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에 관한 단상:

 <목로주점>과 <제르미날> 들여다보기


 

에밀 졸라, <제르미날>,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4)





 몇 년 전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다 읽고 곧바로 팔았던 기억이 있다. 작가가 묘사해 놓았던 도시 빈민가 노동자들의 삶을 따라가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던 까닭이다. 끝없이 추락하는 삶을 들여다보니 내 저질 체력에 남아 있던 에너지 마져 고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이건 작가의 사실적이고 집요한 관찰과 글쓰기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독자로서는 꽤나 힘든 독서 경험이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제르미날>을 만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몸이 조금 경직 되었던 것 같다.


오늘 들여다보는 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은 문학비평가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에서 언급된 '스타일'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모방'이라는 의미의 '미메시스'에는 현실에 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우리가 '현실 Reality'을 이야기 할 때, 이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의문이다. 거칠게 이해한 바대로 표현하자면, '미메시스'란 개념은 현실의 사진적 재생산이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는 주체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에 더 가깝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재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재하는 '현실'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정리해보면, 어느 작품의 '스타일'을 말할 때, 그 작품이 주는 시선과 감각, 현실의 묘사는 모두 작가라는 존재를 매개하여 재구성된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에밀 졸라의 '스타일'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특히 <미메시스>는 유대인이었던 저자가 나치를 피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서 했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까지를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거대한 문학의 흐름을 스타일의 변화 과정이라는 틀 위에서 논의한다. 특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서양의 두 기둥에 기반하는 '스타일'을 규정한다. 계급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스타일이 점차 민중이 목소리를 얻고 일상성이 작품에서 보다 진지하게 다루게 지면서 변화된 스타일을 조망하는 인상을 준다. 
























이 중에서 에밀 졸라는 사실주의의 맥을 잇는 자연주의의 실천자로서 언급된다. 1840년에 출생했으므로, 그의 생애는 현재의 파리 모습을 정비했다고 할 수 있는 파리 지사 오스망의 시대(파리 정비 기간은 1850-60년대)와 겹치고, 또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2공화국 및 제2제정 시기와 겹친다. 한편 1859년에 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가져온 유럽 지성계의 사건은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 에밀 졸라에게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기운 속에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적 시선이 무르익었을 테다. 사실주의에서 나아간 자연주의는 무엇보다 당시의 과학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고 이해된다. 현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찰과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이 실증주의적인 시선은 청년 에밀 졸라의 세계관의 틀을 주조했을 것이다. 


그가 58세이던 1889년에 당시 공화국이었던 프랑스 대통령앞으로 편지를 보냈던 사건, 곧 유대인 프랑스 장교 드레퓌스의 무죄를 탄원하는 편지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일간지에 보냈던 일이 있었다.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던 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에밀 졸라가 기꺼이 들어갔던 일은 작가가 평생 추구한 실증주의적 시선을 통한 진실의 힘을 본인이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당파가 아니라도 진실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도 숭배와 혐오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아마도 그의 용기와 진실의 승리를 믿는 무리가 있는가하면, 그의 존재 자체를 외면하고 싶었던 무리도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인물이었기에, 그가 3년 후 가스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이 사건이 정적에 의한 죽음이라는 음모가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미메시스>의 저자  에리이 아우어바흐가 소개했던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들여다보자. 에밀 졸라는 당시에 교류하던 공쿠르 형제의 문학적 지향(일반 평민, 노동자들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에 대해 크게 공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생각에 고무되어 소위 '루공-마카르 총서'를 기획하기에 이른다. 20권에 달하는 이 총서 연작은 '혈연적 인연을 맺게 된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기획이다.  <제르미날>의 역자는 해설에서 루공-마카르 총서를 "제2제정기 한 가문의 자연사와 사회사"를 다루었다고 정리했다. 이 작업은 아마도 우리의 대하소설 <토지><혼불>, <태백산맥>과 같은 문학적 성취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문학적 시도를 우리도 앞으로 더 기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대가 이미 변했기 때문이다.


<제르미날>의 시간적 배경은 에티엔 랑티에라는 20살의 기계공이 해고된 후 추운 늦겨울에 일자리를 찾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때는 에티엔이 1866년 3월 파리 북부 가상의 도시 몽수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끝은 1년 후인 1867년 4월이다. 소설은 이 13개월 간의 이야기다. 가상의 도시 몽수는 프랑스어로 '돈으로 만들어진 산'이란 의미를 지니는 탄광 지대다. 이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을 캐는 광부로 살아간다. 참고로 1860-1870년대의 프랑스는 전반적인 산업이 위기를 겪었고, 특히 탄광의 파업과 충돌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50-60년대의 파리 시가 정비를 비롯하여 운하나 거대 토목 사업 뿐만 아니라 1860년대에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하던 멕시코 전쟁의 여파 등을 고려하면 거대한 자본이 평민들의 삶을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놓고 소설과 만난다면 <제르미날><목로주점>에서 읽을 수 있는 빈민가와 가난한 노동자들의 '체념과 절망'을 조금은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수로부터 뽑아낸 자원과 노동력 등을 소수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만 쓰인다면 다수의 삶은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2024년 현재의 대한민국 처럼 말이다. 



건조하게 요약한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스포일러 있음). 


주요 인물인 에티엔 랑티에는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사생아(1846년 출생)다. 어릴 때 기계공 견습생이 되기 위해 프랑스 북동부 벨기에와의 접경 지역인 릴로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르미날>에서 그는 철도 작업장에서 책임자의 뺨을 때리고 해고되어 일주일동안 추위와 배고픔 속에 일자리를 찾아 여러 지역을 전전하던 중, 파리 북부의 가상 도시 몽수의 탄광 지역에 도착한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결원이 생겨 르 보뢰 탄광의 탄차 운반부로 일하게 되는데, 같은 작업반 동료 마외의 집에서 10명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들의 집안은 5대째 광부로 일해온 가문이다. 마외네는 아내 라 마외드(39세), 아버지 본모르 영감, 그리고 21살 장남 자샤리부터 이제 막 3개월 된 막내 에스텔까지 7남매가 북적이는 광부의 집이었다. 


 당시 산업의 위기와 탄광의 경영난으로 엔보 사장은 노동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노동계약을 광부들에게 제시한다. 이에 광부들은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이들은 당장 더 굶어야 하는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터에서는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갱 내부의 부실한 안전 시설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은 참아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족을 모두 굶기는 상황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점차 탄광 일에 적응해가는 에티엔은 이러한 동료들의 현실과 탄광회사의 횡포에 분노한다. 에티엔은 파리의 마르크스주의자 플뤼샤르와의 서신 교환과 꾸준한 독서로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혁명에 대한 꿈을 꾸면서 지도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게 된다. 급기야는 파업의 주동자가 되어 파업의 선봉에 선다.  


두 달에 가까운 파업으로 한계에 도달한 광부와 가족들은 숲에서 집회를 열었던 에티엔의 연설에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며 광기로 돌변한다. 분노에 찬 무리들은 주변 탄광 지역을 돌아다니며 시설을 파괴하는 등 급기야는 에티엔의 통제를 벗어나버린다. 회사 측이 파업 광부를 대신할 벨기에 광부들을 데려 옴으로써 대치 상태가 더욱 격화되던 중 탄광을 지키던 군인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마외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광부들과 가족들이 사망한다. 이후 파업은 광부와 가족에게는 실패로 돌아가고, 에티엔은 동료들로부터 지탄과 혐오를 받는 처지에 이른다. 


한편 급진적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을 신봉하던 에티엔의 동료 기계공 수바린의 시설 파괴 행위가 은밀히 자행된다. 같은 날 르 보뢰 탄광에 복귀한 300여 명의 광부 대부분은 수바린의 갱도 파괴로 무너져 내리게 되는데, 대부분의 광부들은 갱을 간신히 탈출하지만, 에티엔과 카트린을 비롯한 10여 명은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버려 지하에 갇히게 된다. 기계실과 보일러 실, 굴뚝마저 땅으로 사라져버리는 등 이들은 같은 길로 빠져나올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결국 르 보뢰 탄광은 모든 시설이 땅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이웃 운하의 물이 차 호수처럼 되어버린다. 그러나 지상의 동료들이 참여한 보름에 가까운 구조작업 끝에 에티엔 혼자 생존하여 구조된다. 이후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그는 떠나는 날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희망을 품은 채 기차역으로 향한다. 

   



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의 연관성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2권 370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제르미날>의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의 제목 ‘제르미날(Germinal)’은 ‘파종의 달’, ‘싹트는germer 달’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를 염두에 두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 보면 작가가 사람들에게 거는 일말의 희망 한 조각을 읽어낼 수 있다. 역사학자마다 규정은 다르지만, 미술 사조에서 볼 때 프랑스의 1870년대를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의 ‘벨 에포크’라 부른다면, 이 시절에 일터가 아니라 거리로 나온 광부들의 투쟁 속에서 졸라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여 주고자 했을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최초의 민중 소설로 여겨지는 <목로주점>은 작가가 37세였던 1877년에 출간하여 작가를 ‘부자’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작가의 현실과 달리 이 소설은 파리의 빈민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묘사했다. 남부 출신의 여인 제르베즈 랑티에는 파리에 상경하여 빈민가에서 세탁부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열심히 일하여 한 때 사람들로부터 신망도 얻었던 그녀는 저축도 하며 언젠가는 자신만의 가게를 갖고 넉넉하게 살 수 있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빈민가의 환경과 사람들은 그녀를 온전히 놔두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최후는 알코올 중독과 굶주림으로 쓸쓸하게 사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소설을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제르베즈를 비롯한 빈민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과 나태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몰락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에 맞서지 않은 무기력한 노동자들처럼 보인다. 작가의 시선은 빈민가의 현실을 핍진성있게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소설에서는 현실 묘사만 보일 뿐, 사회적 문제 제기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반면 8년 후인 1885년(45세)에 발표한 <제르미날>에서는 노동자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사뭇 달라진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목로주점>의 주요 인물인 제르베즈 랑티에의 사생아 에티엔 랑티에가 광부로 일하며 탄광 회사에 맞서 파업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가 실패하는 과정이 서사의 큰 흐름을 구성한다. 여기에서는 계급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탄광 회사와 노동자의 대립과 충돌이 냉정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 파업이 있기 까지 이곳의 광부들은 <목로주점>의 빈민가 노동자들과는 달리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광부들은 더 나은 삶을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탄광회사의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처우에 분노한 데다, 혈기왕성한 20세의 에티엔이 광부들의 지도자급으로 부상하여 이들의 선두에 서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은 <목로주점>의 ‘알코올 중독과 나태함’으로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빈민가의 노동자들과는 결이 다르다. 탄광의 광부들은 굶주리지 않을 권리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었다.  


<목로주점> 이후 8년 간 그의 시선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그에게 금전적으로나 직업적으로 큰 성공을 가져다 준 이 소설에 대한 일부 평단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듯하다. 알코올 중독에 무기력한 노동자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제르미날>을 쓰기까지 8년 간 현실에 대한 그의 의식이 단선적으로 진화해왔다고 보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문제 제기를 반영하는 소설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마침 그가 20대 중반이었던 1866-67년 즈음(그리고 <제르미날>의 시간적 배경이 된 시기) 목격했던 프랑스 탄광의 파업과 무력 충돌 사건들이 그의 시선을 파리가 아니라 탄광 지역으로도 돌리게 했을 법하다. <제르미날>을 읽는 독자는 탄광 주변과 갱 내부의 현장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다는 것을 감지할 것이다. 작가는 탄광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의 동작과 주요 장치의 명칭마저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번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에밀 졸라는 이 소설을 쓰기위한 자료 수집 차 방문한 르나르 탄광에서 폐쇄공포증이 심한데도 지하 675미터 깊이의 탄광으로 들어가 실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의 미묘한 변화는 불가피하게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역자도 언급하지만, <제르미날>에서 보이는 에밀 졸라의 시선이 ‘이원론(흑백논리)적 시각’을 탈피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 ‘혁명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작가가 아무리 노동자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발견하고 있다고 해도, 이들의 선한 모습만 묘사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도정에서 각 존재는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이를 테면, 상점주인 메그라가 음식 외상을 하러 온 여인들을 외상을 빌미로 탐욕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메그라는 파업 기간 중 건물에서 떨어져 죽지만, 폭도가 된 광부의 부인들에 의해 신체가 훼손되는 사후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또 에티엔이 하숙을 하는 동료 마외의 집 둘째 아들(11살)인 장랭은 탄광을 지키던 소년 병사 쥘을 뚜렷한 이유 없이 칼로 죽인다. 또 그의 할아버지 본모르 영감은 어떤가.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이긴 하지만 탄광 자본가의 딸 세실의 목을 졸라 죽인다. 심지어 주요 인물인 에티엔은 매몰된 탄광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의 연적인 샤발을 돌로 찍어 죽인다. 이 정도라면 문자 그대로 막장이 따로 없다. 이웃집에 대한 뒷담화로 치고받는 싸움 정도는 매일의 일과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탄광 회사 사장과 같은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 중에서도 엔보 사장처럼 편협한 인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동정적인 드뇔랭 사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이들의 세계도 엔보 부인과 조카 폴 네그렐의 불륜처럼 각 계급 사회의 풍경은 광부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두 세계는 인류가 속한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면모에 주목하고 지켜봄으로써 작가는 대상들과의 거리를 성공적으로 확보하는듯 보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러한 시선은 계급을 떠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연민’을 지닌 작가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작가의 시선은 글의 스타일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민중’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느 한 진영을 미화하기만 하거나 비판하기만 하는 시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은 비평가 에리이 아우어바흐가 말한 스타일의 혼합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적인 삶, 일반인의 언어가 유입되고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여 얽히는 과정을 이 작품은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민중은 그들의 언어를 얻게 됨으로써, 그리고 다양한 계급의 언어가 뒤얽혀 상호작용하는 장으로서 소설은 스타일의 혼합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타일과 관련한 이러한 특징은 <목로주점>보다 <제르미날>에서 한발 짝 더 나아간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겠다. 


곧 소설이 지니고 있는 스타일의 혼합적 특성은 부르주아가 아닌 노동자들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들은 단순히 미궁에 갇힌 괴물 미노타우루스의 먹이가 되는‘고깃덩이’로 남는 것이 아니며, 이들이 개미집을 만들고 있는 땅속 곤충들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스타일의 혼합적 특징은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데 기여한다. 다시 말해 에밀 졸라가 보여주는 스타일의 혼합적 특징은 보이지 않던 광부들이 인간의 얼굴을 지닌 존재로, 가시 영역 속으로 등장하게 한다. 


 소설에서 탄광/수갱은 괴물의 창자로 비유된다. 매일 700명의 광부들이 내려가는 지하 세계는 바로 괴물 미노타우루스의 거대한 창자다. 광부들은 이 괴물의‘하루 치 식량’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이 괴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존재다. 에밀 졸라가 바라보는 인간은 다윈의 진화론으로 모든 존재의 최상위 자리에서 ‘전락’한 인간이다. 다른 생명체들과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선은 광부들의 삶과 이들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소설의 지배적인 장면을 구성하도록 한다. 스타일의 혼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득력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스타일은 그의 시선과 결을 같이 한다. 또 이 스타일은 작가가 여태껏 보아왔던 부르주아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민중’이라는 세계를 발견하고 이를 이해하려는 집요한 시도의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의 스타일은, 잘 보이지 않던 대상들(광부들)에 빛을 비추어 보이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자본가의 가축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존재들의 두상을 비로소 인간의 얼굴로 보이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결말에 대해 주목해본다. 내게는 소설의 결말이 조금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광부들에게는 '실패'로 끝난 파업을 사실상 이끌었던 에티엔은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과 돌팔매질을 받지만, 남편 마외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고, 아들 자샤리는 매몰된 여동생 카트린의 구조 작업 중 가스 폭발로 타 죽었으며, 결국 구조되지 못하고 굶어 죽은 딸 카트린, 파업 기간 중에 역시 굶어 죽은 딸 알지르를 떠나보낸 어머니로서 라 마외드의 원한이 너무나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라 마외드는 떠나는 에티엔과 악수하며 “이건 절대 자네 잘못이 아니야. 이건 우리 모두의 잘못인 거야.”(360)라며 에티엔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상황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행동은 성인의 수준이 아닌가. 땅에 묻은 씨앗이 싹을 틔워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처럼 작가가 ‘인간이 자라나기를’ 아무리 기대했다고 해도, 파업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의 원한은 상당히 축소가 되어 있거나 작가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진다. 여기에 주목하는 일이 소설의 전개에 불필요하다고 여겼을까. 피해자 유가족들이 에티엔에게 내비치는 원망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최소화되어 있다. 내게는 이 지점이 의문스럽고 성급한 결말로 여겨진다. 나아가 파업의 실패에 대한 부채의식이나 보름에 가까운 매몰 현장에서 생존한 자의 트라우마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내가 의아했던 것은 에티엔이 커다란 저항 없이 마을을 떠나는데다 그 주위로 조성되는 밝은 풍경 묘사와 희망에 대한 전망 때문이다. 내게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임에도 결말의 분위기는 옥에 티로 남을 것 같다. 특히 파종의 달인 4월,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제2권, 369면)는 장면으로 떠나는 장면이 내게는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고 병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결말이 갑작스럽고 생경하여 낯선 분위기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결말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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