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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한없이 계속될 것 같은 무더위도 어느새 주춤하고 새벽에는 한기가 느껴져 이불을 끌어당긴다. 까슬까슬하고 차가운 여름 이불의 감촉에 내 몸은 더욱 옹크려지고, 이불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여름을 보낼 준비를 하면 이 녀석은 항상 심술을 부려 늦더위로, 거친 태풍으로 나의 조급함을 비웃는다. 순차적으로, 적절히 예상할 수 있는 삶은 인간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다. 소설 <산시로>에 나오는 문장처럼 “하늘 멀리 떠 있는 높은 구름은 쉬이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지 않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저 기울어지듯 움직이는데”, 나는 그저 저 높이 떠 있는 구름만 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가을에 어울린다고 해서, 그동안 묵혀두었다가 이제야 읽는다. <산시로>는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난 후 세 번째로 읽는 ‘나쓰메 소세키’ 작가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앞의 두 작품보다 훨씬 더 가을에 읽어야 하는 소설 같다. 문장도 아름답고, 주인공 ‘산시로’를 통해 바라보는 사랑과 세상도 묵직하다. 그래서 가을만큼 더 어렵기도 하다.
구마모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으로 유학을 오는 촌놈 ‘산시로’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있고 자신감도 없다. 시골과는 달리 전등이 켜지는 것을 보고 신비해하며 그 어떤 질문에도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 그저 “아, 예.”, 이런 식으로 말하며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고, 항상 그 뒤에 후회한다. 하지만 후회할 것을 예상하고 억지로 임기응변식의 대답을 아주 자연스럽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경박하지는 않다고 자신을 변호하기도 한다. 도회의 여자에겐 도저히 당하지 못할 것 같고, 굴욕감도 느낀다.
‘산시로’가 고향에서 도쿄로 기차를 타고 올 때 옆에 있는 여자와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일이 생긴다. 다음 날, 헤어질 때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p24
[과감하게 좀 더 가봤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두렵다. 헤어질 때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라고 했을 때는 정말 놀랐다. 23년의 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난 듯한 심정이었다. 부모라도 그렇게 정곡을 찌르지는 못할 것이다. 산시로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더욱 기가 죽고 말았다.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인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호되게 야단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p25
‘산시로’가 답답한 구석이 있고 배짱이 없는 것은 맞지만 그에게 지조나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수동적이지만 자신만의 소신이 있다. 그가 뭔가에 확실하지 않거나 놀라움을 느끼는 것은 이때까지 살아온 환경이 갑자기 달라진 탓이 크다. 그는 여지껏 메이지시대에 걸맞은 세계에 살지 못했다. 생각과 관습과 심지어 새로 만난 여성들까지도 생소했다. 서양의 문물을 아무 비판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도시의 모든 것들이 그에겐 낯설고, 그것이 그를 자신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산시로에게는 멀리 있는 메이지 이전의 평온한 대신 잠에 취해 있는 세계와 자유롭고 편안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대학에 갇힌 세계, 봄처럼 찬연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세 가지의 세계가 생긴 것이다. 그는 그 세 세계를 오가며 살아가야 하지만 결국 하나의 결과를 얻는다.
[요컨대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셔오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고 몸을 학문에 맡기는 것보다 나은 건 없다는 것이다. 결과는 굉장히 평범하다.[ -p107
그 결과로 대학의 연못가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지는 미네코에게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한다. 첫눈에 반한 미네코에게 산시로는 아름다운 색채를 느끼고, 떡을 엷게 구운 듯한 옅은 갈색의 그녀의 피부색을 보며 여자의 얼굴빛은 그런 빛이 아니면 안 된다고 단정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미네코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약간은 제멋대로인 신여성이다. 히로타 선생은 대놓고 난폭한 여자라고 말한다. 입센의 작품에 나오는 여자를 닮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요지로가 미네코를 입센의 인물과 닮았다고 평한 것도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세속의 예의에 구애받지 않는 점만이 입센의 인물과 닮은 건지, 아니면 마음속의 사상까지도 그런 건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p227
당차고 자유로운 생각과 아무 거리낌 없는 신여성을 대표하는 미네코와 요시코도 결국은 자신의 감정을 뒤로한 채 결혼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들은 같은 남자를 두고 혼담이 오가지만, 결국 미네코가 결혼에 성공한다. 도시의 여자들은 메이지 시대에 지극히 어울리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지만 여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한다. 먼 미래에 대한 구상이나 사랑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닌 현실에서의 자신의 편의와 입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것을 무시할 만큼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 미네코는 입센의 세속의 예의에 구애받지 않는 여성만 닮은 것이다. 산시로 역시 미네코를 사랑하지만 그는 결코 미네코같은 여자를 감당할 수도 없다. 그저 고향에서 어머니가 결혼하기를 원하는 미와타의 오미쓰가 그에게 맞는 지도 모른다. 산시로는 미네코를 보면서 또한 자신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대학의 분위기와 미래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 ‘모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현실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학자인 노노미야나 히로타 선생, 미네코 역시 완전히 세상 속에 녹아들지는 못한다. 외국에서는 빛나지만 일본에서는 아주 깜깜한 노노미야, 신랄하게 세상에 대해 쓴 소리를 내뱉고, 사상을 얘기하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서재에만 갇혀있는 히로타 선생역시 무기력한 전형적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이러한 지식인들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분별하게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지식인도, 우물에 갇혀 현실에서 필요한 적절한 역할을 하지 않고 세상물정을 모르는 지식인도 같이 비판한다.
미네코는 자신을 가리켜 ’스트레이 십(stray sheep)' 이라고 말한다. ‘미아’를 ‘스트레이 십’으로 해석한 미네코는 자신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비유한다. 이 ‘스트레이 십’ 이야말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국화인형전을 보러간 산시로, 노노미야, 미네코, 요시코, 히로타 선생은 거지를 보고도 적선하지 않고,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이 시대를 향유하고 지식인으로 살며 교양과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에 대한 책임은 회피한다. 기차에서 만난 히로타 선생이 산시로가 상상도 못할 일본에 대한 비판을 하고, 위험하다고 조심하라고 하지만 그들은 편하고 안전한 자신들만의 성을 구축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자꾸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그 사내는 대단히 침착한 상태였다. 결국 자꾸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위험하지 않은 위치에 있다면 그런 사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방관하고 있는 사람은 여기에 흥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p77
위험한 곳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의 고통과 불행에 흥미만을 가질 수도 있다.
산시로는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몸이 두 동강난 젊은 여성을 본다. 새하얀 천에 둘러싸여 예쁜 바람개비를 달아놓은 어린아이의 작은 관도 본다. 그는 이 죽음을 한 발짝 물러서서 보지만 사랑하는 사람인 미네코는 결코 옆으로 물러서서 볼 수 없다. 이것이 지금 현재 산시로의 딜레마이고 그의 젊음이다. 미네코의 결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은 어머니가 부르는 고향에 다녀온다. 그곳에서 어쩌면 어머니가 원하는 여자를 만나고 약혼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이것이 산시로에게 처해있는 청춘이다. 약간 슬프고도 아쉬움이 남지만 담담히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산시로가 마음에 든다. 또한 그런 산시로가 밉기도 하다.
<산시로>, <그후>, <문>은 연작소설이다. 소설의 그 다음 내용과 전개가 궁금하다.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 -p57
[“어떤가, <숲 속의 여인>은?
“<숲 속의 여인>이라는 제목이 안 좋네.”
“그럼, 뭐라고 하면 좋겠나?
산시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속으로,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 이라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