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여기를 산다


영화 프랑켄슈타인(2025)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의 신이다. 그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내고,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인류의 은인으로 여겨진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해 내었기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작품에 붙게 되었다. 이처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와 메리 셸리의 서사는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인상적인 영상미,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랑, 존재에 관한 철학적인 화두를 던진 바 있는 영화로 <물의 모양 shape of water>(개봉작 명칭은 사랑의 모양’)을 떠올리곤 한다. 이 영화를 제작했으며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올해 개봉했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한 면도 있는 반면, 토로 감독만의 개성 있는 영상미와 해석이 추가되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생명의 이면인 죽음의 문제를 영화에서는 더욱 깊이 고민한 결과가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속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의 조각들을 이어붙이고 생명의 에너지를 가미하여 영혼을 불어넣으며 이른바 필멸자의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다. 하지만 미리 생각하는 자(prometheus)’라는 이름의 무게와 달리, 끝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한 이 창조자는 피조물의 탄생 이후에 대해서는 먼저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거역한 죄로 벌을 받아 카프카스 산맥의 한 바위에 묶인 채,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이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인류의 은인으로도 여겨지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 가운데 이 부분에 주목해보면, 창조물은 프로메테우스의 이면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영원히 살아가야만 하는 이 창조물은 이제 우리 시대에서 범용 AI(AGI)로 변신을 꾀한 것으로 보아도 그럴듯하다. 레이 커즈와일이 제기한 특이점을 넘는 순간에 이 인간의 창조물은 이미 괴물이 되어버릴 것인가, 질문해볼 수 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영원을 살아야 하는 창조물의 가려진 고통과 근원적이면서도 비정한 욕망을 우리에게 이미지의 상징과 은유로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원작은 고전으로 여전히 살아남아 현재적 의미에 주목하고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며 현대인에게 유효한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아름답고 독특한 영상미와 색감이다. ‘기예르모 감독의 색깔이란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곧바로 떠오르는 색(color)은 크게 4가지다. 토로 감독은 화면을 구성하는 추상적인 조형요소로서 색이 지닌 톤과 이 색이 내뿜는 분위기, 그리고 그 색의 상징성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잘 활용하는 감독이라 생각한다. 특히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선명한 빨강, 순백색, 그리고 몽롱한 초록색과 짙은 푸른색, 혹은 이 두 색이 묘하게 섞인 청록색이 떠오른다. 특히 푸른색과 청록색은 이전의 작품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에서 물과 사랑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욕망과 공허함과 같은 감성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준 색으로 기억한다. 이렇듯 토로 감독이 작품에서 사용하는 색은 생의 화려함 생명력, 그리고 그 이면에 가려진 공허함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예감, 혹은 삶과 죽음에 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창조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해서 주변의 모든 이들의 죽음을 보고 떠나보내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결코 죽을 수 없는존재로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이 쪼이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고통과 고립감, 외로움을 마주해야했다. 정작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말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창조물의 잘못된 만남은 이렇듯 존재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생명체, 특히 의식을 지닌 생명체에게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을 간접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바닥이 없는 깊고 거대한 두려움. 이는 토로 감독이 늘 배경색으로 보여주는 짙고 무거운 느낌의 푸른색을 떠올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한 가지는, ‘죽음이란 현상이 한편으로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에게는 우주가 선사한 /휴식의 시간이란 생각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창조물나를 끝낼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을 따라다니며 죽음을 갈망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이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이제 삶이 권태롭거나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만이 존재에게 더 큰 중요성을, 혹은 유일하게 중요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 피할 수도 없이 중년이 되어버린 내게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공통적으로 내게 한 가지 교훈을 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 후에 상대방을 정성스럽게 애도하고 추모하곤 하지만, 살아있는 나에게지금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상대방이 나를, 우리를 떠나기 전에 당신이 나와 함께해서 좋다, 함께 해주어 고맙다고 얼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자주 그리고 가볍게 말이다.

 





[종이 인형(메리 셸리) 협찬: 구슬 @kooseul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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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아포리아 14
롤랑 바르트 지음, 류재화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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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늘 겹겹이 가려져 있는 듯한 작가. 바르트를 좀 더 알고 싶어 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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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기로 했다 - 돌봄과 상실, 부모의 나이듦에 관하여
폴커 키츠 지음, 윤진희 옮김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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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외투

- 당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기로 했다

: 돌봄과 상실, 부모의 나이듦에 관하여


 

폴커 키츠(Volker Kitz) 지음

윤진희 옮김 [김영사] (2025)





 

올 여름 매미가 뜨겁게 울던 어느 날 집안 어른 한 분을 떠나보냈다. 한 인간이 아프고 삶이 무너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의 관심은 오로지 인간의 나이듦과 돌봄에 초점이 맞추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나의 생계를 접어두고 환자의 수족이 되어 환자를 보살핀 것도 아니기에 나의 무력감과 부끄러움이 상처를 더 쿡쿡 건드리고 상실의 아픔을 더 생생하게 자각하게 해주었다. 공허한 감정이나마 달래보려 어렵지 않은 책을 읽어보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제대로 해내기 힘들었다. 그러다 안절부절하던 마음이 우연히 머물게 된 책이 당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기로 했다였다.

 


저자 폴커 키츠는 심리학을 전공한 심리학 연구자이면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도 활동하는 작가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노년에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곁에서 그를 보살피고 떠나보내는 과정을 담은 책이 바로 내가 긴 여름의 끝에 우연히 만난 이 책이다. 특히 우리 사회도 경험한 바와 같이 코로나 팬데믹 시기, 하루하루가 황금 같은 무게를 지녔을 저자와 아버지의 시간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삶을 경험하는 이라면 누구든 반드시 노화를 겪는다. 그리고 누구나 단 한 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엄정한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는가? 올해는 내게 이 문제가 점점 더 중요한 화두가 되어버렸다. 부모의 노화에 더하여, 저자의 아버지와 같이 치매라는 질병은 돌보는 가족을 더더욱 아프게 한다. 치매가 당사자와 그를 돌보는 이들에게 주는 무게는 단순히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만 놓여 있지 않다. 저자 폴커 키츠는 치매로 나날이 변화하는 아버지를 돌보고 곁에서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 자신을 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29)라고. 치매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과정이다. 가족과의 추억이며 한 개인을 둘러싼 역사가 사라진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개인이자 사회적인 한 존재가 지워지는 듯한 상실감을 남긴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거나, 음식을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먹을지, 용변을 어떻게 혹은 어디서 보아야 할지 등등의 기본적인 생활마저 점차 힘들어지게 한다. 가족들은 마치 한 사람의 존재가 서서히 지워는 모습을 봐야하는, 잔인한 형벌을 받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의 아버지도 결국 레지던스라고 부르는 일종의 요양 시설에 입소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자주 방문하고 곁에서 대화를 이어가지만, 자신의 세계와 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세계를 깨닫게 될 뿐이다. 저자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주하는 변화를 감지하고, 보호자로서 느끼는 당혹감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을 책의 곳곳에서 이야기한다. 심리학, 법학, 경영학 등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분야의 책을 20여 권 쓴 바 있는 저자는 이 지난한 과정을 통과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이 된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을 꺼내보고 있었다.

 


올 여름 나는 병원 가는 길이나 집에 돌아오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이따금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들을 메모장에 두서없이 적어두곤 했다. 하지만 49제도 지난 지금도 이 메모들을 아직 들추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저자가 아버지와의 추억이나 자신의 감정들을 담담하게 남겨 놓는 대목을 읽다보니, 올 여름 내가 느꼈던 현실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그날의 고민이나 감정들을 저자가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어 놀랐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가 이토록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그만 위안을 받았다. 어쩌면 우리 현대인의 삶에서 나이듦과 돌봄,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본질에는 결국 공통점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 사람이 삶의 종착역을 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가족은 누구나 한번쯤 무력감을 느낄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종종 돌보는 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후회로 인한 수치심도 느끼는 듯하다. 여기서 그는 이런 수치심이나 죄책감이야말로 글쓰기의 강력한 원동력일 수 있음을 말한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글쓰기 행위 자체에 머물고자 하는 점이 인상 깊다. 그는 단어들이 나를 보호한다. 문장과 페이지, 마침표와 느낌표로 된 외투에 싸여 있으면, 나는 덜 두렵다.(238)라고 언급한다. 한 사람이 지면에 내려 적는 단어들이 마치 우리를 보호하는 외투 같은 역할을 한다니. 그러고 보면 올 여름 내가 적었던 단어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를 지탱해준 것이야말로 바로 이 단어들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개인의 슬픔이나 고통, 불안이나 두려움과 마주하여 이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게 해주는 듯하다. 우리 안의 막연한 감정들을 가시화하는 행위가 글쓰기 일 것이다. 이해하거나 감당하기 힘든 삶의 진실들을 언어로 변환시키고, 이로써 이 주제들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비로소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문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를 글 쓰는 이에게 부여한다. 누군가의 삶이 종착역에 다다르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새삼 깨닫는다. ‘죽음이 결코 스스로 완성될 수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이 과정은 늘 타인의 인정과 인지 없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삶의 도도한 과정에서 모든 이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과정에서 글쓰기는 삶의 거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가져다 줄 고독의 한 가운데에 머무를 수 있는 보호막을 만들어준다.


 

나아가 글쓰기가 우리 삶의 일상이 되고 루틴 속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를 보호하는 역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습관에 대해 사회학자 야노슈 쇼빈의 말을 인용한다. ‘습관이 우리에게 무한에 대한 허구를 제공한다. 나아가 이 허구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이다. 따라서 글쓰기가 우리의 일상이 되고 루틴이 될 때 인간의 죽음도 보편적인 경험으로써 공유되고 그 무게가 경감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의 과정으로서 규칙적인 글쓰기, 루틴이 된 글쓰기가 하나의 의식(ritual)이 되면, 마치 예방주사를 맞듯,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주할만한 사건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은 살아 있는 누구든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내게는 글쓰기가 타인의 죽음이라는 경험을 상상하게 하고 두려움을 마주하게 해주는 의식으로서 소중하다.



[책속으로]


[1] "‘돌봄’은 이제 우리 세대를 드러내는 단어다." - P25

[2]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 자신을 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P29

[3] "아버지의 변화는 나를 두렵게 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 P74

[4] "아버지는 이제 레지던스에서 지낸다. 나에게 가까이 왔지만, 아버지의 세계는 멀리 있다." - P91

[5] "아버지의 기억에 내 모습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남을까 봐 몹시 두렵다. (...) 다음 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나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해서 현장이 그 상태 그대로 봉인되어버릴까 봐 두렵다." - P171

[6] "사회학자 야노슈 쇼빈은 습관이 우리에게 ‘무한에 대한 허구’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이 허구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일상의 루틴, 거듭되는 비슷한 패턴 그리고 같은 사람들과의 규칙적인 만남은 우리의 행동을 무한히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P176

[7]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의 책 《불안 속에 머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복잡성을 담아내고, 경계선을 열어두고,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사이의 예상치 못한 연결을 향한 갈망을 유지해주는 커다란 이야기(그리고 이론)가 필요하다.’" - P208

[8] "아버지는 종종 죽기를 원했지만, 여전히 살고 싶어 했다." - P209

[9] "누구의 자녀가 동성애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아버지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당신이 원하는 삶과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도 자신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리길 바랐을 것이다." - P231

[10] "아기였을 때 자신을 돌봐준 부모님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개인적 의무감과 사회적 기대에 어긋난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그 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죄책감이 더해진다." - P236

[11] "단어들이 나를 보호한다. 문장과 페이지, 마침표와 느낌표로 된 외투에 싸여 있으면, 나는 덜 두렵다." - P238

[12] "나에게는 자녀가 없으니, 자녀가 나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돌봐줄까?" - P255

[13] "(도나 해러웨이는)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는 창의적인 친족 관계를 만들고, 현재 안에서 함께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는 학습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해러웨이가 말하는 ‘촉수적 사고’다. (...) 이는 친구놀이를 뜻한다." - P257

[14] "불꽃이 사방으로 번진다. 재와 불꽃, 연기, 나무 타는 소리 그리고 속삭임. 그곳은 붙잡을 수도, 측정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그리고 한순간, 불꽃 속에서 문어가 솟아오른다. 문어는 촉수를 펼치며 탐색하고 느끼고 뭔가를 찾는다."(267, 마지막 문장)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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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의 하루 알맹이 그림책 80
아르노 네바슈 지음, 안의진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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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의 완벽한일일(一日), 또는 일일(日日)

- 가스파르의 하루

 


아르노 네바슈 지음

안의진 옮김 [바람의아이들] (2025)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작품을 둘러싼 예술 논쟁과 재판을 소재로 삼았던 그래픽 노블 이것이 새입니까?(2024)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아동문학 작가/삽화가 아르노 네바슈가 이번에는 우리 삶의 일상에 주목했다. 가스파르의 하루(2025)에서 작가는 도시의 환경미화원 가스파르의 하루, 혹은 매일의 모습을 담은 그림책을 만들어 냈다. 작가가 전작 이것이 새입니까?에서 그림책과 예술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졌다면, 이번에 출간된 가스파르의 하루는 삶을 예술처럼 만드는 가스파르의 일상을 소개한다.

 


도시는 현대인이 살아가는 제2의 자연이기도 하다. 문명의 상징인 거대 공동체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구성원 각자가 역할을 충실해 해내는 과정 속에서만 도시는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파르의 하루를 따라가 보면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존재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도시의 행정을 맡은 눈에 보이는이들도 있지만, 가스파르처럼 새벽이나 밤부터 일을 시작하는, 보이지 않는이들도 많다. 작가 아르노 네바슈는 이처럼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게 해주지만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던 우리 주변의 영웅들을 소환한다.

 


가스파르는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밤새 쌓인 도시의 쓰레기를 수거하러 나간다. 쓰레기 수거차를 타려면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집을 나서야만 한다. 가스파르는 이른 새벽 시간을 아주 좋아한다. 그는 쓰레기 수거차를 모는 카를로스, 쓰레기를 수거하는 동료 엘사와 함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엘사와 가스파르가 지나간 자리는 늘 깨끗해져요.”란 문장이 마음에 들어 책에 잠시 머문다. 가스파르와 동료들은 정오가 되기까지 매일 3톤에 가까운 쓰레기를 수거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인정하고 매일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이들이다. 이렇게 힘들고 궂은일을 태어나면서부터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분명한 건 이들이 없어서는 결코 안 될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고 오염을 막기 위해 도시는 수백 명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쳇바퀴 돌 듯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 가스파르는 사소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찾아낸다. “가스파르에게 가장 소중한 건, 매일 아침 마주치는 작은 순간들이에요.이처럼 그는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만남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소소한 만남중에서도 그가 가장 기대하는 시간은 매일 노란 우비를 입고 킥보드를 타는 꼬마를 만나는 일이다. 가스파르가 매일 아침 킥보드 타고 지나치는 꼬마를 보는 일은 그에게 매일 거쳐야하는 개인적인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만남이 가스파르에게는 소중한 일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란 우비를 입은 꼬마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데, 가스파르는 그 꼬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해 하는 듯하다. 쓰레기 더미를 자세히 보니 꼬마가 타던 킥보드가 고장 난 것을 알고 집에 가져와 수리를 한다. 그리고 고장 난 킥보드 부품들을 가지고 다시 조립하여 꼬마 집 앞에 놓아둔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도시의 쓰레기를 수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물건들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는 가스파르의 관심과 행동이 꼬마의 하루를 행복하게 했을 것 같다.

 


이쯤 되니 문득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생각났더랬다.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 분)는 일본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가스파르처럼 도시가 아직 잠들어 있는 새벽에 일어나 공중화장실을 매일 청소한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과 정성을 다하는 인물이다. 점심시간에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매주 현상/인화하여 결과물들을 보관하기도 한다. 여기에 음악 감상이나 독서 등의 취지를 꾸준히 이어나가는데, 그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는 듯 하다. 자신만의 생활과 마치 의례와도 같은 개인적인 일상의 행위들로 하루가 채워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일상의 모습 또한 가스파르의 일상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환경미화원 가스파르나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가 공통적으로 내게 말해주는 것은, 이들이 일상의 예술가와 같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이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의 의미는 조금 느슨하게 말해 감성적인 반복을 통해 인간이 주체로 만들어지는 의례로 보았다. 이는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책 <모두를 위한 철학 입문>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현대인은 타인이 부여하고 강요하는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곤 한다. 여기에 나의 것이 아닌 의미가 나의 권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 아닐까 싶었다. 사사키 아타루는 우리가 반복적인 의례를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주체로 되어간다고 말한다. 다시 정리하면, 사사키 아타루의 예술과 의례의 의미를 적용해볼 때 내 눈에는 가스파르나 히라야마가 일상의 의례를 예술로 만드는 이들로 보였다는 점이다.

 


작가 아르노 네바슈의 <가스파르의 하루>는 이제 내게 새로운 인식을 주고 있다. 가스파르나 히라야마는 우리의 공적 삶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숨은 영웅일 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자신의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 나가는 일상의 예술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또한 새롭게 느끼는 시대적 징후로서 현대인의 삶이 공동체의 기억을 담은 집단 의례의 시대에서 개인적 의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세대 이후에는 이제 조상의 제사를 집에서 지내는 이들이 매우 적을 것이다. 대신 개개인 각자 자신만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만들어 나가지 않을까. 이처럼 앞으로는 개인적 의례, 혹은 일상 속 의례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 같다. 결국 가스파르가 노란 우비를 입은 꼬마와 느슨한 만남이라도 기대하듯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 그리고 가스파르가 이들의 삶과 얽히는 모습은 그와 같은 일상 속 예술가의 일일’(一日, 하루) 혹은 일일’(日日, 매일)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여기서의 완벽함은 충만함의 정도에 더 가깝다. 가스파르는 우리에게 하루’, 나아가 매일의 일상을 이처럼 충만하게 보내는 법을 알려준다. 우리의 삶은 가스파르의 하루처럼 이렇게 작지만 완벽한/충만한일상의 의식, 일상의 예술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1] "집을 나설 채비를 하는 가스파르는 고요한 이른 새벽 시간을 아주 좋아해요."

[2] "엘사와 가스파르가 지나간 자리는 늘 깨끗해져요."

[3] "가스파르의 하루에는 매일 사소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있어요."

[4] "가스파르가 가장 기대하는 순간은 바로 이 골목을 지날 때예요. 여기서 늘 노란 우비를 입은 꼬마를 마주치거든요."

[5]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고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수백 명의 손길이 필요해요."

[6] "가스파르에게 가장 소중한 건, 매일 아침 마주치는 작은 순간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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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과학책이라니

<이토록 아름다운 뇌>


래리 W. 스완슨 외 지음

정지인 옮김 | 정재승 감수 [아몬드] (2025)

 




자녀가 그림만 그리거나 낙서만 한다고 자녀를 혼내신 적 없으신가요? 100여년 전 스페인에 오로지 그림만 그리고 싶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이라는 이름의 아이에게는 인간의 몸을 잘 이해하기 위해 정확한 관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아이가 그린 놀라운 그림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 의사의 길, 의사의 사명으로 새롭게 이끌어준 부모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림만 그리던 아이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은 현대 신경학이라는 학문을 사실상 만들어 낸 인물이 되었습니다. 신경 신호 전달의 기본이 되는 단위세포인 뉴런을 처음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인물로 기억되고요. 그의 발견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또 세포 내에서 합성된 단백질을 전달하는 세포 소기관으로 알려진 골지체를 명명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카밀로 골지라는 과학자의 획기적인 세포 염색 기법을 도입하여 평생 아름다운 신경 세포 그림을 3000점 가까이 남겼습니다. 물론 본인은 1만여 장을 그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건, 이 모든 아름다운 그림들이 오로지 당시에 개량되고 있던 현미경과 그의 그림 실력만으로 이루어진 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라몬 이 카할은 꾸준히 연구한 결과 골지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뇌>에서는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아름다운 신경 세포 그림 80여 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던 신경 세포를 우리의 시야에 가져온 인물, 생명체의 신비를 알아가는 데 큰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인 거지요. 개인적으로는 산티아고가 19세기에 막 등장하여 아직은 대중적이진 않았던 사진술에 흥미를 가졌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당시의 사진술은 빛과 렌즈의 광학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현상과 인화에 필요한 화학 지식도 갖추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사진술은 시각 매체에 대한 흥미만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도 필요한 활동이었던 셈이죠. 이 책에는 라몬 이 카할 자신의 모습을 담은 초상 사진이 여러 장 실려 있는데요, 그는 평생 자신의 초상 사진을 일종의 개인적인 프로젝트처럼 찍었다는 사실이 저의 눈길을 끕니다. 시각적인 매체에 상당한 관심과 흥미를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과학자로서 그는 다분히 시각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과학과 예술은 별개의 것인가?’라는 우문에 대한 답이 바로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참에 그가 직접 젊은 과학자들에게 남기는 전언을 모은 <카할의 과학하는 삶>(절판 되긴했으나)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참고로 산티아고는 이름이고 라몬 이 카할이 그의 성입니다. 부모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성인데요, 책 제목에서 이렇게 카할이라는 부분적인 성만을 써서 제목을 쓴 것은 편집자가 모를리는 없을 테고, 편집자 혹은 출판사가 이 점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칭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자신의 성을 일부만 써서 이름을 바꿔 놓고, 대중에게는 틀린 성으로 불리는 일을 좋아할까요?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 생각합니다.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특히나 이건 고정된 활자, 박제된 텍스트의 형태로 오래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차후 이 책이 다시 출간될 경우 수정되었으면 하는 점이 바로 이 제목에 제시된 이름입니다. 아직 그의 이름은 이 분야의 전문가나 전공자들 외에는 널리 알려진 것 같지는 않으니, 앞으로 라몬 이 카할의 책이 좀 더 번역되어 소개되고, 또 이름도 정확히 불러지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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