진 알베르틴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알베르틴 양이 떠났어요!”
고통은 우리 마음속을 심리학보다 얼마나 더 깊이 탐색하게 하는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나의 온 삶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모르는 걸까.
-p.15]
알베르틴의 고모라적(여성 동성애) 습관을 막기 위해 시작된 화자와 그녀의 동거는, 알베르틴이 편지 한 장만 남겨둔 채 떠나버림으로써 끝이 난다. 알베르틴에 대한 일관적이지 못했던 화자의 사랑과 권태에 그녀는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헤어질 결심도 하고, 그녀가 스스로 떠나주기를 바라기도 했었지만 막상 그녀가 떠나자 화자는 충격을 받는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나와 타자의 관계로 시작하지만 사실 사랑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충동의 결과이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그녀를 지켜주고, 그녀가 하는 일을 알고, 뱅퇴유 양과의 습관을 다시 시작하지 못하도록 막기(p.39)' 위한 화자의 사랑에 알베르틴의 생각은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질투에 갇힌 화자의 욕망일 뿐이다. 알베르틴 역시 화자의 집으로 같이 왔다는 것이 화자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화자의 질베르트와의 사랑에도, 스완의 오데트에 대한 사랑에도 질베르트와 오데트의 마음은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계속 읽어 오며 질베르트, 오데트, 알베르틴의 입장도 궁금했지만 프루스트는 화자와 스완의 마음과 생각만을 집요하게 표현한다. 이런 프루스트의 서술 방식에 약간의 불만도 있었지만, 이 글이 과거를 회상하며 써 내려 간 글이라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나를 불러내어 ’그때 난 왜 그랬을까?‘라는 분석을 한다. 내가 한 행동이나 말에 대한 후회와 회한이 많지만, 그럼에도 ’나‘만 볼 수밖에 없다. 나를 통해 타자를 보고, 타자의 생각을 추측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알베르틴이 떠나고 화자는 그녀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생루를 그녀에게 보낸다. 그녀의 죽음 후 화자는 의심했던 부분에 대한 알베르틴의 행적을 궁금해 하고 캐낸다.(어떨 땐 정말 이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한 답이 아닌 알베르틴의 고모라적 성향을 확인할 뿐이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앙투안 콩파뇽 외, p.97
알베르틴의 모델이 된 사람은 프루스트의 운전사로 일했던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이다’. 프루스트는 그를 사랑하게 되어 자신의 비서로 일해 줄 것을 제안했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기거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아고스티넬리는 프루스트 몰래 비행을 하다 추락해서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을 프루스트는 알베르틴을 통해 표현한다. 화자는 알베르틴을 잃은 고통과 상실을 ‘사랑’이란 것에 대한 깊은 생각과 그녀를 알아가는 것으로 애도한다. 그러면서 점점 알베르틴을 망각해간다.
르 몽드지에 보냈던 화자의 글이 신문에 실리고 그의 기쁨은 사교계가 아닌 문학 속에 존재하기 시작한다.(p.264) 스완이 죽고 오데트와 그의 딸 질베르트는 스완의 이름을 지우고 귀족의 지위를 얻기를 열망한다. 질베르트는 생루와 결혼해 귀족의 신분으로 올라서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후 그녀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각자 다르다. 합리적이지 못한 욕망도 많다. 욕망의 성취가 꼭 좋거나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 결과에 타격을 받는다. 화자, 알베르틴, 질베르트의 욕망은 다 다르며, 그것은 타인과 함께 할 수 없고 이해시키지도 못한다. 내 속에 서툴게 들어있는 나, 아집, 습관이 기대하는 욕망을 엉뚱하고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 버린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진정한 질베르트, 진정한 알베르틴은 어쩌면 첫 순간 자신들의 시선 속에 자신을 내맡기던 바로 그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소녀는 분홍빛 산사나무 울타리 앞에서, 다른 한 소녀는 바닷가에서.
-p.46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분량이 많은 책이라 연속적으로 읽기가 힘들다. 지루하기도 하고, 그 사이 다른 책을 읽고 싶기도 하다. 다른 책을 읽다가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돌아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낀다. 물론 어려운 건 여전하지만 어느새 내가 프루스트의 문장에 익숙해지고 젖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프루스트가 서술하는 것들 중에 이해할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그가 서술하는 문장만큼은 아름답다.
이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인 ’되찾은 시간‘만 남겨두고 있다. 이 소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확실히 알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이미지와 프루스트가 마음 깊이 들어가 만들어 낸 문장만으로도 읽는 의미가 충분하다.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옥에 내려가 그녀를 만나지만,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아내를 데려나오지 못한다. 오르페우스의 슬픔을 작곡가 글룩은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중, ’에우리디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표현했다. 애타게 에우리디케를 찾는 오르페우스의 마음이 알베르틴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과 닮았다. 그리고 수많은 젊음을 순식간에 앗아간 이태원에도 간절하고 비통한 이 마음이 있다.
삶은 무척이나 허무하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