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당시 우리가 지닌 시대정신과 비슷한 무언가를 다루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순된 무언가가 그 안에 있었다....
무한히 계속되는 지엽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문장들, 다양하고 서로 동떨어져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조합들, 얽히고설킨 주제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어떤 서열이나 체계 없이 다루는 기묘한 방식들, 극도의 정밀함과 풍요로움...
그 모든 것을 탐색하는 이 무시무시한 작가는, 난삽해 보일 정도로 복잡한 수많은 디테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의 조합으로써 심리를 해석하는 예지가 곧장 내 가슴을 밀고 들어왔다. 그때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롭고 보석 같은 심리 분석의 기구를, 새로운 시의 세계를, 그리고 보석 같은 문학의 형태를 이 작품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p41~42]
프루스트를 만나기 전에 읽었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2권을 읽고 다시 읽고 있다. 차프스키는 내가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느꼈지만, 나의 짧은 언어로 그려내지 못한 감상을 시원하고도 적절히 표현해 준다. 2권의 ‘스완의 사랑’부분은 위의 인용문의 전형을 보여 준다. ‘극도의 정밀함과 디테일’로 내가 이때껏 읽었던 그 어떤 사랑의 이야기보다 그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스완의 사랑’은 우리가 만나는 사랑의 흐름에 따른 인간 심리의 변화뿐만 아니라, 살면서 마주치는 '순간'들이 얼마나 우리 삶의 방향을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틀어버리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는 나중에 자신이 스완의 기질과 닮은 구석이 많다고 생각한다. 스완은 콩브레에서는 할아버지의 절친이며 소박한 이웃 친구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사교계를 드나들며 그곳에서 무척 대우받고 인기 있는 사람이다. 스완은 프루스트와 1879년대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남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던 ‘샤를 아스’라는 인물을 섞어 변형한 작중 인물이다. ‘스완의 사랑’은 화자가 태어나기 전 스완이 화류계 출신 여성인 ‘오데트 드 크레시’를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이다.
스완은 오데트를 만나기 1년 전 쯤, 어느 저녁 파티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곡을 듣는다. 처음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그 음악에 매혹되어 버린다. 그 악절은 그를 ‘뚜렷한 행복, 미지의 앞날’로 데리고 간다. 1년 후, 베르뒤랭 부인 집에서 오데트를 만나고 그는 그 악절을 다시 듣는다. 여러 우여곡절과 사랑의 고통을 겪고 난 뒤, 스완은 생퇴베르트 부인의 저녁 파티에서 같은 소악절(뱅퇴유의 소나타)을 들으며 오데트와의 사랑이 끝났음을 깨닫는다. 우연히 스완에게 찾아 온 그 악절은 그의 사랑의 과정에서 중요한 모티브이다. ‘스완의 테마’로 유명한 그 악절은 생상스, 드뷔시, 프랑크, 바그너의 작품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날 저녁 이후로 스완은 그에 대한 오데트의 감정이 결코 되살아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 행복에 대한 그의 희망이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p283
때때로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밖에서 거리나 길을 쏘다니는 오데트가 무슨 사고라도 당해 고통 없이 죽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는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돌아왔다. 인간의 몸은 아주 유연하고 강인하여, 온갖 주위 위험을 저지하고 예방해 주어,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거의 벌도 받지 않고 거짓말이나 쾌락에 몰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p286]
아, 이 죽일 놈의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스완의 사랑’-연대기
견제, 부정
소악절이라는 결정적인 계기
몰입, 이해, 우연
받아들임, 주변의 시선을 감수한다.
합리화, 신분과 취향 차이의 극복
연인의 과거를 무시하거나 애써 외면, 희생
영구적인 사랑의 기대-삶의 환희
사람을 변화시킴, 역전, 상대를 미화시킨다.
선물 세례,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조달해 준다.
기댄다, 물질적 보상(부양한다)
눈이 멀다. 포로가 된다
독점,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
질투(그의 사랑의 그림자),
의심, 염탐, 치졸
아픔, 고통, 괴로움
섭섭함, 슬픔, 자존심
사랑의 포로,
다시 고통, 고뇌, 괴로운 상상,
의혹
실체의 파악, 계산적
본질, 위기, 혼동, 과거를 의심
오열, 피로감, 한 번씩 죽음까지도 생각한다.
아픔, 통증, 상처, 구차함
소악절이 사랑의 허무를 일깨워 줌
마법에서 깨어남
즐거운 체험, 공허
오데트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나지 않고, 행복에 대한 그의 희망이 더 이상 실현될 수 없음을 느낌(p283)
연인의 불행을 기원, 약간의 비열함
심문(과거의 진실을 캐묻고, 거짓말에 대한 추궁을 한다)
간헐적인 비열함, 사랑의 부정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도덕적인 수준도 낮아지면서 그에게 다시금 나타나는 저 간헐적인 비열함으로 이렇게 외쳤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다니!”
-p330]
누구에게나 사랑의 시작은 원대하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과정이 있고, 그 과정 속에 질투와 열정, 파괴도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스완의 사랑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다. 사랑은 개인적이며 천박하기도 하고,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앙의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편인 ‘스완네 집 쪽으로’의 3부인 ‘고장의 이름’은 무척 서정적이다. 우리 발길이 닿는 곳 뿐만 아니라 상상속의 공간도 존재한다. 그것은 욕망하고 가기를 원하는 물리적인 실제의 장소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만남이나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장의 이름이나 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에 화자의 첫사랑인 질베르트와 계속 경외하며 바라보는 스완의 만남 또한 스며들어 있다.
1인칭으로 서술된 ‘고장의 이름’ 역시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향수에 젖어 들었다.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사실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련히 떠오르는 어떤 슬픔과 설렘, 뒤틀림, 삶의 여정, 묵직함 같은 감정들이 왔다 갔다 했다. 프루스트를 닮아 말은 길어지고, 두서없지만 나의 감성만은 점점 더 뾰족해지고, 풍부해 진다.
프루스트를 닮아 간다.
[스완은 자신을 안달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사랑과 만나는 중에도 이와 같은 에고이즘에 휩싸였다. 한때 매춘부였던 오데트는 그의 사랑이자 비밀스러운 삶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아주 자연스럽고,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사실 오데트는 해체의 세계로 들어가는 짧은 어귀에 불과했다. 오데트가 그에게서 멀어지자 스완은 비로소 그녀에 대한 자신의 정념이 너무나 크고, 그래서 이토록 자신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깨닫는다. 나는 프루스트가 수백여 페이지에 걸쳐서 하고 있는 이것과 비견될 만한 또 다른 ‘분석’이 존재한다고는 감히 생각지 않는다. 같은 주제에 대해 이보다 더 섬세하면서 폭넓게 행해진 분석은 없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p8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