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기록
신상웅 지음 / 소요서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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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염색 장인을 닮은, 이런 여행법

 

신상웅, 푸른 기록, 소요서가, 2024

 




책을 읽는 동안 책의 곳곳에서 책을 만든 이의 의도가 느껴졌을 때, 무언가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국내 쪽 염색 장인의 에세이 <푸른 기록>도 그런 책이었다. 푸른 쪽 색으로 물든 양포 혹은 화포의 느낌이란 이런 것일까 상상하게 만드는 책의 표지 색과 질감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작자와 저자 사이에서 책 내부에 접혀 있었을 세세한 이야기들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을 법하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저자는 고향에 내려와 쪽을 직접 재배하고 천에 염색하는 일을 업으로 한다. 그리고 사이 시간을 이용해 자료 조사를 위한 여행을 한다고 한다. 이 책은 중국, 라오스, 태국, 베트남, 일본 등등 동아시아 여러 곳의 쪽 염색 현장을 발로 누빈 기록이다. 중국의 깊은 산골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과 무늬를 지닌 옷감을 만들고 일상에서 사용할 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자녀에게 직접 고추장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 연암 박지원 선생의 편지글에서 쪽 염색된 두루마기를 언급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사람은 세계를 바라볼 때 자신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대상이 먼저 눈에 보이듯, 저자에게는 연암 선생의 화포가 보였던 모양이다. 연암 선생이 입었던 화포 두루마기는 우리나라에서 염색된 것일까, 아니면 수입된 옷감으로 지어진 것일까. 나 역시 궁금했다.


 

동시에 해방 직후에 그려진 한 점의 자화상도 떠올릴 수 있었다. 월북했던 화가 이쾌대가 그린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었다. 이제 막 해방되어 건국된 이 땅에서 서양식 물감 팔레트와 붓을 들고, 중절모와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어쩌면 이 두루마기 역시 연암 선생의 화포처럼 우리 땅에서 염색되고 지어진 옷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저자가 자료 조사 차 쪽 염색 전통을 지닌 동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과정에서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쪽 염색 과정 이전에 저자의 독특한(?) 여행법이었다. 만약 연암 선생이 청나라 연행을 하기 전에 화포에 관심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호기심 많던 연암은 현지에서의 저자처럼 인연을 만들어 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저자가 보여주는 현지인들과의 사소하지 않은 마주침과 인연 만들기의 모습이 너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도 여행에 동참하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저자의 특이한 여행법은 오지에서 생존하는(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저자만의 여행 감각인 듯하다. 이를테면, 인도차이나반도의 라오스 산골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산길을 걷다가 결혼식 잔치집에서 하객들에게 발견(?)되어 초대되고 환대받는 모습이 저자의 여행을 따라가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피로연에서 독한 증류주 라오라오를 마시고, 하객들과 춤을 함께 추는 저자의 능글능글한(?) 내공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취기에 오른 저자가 감지하던 여인들의 아찔한 향기에 대한 언급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다. 단지 글을 읽을 뿐인 나 역시 곧 눈이 부시고 현기증이 나는 듯 생생하니 말이다.

 


저자의 가방에는 이따금 찹쌀떡이나 귤 등의 과일이 들어 있어, 현지인들에게 주며 말을 트는 모습도 여행지에서의 인연을 만드는 노하우인가 보다. 이걸 알았다고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낯선 곳, 특히 산골 오지 마을에서도 결코 굶지 않을 것 같은 저자의 인연 만들기 내공은 아무리 봐도 신기할 뿐이다. 저자처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가는 인연은 오지의 산간 마을, 낯선 장소를 이전과는 다른 곳으로 만들어준다. 태국 북부 산간 마을 매살롱을 지나며 저자가 기록해 둔 한 문장, “삶이 섞이듯 문화도 섞인다.”(110)는 타문화와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바라보는 저자의 철학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또 나의 시선을 붙들었던 부분은 쪽 염색을 하는족과 관련한 역사였다. 중국에서 쪽 염색하는 먀오족은 족과 친척이었고, 이들은 역사적으로 어떤 계기로 인해 남쪽으로 이동했던 모양이다. 이들이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베트남, 라오스, 태국의 북부 산간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족이라고 하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있어서 이전에 읽은 책을 들여다보다 족에 관한 언급을 처음 마주쳤던 책을 찾았다.

 


바로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현실문화, 2023)에서 미국과 캐나다의 로키산맥을 중심으로 송이버섯을 채취하던 동양인들이 바로 족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 책의 번역자는 몽족대신 몽인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라는 표현이 현대 문화가 아닌 전근대적인’, 혹은 미개하고 야만적인문화를 가진 사회라는 편견을 갖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몽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의 5장과 6장에서 미국 서부 오리건주의 산속에서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몽인에 대해 소개하는데, 이들이 미국이 야기한 전쟁으로 난민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보인다. 다만 애나 칭은 보다 자세한 내막을 소개하고 있지 않아 이 대목을 읽을 때 몽인들이 미국에 난민으로 오게 된 사연이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바로 <푸른 기록>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점령군으로 있던 프랑스가 물러난 후 들어온 미국. 이들이 벌인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라오스와 베트남 북부의 공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산골에서 살아가던 몽인들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싸우게 했던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패전하고 퇴각한 후다. ‘몽인들은 미국의 먹튀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몽인들의 비극과 고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버려진 몽인들은 공산 정부의 보복 대상이 되어,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난민수용소에 머물다가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등으로 건너가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것. 이렇게 해서 <세계 끝의 버섯>에서 마주쳤던 몽인들의 비극적인 역사도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은 마치 송이버섯처럼 척박한 토양에 흩어져 자신만의 생존술을 발휘하며 존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낯선 곳에서도 지난 시절 쪽 염색물을 들인 양포에 대한 푸른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쪽 염색 전통을 찾아간 저자의 여정이 세계사적인 사건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저자가 일본의 골목 전시장에서 일본인들이 작업한 쪽 염색 옷감과 더불어 중국의 '먀오인몽인들의 푸른 화포를 다시 만난 순간 먹먹해하던 장면이 인상 깊다. 국내에서 직접 쪽을 기르고 염색에 매진해온 저자는 매순간 작업의 의의를 끊임없이 자문했을 테다. 산골 마을에 사는 몽인들이 명절에 입고 나온 화려한 옷들을 보며,“내가 물들이는 푸른색은 명함도 내밀기 부끄럽다.”(170)고 말하는 저자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현재 남아 있는 푸른색 화포에서 무엇을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196)를 자문하는데, 전통과 새로움에 대한 요구와의 충돌 혹은 균형에 대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모색하고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쪽 염색 작업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탐색하는 장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저자가 여행에서의 기억과 종이 위에, 그리고 그간 무명천 위에 남겼던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 역시 저자가 전해주는 푸른 기운을 이어 받아본다. 저자의 표현대로 푸른색은 푸른색이되 다 같은 푸른색이 아닌이 쪽 염색의 빛깔은 서늘하면서도 신비함을 자아낸다. 은근히 눈길을 붙들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듯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게 하는 색이다. 때론 처연한 푸른색에 눈이 시린 느낌이 들 정도다. 중국과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지의 산골에서 전통을 이어온 이들이 옷감에 물들이고 남은 푸른 물은 그들의 애환과 고통, 슬픔을 오랫동안 씻어내었을 테지만, 한편으론 반복할수록 선명하게 남는 푸른 빛은 한편으로 그들의 심연에 응어리진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만 같다. 때론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진실은 있기 마련이니까. 저자가 여행에서 낯선 인연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그는 사라져가는 것을 찾으면서도 때론 우연한 발견들 또한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삶이든 문화가 서로 섞이며 새로운 세계로 한 발 한 발 내딛게 되는 것처럼.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1]
"나는 콩 대신 색을 수확했다. (...) 쪽에서 풀려난 색이 하늘로 이어졌다."(13) - P13

[2]
"이름을 쓴 꼬리표라도 달지 않으면 푸른 무명더미 속에서 내 것을, 나의 푸른색을 구별할 수 있을까. 저 안에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하는 속절없는 물음들."(13-14)
- P14

[3]
"삶이 섞이듯 문화도 섞인다."(110) - P110

[4]
"나는 현재 남아 있는 푸른색과 화포에서 무엇을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196) - P196

[5]
"더구나 그런 아름다움이 일상과 함께 한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반갑다. 아름다움이란, 또 문화란 저렇게 삶과 섞여 살아있을 때 가장 빛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265) - P265

[6]
"길은 끝이 없고 가야하는 이유도 앞에 놓인 길 위에 있다."(303)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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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28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초란공님도 책을 협찬받아 읽으실 때가 있으시군요. ㅎ 저도 쪽염색 좋던데. 보기만. ㅋ 이런 책이 있었네요. 좋으셨나 봅니다. ^^

초란공 2024-10-28 22:04   좋아요 1 | URL
하하 네^^ 가끔은 색다른 주제로 출간된 책에 관심이 가서요~ 책을 보고 일본 우키노에 그림을 보이 온통 사람들이 푸른 쪽 염색 옷을 입었더라구요.

그레이스 2024-10-28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도 소요서가에서...!^^
저두요...

초란공 2024-10-28 22:04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혹시 서점에서 마주치는 분이 아니실지 ㅋㅋㅋ

그레이스 2024-10-28 22:07   좋아요 1 | URL
저는 회원이긴 한데요, 프로그램은 아직 온라인으로만....!

초란공 2024-10-28 22:08   좋아요 1 | URL
아하^^ 왠지 더 반갑습니다~^^
 
푸른 기록
신상웅 지음 / 소요서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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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행지에서 저자가 만들어가는 인연과 인간적인 섞임/어우러짐이 인상적인 여행기입니다. 아시아 지역의 쪽 염색 전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면서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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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0-28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있는 책 만나니 기분 좋네요^^
 
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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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남긴 사랑과 회한의 기억 그리고 복원의 기도


김이정, <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2024

 



상실의 경험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는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때론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장편소설 <유령의 시간>은 작가 김이정의 가족사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소설에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 초래한 어둠의 시간을 통과하며 상실과 상처를 화인처럼 짊어진 사람들로 그득했다.


작품 속 주요 인물인 김이섭은 일제 강점기에서 30, 해방 공간에서 전쟁을 겪고 30년 생애를 살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끝내 찾지 못했다. 특히 이념의 대립으로 손 쓸 기회도 없이 아내와 세 아이를 잃었던 그였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리움이라는 깊은 우물의 심연 속에 평생 갇혀 살았다. 사회주의라는 이상과 타인을 위한다는 대의를 따르다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자각은 그의 삶을 평생 갉아 먹었다. 한차례 가족을 잃고 난 후 주변 사람들의 손에 떠밀려 한 여인, 미자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녀 역시 전쟁 중 눈앞에서 남편이 죽고 안식처마저 잃었던 여인이었다.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새로운 가족을 꾸리게 된 이섭과 미자는 엄혹한 시절, 가족을 지키고자 발버둥 쳐온 우리 선배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별 인사도 미처 하지 못한 채 역사의 거대한 파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주었던 이섭에게는 잃어버린 피붙이들의 목소리와 이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시간 속에서 부유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이섭, 미자, 그리고 월남전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돌아온 남편을 지켜보아야 해던 순희의 생을 상상해 본다. 이들처럼 인생의 고비를 넘는 동안 삶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배반당했을 때, 그러니까 이 방향감각의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섭이 건너야 했던 기구한 삶은 내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섭은 물 밖에 나온 새우의 모습처럼 강하지 못한 생명을 무엇보다 혐오했다. 그가 이런 무기력함을 가장 잔혹한 형벌로 여겼을 속사정을 헤아려본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가장으로서의 수치심과 죄책감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섭과 미자, 그리고 가족이나 다름없던 이웃집 순희 같은 이들은 모두 고통스러운 상처를 끌어안고서 각자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자 분투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우리 삶의 비루한 취약성을 선명히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토록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등과 보듬을 수 있는 팔을, 살가운 손길을 서로에게 내어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첫 아내이자 한 집안의 사랑을 받던 맏딸을 잃고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장인을 바라보던 이섭의 마음처럼, 사람이 사람을 잃고 무언가를 지켜낼 힘을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게 인상적으로 남은 장면 하나는, 지형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저렇게 모든 걸 잃고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할까?”, 자문하는 대목이다. 지형의 형제들이 아버지가 평생 잃어버린 것들을 복원하자고 손을 모으는 장면이 오롯하게 떠오른다.


인생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다시 살리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의 천진한 검은 눈동자일 수도, 또 누구에게는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등을 내어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상실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고 꿈을 꾸는 일일 수도 있겠다. 지형이 꿈에서 보았던 노란 두메양귀비를 백두산에서 발견한 순간 아버지의 존재를 다시금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리운이복형제에 가 닿고자 했다. 지형의 이러한 간절함은 다시 이생에서 누군가를 추억하고 사랑하며 꿈꾸길 멈추지 말 것을, 기도하듯 요청하는 듯했다. 불현듯 이섭이 남긴 오래된 일기장의 한 구절이 어른거린다.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지형이 이복 오빠가 있을 방향을 향해 무언가를 외칠 때, 나 역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메마르고 헛헛한 유령의 시간을 보내온 모든 이들이 이제는 꿈꾸는 시간으로 생을 채워 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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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4-10-31 13:44   좋아요 0 | URL
네~ 괜찮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라톤 철학으로 <모비딕> 읽기


플라톤, <파이돈>, 전헌상 옮김, 아카넷, 2020

 




플라톤 철학은 서구 정신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2400여 년 전에 태어난 한 철학자의 사상적 유산이 큰 공감을 얻고 종교와도 접목되며 살아남아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정초해 놓았다. 구체적으로 그는 대화 형식의 여러 철학서를 후세에 남겼는데, 그 가운데 후대의 수많은 사상가나 작가가 꾸준히 언급하여 제목도 익숙한 <파이돈>, <변명>, <국가>등 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나는 이 가운데 영혼의 문제를 다룬 <파이돈>에 먼저 주목해 보았다. 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자신의 제자 및 벗과 함께 나눈 철학적 대화를 재구성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앞에 내려진 죽을죄는 그가 당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그리스의 신을 온전하게 믿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범박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에 내몰리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며 발버둥 치지 않을까. 놀랍게도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행보는 믿기 힘든 반전을 보여준다. 제자와 벗들이 감옥에 모여 뇌물을 써서라도 감옥에서 탈출할 것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당당히 죽음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이미지에 골몰한 나머지 죽음을 열망하는사람처럼 말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미치지 않았다. <파이돈>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철학자가 죽음을 열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사실 삶에 대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철학자는 오히려 우리가 삶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영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대화를 통해 일깨워준다.

 

이 논의에 접근하려면 우선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 곧 플라톤의 인간관을 먼저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완전하고 영원한 신과 달리 인간은 불완전한 필멸의 존재다. 물론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기도 했다.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과 신체로 구분되는 영역으로 구성됨을 이야기한다. 서양사상의 전통 가운데 중요한 주제인 심신이원론의 뿌리도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엿보인다. 플라톤의 주요 저작 중 <변명>, <크리톤>, <파이돈>, <소피스트>, <알키비아데스>을 읽어 가면서 주목할 수 있었던 점은 인간의 영혼과 신체의 구분에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체는 가시적이면서 끊임없이 변하여 결국 소멸하는 대상이다. 반면 영혼은 비가시적이며 영원히 존속하여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이다. 감각적인 것의 근원인 신체는 이성(logos)의 근원인 영혼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 철학에서 신체는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틀과 같다. ‘신체는 감옥이라는 표현마저 보인다. 신체의 욕구에만 충실한 삶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 나아가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플라톤 철학은 존재를 구속하는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한 철학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이 주제,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은 서양사상에서 끊임없이 논의되어 온 큰 흐름을 유지하는 주제다. 이런 시각을 한 가지 방법으로 삼고 지혜를 사랑하는 일을 우리의 철학함과 연관지어볼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신체의 구속과 욕망으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일이 지혜를 사랑하고 철학 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지향은 신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으로 보았던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과정, 곧 철학 하는 일과 죽음의 상태를 열망하는 일 모두가 신체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과정과 구조상 유사한 까닭이다. 이제 <파이돈>에서 철학 하는 삶은 죽음을 열망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철학자로서 죽음을 열망하는 태도를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무턱대고 죽음을 열망하는 것과 구분한다. 평범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이건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신체와 더불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시급하다는 함의를 지닌다.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일은 우리가 노예 상태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함이니까.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야말로 서양 사상사의 주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플라톤 철학으로 소설 읽기


플라톤의 <파이돈>을 통해 그의 사상 일부를 접할 때 생각난 소설이 있다. 허먼 멜빌의 낭만주의적이고도 비극적인 소설 <모비딕>이다. 소설 전체가 플라톤 철학의 구현이 아닐까 싶은 요소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이 소설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이유로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플라톤 철학과 소설 읽기가 낯설고도 동시에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쫓으면서 <모비딕>을 펼쳐보니 눈길을 끄는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참고래가 생전에 스토아 철학자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주의자인 향유고래가 말년에는 스피노자를 친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478)

 

멜빌은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은 숙명론자의 입장이면서 이성을 중시하는 금욕주의자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 멜빌은 참고래로부터 이러한 숙명론자이면서 금욕주의자인 면모를 읽어냈던 것일까. 멜빌이 남겨놓은 참고래가 스토아주의자라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참고래 머리의 표정을 보라. 그 놀라운 아랫입술이 우연히 뱃전에 짓눌려 턱을 단단히 감싸버린 것을 보라. 이 머리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강력한 실제적 결의를 말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모비딕>, 작가정신, 468) 아마도 멜빌이 스토아주의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했을 법한 인물이 소설의 1장에 언급되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일명 소카토)일 것 같다. 카토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로, 공화정을 옹호하며 카이사르에 대항했다가 실패하자 칼 위로 몸을 던져 자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멜빌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굳은 결심의 인간 전형으로 스토아주의 철학자였던 카토를 1장부터 언급한 것이다. 그는 참고래의 모습에서 굳게 결심한 듯한 스토아 철학자의 모습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이와 달리 플라톤주의자인 향유고래는 숙명론자의 특징을 지니면서도 물질보다는 관념’, ‘신체보다는 영혼을 중시하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특징을 향유고래로부터 읽어낸 것이 아닐까. 멜빌이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한 이유의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에는 죽음에 대한 명상적 초월에서 유래하는 대초원 같은 평온함이 충만해 있는 듯하다.”(<모비딕>, 작가정신, 468) 특히 향유고래는 죽을 때 태양을 향해 방향을 틀고 죽는다는 표현도 숙명론적이면서 영적인 존재로서의 향유고래를 강조한다.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더라도, 굳은 결심으로 죽음을 대하는 스토아철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서도 초연했던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떠올렸을 법하다. 멜빌이 거대한 서사를 계획하고 준비할 때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작품 속에서도 드러낸 점이 흥미롭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장면을 철학책의 기본 구도로 활용한 <파이돈>을 직접 언급한 대목도 살펴보자.

 

이 자리에서 낸터컷의 선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충고하겠다. 경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포경업에 이마가 좁고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를 채용하는 것은 조심하기 바란다. 그런 젊은이는 시도 때도 없이 명상에 잠기기 일쑤고, 보디치의 <항해술>대신 플라톤의 <파이돈>을 머릿속에 넣고 배를 탄다. 이런 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고래를 죽일 수 있으려면 우선 고래를 보아야 한다.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 플라톤 숭배자는 세계를 열 바퀴나 돌아도 고래기름을 한 통도 보태주지 못할 것이다.”(<모비딕>, 작가정신, 243)

 

영혼을 신체보다 우월한 대상으로 보았던 플라톤 철학 중에서도 특히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파이돈>을 작품에서도 언급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직면하여 탈옥하라고 권유하는 제자 및 벗들의 말에 오히려 기꺼워하며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하며 영혼 불멸에 관한 논증을 제시한다. 이것이 <파이돈>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플라톤 철학, 그중에서도 <파이돈>을 인상 깊게 읽고 글을 써내려갔을 소설가를 상상해 본다. 위의 인용 문장에서 플라톤 숭배자인,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는 화자인 이슈메일 자신을 암시할 수 있지만, 정작움푹 들어간 눈에 대한 평을 들은 바 있는 사람은 작가 허먼 멜빌이다.

 

멜빌이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과 교류를 시작한 시점은 <모비딕>의 원고를 쓰던 1850년 즈음이다. 이때 호손의 <주홍 글자>(1850)가 나왔으므로 멜빌은 집필 직전이나 과정에서 이 책을 접했을 것이다. 특히 15살 연하였던 멜빌이 호손의 칭찬을 받았던 일은 멜빌이 작가로서 자신감을 얻고, 호손을 자신의 멘토로 여겼을 것이다. 멜빌은 기회가 되면 호손을 여러 번 찾아간 듯하다. <사악한 책, 모비딕>을 쓴 너새니얼 필브릭은 호손의 부인 소피아가 집에 찾아온 멜빌의 눈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피아는 멜빌한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작은 눈이라고 했다. “가끔 활기가 수그러들고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 그 눈이 두드러지게 조용한 기색을 띨 때가 있어요. 내면을 향하는 듯한 흐릿한 표정인데 동시에 그 순간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을 매우 깊이 새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기이하고 게으른 시선인데 그 안에 무척 독특한 힘이 있어요. 사람을 꿰뚫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한 눈빛이에요.

(너새니얼 필브릭, <사악한 책, 모비딕>, 홍한별 옮김, 교유서가 59)

 

소피아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보면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 플라톤 숭배자는 다름 아닌 허먼 멜빌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멜빌은 거대한 몸집에 지극히 작은 눈을 지닌 향유고래의 모습에서 자신과 동일시하며 플라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읽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죽음에 대한 명상적 초월의 덕목을 향유고래에게서 읽어 낸 대목은 <파이돈>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짐작케 한다.

 

<모비딕>이 플라톤 철학의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다음과 같다. “꿀이 가득 든 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거기서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모비딕>, 작가정신, 478) 이 부분은 포획한 향유고래의 머리 부분에서 경뇌유를 길어내던 인디언 작살잡이 태시테고가 향유고래의 머리에 빠진 직후, 고래의 머리가 바다로 떨어져 가라앉게 된 사건에 나온다. 작살잡이 퀴퀘그가 바다로 뛰어들어 태시테고를 구출한 후 이슈메일이 남기는 대목이다. 이때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은 무엇보다 <파이돈><변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영혼을 돌보는 일이 신체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에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한 사람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대목을 살펴보자. 향유고래를 잡아 죽인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흑인 요리사 플리스 영감을 밤에 불러 고래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스터브는 자신이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뱃전에 묶어 놓은 고래를 뜯어 먹는 상어를 향해 얌전히 있으라는 연설을 시키는 장면이다. 요리사 영감이 마지못해 상어에게 전하는 연설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탐욕스러운 것을 그렇게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타고난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그 못된 천성을 억제하는 게 중요하단 말이다. 여러분은 상어지만, 근성을 억제하면 여러분도 천사가 될 수 있다. 천사라고 해서 모두 다 상어 근성을 잘 억제한 상어보다 훌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비딕>, 작가정신, 419)

 

플라톤 철학을 떠올릴 때 이 부분이 흥미로웠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영혼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파이돈>에서도 영혼의 불멸을 언급하며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존재를 지속한다고 말한다.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고 돌보며 영혼을 정화하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에서도, 그가 인간의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인간 고유의 욕망, 탐욕을 감각적인 것, 신체적인 것으로 보고 이러한 천성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흑인 요리사 플리스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이 덕목은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4가지 덕목(지혜/용기/절제/정의)을 떠올리게 하는데, 플라톤은 신체를 지닌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일정하고, 이를 절제라는 덕목을 통해 훌륭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것이 필멸의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과제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멜빌의 표현에 따르면, ‘천사는 절제의 덕을 훌륭하게 따른 결과인 셈이다. 반대로 절제의 덕과 함께 천사도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다면 언제든 상어와 같은 악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전언이다. 소설 속의 이 장면은, 우리 인간 역시 스스로 영혼을 끊임없이 돌보지 않으면 언제든 천사에서 탐욕스러운 상어가 될 수 있다는 철학을 서사에 녹여내었다.

 

포경선원들은 포경선에 오르기 전에 계약서에 배당과 함께 사인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남태평양에서 문명 세계로 나와 작살잡이가 된 퀴궤그 역시 3-4년 간의 바다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면 받게 될 배당과 노동계약서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모비딕>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작살잡이 퀴퀘그는 자신의 계약서에 사용하는 서명이 없기에 자신의 팔에 새겨진 문신의 문양을 서명으로 사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모비딕>의 판본마다 퀴퀘그의 서명(정확히는 서명이 아니므로 그의 표시)이 다르게 나오는데, 판본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X', '', '' 의 세 가지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멜빌이 의도한 퀴퀘그의 서명이 ''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영어 원서의 묘사에 'a queer round figure'(기이한 둥근 모양/문양)라는 표현 때문이다. 이 표현이 있음에도 몇몇 번역서들은 곡선이 보이지 않는 ‘X'''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부분의 번역을 생략한 번역서도 보인다. 반면 몇몇 판본은 기이한 둥근 모양/문양이라고 번역하고, ''를 퀴퀘그의 표시로 제시한다. 원서의 표현을 참고한다면, 유일하게 이상한 곡선이 들어간 표시로 ''이 사용됐을 것이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플라톤주의자를 자처하는 화자와 만났을 때,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보는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있던 피타고라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주의 원리를 수를 통해 탐구하는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수비학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성격,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종교 지도자의 아우라가 있었던 모양이다. 피타고라스는 무한의 개념을 인지하고 있던 인물이기도 하기에, 무한을 나타내는 기호 역시 '' 역시 이교도적인 요소로서 이교도인 작살잡이 퀴퀘그의 팔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있다. 이 무한대 개념은 <파이돈>의 주된 논증 주제인 영혼 불멸과 관계가 있다.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언젠가 물질 세계에 있는 신체와 만나 환생할 수 있다는 영혼 회귀의 기본 개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은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신성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모비딕>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분명히 이마가 좁고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 ‘플라톤의 <파이돈>을 머릿속에 넣고 배를 탄젊은이는 바로 허먼 멜빌이었던 셈이다.

 

이제 거리를 두어 <모비딕> 전체를 조망해 보자. 소설의 시작은 돈이 궁핍해지고, 영혼이 을씨년스러워 우울감에 빠진 채 갈 곳 없이 배회하는 청년이 권총과 총알 대신 바다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이슈메일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한편 소설의 마지막은 모비딕의 공격을 받고 피쿼드호가 침몰한 후 혼자 살아남은 이슈메일의 독백으로 끝난다. 소설은 이슈메일이 바다로 향하는 대목으로 시작하여, 그가 바다로부터 구출되어 나오는 대목으로 끝난다. 이슈메일은 큰 사고를 겪었으니 이제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육지에서의 삶이 또다시 피폐해지고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이슈메일은 또다시 바다를 생각하고 바다로 나가게 될 운명은 아닐까. 이는 플라톤의 영혼 불멸영원 회귀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육지는 물질적 세속의 세계이며, 바다는 영혼이 신체를 벗어난 죽음의 세계혹은 영혼을 돌보는/혹은 영혼 정화를 위한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을까 싶다. 영혼 불멸영혼 회귀의 개념 역시 이교도적인 성격,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피쿼드호의 흑인 소년 을 생각해 본다. 핍은 포경선에서 사람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때론 탬버린을 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고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망망대해에 빠진 후 정신을 놓게 된다. 문자 그대로 백치가 되어 버려 그의 영혼은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의 신체는 껍데기로만 남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바다라는 공간을, 영혼을 돌보며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본다면, 여기에는 분명 위험 요소도 있다.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 신체를 이탈한 영혼은 정화된 상태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핍은 이러한 사례를 보여준다.

 

피쿼드호가 모비딕의 일격을 받고 침몰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바다를 거대한 수의로 언급한다. 바다는 신체를 지닌 생명의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는 죽음의 공간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다는 철학자가 죽음을 열망하듯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형이상학적 공간일 수 있다. 피쿼드호의 침몰 직후 포경선의 목수가 퀴궤그를 위해 제작한 관을 봉해 마련한 부표가 물 위로 떠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슈메일은 죽음을 상징하는 관-부표를 타고 다시 삶을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그러니 바다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이면서, 신체와 영혼이 합일하거나, 혹은 분리되기도 하는 제3의 무대인지도 모른다. 핍의 사례나 이슈메일이 소설의 시작에서 바다로 들어가고 다시 바다에서 육지로 나오는 일련의 과정은 소설의 기본 구도가 플라톤적이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모비딕>은 방대한 소설이다. 소설 쓰기 작업에 사용되거나 언급된 참고도서 만큼이나 많은 요소가 작품에 기여했다. 여기에는 작품에 영향을 준 요소로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그의 문체, 사회적 악의 문제를 다루는 너새니얼 호손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또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나아가 소설 전체의 기본적인 구도까지, 그리고 영혼과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문제를 고려한다면, <모비딕>은 그 자체로 플라톤 철학의 소설적 구현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에 기대어 <모비딕>을 읽을 때, 우리는 플라톤주의자이슈메일의 영혼 뒤에 가려진 허먼 멜빌의 영혼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모두 그가 남긴 철학의 주석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2000여 년 전에 한 철학자가 남긴 사유의 흔적을 이토록 후대인들 역시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인류가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플라톤 철학은 바로 이 문제를 직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의 사유 속에 머물게 될 듯하다.

 

멜빌이 포경선을 타게 될 선원들에게 설교하던 매플 목사의 입으로 필멸의 인간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영원히 산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모비딕>, 작가정신, 106) 삶과 죽음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인류의 영원한 과제다.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이 바로 플라톤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책 한 권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앞서 우리의 영혼과 삶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남겨놓았다. 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새롭게 만나게 된 화두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언젠가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우리가 나누게 될 마지막 이야기는 무엇이 될까. 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새롭게 만나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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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에 관한 단상:

 <목로주점>과 <제르미날> 들여다보기


 

에밀 졸라, <제르미날>,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4)





 몇 년 전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다 읽고 곧바로 팔았던 기억이 있다. 작가가 묘사해 놓았던 도시 빈민가 노동자들의 삶을 따라가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던 까닭이다. 끝없이 추락하는 삶을 들여다보니 내 저질 체력에 남아 있던 에너지 마져 고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이건 작가의 사실적이고 집요한 관찰과 글쓰기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독자로서는 꽤나 힘든 독서 경험이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제르미날>을 만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몸이 조금 경직 되었던 것 같다.


오늘 들여다보는 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은 문학비평가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에서 언급된 '스타일'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모방'이라는 의미의 '미메시스'에는 현실에 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우리가 '현실 Reality'을 이야기 할 때, 이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의문이다. 거칠게 이해한 바대로 표현하자면, '미메시스'란 개념은 현실의 사진적 재생산이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는 주체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에 더 가깝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재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재하는 '현실'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정리해보면, 어느 작품의 '스타일'을 말할 때, 그 작품이 주는 시선과 감각, 현실의 묘사는 모두 작가라는 존재를 매개하여 재구성된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에밀 졸라의 '스타일'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특히 <미메시스>는 유대인이었던 저자가 나치를 피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서 했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까지를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거대한 문학의 흐름을 스타일의 변화 과정이라는 틀 위에서 논의한다. 특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서양의 두 기둥에 기반하는 '스타일'을 규정한다. 계급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스타일이 점차 민중이 목소리를 얻고 일상성이 작품에서 보다 진지하게 다루게 지면서 변화된 스타일을 조망하는 인상을 준다. 
























이 중에서 에밀 졸라는 사실주의의 맥을 잇는 자연주의의 실천자로서 언급된다. 1840년에 출생했으므로, 그의 생애는 현재의 파리 모습을 정비했다고 할 수 있는 파리 지사 오스망의 시대(파리 정비 기간은 1850-60년대)와 겹치고, 또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2공화국 및 제2제정 시기와 겹친다. 한편 1859년에 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가져온 유럽 지성계의 사건은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 에밀 졸라에게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기운 속에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적 시선이 무르익었을 테다. 사실주의에서 나아간 자연주의는 무엇보다 당시의 과학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고 이해된다. 현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찰과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이 실증주의적인 시선은 청년 에밀 졸라의 세계관의 틀을 주조했을 것이다. 


그가 58세이던 1889년에 당시 공화국이었던 프랑스 대통령앞으로 편지를 보냈던 사건, 곧 유대인 프랑스 장교 드레퓌스의 무죄를 탄원하는 편지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일간지에 보냈던 일이 있었다.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던 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에밀 졸라가 기꺼이 들어갔던 일은 작가가 평생 추구한 실증주의적 시선을 통한 진실의 힘을 본인이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당파가 아니라도 진실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도 숭배와 혐오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아마도 그의 용기와 진실의 승리를 믿는 무리가 있는가하면, 그의 존재 자체를 외면하고 싶었던 무리도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인물이었기에, 그가 3년 후 가스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이 사건이 정적에 의한 죽음이라는 음모가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미메시스>의 저자  에리이 아우어바흐가 소개했던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들여다보자. 에밀 졸라는 당시에 교류하던 공쿠르 형제의 문학적 지향(일반 평민, 노동자들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에 대해 크게 공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생각에 고무되어 소위 '루공-마카르 총서'를 기획하기에 이른다. 20권에 달하는 이 총서 연작은 '혈연적 인연을 맺게 된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기획이다.  <제르미날>의 역자는 해설에서 루공-마카르 총서를 "제2제정기 한 가문의 자연사와 사회사"를 다루었다고 정리했다. 이 작업은 아마도 우리의 대하소설 <토지><혼불>, <태백산맥>과 같은 문학적 성취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문학적 시도를 우리도 앞으로 더 기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대가 이미 변했기 때문이다.


<제르미날>의 시간적 배경은 에티엔 랑티에라는 20살의 기계공이 해고된 후 추운 늦겨울에 일자리를 찾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때는 에티엔이 1866년 3월 파리 북부 가상의 도시 몽수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끝은 1년 후인 1867년 4월이다. 소설은 이 13개월 간의 이야기다. 가상의 도시 몽수는 프랑스어로 '돈으로 만들어진 산'이란 의미를 지니는 탄광 지대다. 이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을 캐는 광부로 살아간다. 참고로 1860-1870년대의 프랑스는 전반적인 산업이 위기를 겪었고, 특히 탄광의 파업과 충돌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50-60년대의 파리 시가 정비를 비롯하여 운하나 거대 토목 사업 뿐만 아니라 1860년대에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하던 멕시코 전쟁의 여파 등을 고려하면 거대한 자본이 평민들의 삶을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놓고 소설과 만난다면 <제르미날><목로주점>에서 읽을 수 있는 빈민가와 가난한 노동자들의 '체념과 절망'을 조금은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수로부터 뽑아낸 자원과 노동력 등을 소수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만 쓰인다면 다수의 삶은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2024년 현재의 대한민국 처럼 말이다. 



건조하게 요약한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스포일러 있음). 


주요 인물인 에티엔 랑티에는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사생아(1846년 출생)다. 어릴 때 기계공 견습생이 되기 위해 프랑스 북동부 벨기에와의 접경 지역인 릴로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르미날>에서 그는 철도 작업장에서 책임자의 뺨을 때리고 해고되어 일주일동안 추위와 배고픔 속에 일자리를 찾아 여러 지역을 전전하던 중, 파리 북부의 가상 도시 몽수의 탄광 지역에 도착한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결원이 생겨 르 보뢰 탄광의 탄차 운반부로 일하게 되는데, 같은 작업반 동료 마외의 집에서 10명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들의 집안은 5대째 광부로 일해온 가문이다. 마외네는 아내 라 마외드(39세), 아버지 본모르 영감, 그리고 21살 장남 자샤리부터 이제 막 3개월 된 막내 에스텔까지 7남매가 북적이는 광부의 집이었다. 


 당시 산업의 위기와 탄광의 경영난으로 엔보 사장은 노동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노동계약을 광부들에게 제시한다. 이에 광부들은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이들은 당장 더 굶어야 하는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터에서는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갱 내부의 부실한 안전 시설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은 참아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족을 모두 굶기는 상황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점차 탄광 일에 적응해가는 에티엔은 이러한 동료들의 현실과 탄광회사의 횡포에 분노한다. 에티엔은 파리의 마르크스주의자 플뤼샤르와의 서신 교환과 꾸준한 독서로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혁명에 대한 꿈을 꾸면서 지도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게 된다. 급기야는 파업의 주동자가 되어 파업의 선봉에 선다.  


두 달에 가까운 파업으로 한계에 도달한 광부와 가족들은 숲에서 집회를 열었던 에티엔의 연설에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며 광기로 돌변한다. 분노에 찬 무리들은 주변 탄광 지역을 돌아다니며 시설을 파괴하는 등 급기야는 에티엔의 통제를 벗어나버린다. 회사 측이 파업 광부를 대신할 벨기에 광부들을 데려 옴으로써 대치 상태가 더욱 격화되던 중 탄광을 지키던 군인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마외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광부들과 가족들이 사망한다. 이후 파업은 광부와 가족에게는 실패로 돌아가고, 에티엔은 동료들로부터 지탄과 혐오를 받는 처지에 이른다. 


한편 급진적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을 신봉하던 에티엔의 동료 기계공 수바린의 시설 파괴 행위가 은밀히 자행된다. 같은 날 르 보뢰 탄광에 복귀한 300여 명의 광부 대부분은 수바린의 갱도 파괴로 무너져 내리게 되는데, 대부분의 광부들은 갱을 간신히 탈출하지만, 에티엔과 카트린을 비롯한 10여 명은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버려 지하에 갇히게 된다. 기계실과 보일러 실, 굴뚝마저 땅으로 사라져버리는 등 이들은 같은 길로 빠져나올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결국 르 보뢰 탄광은 모든 시설이 땅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이웃 운하의 물이 차 호수처럼 되어버린다. 그러나 지상의 동료들이 참여한 보름에 가까운 구조작업 끝에 에티엔 혼자 생존하여 구조된다. 이후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그는 떠나는 날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희망을 품은 채 기차역으로 향한다. 

   



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의 연관성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2권 370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제르미날>의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의 제목 ‘제르미날(Germinal)’은 ‘파종의 달’, ‘싹트는germer 달’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를 염두에 두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 보면 작가가 사람들에게 거는 일말의 희망 한 조각을 읽어낼 수 있다. 역사학자마다 규정은 다르지만, 미술 사조에서 볼 때 프랑스의 1870년대를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의 ‘벨 에포크’라 부른다면, 이 시절에 일터가 아니라 거리로 나온 광부들의 투쟁 속에서 졸라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여 주고자 했을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최초의 민중 소설로 여겨지는 <목로주점>은 작가가 37세였던 1877년에 출간하여 작가를 ‘부자’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작가의 현실과 달리 이 소설은 파리의 빈민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묘사했다. 남부 출신의 여인 제르베즈 랑티에는 파리에 상경하여 빈민가에서 세탁부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열심히 일하여 한 때 사람들로부터 신망도 얻었던 그녀는 저축도 하며 언젠가는 자신만의 가게를 갖고 넉넉하게 살 수 있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빈민가의 환경과 사람들은 그녀를 온전히 놔두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최후는 알코올 중독과 굶주림으로 쓸쓸하게 사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소설을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제르베즈를 비롯한 빈민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과 나태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몰락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에 맞서지 않은 무기력한 노동자들처럼 보인다. 작가의 시선은 빈민가의 현실을 핍진성있게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소설에서는 현실 묘사만 보일 뿐, 사회적 문제 제기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반면 8년 후인 1885년(45세)에 발표한 <제르미날>에서는 노동자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사뭇 달라진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목로주점>의 주요 인물인 제르베즈 랑티에의 사생아 에티엔 랑티에가 광부로 일하며 탄광 회사에 맞서 파업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가 실패하는 과정이 서사의 큰 흐름을 구성한다. 여기에서는 계급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탄광 회사와 노동자의 대립과 충돌이 냉정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 파업이 있기 까지 이곳의 광부들은 <목로주점>의 빈민가 노동자들과는 달리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광부들은 더 나은 삶을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탄광회사의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처우에 분노한 데다, 혈기왕성한 20세의 에티엔이 광부들의 지도자급으로 부상하여 이들의 선두에 서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은 <목로주점>의 ‘알코올 중독과 나태함’으로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빈민가의 노동자들과는 결이 다르다. 탄광의 광부들은 굶주리지 않을 권리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었다.  


<목로주점> 이후 8년 간 그의 시선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그에게 금전적으로나 직업적으로 큰 성공을 가져다 준 이 소설에 대한 일부 평단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듯하다. 알코올 중독에 무기력한 노동자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제르미날>을 쓰기까지 8년 간 현실에 대한 그의 의식이 단선적으로 진화해왔다고 보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문제 제기를 반영하는 소설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마침 그가 20대 중반이었던 1866-67년 즈음(그리고 <제르미날>의 시간적 배경이 된 시기) 목격했던 프랑스 탄광의 파업과 무력 충돌 사건들이 그의 시선을 파리가 아니라 탄광 지역으로도 돌리게 했을 법하다. <제르미날>을 읽는 독자는 탄광 주변과 갱 내부의 현장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다는 것을 감지할 것이다. 작가는 탄광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의 동작과 주요 장치의 명칭마저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번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에밀 졸라는 이 소설을 쓰기위한 자료 수집 차 방문한 르나르 탄광에서 폐쇄공포증이 심한데도 지하 675미터 깊이의 탄광으로 들어가 실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의 미묘한 변화는 불가피하게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역자도 언급하지만, <제르미날>에서 보이는 에밀 졸라의 시선이 ‘이원론(흑백논리)적 시각’을 탈피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 ‘혁명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작가가 아무리 노동자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발견하고 있다고 해도, 이들의 선한 모습만 묘사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도정에서 각 존재는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이를 테면, 상점주인 메그라가 음식 외상을 하러 온 여인들을 외상을 빌미로 탐욕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메그라는 파업 기간 중 건물에서 떨어져 죽지만, 폭도가 된 광부의 부인들에 의해 신체가 훼손되는 사후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또 에티엔이 하숙을 하는 동료 마외의 집 둘째 아들(11살)인 장랭은 탄광을 지키던 소년 병사 쥘을 뚜렷한 이유 없이 칼로 죽인다. 또 그의 할아버지 본모르 영감은 어떤가.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이긴 하지만 탄광 자본가의 딸 세실의 목을 졸라 죽인다. 심지어 주요 인물인 에티엔은 매몰된 탄광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의 연적인 샤발을 돌로 찍어 죽인다. 이 정도라면 문자 그대로 막장이 따로 없다. 이웃집에 대한 뒷담화로 치고받는 싸움 정도는 매일의 일과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탄광 회사 사장과 같은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 중에서도 엔보 사장처럼 편협한 인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동정적인 드뇔랭 사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이들의 세계도 엔보 부인과 조카 폴 네그렐의 불륜처럼 각 계급 사회의 풍경은 광부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두 세계는 인류가 속한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면모에 주목하고 지켜봄으로써 작가는 대상들과의 거리를 성공적으로 확보하는듯 보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러한 시선은 계급을 떠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연민’을 지닌 작가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작가의 시선은 글의 스타일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민중’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느 한 진영을 미화하기만 하거나 비판하기만 하는 시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은 비평가 에리이 아우어바흐가 말한 스타일의 혼합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적인 삶, 일반인의 언어가 유입되고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여 얽히는 과정을 이 작품은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민중은 그들의 언어를 얻게 됨으로써, 그리고 다양한 계급의 언어가 뒤얽혀 상호작용하는 장으로서 소설은 스타일의 혼합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타일과 관련한 이러한 특징은 <목로주점>보다 <제르미날>에서 한발 짝 더 나아간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겠다. 


곧 소설이 지니고 있는 스타일의 혼합적 특성은 부르주아가 아닌 노동자들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들은 단순히 미궁에 갇힌 괴물 미노타우루스의 먹이가 되는‘고깃덩이’로 남는 것이 아니며, 이들이 개미집을 만들고 있는 땅속 곤충들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스타일의 혼합적 특징은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데 기여한다. 다시 말해 에밀 졸라가 보여주는 스타일의 혼합적 특징은 보이지 않던 광부들이 인간의 얼굴을 지닌 존재로, 가시 영역 속으로 등장하게 한다. 


 소설에서 탄광/수갱은 괴물의 창자로 비유된다. 매일 700명의 광부들이 내려가는 지하 세계는 바로 괴물 미노타우루스의 거대한 창자다. 광부들은 이 괴물의‘하루 치 식량’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이 괴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존재다. 에밀 졸라가 바라보는 인간은 다윈의 진화론으로 모든 존재의 최상위 자리에서 ‘전락’한 인간이다. 다른 생명체들과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선은 광부들의 삶과 이들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소설의 지배적인 장면을 구성하도록 한다. 스타일의 혼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득력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스타일은 그의 시선과 결을 같이 한다. 또 이 스타일은 작가가 여태껏 보아왔던 부르주아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민중’이라는 세계를 발견하고 이를 이해하려는 집요한 시도의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의 스타일은, 잘 보이지 않던 대상들(광부들)에 빛을 비추어 보이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자본가의 가축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존재들의 두상을 비로소 인간의 얼굴로 보이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결말에 대해 주목해본다. 내게는 소설의 결말이 조금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광부들에게는 '실패'로 끝난 파업을 사실상 이끌었던 에티엔은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과 돌팔매질을 받지만, 남편 마외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고, 아들 자샤리는 매몰된 여동생 카트린의 구조 작업 중 가스 폭발로 타 죽었으며, 결국 구조되지 못하고 굶어 죽은 딸 카트린, 파업 기간 중에 역시 굶어 죽은 딸 알지르를 떠나보낸 어머니로서 라 마외드의 원한이 너무나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라 마외드는 떠나는 에티엔과 악수하며 “이건 절대 자네 잘못이 아니야. 이건 우리 모두의 잘못인 거야.”(360)라며 에티엔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상황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행동은 성인의 수준이 아닌가. 땅에 묻은 씨앗이 싹을 틔워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처럼 작가가 ‘인간이 자라나기를’ 아무리 기대했다고 해도, 파업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의 원한은 상당히 축소가 되어 있거나 작가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진다. 여기에 주목하는 일이 소설의 전개에 불필요하다고 여겼을까. 피해자 유가족들이 에티엔에게 내비치는 원망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최소화되어 있다. 내게는 이 지점이 의문스럽고 성급한 결말로 여겨진다. 나아가 파업의 실패에 대한 부채의식이나 보름에 가까운 매몰 현장에서 생존한 자의 트라우마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내가 의아했던 것은 에티엔이 커다란 저항 없이 마을을 떠나는데다 그 주위로 조성되는 밝은 풍경 묘사와 희망에 대한 전망 때문이다. 내게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임에도 결말의 분위기는 옥에 티로 남을 것 같다. 특히 파종의 달인 4월,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제2권, 369면)는 장면으로 떠나는 장면이 내게는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고 병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결말이 갑작스럽고 생경하여 낯선 분위기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결말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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