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결정짓는 다섯 가지 선택
로버트 마이클 지음, 안기순 옮김 / 책세상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인생을 결정짓는 다섯가지 선택>

로버트 마이클 지음/안기순 옮김/책세상

                        

 

 

책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만나게 되는 혹은 반드시 고민할법한 인생의 결정 사항 5가지를 중심으로 할아버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후배들에게 조언해주는 책이다. 경제학자 답게 수많은 연구결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다만 연구의 대상과 통계 자료의 표본이 미국인들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다섯가지 결정에 도움이 될만한 고려사항들을 깊이는 얕지만 세부적인 사항까지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 사항 5가지로 꼽은 것은 학교교육’, ‘직업선택’, ‘배우자선택’, ‘부모되기’, ‘건강습관 관한 사항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라고 흔히 말하곤 한다. 저자가 선택한 인생의 5가지 결정사항은 사실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국면마다 서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고, 연관되어 있는 사항이다.

   예를 들어 학교교육과 직업선택은 현대 사회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인간의 정신적 성숙을 돕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직업을 갖기 위한 사설학원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부는 평생교육 장려하고 자격증 제도를 만들어 국민들을 교육시장의 소비자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대한민국에서 현재 매년 1 4-5000 수준의 박사를 배출하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는 달리 좀더 극단적으로 대한민국에는 박사 실업자가 많이 양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이공계 분야는 상황이 낳은 편이나, 인문계 박사들은 가정을 갖고 부모가 되어 자녀를 양육하거나 하는 과정이 더욱 열악한 상황에 직면해있다. 이런 점들은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통계 지표인 고학력 일반적으로 높은 소득 얻는 경향과 맞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배우자선택과 부모되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이다. 책의 옮긴이는 부분을 각각 결혼을 해야할까 아이는 가져야할까라는 제목으로 장에서 논의하는 방향이 상당히 왜곡될우려가 있다. 혹은 마케팅적인 관점에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많은 관심을 가질 있는 세부 주제 가지를 장의 전체 제목으로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점은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킬 있기에 다소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책에서 저자도 언급하듯이 파트너로서의 배우자를 전통적인 이성 배우자 뿐만 아니라 동성인 배우자도 범주에 무리없이 포함시킨다. 할아버지 경제학자(1942 )로서 미국에서 민감한 주제인 동성 결혼이나 동성 부모 가족의 양육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점은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도 이제 매년 결혼하는 커플의 10% 이상이 국제결혼이고, 다문화라는 개념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사회의 변화가 지속되고 다양성이 근래에 들어 급증한다는 증거로 있겠다.

   인생의 여러 결정 사항에 대해 경제학자로서 조언하고 있는 저자는 본인의 세계관에 따라 경제학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듯하다. ‘시간 비용에 대한 투자’, ‘불확실성’, ‘외부효과’, ‘주인-대리인 관계’, ‘수익률 등의 용어로 독자의 선택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경제학적인 판단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 혹은 옳은 것일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예컨대 대학교육을 이야기할 , 저자는 교육을 하나의 투자개념으로 바라본다. 사실 대학입시 원서를 제출하는 시기가 되면 국내 언론에서도 적성, 혜택, 학과 분위기 등을 고려하여 4 투자해도 좋을 곳을 선택하라 기사를 싣는다. ‘투자라고 하면 수익률 같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제학적 관점이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면 학내 인문학과의 축소 폐지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러니컬 것은 현재 대한민국은 인문학 열풍 한가운데에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맨큐의 경제학 필두로 우리에게 익숙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중심지 시카고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저자가 평생 내면화한 신자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하여 어떻게 하면 '합리적' 근거로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인지 조언하고, 체제에 가장 합리적으로 순응하여 살아갈 있는 무난한 선택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점이다.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노경제학자가 딸에게 전해주는 노파심어린 충고이다.

   저자의 경제학적 세계관을 인생의 국면에 적용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계속 등장한다.  저자가 양육의 결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에서 어머니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없다면 모유수유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모유수유가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일보다 좋다는 점은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그런데 저자는 모유수유가 돈이 들지 않는 가장 값싼 방법이므로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권하는 것인지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경제학자다운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모유수유를 권하는 근거로는 빈약해보인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저자가 건강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저자가 말하는 건강 정의는 어떤 점에서보면 매우 플라톤적이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에서 진정한 실체와 실체의 모사인 그림자적 측면을 말한다. 우리의 현실은 그림자에 해당하고, 저자가 말하는 건강 상태는 바로 유일한 진실의 실체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건강 정의를 다른 말로 이해해보면 매우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조화롭고 정상적인 역할 해내는 상태만이 저자의 건강범주에 들어갈 있을 듯하다. 다시말하면 저자는 사람이 건강한 상태는 신체에서 측정된 수치가 정상적 범위 내에 속해있을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수많은 크고 작은 병에 걸리고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병치레를 하는 것도 크게  건강 범주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했다. 앓고 온전히 회복하는 일도 결국은 건강한 상태로 봐야할 듯한데, 이부분은 단지 나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책내용만을 보고 저자에 대해 짐작해보면 저자는 온건한 보수성향의 백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아닐까한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 발생한 후인 1942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저자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지만 저자의 가치관은 50-60년대 호황기 백인 중산층 가족 가치관의 전형인듯하다. 건강을 이야기하며 프랭클린을 인용하는 것도 어떤 점에서보면 저자가 종교에 대한 표면적인 편견은 없으나 청교도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프랭클린으로 대표되는 청교도적 윤리관은 근면, 절제, 검소 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찍자고 일찍일어나면 건강해진다.’라는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건강 관한 장에서 저자에 대해 분명히 청교도적 가치의 영향을 느낄 있다. 아울러 동성 결혼과 양육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논의의 카테고리에 포함시킨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가치관은 <사피언스의 미래>라는 책에서 이루어진 토론의 참석자인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의 관점과 너무나 유사한 같다.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는 과학자이고, 사회에 대한 모든 인식과 판단 기준은 절대적으로 수치와 자료에 기반하는 같기 때문이다. 이들이 참여한 토론의 주제는 인류의 미래는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대한 것이었으며, 상대편 토론자는 알랭 보통과 맬콤 글래드웰이었다. 알랭과 맬콤은 인문학을 공부한 이들로서 인류의 미래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의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어 토론을 진행해나갔다. 반면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는 인류의 미래는 절대적으로 낙관적이며, 모든 통계와 수치가 이를 증거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전문가는 경제학자였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결정짓는 다섯가지 선택> 저자인 로버트 마이클은 경제학자이자 공공정책 분야의 권위자 답게 방대한 통계자료를 인용한다. 통계자료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해석하고 이를 어떠한 의도를 갖고 견해를 표출하게 때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저자의 조언은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은 전문가이기에 있는 조언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선배로서 있는 조언일 것같다. 상식적으로 이미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어본 조언들이 많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책에는 할아버지 경제학자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조언들이 가득하다. 다만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판단할 기준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다소 제한적인 조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모든 선택의 행위를 투자, 그리고 선택이 잘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수익률 된다면, 기대한 수익률이 나오지 않았을 경우 개인의 선택은 틀린 것이 된다는 것일까. 저자가 제시하는 각각의 중요한 선택에서 반드시 존재하는 불확실성 떠올려본다면 독립적인 성인 된다는 것은,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노력하되, 자신의 선택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결정의 순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최소화는 선택을 하여 자신의 삶에 주도적으로 관여함을 의미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모든 통계와 진심어린 조언들 뒤에는 결국 인생의 주인인 본인이 모든 국면에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독자가 인생의 단계에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해 있을 , 저자는 수많은 선택의 길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사정은 모두가 다른 ! 결국은 여러 주제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선택의 가능성의 수에 반하여 지극히 원론적인 선택시 고려사항만을 전달해 있을 뿐이다. 결국 각자의 인생에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 문제와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공유하면서도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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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본 길이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책을 읽고 뒷풀이를 글로 끄적끄적 남겨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사이의 관계나 사람의 일들이 무인도에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책을 읽고 잠깐 잠깐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온전히 붙잡아둘 건실한 기억력도, 그나마 붙들은 생각들을 제대로 표현할만한 재주도 없다는 생각에 여러 책들을 그저 읽고 잊기에 바쁜 나날들이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너무 주지 말고 더도말고 A4용지 이내로, 그리고 무형식의 글이라도 기록해보자하는 생각이 들었다. 곳에서 짧은 전세 계약기간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곳에서 다른 전세입자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좀더 정리가 되고 안정을 찾으면 책읽는 시간도 좀더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래서 편히 손에 집어든 책이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 가본 길이 아름답자>였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작가들의 에세이나 산문집에 쉽게 눈길이 가지 않는다. 자유로움과 잡스러운 주제를 편하게 들려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도 무난하게 읽어가지만, 그렇다고 애착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대신 작가들의 작품을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짧은 독서경험이지만 반대의 경우, 작가의 작품(소설)보다 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나에게 있었는데, 작가는 제프 다이어라는 영국작가였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을 때도 사실은 그리 기대를 하고 읽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 편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2010년에 출간된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은 작가의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흥미있게 읽었다. 50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할 즈음 서울대생이었던 작가가 전쟁 발발 직후 변해버린 삶의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아온 분이었는지 보다 이해할 있었던 산문집이었다. 특히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삶을 겪어낸 분이기에 작가의 전쟁 체험과 가족사, 사람들이 살림살이에 대한 기록은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쟁통에 운좋게’ PX 취직이 되어 알게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 그리고 서울대생으로서 기고만장하고 무례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반성하며 성숙하게 사연이 인상깊다. 박수근 화백의 추모전에서 만난 나무와 연인이란 제목의 그림이 작가에게 영향에 대한 뒷이야기 등은 작가의 작품에서 전혀 없는 내밀한 고백이기도 하다. 산문집에는 작가와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 그리고 박경리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이 소개되어 있어 작가의 삶에 대한 이해를 있다.

   2 책들의 오솔길에서 만나는 작가의 독서감상도 흥미롭다. 신문에 연재했던 작가의 책읽고 후의 이야기 작가 스스로 독후감 아니라고 말한다. 글들은 단지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거느리고 있어 쉬엄쉬엄 쉬어갈 있는 책읽기 작가의 의도이다. 작가가 읽은 권에 대해 간결하게 적어나간 글들은 독자가 따라 읽어나가기에 부담이 없고, 솔직하여 어느새 작가를 따라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 된다. 이러한 능력도 결국은 작가의 오랜 필력에서 나온 것일테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손자, 손녀를 평범한 할머니로서 작가의 솔직함을 보는 즐거움이 책의 매력적인 하나가 아닐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무엇보다도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과 전쟁의 경험에 대한 에피소드는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소중한 기록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시를 읽는 이유들‘
215면)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숩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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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임종학 강의
모니카 렌츠 지음, 전진만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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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모니카 렌츠 지음 | 전진만 옮김 [책세상]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란 주제는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맞이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운명일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아마도 인간의 인지능력이 여타의 동물과 달리 창발되어 드러난 이후 언제나 우리의 속에 함께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사랑’은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논했던 주제인 반면, ‘죽음’은 어쩐지 우리가 회피하고 막연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같다. ‘죽음’은 본연의 실체를 모르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생명체의 운명이다.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저자 모니카 렌츠는 스위스 동북부에 위치한 장크트갈렌St. Gallen 종합병원의 정신종양학 의사로서, 그리고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음악치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심층 심리학자로서 활동하는 죽음 전문가라고 있다. 저자가 17 1000 명의 죽음에 이르는 환자들을 지켜보고, 경험한 점들을 바탕으로 책이 바로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 ‘죽음’에 대해 갖게 되는 공포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것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우리의 죽음이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중에 몽테뉴의 에세이 형식을 닮은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서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서도 ‘죽음’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라고 하였다. 누구나 피할길 없는 자명한 운명은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마주해야하는 대상이다. ‘안락사’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는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서문에서 ‘안락사’에 대한 개념을 여러 가지 유사 개념들과 함께 구분해 놓고 있다. 생명유지가 무의미한 상황에서 생명 연장을 위한 조치들을 포기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여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거나 거두는 ‘적극적 안락사’, 그리고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직접 처방받아 환자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 자살’ 행위도 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화적 맥락에서 ‘안락사’는 논의를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다. 나아가 가족 명이 ‘안락사’를 이야기 한다면 더욱 힘겨운 주제가 것이다. 현재에도 특별한 시대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안락사’는 금기시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안락사’는 금기시되는 단어라고 어느 교수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 바로 나치가 권력을 잡던 시기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이 ‘안락사’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 나치의 광기어린 지도층에게나 ‘안락사’라고 말할 , 정작 대상이 되는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고려와는 전혀 무관한 표현이었다. 이처럼 말을 꺼내기조차 쉽지 않은 ‘안락사’를 언급하기도 하며 저자가 말하려던 의도는 무엇보다 ‘존엄’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타의 동물과 다른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모습에 ‘존엄’이란 존재할 있나? 저자는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도 자문한다. 저자가 기존의 죽음을 다룬 사람들과 다른 점은 아마도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관점에서 ‘죽음’을 고려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일 듯하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일반적인 인지과정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임종환자의 ‘존엄’은 보다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책의 여러 곳에서 꾸준히 ‘존엄’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저자는 심지어   다시 환기하자면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실존 형식의 하나로서, 죽음을 17 관찰해온 저자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나도 조금 얻어갈 있게 되어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의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던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연구와 업적은 저자의 선배 세대로서 죽음이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선배 연구자 퀴블러 로스의 업적에 힘입은 크다는 점을 언급함과 동시에 한계점을 언급하고 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순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다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앗다는 확진을 받고 나서 쇼크, 상실, 비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내적인 여정만을 묘사한다.”(42) 퀴블러 로스의 견해는 임종 환자의 죽음에 대한 수용-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하며, 저자 자신은 여기에서 나아가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 대한 이해를 하기위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죽음의 과정은 크게 3가지 다른 양상으로 구분된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임종 과정은 다른 상태 사이를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전이 현상으로 이야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의 과정 3단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전 단계(통과 이전),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 그리고 경계의 통과 이후 이루어진다고 본다. 경계 이전의 단계에서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자아가 소멸되어간다고 한다. 경계 통과 이전의 경직된 상태는 경계를 통과하며 이러한 상태가 이완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한다.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점으로 임종 환자의 공간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됨을 강조한다. 따라서 임종환자의 인지 경험은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임종 환자는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한다. 죽음의 과정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결코 완전한 이해에 다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닌 이상, 자연적인 죽음에는 틀로서의 진행방식은 존재하는 같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일부만이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들이 파악될 것이다.

 

     모니카는 죽음의 단계에 대한 연구와 소개에서 멈추지 않고, 의미에 대해서도 추구한다. 죽음의 단계에서 존엄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임종환자의 가족으로서 그리고 전문가인 의사로서 환자를 어떻게 돌보아야하는지를 저자는 되묻고 고민한다. 모니카가 잊지 않고 당부하는 점은 임종 과정이 환자 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한가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존엄이라고 하는 개념이 초기 근대의 계몽주의적인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소외된 이후, 우리는 전문가'로서 의사의 서비스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필요 전문가인 의사와 간호사에게 위탁함으로써, 과거 우리 선조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임종과정을 지켜보고, 후손들에게 이야기와 경험을 통해서 전달되던 죽음 대한 지식과 이해가 일반인들로부터 분리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일종의 계몽주의적 산물로서 죽음  전문가들의 지식과 돌봄에 대한 경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선조들 보다 앞에서 언급한 존엄 의미가 더욱 가벼워진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

     저자는 분명히 삶과 죽음의 경계 통과 이후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없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죽음 연구에 있어서의 한계를 인정한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모두에게 반드시일어나게될 실존의 형식으로서 죽음 대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깨닫는 경험이었다. 죽음에 대해 좀더 알게 것이 반갑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곳곳에서 저자가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한 점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은 있지만, ‘죽음 실체를 이해하기위한 노력과 죽음의 단계에서 진지하게 되묻는 존엄 의미 추구는 공감을 많이 하게 된다. 오히려 저자가 소개하는 칸트의 존엄 의미는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인간이기에 존엄을 갖는다 정언적 선언이기에 모호하고 공감을 하기 힘든 점이 있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라고 서경식 교수가 글을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병원 시설에서 첨단 장비에 연결되어 생명 활동의 신호가 수치로 모니터링 되는 상태로 명을 이어가다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맞는 죽음은 금기시 된다. 모니카 렌츠는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이상 죽음 아닌, ‘죽음의 고통이라고 보다 명확히 지적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죽음을 회피하게 현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 좀더 신랄하게 비판해본다면, 나는 현대인들이 자신들의 죽음 아웃소싱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해보겠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일부를 회피하는 데서 생기는 소외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꾸어 말하면, 이런 상황은 죽음 우리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자 우리 삶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정보 내지는 조건처럼 인지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한다. 가운데는 현대 사회의 병폐에 기인하는 점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같다.      

 

     책을 덮으며 모니카 렌츠가 자문한 것처럼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해본다. 누구나 죽는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죽음은 너무나 개별적이기에 죽음 앞에 좋은이란 수식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죽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선배 세대에 비해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는 점점 희귀해진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개체의 삶의 완성이기에 죽음 대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있지 않을까.



(37면) 죽음의 이해
"자아 중심적 존재에서 더 큰 존재(포괄적 존재)로의 전이, 자존적 존재에서 포괄적 존재로의 전이는 죽음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경험하는 영혼적, 정신적 과정이다."

(50면) ‘존엄‘에 대해
"존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다. 동시에 자율의 표현이자 (거부가 아닌) 긍정의 표현이며 본질에 다가서려는 ‘불굴의 의지‘다."

(89면) ‘임종환자에 대한 위로‘
"위로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109)면 ‘죽음‘의 존재론적 해석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이자 ‘대상을 경험하는‘ 통로에서 죽음이 발생한다. (...) 즉 인간은 존재자이면서도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159면) 오늘날 왜곡된 죽음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죽음의 고통이다. 사람들은 고통과 함게 환자의 외모가 심하게 일그러진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에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187면) 임종준비
"임종 준비란 임종 환자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다."

(243면) 저자의 마지막 언급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들의 마지막 변화가 내세에 대한 암시인지, 아니면 단지 임사체험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단지 해석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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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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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버거(John Berger) 지음 | 김현우 옮김 | 열화당

 

 

[I] 작가의 글쓰기

노()작가의 문장은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시작한다. 80 가까이 글을 써온 버거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글쓰기 활동은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활동 덕분에 나는 의미를 찾고, 계속할 있었다.라고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버거가 발표한 다른 책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담긴 작가의 글쓰기는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우 직관적이다. 어떤 외부의 소재로부터 글을 시작하여 곧바로 소재가 이어주는 현상/기억 등의 내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다시 어느 순간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곤한다. 버거는 외부의 소재/사물이 내면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하고 소재와 자신의 내면이 나누는 담소를 듣는 것같다.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에서 저자는 순간을 인식하며 현재와 하나가 된다. 버거의 문장은 차분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함축적이다. 

 

책의 곳곳에서 버거는 오랜 지인들의 죽음을 계기로, 사망한 지인들의 장례식에 찾아가며 이들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고 이들과의 추억을 소환한다. 따라서 저자 자신의 오랜 지인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버거의 지인들은 평생지기들이다. 보통이 30 정도인 듯하고, 사진가 모르처럼 50 지기도 있다. 책은 현재를 충실하고 온전하게 사는 버거의 방식 또한 살펴볼 있다. 개인의 제한적인 시간성 속에서 망각에 저항하고영원을 사는 법이 담겨있는 것이다. 

 

 

[II] 자연의 텍스트 읽기 - 드로잉

버거는 진정한 번역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글을 써내려 가지만 어느 번역 맥락은 언어의 문제에서 벗어나 본인의 관심사인 드로잉으로 옮겨간다.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어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그는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는 저자의 오랜 지인의 모습이나, 채플린과 같은 이의 초상 또는 그림의 부분을 보고 거칠게 스케치한 그림과 장미를 비롯한 여러 식물들의 그림들이 실려있다.

 

   버거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텍스트 번역의 과정과 다르지 않는 듯하다. 아무리 손기술이 좋은 화가도 자연의 모습을 동일하게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화가는 자연을 대상화하여 인지한 화가에게 떠오른 심상, 형성된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는 작업을 뿐이다.  

 

   이미지를 이야기 , 작가 자신이 그린 붓꽃 그림과 사진작가 타토 올리바스(Tato Olivas) 버거의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무용수 사라 바라스(sara Baras) 사진을 보내온 장면은 무척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버거의 붓꽃 그림과 무용수의 사진을 순간 소름이 돋았다. 책에 나온 내용을 보니 버거 자신도 사진작가 타토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자신의 눈을 믿을 없었다라고 하였다. 사진에 포착된 무용수의 역동적인 동작이 주는 에너지와 붓꽃 그림에서 보여주는 동적 형태가 주는 정서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사진과 그림을 보면 때서야 버거의 설명이 더욱 실감나게 이해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붓꽃 그림과 무용수 사진) 무한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리듬의 관점에서는 함께 움직이고 있다.”(81)

 

   이제야 비로소 작가가 간결하게 모든 시대, 모든 춤의 모태가 동작’(81)이란 표현이 스스로 맥락을 드러내고 정당성을 획득한다.

 

 

[III] 신자유주의 비판

아흔에 가까웠던 작가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관심을 갖는다. 책의 곳곳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영원히 바꿔버린 투기 금융자본주의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날카롭게 지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투기 금융 자본은 정부를 노예 주인처럼 활용하고, 세계 미디어를 마약 공급상처럼 활용한다. 폭정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과 자본 축적인데,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소란하고, 위태롭고, 매정하고, 설명할 없는 세계관 혹은 삶의 패턴을 강요한다.”(35)

 

미국이 이라크에 있는 자신들의 정유 시설을 지키기 위해 삼백 개가 넘는 부대를 은밀히 파병했다는 소식”(56)

 

버거는 현대의 금융 자본주의가 야기한 폭력성에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작가였다. 대한민국에서 1997 외환위기를 통해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경험한 기억을 떠오려보면, 작가는 현대사회의 본질을 명료한 언어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 1990년대를 지나며 세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져 버렸다. 시기에 대리인들, 로비스트들, 다국적 투기 자본이 지구촌의 길을 정하는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다. 그게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독단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의회 정치인들은 무력해졌고, 그들이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다. 미디어도 똑같이 공허하고 언어를 이어받았다. 유럽, 국제적 연대, 독립 같은 용어는 쓸모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제적인 뉴스를 전할 약어들을 남발하는 역시, 내용 없음을 향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60-61)

 

모든 정치적인 활동의 노력이 투기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위기에 처해 있음에 노()예술가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신을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곳을 메우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고백과 비교하면 얼마나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새삼 발견하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버거에게 글쓰기란 의미를 찾도록도와주는 수단으로써, 이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항상 깨어있게 해주며 망각에 저항하도록 해주는 평생의 지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 다수는 아니더라도 -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16면)
-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 중에서

"(고아는)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가 된다." (27면)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57면)
- 작가 자신이 수영을 하다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과 관련하여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10면)

본인의 드로잉과 관련하여

"드로잉을 할 때, 나는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서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 외양이라는 텍스트는 이미 나의 모국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9면)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면)



신자유주의 비판

"마찬가지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생겨나는, 또한 점점 늘어나는 인류의 가난과 계속되고 있는 지구에 대한 착취도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자유시장방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작동할 때 보장되는 것이다. 그건, 밀턴 프리드먼의 말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넥타이 색깔을 놓고 투표하는’ 세상이다."(89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 정보들은 대부분 한때 정치라고 불리던 활동에 관한 것이지만, 정치는 이미 주식 거래인과 은행의 로비를 앞세운 전 세계적 투기 자본의 독재로 대체되어 버렸다."(104-5면)

신자유주의 사회의 ‘언어‘ 비판

"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율을 이야기하고,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험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이산화탄소 측정치 등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목소리지만 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털구름은 북족, 수영장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물에 뜬 채로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로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 (56-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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