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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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별성을 잃는다면, 우리는/나는 누구인가?

- 우리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6/2006)

 



매일 아침 육륜(六輪)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18)


 

29세기의 지구를 지배하는 단일제국의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매일 오전 7시에 단일제국 찬가를 합창하며 기상한다. 이들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집에서 살아가는 반면, ‘녹색의 벽너머에는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 이곳은 200년에 걸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전쟁으로 삶의 공간이 파괴된 곳이다. 하지만 단일제국의 하루는 일사분란하다. 마치 여섯 개의 바퀴에 의지한 채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거대한 증기 기관차처럼 말이다. 이들의 취침 시간은 정확히 222분의 1(오후 1030)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의 생활 패턴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군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풍경을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은 디스토피아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당시 36세의 젊은 작가는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0년에 집필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품 전체를 통해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 출간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스탈린 집권 이전에 집필되었기에,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 보다는, 경제 체제의 지배와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독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특히 거대한 생산 라인의 부품처럼 최대의 효율성을 위해 일하도록 길들여진구성원들의 소외와 자유의 박탈 문제를 꽤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자본을 가진 거대 기업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막강해진 지금 시대의 현실과 더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은 녹색의 벽 너머의 인간들처럼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거대한 유리 반구로 경계 지워져 있는 이 곳에서 이름 대신 여자는 알파벳 모음, 남자는 자음 한 자로 시작하는 번호로 불린다. 이를테면, 소설의 화자는 D-503이고, 화자와 맺어진연인은 O-90으로 불리는 식이다. 이 곳의 구성원들은 개인성 자체를 의식하도록 길들여진 듯하다. 획일적이고 평균적인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반면 단일제국을 지배하는 존재는 번호 대신 은혜로운 분으로 불린다. 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된 인간과 달리, 막연하고 불가해한 이름으로 불림으로서 스스로를 구별 짓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생각까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12) 그러므로 각자가 자각하는 자신은 언제나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닌”(8) 상태에 머물 뿐이다.


 

수백 년 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인간들의 고대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처럼 건물들이 불투명하다. 반면 단일제국의 건물들은 모두 투명한유리로 되어 있다. 상상이 되는가? 7시에 기상하여 눈길을 옆으로 돌리면 옆집 사람이 무엇을 하는 지 볼 수 있고, 때론 눈길도 마주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평소에 사생활없이 살아간다. , 사랑을 나눌 때에만 국가에 신고를 하고 이를 증명하는 분홍색 감찰을 얻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때에야 비로소 커튼을 내릴 수 있는 허가가 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사람들은 성생활까지도 국가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나아가 사랑에 있어서 희열(분모)/질투(분자)로 정의되는 행복의 공식에서,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들면 행복을 무한히 증대시킬 수 있다는, 기계적이고 우려스러운 믿음을 신봉한다. 이때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드는 방법으로서 국가는 모든 파트너의 자유로운 공유를 제도화한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소설 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제도가 보다 구체적이고 파격적으로 설정되어 이어지는 모습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람과 깊이 맺는 인간적인 관계가 오히려 의심스럽고 불순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인 D-503은 단일제국의 수학자이면서, 건조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조선 담당 기사이다. 학창 시절 친구이자 시인이기도 한 흑인 R-13은 여인 O-90와도 파트너다. 곧 이 세 사람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인간들과는 달리 이 세 명 사이에는 서로에게 질투를 품지는 않는다. 화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관계를 완벽한 삼각형이라고 만족하기까지 한다. 이들 각자는 단일제국의 업무를 분담하는 개미혹은 거대한 기계의 규격 부품과 같은 의무를 다하고자 할뿐이다.


 

단일제국의 철학은 테일러 주의(Tayorism)와 포드주의(Fordism)이라는 표현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메커니즘의 아름다움이란 진자와 같이 정확하고 불변하는 리듬에 있다. 그러나 사실 어려서부터 테일러 시스템에 의해 길러진 당신들은 진자처럼 정확하게 되지 않았는가? (...) 메커니즘에는 환각증이 없다.”(175) 단일제국에 스며들어 있는 공기에서는 미래와 이성에 대한 낙관을, 오차 없는 기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감지할 수 있다. 생산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그러니까 각각의 번호들)은 밤에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기에, 밤에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은 심지어 범죄가 된다. 이 단일제국의 번호들에게는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의무는 인간다운 생활과 행복 추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생산 목표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개인의 개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와 달리 영혼이 내면에 형성된 번호들,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여겨지는 꿈을 꾼 이들’, 제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들환각증을 가진 사람들로 진단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단일제국은 이들에 대한 처리방법을 알고 있다. 환각증을 가진 사람들은 소위 위대한 수술을 받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수술이란, 간단하다. 엑스레이로 대뇌 하부의 뇌신경 마디를 3회에 걸쳐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수술 받은 번호들은 결국 화자처럼,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가진 본래의D-503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단일제국의 번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체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데 머문다. 어쩌면 화자가 건조에 참여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이름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명칭은 영어의 인티그럴(integral)에 해당할 텐데, 이 용어야말로 전체의 일부로서 필요불가결한’, ‘완전한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분수(fraction)에 대항하는 정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인티그럴총체라는 의미나 적분, 혹은 적분 기호로의 의미도 함의한다는 점에서 우주선 인쩨그랄의 명칭 하나에도 소설 전반이나 화자와 관계된 다의적인 상징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다양한 상징성을 구현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수 있는 특징은, 화자 D-503의 의식 변화다. 그는 동질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 점점 더 혼자됨을 자각해간다. ‘나는 혼자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꽤 많이 반복된다. 그리고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있다면.”(69)이라고 말할 정도로 화자의 내면은 자아분열에 가까운 균열과 정처 없음을 경험한다. 결국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의식은 질병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고유한 개인으로 드러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사회의 관습이라는 것이 그렇듯, 관습의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일제국의 의사는 화자의 내부에 영혼이 형성된 것이 틀림없으며, 자연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린다. 따라서 이 환각증을 제거하려면 수술을 받는 길밖에 없다는 처방을 내린다. 이 수술은 앞에서 언급한 신경 마디를 태우는 수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진단에도 화자 D-503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의식하고 결국 나는 단독체”(153)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


 

화자가 스스로를 단독체로 자각하는 분열과 고뇌의 양상은 화자가 여성 I-110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I는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존중을 받는 인물이지만, 벽 너머 인간들의 장소인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금지된 술과 담배를 하며 화자를 유혹한다. 물론 화자를 유혹한 주된 이유는 화자가 참여하는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고자 하는 혁명 활동의 포섭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I는 혁명 세력의 일원이었다.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여 단일제국의 우주 진출을 막으려는 계획에 참여해왔던 것이다.

 


소설에서 예기치 못한 반전을 꼽는다면, I가 참여하는 혁명 활동이 다이나믹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흐지부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I에 단단히 빠져 있던 화자는 혁명 활동에 참여하는 듯 했지만, ‘인쩨그랄탈취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며, 결국 어처구니없이 실패하고 만다. 급기야 화자 D-503은 국가로부터 수술까지 받아 마치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화자는 단일제국의 충실한 개인이 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내게는 극적인 반전도, 기대도 개의치 않는 듯한 반전이었지만 결국은 디스토피아적인 마무리다. 마치 녹색의 벽너머 인간의 세계로 넘어갈 것만 같았던 화자가 다시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은혜로운 분의 영향력 아래 복귀하는 설정. 내겐 오히려 상투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현실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지만, 현실에서 패배하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어쩌면 오히려 더 실감나는 정서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 자먀찐은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전체주의적 사회 속 개인의 문제를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나 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강요하는 공동체에서 오히려 극도로 소외된 인간 존재에 대해 고찰했다. 5월의, 제국 상공의 푸른 하늘과 녹색의 벽’, 그리고 노란 꽃가루가 넘어오는 인간들의 사회, 불투명한 고대관의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렸던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초기 작품을 떠올렸다. 특히 키리코의 그림 이탈리아 광장’(1913)처럼 고독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혹은 그의 그림 가운데 마찬가지로 인기척 없는 광장 풍경을 담은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묘사처럼, ‘마졸리카 도자기를 닮은 파란 하늘 아래 누런 흙바닥이 있는 광장,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원형의 성이 있는 풍경처럼 말이다. 그리고 늦은 오후인 듯 길게 들어진 동상의 그림자. 그림의 광장은 소설에서 불투명한 건물이 늘어서 있는 고대관의 모습을 닮은 듯했다. 인기척뿐만 아니라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왠지 모르게 황량하고 고독해 보이는 세계,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이 팽배한 그림이 소설의 분위기와도 꽤나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비밀 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는 작품 속의 사회에서 개인은 균일한 부품으로, 전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투명한 다이아몬드처럼 말이다. 반면 녹색의 벽너머의 인간 거주 구역에서 모든 건물은 불투명하다. 이들의 존재 조건은 불투명한 흑연을 닮아 있다. 하지만 이로써 각자에게는 사생활이란 것이 생겨나고, 이로부터 사람들은 혼자됨의 시간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일단 개인성을 자각하게 되면, 그는 단독체로서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테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혼자됨을 자각하는 인물이었다.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존재이자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이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 그리고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들이 비록 실수하고 실패하며 방황을 수반하더라도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자에 보다 더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존재의 불투명성은 타자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보다 겸손하게 하고, 타자를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극단적이고 경직된 도덕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이 숨 쉴 여지를 남겨 놓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개인성의 발현, 소외와 고립, 그리고 자유의 문제를 견주어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1]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니다."(8) - P8

[2] "‘녹색의 벽’ 너머, 보이지 않는 황량한 평원에서 달콤한 황색의 꽃가루가 바람에 실려 온다."(9) - P9

[3] "우리는 심지어 생각까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12) - P12

[4] "매일 아침 육륜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18) - P18

[5] "국가(인류)는 한 개인의 살인은 금지했으되, 수백만을 절반 정도 죽이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 즉 인간 생명의 합산을 50년 축소시키는 것은 범죄이지만 인간 생명의 합산을 5천만 년 축소시키는 것은 범죄가 아니었다는 얘기다."(19) - P19

[6] "다시 말해서 사랑이 조직화되고 수학화된 것이다. (...) 모든 번호에게는 다른 어떤 번호라도 성적 산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26) - P26

[7] "지고의 희열과 질투란 행복이라 불리는 분수의 분자와 분모라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겠는가."(26) - P26

[8] "이 모든 일은 무엇 때문인가? 어째서 나는 여기 있는가?"(34) - P34

[9] "독창적이란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따라서 독창적임은 평등을 깨뜨리는 거죠..."(35) - P35

[10] "우리는 꿈이란 심각한 정신질환임을 안다. (...) 그들(고대인)의 생이란느 것은 전체가 그토록 끔찍한 회전목마가 아니었던가."(38) - P38

[11] "나는 저 거대하고 강력한 단일체의 한 부분으로서 나 자신을 인식한다. 그토록 정확한 아름다움이 또 있을까."(38) - P38

[12] "당신도 아시다시피 당신은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43)

"밤에, 번호들은 반드시 자야 한다. 그것은 의무다. 낮에 일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낮에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야 한다. 밤에 자지 않는 것은, 범죄다..."(63) - P63

[13] D-503: "나는 (...)앞으로도 지식을 위해 봉사할 걸세."
R-13: "자네의 그 지식이란 것이야말로 비겁함일세. (...) 그러나 벽 너머로 시선 던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어."(46) - P46

[14] "그래, 수학자 선생.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평균적인, 산술적인 존재들이지..."(49) - P49

[15] "아름다운 것은 오로지 이성적이고 유익한 것들이다."(54) - P54

[16] "창백한 유리 하늘, 녹색 빛이 도는 부동의 밤. 그러나 그 고요하고 서늘한 유리 밑에서 소리 없이 맹렬한 털북숭이의 무언가가, 적자색의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62) - P62

[17] "털북숭이의 야만적인 제2의 나. (...) 나는 혼자 남았다."(68)

"나는 혼자다. (...) 저 높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있다면."(69) - P69

[18] "그대는 안개가 자신보다 강력하기에 두려워해요. 그리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증오하지요. 또 정복할 수 없기에 사랑하지요. 사실상 우리는 정복할 수 없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죠."(76) - P76

[19] "사실 나는 우리의 이성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유해한 고대의 세계에... 의 세계에 살고 있다."(81) - P81

[20] "인간화한 기계와 기계화한 인간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86) - P86

[21] "그러나 나는 혼자였다. 난 파도에 떠밀려 무인도로 내팽개쳐진 인간이었다. 나는 찾고 있었다. 청회색의 파도 속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90) - P90

[22] "인간은 최초로 벽을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야생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우리가 녹색의 벽을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야만인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가 녹색의 벽으로 우리의 기계적이고 완벽한 세계를 나무, 새, 짐승 등의 비이성적인 흉측한 세계로부터 격리하게 되었을 때."(95) - P95

[23]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라는 이름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의 문법에 의문부호가 절대로 없으며 있는 것은 다만 감탄부호, 쉼표, 그리고 마침표일 때에 한해서다."(118) - P118

[24] "나는 유쾌하고 건강하게 결박당한 느낌이었다."(121) - P121

[25] "우리는 늘 아시리아의 기념비에 그려진 투사들처럼 걷고 있었다. 천 개의 머리. 그러나 팔과 다리는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흔들렸다."(124) - P124

[26] "그만해요, 그만./ 그녀는 이미 더 이상 번호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인간이었다. 그녀는 다만 단일제국에 가해진 모욕적인 형이상학적 실체에 불과했다."(125) - P125

[27] "나는 나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스스로를 느낀다는 것, 스스로의 개인성을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먼지가 들어간 눈, 종기가 난 손가락, 충치를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한 눈, 손가락, 이빨은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므로. 그렇다면 개인적인 의식이란 단지 질병임이 확실하지 않은가."(127) - P127

[28] "모든 것이 특별하고 서럽고 부드럽고 장밋빛이고 축축했다."(128) - P128

[29] "(고대인들은) 어째서 그 모든 비밀이 필요했을까. (...( 우리에겐 숨길 것도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135) - P135

[30] "나는 끝없는 복도에 혼자 서 있다. 그때의 그 복도 말이다. 말 없는 콘크리트 하늘."(149) - P149

[31] "나는 나였다. 개별적인 존재, 세계, 나는 여느 때처럼 구성 분자가 아니었다. 나는 단독체였다."(153) - P153

[32] "그들의 몸은 털로 뒤덮이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대신 털 아래에 따뜻한 붉은 피를 보존했어요. 당신의 경우는 훨씬 나빠요. 당신은 숫자로 뒤덮여 있으니까요. 숫자가 마치 이처럼 당신 위를 기어 다니고 있어요. (...) 공포와 기쁨, 불같은 노여움, 추위 때문에 전율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160) - P160

[33] "다양성만이, 체온의 다양성, 열량의 대비만이 생명을 구성한다는 걸요. 만일 우주 도처에 동일하게 차갑거나 동일하게 뜨거운 것만이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야만 해요. 불과 폭발과 지옥을 위해서죠."(171) - P171

[34] "‘국가 과학’의 최신 발견에 따르면 환각증의 중심은 대뇌 하부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뇌신경 마디라는 것이다. 엑스레이로 그 마디를 3회에 걸쳐 태우면 당신들의 환각증을 치유할 수 있다."(175) - P175

[35] "그러나 내게는 구원이란 게 없었다. 나는 구원을 원치 않았다..."(182) - P182

[36]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너무도 뜻밖이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안에 팽팽하게 조여 있던 용수철이 곧 망가져 버렸다. (...) 나는 그때 개인적 경험을 통해 웃음이 가장 무서운 무기임을 알게 되었다. 웃음으로 모든 걸 죽일 수 있다. 살인까지도 할 수 있다."(206) - P206

[37] "어호, 우린 행동을 개시했어요!/ 우리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215) - P215

[38] "이전에 나는 웃음에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웃음이란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의 먼 메아리일 뿐이다."(216) - P216

[39] "나는 미소 짓는다.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내 머리에서 무슨 가시 같은 걸 뽑아냈으므로 머릿속은 가볍고 텅 비어 있다."(227) - P227

[40] "우리는 40번가의 횡단로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임시 벽을 건축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우리가 승리하길 희망한다. 아니, 그보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이성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228)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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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위험한 생각
대니얼 C. 데닛 지음, 신광복 옮김 / 바다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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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받았습니다! 데닛의 세계에 조금씩 다가가는 중! 말로만 들었던 유명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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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지능 -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일곱 가지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 까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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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함께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들

-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까치] (2023)

 




현대 사회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매일 피부로 느낀다. 얼리 어답터가 아닌 나로서는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가는 일이 이따금씩 일어나는 행사가 아니라 일상이 된 느낌이다. 하지만 깊은 산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기술의 발전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AI라는 화두가 있다. 최근에 등장한 주제는 아니지만, 지난 몇 년 사이 그 변화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테다. 더 이상 뒤처지지 않으려고 해도 빠르게 다가오는 시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교육자, 작가인 주나이드 무빈의 수학 지능AI시대의 핵심 분야인 수학을 중심에 놓고, 이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지 말한다. 수학자는 AI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나아가 우리가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힌트를 준다. 무엇보다 미지의 대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가 생겨난다면 우리는 두렵지 않게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2024년 노벨 과학상 수상자의 연구 분야를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리학상과 화학상 분야에서 모두 AI관련 기술이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된 점이 눈에 띈다. 이 분야는 이미 수십 년 이상 활용되어 왔지만, 작년의 노벨 과학상 발표 소식은 AI관련 기술이 이제는 첨단 연구에서도 중요한 도구이자 파트너로 활용되고 있음을 대중에게도 알린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 조짐은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고와 세계 정상급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이 사건은 세계에 던진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사회는 새로운 발명이나 기술과 같은 변화의 조짐에 동요한 바 있다. 이 변화에 먼저 참여한 소수의 사람들과 달리,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저항하기도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오히려 이런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 수학 지능의 저자 주나이드 무빈은 급격한 변화에 나처럼 당황할 것 같은 독자를 위해, 우선 수학자의 관점에서 기계(AI)와 인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기계는 (아직) 하지 못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이미 알려져 있지만 제한적인 지식으로부터 새로운 통찰을 알아내는 인간의 추정 능력, 이 지식을 압축하고 효과적으로 체계화하는 표상 능력, 파악된 대상들 혹은 지식들 사이의 연관성과 의미를 찾아내는 추론 능력, 주어진 규칙을 벗어나 새로운 창의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상력, 그리고 질문하는 지적 호기심을 언급한다. 이러한 지능들은 아직 AI가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만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이 다섯 가지 지적 능력을 특별히수학적 지능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기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수학 지능의 장점을 언급하며, 관심사인 교육에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인간이 이런 역량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 듯하다. 왜냐하면 극도로 고도화되고 복잡한 인간 사회를 특출한 개인 혼자 이끌어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기에, 저자는 여기에 조율협동의 역량을 추가한다. 특히 이 두 가지 특질은 AI가 스스로 구현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기술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해도 AI에게만 맡길 수도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보다 AI에게 아직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신체를 매개로 생겨난 생명 현상이라는 데 주목한다. 신체를 지닌 존재로부터 생겨난 마음을 달리 표현하면 주체성이라 볼 수 있겠다. 저자는 수학적 지능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 생가하고 능동적으로 다양한 발견의 단계를 탐색할 수 있는 자유, 즉 주체성이다”(326)라고 말한다. 주체성이 결여된 AI에게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킨다한들, 결국 인간의 개입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 나아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결말을 기대할 수도 없다. AI기술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바로 이런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조율협동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현재 지구에는 기후 문제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80억 명이 넘는 인구가 집단 지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메타 인지이기도 하다. 끝없이 달려가기만 하는 세계를 잠시 돌아보고 멈추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고 수정할 수 있는 지연의 윤리가 깃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조율의 역량이라 이해한다.


여기에 집단 지성이 발휘되는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생겨날 수 있다. 소수의 지도자나 선두를 맹목적으로 따를 때 집단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우리에게 지연의 윤리에 더하여, 집단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위기에 대응하고 극복하기 위해 인지적 다양성이 높은 집단 지성의 힘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느라 홀로 7년 간 칩거한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도 있지만 현대에서는 아주 드문 사례다. 오히려 방대한 협업을 통해 수많은 논문을 펴낸 헝가리 수학자 폴 에르되시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다만 독자로서 내심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이토록 극도로 분열되고 원자화된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협동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이 문제는 현대 사회가 직면해 있는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저자는 AI가 도달하지 못한 역량, 곧 수학 활동을 하면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을 언급한다. AI가 아무리 영리해져도스스로 한 작업에 대해 감탄하고 만족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만족감의 의미가 공동체적이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수학의 진정한 만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그러한 배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에서 나온다.”(308) 이는 앞서 언급한 집단 지성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할 테다. 그는 책 전반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차이점에 주목하지만, 우리가 단순한 기술 혐오에 빠지거나 기술에 압도되어서도 안 된다고 여긴다. 그는 우리의 자리를 확인하고자 오래 고민해왔을 터이다. 현재의 인류는 AI를 비롯한 기계에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인간의 핵심적인 협업 파트너로서, 그리고 지적 안내자로서 AI를 대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수학 지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1] "컴퓨터는 세상에 대한 모델을 구축하거나 그 해답이 타당한지 판단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역할은 각 모델의 토대가 되는 전제, 모델에 투입되는 특정 입력값의 신뢰성, 출력물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76) - P76

[2] "우리 뇌는 철학자 존 로크가 말한, 주변 환경에 의해서 그 내용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서판(Tabula rasa)’이 아니다."(105) - P105

[3] "사고와 기억은 자연적 처리 환경의 일부로서 신경세포의 연결망 전체에 분산되어 있다."(113) - P113

[4] "수학은 놀랄 만큼 압축적이다. (...) 이러한 압축에 따르는 통찰력이야말로 수학의 진정한 기쁨 중 하나이다."(118, 필즈 메달 수상자 윌리엄 서스턴의 말) - P118

[5] "돌더미를 쌓는다고 집이 되지 않듯이 사실을 축적한다고 과학이 되지는 않는다."(120,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말) - P120

[6] "모든 수학자는 가장 생생하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이다."(128) - P128

[7] "인간 지능을 일반화하여 말하면, 단일한 기본 지식 체계 내에서 표상들 사이를 전환하고 여러 관점을 융화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129) - P129

[8] "데카르트는 개념과 감수성이 완전히 다른 수학의 두 분야인 대수학과 기하학 사이에 심적 다리를 놓은 인물로 간주된다."(132) - P132

[9] "수학적 증명은 우리 모두를 영원한 회의론자로 만든다."(159) - P159

[10] "인간 추론의 결함이 진화의 필연이라면 우리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스며든 불완전한 논증에 수학적 증명의 무오류성으로 대항할 수 있다. 또한 패턴에 굶주린 알고리즘에서 오류를 포착하도록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다."(160) - P160

[11] "수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다양한 표상을 활용하는 등 증명에 관한 한 다원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163) - P163

[12] "기계는 날것 그대로의 사실을 움켜쥐지만 사실의 정수는 언제나 기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175, 앙리 푸앵카레의 말) - P175

[13] "자연은 우리에게 정확한 수를 오직 한줌만 알도록 허용했다. 4를 넘는 그 외의 모든 정수는 우리가 발명한 것이다."(192) - P192

[14] "괴델은 기초 산술을 포함하는 어떠한 계도 이와 같이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즉 언제나 증명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 진술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무모순적이면서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207) - P207

[15]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복제하려면 특정 규칙이나 행동 모음에 구속되지 않는, 즉 모순을 즐길 수 있는 기계를 설계해야 한다."(210) - P210

[16] "(질문은) 지성의 엔진, 즉 호기심을 통제된 탐구로 전환하는 두뇌 기계다."(225, 역사학자 데이비드 해컷 피셔의 말) - P225

[17] "컴퓨터의 역할은 해답을 찾는 데 그칠 뿐, 어떤 질문이 가장 흥미로운지, 어떤 질문은 인간만이 풀 수 있는지, 어떤 질문은 더 확장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컴퓨터는 우리의 탐험을 돕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여정을 계획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이다."(241) - P241

[18] "우리가 기계에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기계의 핵심 능력에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또한 특정 수준의 계산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258) - P258

[19] "수학에 가장 심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인 경우가 많다."
(263, 필즈상 수상 수학자 티머시 가워스) - P263

[20] "수학은 기존의 아이디어와 새 아이디어에 생명을 불어넣어 이해의 폭을 확장하는 수학자들의 살아 있는 커뮤니티에서만 존재한다. 수학의 진정한 만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그러한 배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에서 나온다."(308, 수학자 윌리엄 서스턴의 말) - P308

[21] "문제 해결 동기는 그 자체로 경험의 공유에서 창발된 현상이다."(318) - P308

[22] "기계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목표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하다."(319) - P319

[23] "수학적 지능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다양한 발견의 단계를 탐색할 수 있는 자유, 즉 주체성이다."(326) - P326

[24] "수학 지능은 우리의 인지적 동맹, 즉 기계가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우리와 협업하도록 이끌기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다."(329)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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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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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하고 경직된 질서의 세계에서 연대의 세계로
<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 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황금가지] (2025)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외딴섬 야샥툰에는 외부 세계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한 인간이 창조해낸‘동물 인간’들이었다. 이 동물 인간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멕시코로 건너온 전직 외과의사 모로 박사가 창조한 생명체들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만큼 견고한 남성적 세계의 부산물이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이 남자는 SF의 대가 H.G. 웰스가 《모로 박사의 섬》이라는 작품에서 창조한 인물이다. 웰스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던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로부터 생물학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웰스의 원작이 19세기 말에 나왔기에 진화론의 자장 안에서 집필된 소설인 것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모로 박사의 딸》은 웰스의 원작 《모로 박사의 섬》을 토대로 후대의 작가가 다른 시선에서 쓴 작품이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와 연구소의 관리인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젊은 남자의 시선이 번갈아가며 교차하고 있다. 마치 두 사람 각각의 우주가 서로 교차하며 ‘실재’라고 하는 새로운 직조물을 만들어가는 현장에 함께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후인 1871년과 1877년에 맞추어져 있다. 공간적 배경도 웰스의 원작과 달리 멕시코의 한 장소인데, 멕시코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유카탄 반도는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이 충돌하여 공룡(파충류) 대멸종을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지구적 사건의 ‘그라운드제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 같은 저택을 떠올려보라. 조만간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은가.

 
소설은 야샥툰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에르난도 리잘데와 젊은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29살의 청년이 섬에 찾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몽고메리는 야샥툰에서 모로 박사의 저택을 관리하는 책임자(마요르도모)로 오게 된 것인데, 실상은 리잘데에게 술과 도박으로 큰 빚을 지고 벶을 갚기 위해 온 것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외딴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서 프랑스인인 모로 박사와 영국인 몽고메리의 이질적인 조합부터가 심상치 않다. 몽고메리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15세에 출가하여 배를 타며 자신의 삶을 추스르던 기계공이기도 했다. 서로 맞지 않는 결혼을 한 까닭에 아내와 별거중인 상태로 정처 없이 방황하던 중이었다. 점점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아내는 남편의 무능력을 깨닫고 몰래 달아났기 때문이다.

 
모로 박사의 저택 거실에는 유독 시선을 끄는 물건 하나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제 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외딴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밀기계다. 야샥툰의 어디에도 이 기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연루되어 있을 법하지 않다. 시계는 오로지 이 고립된 문명 세계의 파편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소설에서 정밀시계의 이미지는 소설 전반을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새로 온 몽고메리에게 ‘natura non facit saltus(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알려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시계는 이 장면과 연결되는 듯하다. 시간을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이라 말할 수 있다. 곧 정밀 시계는 인위적이고 공고한 질서를 상징하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시간적 배경인 1871년, 그리고 멕시코 지역의 집단 농장과 같은 환경을 고려하면 제국주의의 견고한 유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한편 몽고메리의 하나뿐인 누나 엘리자베스는 로턴이 결혼한 후 자신의 불행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엘리자베스는 ‘살해당했다’는 표현이 보인다. 당대 여성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여성들은 판자에 꼼작 못 하게 핀으로 고정시킨 나비 같은 신세였다.”(44)라는 작가의 시선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모로 박사의 거실에 있는 시계는 구시대, 가부장적 질서 위에 구축되어 있는 견고한 세계, 제국주의 시대의 불문율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다. 그리고 모로 박사는 바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바라보고 대하는 부분에서, 모로 박사는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규칙을 강요하여 왕국을 통제하려는 예언자이자 신의 지위에 있다. 그가 창조한 동물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는 합리와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셈이다. 반면 모로 박사의 저택에서 오래 일해 온 가정부 라모나는 모로 박사의 시선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를 비롯하여 다른 동물 인간들을 애정으로 돌본다. 자연의 모든 존재를 애니미즘적인 관점,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사물에도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는 신적 질서를 믿는 마음이 있다. 물론 모로 박사의 ‘신’과 라모나의 ‘신’이 같은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녀의 보살핌 때문이었는지,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정글에 있는 돌과 꽃과 짐승 하나하나에 모두 신이 실재한다는 사실”(485)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소설의 배경은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에빛을 본 이후의 1871년이다. 모로 박사가 다윈의 ‘범생설’에 입각하여 생명의 시작이 ‘제뮬’이라는 입자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 것은, 아직 유전체의 존재가 발견되기 전이니 일견 합리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모로 박사는 “우리 눈에는 볼 수 없지만 제뮬은 거기 존재한다네.”(47)라는 신념을 거듭 밝힌다. ‘자연에 도약이란 없다’라는 인식이 역사적·문화적 불문율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사는 여러 동물의 제뮬을 섞어 동물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는 당대의 믿음을 깨고‘자연의 도약’을 손수 만들어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애초에 ‘동물 인간’을 만든 이유는, 고용주의 이익을(임금 줄이기) 위해서였으므로, 기존의 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에 활약(?)했던 값싼 노동력(이를테면 흑인들)을 대체할만한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모로 박사는 동물의 ‘제뮬’을 이용한 생명공학적 방법으로 접근한 것일 뿐이다.


거실의 정밀 시계는 절대적인 시간•공간의 세계처럼 마치 불변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힌다. 하지만 모로 박사가 구축한 왕국은 리잘데의 아들 에두아르도와 사촌 이시드로의 방문 이후 조금씩 금이가는 모양새다. 리잘데의 아들이 카를로타에게 반하기 때문. 일주일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본격적으로 ‘동물 인간’의 존재를 마주하게 된 에두아르도 일행은 카를로타에게 프로포즈하는 에두아르도와 카를로티의 승낙, 그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리잘데의 개입으로 야샥툰 세계의 운명은 급격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섬과 ‘동물 인간’을 소유하고자 하는 리잘데와, 카를로타와 결혼하고 자신의 독립을 바라는 에두아르도, 이를 시기하면서도 보수적인 종교인의 시선을 드러내며 결혼을 막고 ‘동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네는 이시드로의 충동이 야샥툰의 몰락을 견인하고 있다.


소설의 구체적인 결말을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인물들이 충돌의 과정에서 모로 박사의 거실에서 변함없이 작동하던 정밀 시계가 몽고메리와 에두아르도가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파괴되기에 이른다. 리잘데의 그릇된 욕망과 그에 장단을 응하며 자연의 질서를 거스른 모로 박사의 세계는 이로써 몰락을 맞는다. 이 소설에서는 어느 독자도 프랑스제 정밀시계의 상징성을 주목하게 될 듯하다. 결국 야샥툰에 구축된 모로 박사의 세계와 질서는 파괴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동물 인간 두 명과 리잘데 가문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선고했다. 그러면 작가는 소설 속 세계의 몰락을 통해 어떤 결말을 원했을까? 몽고메리와 카를로타의 결합이 아닌, 우정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동물 인간인 루페와 카치토와 카를로타와 더 단단한 우정의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몽고메리 로턴의 말 중에서 다음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지구상에 완벽한 장소는 없어. 어디를 가든 나는 인간의 잔인함과 과도함을 봤어. 그게 바로 내가 야샥툰에 와서 여기 머물게 된 이유야. 야샥툰은 적어도 행복과 비슷한 뭔가를 줬거든. 나는 야샥툰에서 괴물을 본 적은 없어.”(396) 이 대목을 보면 인간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잘 지내지 못했던 몽고메리가 오히려 외양이 ‘이상한’ 동물 인간과 함께 지낼 때 안식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는 오히려 ’괴물‘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함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듯하다.


에필로그에 이르면, 카를로타와 루페가 사건을 ‘처리’하고 유산을 상속받으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다. 보통 서사의 구조 같으면 몽고메리와 카를로타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를 통해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몽고메리가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카를로타의 동생뻘인 동물 인간 ‘루페’와는 결속력이 강해짐을 느끼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찾게 된 듯하다. 웰스의 원작리 신적 질서에 도전한 인간의 경솔함과 무모함을 경고했다면, 작가 실비아의 작품은 분명히 희망적이다. 인간-비인간의 돌봄과 우정의가치와 중요성,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를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쓴 시도는 분명 독자의 판단을 유보하게 하고 다면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독자에게는 서사의 윤리성을 함께 생각하게 해주는 독서 경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로박사의딸 #실비아모레노가르시아 #김은서번역가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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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가블레르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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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양식의 선구적인 탐구 작업

<헤다 가블레르 Hedda Gabler>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지만지드라마] (2019)




 

희곡이라는 장르는 조금씩 알아갈수록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희곡을 읽어보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고, 특정 작품을 따로 찾아 읽으려고 하던 장르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되면 읽어보려 했다. 헨리크 입센은 국내에서 특히 <인형의 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그의 다른 작품을 주목하여 따로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큰 관심이 없을 때 읽어서 그런지 스토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극중 인물인헤다 가블레르는 장군의 딸(귀족/상류층)이다. 그녀는 29살이고, 공부에 뜻을 둔 중산층 출신의 30대 초반의 샌님과 결혼하여 이제 6개월의 기나긴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사랑은 흔히 길어야 2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헤다가 애초에 사랑 없이 선택한 결혼은 사회적 굴레에 갇힌, 동시에 상류층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여성의 권태와 불만, 그리고 이 굴레 너머의 삶을 갈망하나 이로부터 유발되는 불안을 조명한다.

 


입센이 창조한 헤다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 볼 수 있다.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생에 대한 의지를 갖는 모든 유기체의 존재 양식일 텐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결혼을 통해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 삶은 그녀의 일상을 더욱 힘들게 했을 법하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태양의 잉여 에너지로 비롯되었다. 무질서함을 향해가는 물질세계에서 그 질서를 역행하는 아주 특별한 우주의 파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언가를욕망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숙명을 고려할 때,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헤다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다만 그녀는 무언가를 언제나 갈망하나, 그 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듯하다. 욕망의 실체 없음이 헤다에게는 가장 큰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모습에 대해 헤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인간, 모든 존재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곧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질문의 방식을 다르게 시도해야 할 듯하다. 헤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대의 여성에게 사회가 제약하는/가두어 놓은 현실에는 책임이 없는가? 어쩌면 우리는 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 주목하고, 그 이유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단순히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넘어서, 이 맥락과 결부된 인간의 조건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그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적 관습일수도 있고, 보다 폭넓게는 이분법적인, 양성적 사고에서 비롯된 공동체의 공고한 규범들일 수도 있겠다. 현재 지구에 80억 명의 인구가 있다면, 80억만큼의 다양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다. 각자 어떠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든, 그저 나름의 존재 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학적/존재론적 다양성을 지닌 존재를 이분법적인 사회 제도에 욱여넣는 일에는 저항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고유함은 수많은 스펙트럼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당당한 존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고유한 존재로서의 헤다는, 당대 사회에서 기대되는 여성상의 틀에 맞지 않는 인물일 뿐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기대/기준을 벗어나는 경우, 사회/공동체는 개개인에게불안을 심어준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인 셈인데, 의도된 불안이야말로 (남성적)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은밀히 활용되어 온 유지 전략이자, 체스판 위의 규칙이 아닐까.

 


따라서 헤다의 자살은자신의 미학적 기준에 의하면, 관자놀이에 정확히 총구를 겨누는 일이런 의미에서 충격적이다. 역자는 자살에 대한 헤다의미학적인 기준을 언급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헤다가 추구한 자살 방식이 하나의 의식(ritual)으로 해석해 보았다. 방아쇠를 당겨 맞는 미학적인 죽음, 그리고 옛 연인의 귀중한 원고를 불에 태워 소멸시키는 행위가 일종의 정화의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논리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헤다의 행위에는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투명성이 부족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가 의식/의례라고 부르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 부합한다고 느꼈다.


 

헤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출구를 찾고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번번이불안이 유발하는두려움때문에 다시 굴레 안으로 되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옛 연인과의 결합을 바라면서도, 타인의 시선,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하나의 기호이자 메시지이기도 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을 때, 그녀는 세상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헤다의 자살은 예수가 사랑이 부재한 공동체에 가져온 평화가 아니라 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건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조건/사회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동을 단순히 미화하거나, ‘남성의 문제라고만 단정짓기 전에, 이 문제는 공동체 전체, 모두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듯하다. 고질적인 이분법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입센이 생의 말년, 작가로서 완숙한 시기에 쓴 희곡 <헤다 가블레르>에서 제시하는 인물은 지극히 입체적이고 현대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듯하다. ‘남자가 여성의 심리를 이렇게나 탐구하여 묘사해 놓은 것이 놀랍다고 말이다. 절반은 동의하지만, 이것 역시 남자라는 존재를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욱여넣는오류가 아닐까. 입센이 헤다를 비롯하여,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처럼, 작품에서 주목하고 그려낸 여성들은, 그가 자기 안의 여성성, 혹은 자기 안의다양성을 발견하고 탐구해 온 발자국을 보여주는 듯하다. 발자국의 주인이 어떤 보폭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결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이해에도 본질적인 불확정성은 존재하는 셈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비로소 타자를 향하는 시선을 좀 더 소박한 마음으로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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