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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평점 :
공고하고 경직된 질서의 세계에서 연대의 세계로
<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 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황금가지] (2025)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외딴섬 야샥툰에는 외부 세계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한 인간이 창조해낸‘동물 인간’들이었다. 이 동물 인간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멕시코로 건너온 전직 외과의사 모로 박사가 창조한 생명체들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만큼 견고한 남성적 세계의 부산물이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이 남자는 SF의 대가 H.G. 웰스가 《모로 박사의 섬》이라는 작품에서 창조한 인물이다. 웰스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던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로부터 생물학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웰스의 원작이 19세기 말에 나왔기에 진화론의 자장 안에서 집필된 소설인 것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모로 박사의 딸》은 웰스의 원작 《모로 박사의 섬》을 토대로 후대의 작가가 다른 시선에서 쓴 작품이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와 연구소의 관리인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젊은 남자의 시선이 번갈아가며 교차하고 있다. 마치 두 사람 각각의 우주가 서로 교차하며 ‘실재’라고 하는 새로운 직조물을 만들어가는 현장에 함께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후인 1871년과 1877년에 맞추어져 있다. 공간적 배경도 웰스의 원작과 달리 멕시코의 한 장소인데, 멕시코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유카탄 반도는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이 충돌하여 공룡(파충류) 대멸종을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지구적 사건의 ‘그라운드제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 같은 저택을 떠올려보라. 조만간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은가.
소설은 야샥툰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에르난도 리잘데와 젊은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29살의 청년이 섬에 찾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몽고메리는 야샥툰에서 모로 박사의 저택을 관리하는 책임자(마요르도모)로 오게 된 것인데, 실상은 리잘데에게 술과 도박으로 큰 빚을 지고 벶을 갚기 위해 온 것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외딴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서 프랑스인인 모로 박사와 영국인 몽고메리의 이질적인 조합부터가 심상치 않다. 몽고메리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15세에 출가하여 배를 타며 자신의 삶을 추스르던 기계공이기도 했다. 서로 맞지 않는 결혼을 한 까닭에 아내와 별거중인 상태로 정처 없이 방황하던 중이었다. 점점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아내는 남편의 무능력을 깨닫고 몰래 달아났기 때문이다.
모로 박사의 저택 거실에는 유독 시선을 끄는 물건 하나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제 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외딴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밀기계다. 야샥툰의 어디에도 이 기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연루되어 있을 법하지 않다. 시계는 오로지 이 고립된 문명 세계의 파편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소설에서 정밀시계의 이미지는 소설 전반을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새로 온 몽고메리에게 ‘natura non facit saltus(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알려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시계는 이 장면과 연결되는 듯하다. 시간을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이라 말할 수 있다. 곧 정밀 시계는 인위적이고 공고한 질서를 상징하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시간적 배경인 1871년, 그리고 멕시코 지역의 집단 농장과 같은 환경을 고려하면 제국주의의 견고한 유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한편 몽고메리의 하나뿐인 누나 엘리자베스는 로턴이 결혼한 후 자신의 불행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엘리자베스는 ‘살해당했다’는 표현이 보인다. 당대 여성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여성들은 판자에 꼼작 못 하게 핀으로 고정시킨 나비 같은 신세였다.”(44)라는 작가의 시선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모로 박사의 거실에 있는 시계는 구시대, 가부장적 질서 위에 구축되어 있는 견고한 세계, 제국주의 시대의 불문율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다. 그리고 모로 박사는 바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바라보고 대하는 부분에서, 모로 박사는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규칙을 강요하여 왕국을 통제하려는 예언자이자 신의 지위에 있다. 그가 창조한 동물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는 합리와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셈이다. 반면 모로 박사의 저택에서 오래 일해 온 가정부 라모나는 모로 박사의 시선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를 비롯하여 다른 동물 인간들을 애정으로 돌본다. 자연의 모든 존재를 애니미즘적인 관점,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사물에도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는 신적 질서를 믿는 마음이 있다. 물론 모로 박사의 ‘신’과 라모나의 ‘신’이 같은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녀의 보살핌 때문이었는지,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정글에 있는 돌과 꽃과 짐승 하나하나에 모두 신이 실재한다는 사실”(485)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소설의 배경은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에빛을 본 이후의 1871년이다. 모로 박사가 다윈의 ‘범생설’에 입각하여 생명의 시작이 ‘제뮬’이라는 입자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 것은, 아직 유전체의 존재가 발견되기 전이니 일견 합리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모로 박사는 “우리 눈에는 볼 수 없지만 제뮬은 거기 존재한다네.”(47)라는 신념을 거듭 밝힌다. ‘자연에 도약이란 없다’라는 인식이 역사적·문화적 불문율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사는 여러 동물의 제뮬을 섞어 동물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는 당대의 믿음을 깨고‘자연의 도약’을 손수 만들어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애초에 ‘동물 인간’을 만든 이유는, 고용주의 이익을(임금 줄이기) 위해서였으므로, 기존의 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에 활약(?)했던 값싼 노동력(이를테면 흑인들)을 대체할만한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모로 박사는 동물의 ‘제뮬’을 이용한 생명공학적 방법으로 접근한 것일 뿐이다.
거실의 정밀 시계는 절대적인 시간•공간의 세계처럼 마치 불변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힌다. 하지만 모로 박사가 구축한 왕국은 리잘데의 아들 에두아르도와 사촌 이시드로의 방문 이후 조금씩 금이가는 모양새다. 리잘데의 아들이 카를로타에게 반하기 때문. 일주일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본격적으로 ‘동물 인간’의 존재를 마주하게 된 에두아르도 일행은 카를로타에게 프로포즈하는 에두아르도와 카를로티의 승낙, 그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리잘데의 개입으로 야샥툰 세계의 운명은 급격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섬과 ‘동물 인간’을 소유하고자 하는 리잘데와, 카를로타와 결혼하고 자신의 독립을 바라는 에두아르도, 이를 시기하면서도 보수적인 종교인의 시선을 드러내며 결혼을 막고 ‘동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네는 이시드로의 충동이 야샥툰의 몰락을 견인하고 있다.
소설의 구체적인 결말을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인물들이 충돌의 과정에서 모로 박사의 거실에서 변함없이 작동하던 정밀 시계가 몽고메리와 에두아르도가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파괴되기에 이른다. 리잘데의 그릇된 욕망과 그에 장단을 응하며 자연의 질서를 거스른 모로 박사의 세계는 이로써 몰락을 맞는다. 이 소설에서는 어느 독자도 프랑스제 정밀시계의 상징성을 주목하게 될 듯하다. 결국 야샥툰에 구축된 모로 박사의 세계와 질서는 파괴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동물 인간 두 명과 리잘데 가문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선고했다. 그러면 작가는 소설 속 세계의 몰락을 통해 어떤 결말을 원했을까? 몽고메리와 카를로타의 결합이 아닌, 우정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동물 인간인 루페와 카치토와 카를로타와 더 단단한 우정의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몽고메리 로턴의 말 중에서 다음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지구상에 완벽한 장소는 없어. 어디를 가든 나는 인간의 잔인함과 과도함을 봤어. 그게 바로 내가 야샥툰에 와서 여기 머물게 된 이유야. 야샥툰은 적어도 행복과 비슷한 뭔가를 줬거든. 나는 야샥툰에서 괴물을 본 적은 없어.”(396) 이 대목을 보면 인간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잘 지내지 못했던 몽고메리가 오히려 외양이 ‘이상한’ 동물 인간과 함께 지낼 때 안식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는 오히려 ’괴물‘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함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듯하다.
에필로그에 이르면, 카를로타와 루페가 사건을 ‘처리’하고 유산을 상속받으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다. 보통 서사의 구조 같으면 몽고메리와 카를로타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를 통해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몽고메리가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카를로타의 동생뻘인 동물 인간 ‘루페’와는 결속력이 강해짐을 느끼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찾게 된 듯하다. 웰스의 원작리 신적 질서에 도전한 인간의 경솔함과 무모함을 경고했다면, 작가 실비아의 작품은 분명히 희망적이다. 인간-비인간의 돌봄과 우정의가치와 중요성,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를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쓴 시도는 분명 독자의 판단을 유보하게 하고 다면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독자에게는 서사의 윤리성을 함께 생각하게 해주는 독서 경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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