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책을 읽고 그 뒷풀이를 글로 끄적끄적 남겨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사이의 관계나 사람의 일들이 무인도에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책을 읽고 잠깐 잠깐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온전히 붙잡아둘 건실한 기억력도, 그나마 붙들은 생각들을 제대로 표현할만한 재주도 없다는 생각에 여러 책들을 그저 읽고 잊기에 바쁜 나날들이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너무 주지 말고 더도말고 A4용지 한 장 이내로, 그리고 무형식의 글이라도 기록해보자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곳에서 짧은 전세 계약기간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전세입자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좀더 정리가 되고 안정을 찾으면 책읽는 시간도 좀더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래서 맘 편히 손에 집어든 책이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자>였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작가들의 에세이나 산문집에 쉽게 눈길이 가지 않는다. 자유로움과 그 잡스러운 주제를 편하게 들려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도 무난하게 읽어가지만, 그렇다고 애착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대신 작가들의 작품을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짧은 독서경험이지만 이 반대의 경우, 곧 작가의 작품(소설)보다 작가의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나에게 있었는데, 이 작가는 제프 다이어라는 영국작가였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을 때도 사실은 그리 기대를 하고 읽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 편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2010년에 출간된 박완서 작가의 이 산문집은 작가의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흥미있게 읽었다. 50년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 즈음 서울대생이었던 작가가 전쟁 발발 직후 변해버린 삶의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아온 분이었는지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산문집이었다. 특히 내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삶을 겪어낸 분이기에 작가의 전쟁 체험과 가족사, 사람들이 살림살이에 대한 기록은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쟁통에 ‘운좋게’ PX에 취직이 되어 알게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 그리고 서울대생으로서 기고만장하고 무례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반성하며 성숙하게 된 사연이 인상깊다. 박수근 화백의 추모전에서 만난 ‘나무와 연인’이란 제목의 그림이 작가에게 준 영향에 대한 뒷이야기 등은 작가의 작품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내밀한 고백이기도 하다. 이 산문집에는 작가와 고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 그리고 고 박경리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이 소개되어 있어 작가의 삶에 대한 이해를 더 할 수 있다.
2부 ‘책들의 오솔길’에서 만나는 작가의 독서감상도 흥미롭다. 신문에 연재했던 작가의 ‘책읽고 난 후의 이야기’는 작가 스스로 ‘독후감’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글들은 단지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거느리고 있어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책읽기’가 작가의 의도이다. 작가가 읽은 책 한 권에 대해 간결하게 적어나간 글들은 독자가 따라 읽어나가기에 부담이 없고, 솔직하여 어느새 작가를 따라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 된다. 이러한 능력도 결국은 작가의 오랜 필력에서 나온 것일테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는 손자, 손녀를 둔 평범한 할머니로서 작가의 솔직함을 보는 즐거움이 이 책의 매력적인 점 중 하나가 아닐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무엇보다도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과 전쟁의 경험에 대한 에피소드는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소중한 기록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시를 읽는 이유들‘
215면)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숩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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