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같은 나>
한 때, 대기업의 입사시험과 TV의 퀴즈 프로그램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단어가 단골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개혁’이라는 단어로 소련의 변화를 온 세계에 알렸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자유’라고도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이없게 보리스 옐친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옐친은 소련연방을 해체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경제정책의 실패로 국민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었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소설집, ‘티끌 같은 나’는 ‘페레스트로이카‘이후 러시아에서 신흥부자가 늘어나고, 서민들의 삶은 더 힘들어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자들의 삶엔 모든 것이 넘쳐나고 안나 카레니나처럼 할 일이 없어 무료함에 지배당한다. 자기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들의 삶에만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수가 되고 싶어 무작정 모스크바로 상경한 <티끌 같은 나>의 ’안젤라‘는 그 모든 것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지금의 안젤라는 노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학 한 마리를 잡겠다며 남이 싸 놓은 똥을 치우고 끊임없이 닦고 청소하느라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p75]
물론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런 그녀가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어디선가 들은 ‘킬리만자로의 눈’이란 말이 좋아 그녀의 꿈도 ‘킬리만자로의 눈’처럼 빛나기를 바랬지만, 이 세상의 티끌 같은 그녀, 또는 우리들의 ‘킬리만자로의 눈’은 쉽게 반짝이지 않는다.
소련 연방의 해체로 민족 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여러 민족들이 어우려져 사는 곳에서 묵은 감정의 결과로 폭력이 발생하고,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야 하는 러시아 사람도 있다. 중편소설 <이유>에서 ‘마리나 이바노브나 구시코’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사이좋고 평화롭게 사는 다민족 도시인 바쿠에서 산다. 교사인 그녀에겐 떠난 남편과 남매와 애인인 아제르바이잔 사람인 루스탐이 있다. 루스탐은 그 후 결혼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숨긴 채 여전히 마리나를 사랑한다. 그렇게, 그냥 그렇게 살아도 별로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르메니아인을 죽이고 러시아인들에게도 폭력을 가한다.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 애인을 떠나 모스크바로 온 마리나의 삶 역시 녹록치 않다. 그녀 역시 안젤라와 마찬가지로 부잣집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돈을 벌 수 밖에 없다. 자식들 역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다들 힘들게 산다. 돈을 가진 쪽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골라 쓰면 그만이다. 스탈린의 폭정의 희생양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스탈린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왜 다른 이들은 사람답게 사는데 그녀의 자식들만 그 모양일까? ...도대체 그녀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러시아 지식인들이 자주 하는 질문인 ‘누구의 잘못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떠올랐다....클라스의 유해가 틸 오일렌슈피겔의 가슴을 두드리듯이 불공평이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그녀는 1917년 볼셰비키 당원들이 국민들을 혁명으로 내몬 이유를 이해했다. 당시 레닌은 ’약탈자들을 약탈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지금 새로운 레닌이 나타나서 함께 힘을 합치자고 한다면 그녀가 선두에 설 것 같았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소련이여,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p269~275]
2편의 중편과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는 사건과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여러 소설들에 나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친근하다. 우리나라의 주말드라마나 일일연속극에서 다루어지는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영상들의 내용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빅토리아 토카레바 작가의 말들이다. 인물들의 대화나 생각에 은근슬쩍 붙어있는 그 말들에서 이 소설의 매력이 발산된다. 작가의 설명으로, 소설속의 인물들이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것에서 벗어나더라도 이해된다. ‘위대한 개츠비’의 첫 구절이 연상될 만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평가할 때 그 어떤 잣대를 들이밀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어떤 말엔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를 하고, 결국 한숨짓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권력에서 밀어낸 옐친에 대한 감정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주책없이 내 친구의 데이트에 끼인 적이 있다. 그때 내 친구의 남자 친구는, 남자들 사이에서 그냥 시시한 농담처럼 ‘옐친 같은 놈’이라는 욕을 한다고 그랬다. 그들은 그 후 결혼했고,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내 친구 곁에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의 남편은 없었다. ‘옐친 같은 놈’이라는 말을 가르쳐 준 그 사람은 ‘옐친 같은 놈’이 되어 있었다. 내 친구는 마라처럼 저세상에 가 있다.
<첫 번째 시도>의 라리사는 마라 앞에만 가면 한없이 약해지고, 초라해진다.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있다. 그래서 모질게 다짐하며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나면 이상하게 씁쓸함도 느껴진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냥 죄책감도 들고 미안함도 있다.
어느 곳에서나 사람 사는 모습들은 거의 비슷하다. 가진 것이 없어 티끌 같고 재만 남은 삶일지라도 안젤라와 마리나는 결국 자신의 삶을 산다. 남들이 뭐라 해도 사랑을 선택하고, 과거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킬리만자로의 눈’은 다시 빛날 수도, 영원히 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안티포바는 바다가 거대한 슬픔의 접시라고 상상해 보았다. 저마다 자기 숟가락을 들고 자기 몸의 슬픔을 떠 마시면 된다. 몸싸움은 없다. 자리도 충분하고 슬픔도 충분하다. 접시는 크기 때문이다. -p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