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 《1945 히로시마》
존 허시(John Hersey) 지음 | 김영희 옮김 | [책과함께] | (2015)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관련된 배경을 더 이해해보려고 《카운트다운 1945》와 《원자 스파이》, 그리고 《1945 히로시마》를 이어서 읽었다. 특히나 오늘(2023년 8월 24일)은 일본 정부가 오후 1시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앞으로 30년간 방류하기로 하고 첫 발을 뗀 날이기에 오늘을 기억해두고자 글을 남겨둔다.
1930년대 말에 독일의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이 핵분열의 가능성을 실험으로 처음 증명한 이후, 세계는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특히 맨해튼 프로젝트로 인류는 핵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불리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핵실험이라는 희생을 기어코 치르고 말이다.
《1945 히로시마》는 <뉴요커>의 기자 존 허시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한 달 가량 히로시마에 머물면서 원폭 피해자들 만나 대화하고 자료를 조사한 결과다. 이 폐허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여섯 명의 인물의 증언을 담고 있으며, 이후 40년 후의 이야기까지 더해진 보도 자료이다. 《카운트다운 1945》의 기록에 따르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상공 580미터에서 폭발하여 7만 8천여 명이 즉사했다. 이후 며칠에서 몇 주 동안 과도한 방사능과 열에 노출되었던 환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1945 히로시마》는 한 순간 폐허로 변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묘사한다.
1945년 7월 즈음, 이 때는 이미 나치 독일이 항복하여 원자폭탄의 위험이 사라졌음에도, 미국은 스탈린의 영토에 대한 야욕에 주목하고, 이 무기를 일본에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패색이 짙었던 일본에 대해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 아이젠하워나 맥아더가 있었지만, 빨리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을 승인한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일종의 무력시위 성격의 결정이었음을 지적한다.
한편 《1945 히로시마》에는 일본의 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피해에 관한 보도를 유포하거나 또는 이를 요구하는 시위 등을 신문 검열 규정을 비롯한 여러 조치들을 통해 엄격하게 금지”(234)했다. 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원자폭탄의 폐해에 대해 실감하게 된 것은 1946년에 발표된 존 허시의 《1945 히로시마》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원자폭탄 개발과 성공 스토리이면에 인류가 직면하게 된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요구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책에는 원자폭탄이 가져온 아비규환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도시를 한 순간에 폐허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참혹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내가 추가로 놀란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미국은 오펜하이머가 프로젝트를 떠난 후 수소폭탄을 개발한 역사 말고도, 소련과 영국 등의 핵개발 및 실험 기록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전쟁 이후, 각 국에서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개발이 이어지면서,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 및 정치가들이 우려한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다음 기록을 확인해보라.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의 핵개발 기록]
“1946년 7월 1일, 원폭 투하가 있은 지 1년도 채 안 되어 미국은 비키니 환초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그리고 1948년 5월 17일 미국은 또 다른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발표했다.”(229면)
“1952년 10월, 영국은 첫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고 미국은 첫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1953년 8월, 소련연방 또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238면)
“1954년 3월 1일, 제5후쿠류마루가 비키니 환초에서 행해진 미국의 핵 실험 때문에 방사능 낙진 세례를 맞았다.” (240면)
“1957년 5월 15일, 영국은 인도양의 크리스마스 섬에서 처음으로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249면)
“1960년 2월 13일,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에서 핵무기를 실험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은 처음으로 핵 실험을 실시했고, 1967년 6월 17일에는 수소폭탄도 터뜨렸다.”(250면)
“1974년 5월 18일 인도는 처음으로 핵 실험을 실시했다.”(253면)
책에 흩어져 있는 핵개발 기록을 모아보았다. 미국에 이어 영국과 소련이 핵실험을 했고, 이어서 수소폭탄을 개발하며 각 국가가 이를 또 실험까지 하며 핵개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60년대에 들어 프랑스와 중국이 핵무기 실험을 하고 수소폭탄에도 손을 대었으며, 70년대에는 인도가 핵개발에 뛰어들었다. 《카운트다운 1945》에 언급된 것처럼, 이제 파키스탄과 이스라엘도 핵무기를 갖고 있으며, 이제 북한도 지니게 되었다.
오늘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원전 오염수를 방류한 일 역시, 이런 핵개발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앞으로 30년 이상 축적될 오염수가 가져올 문제는 핵개발 시대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의미에서, 또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영향을 미칠 문제라는 점에서,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는 군수공장을 비롯하여 징용된 조선인, 일본으로 건너가 터를 잡고 있던 조선인들이 7만 여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피해자에는 분명 일본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이 원폭 피해자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면서도, 피해자 보상 문제에 있어서는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을 배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존 허시의 기록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지만, 전쟁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 보상 문제에 있어서도 외국인을 차별하고 꼼수를 사용하는 관행은 원전 오염수 방류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정권은 몇 년 뿐이지만, 국제사회에서 바다에 오염 물질을 투기하고 오염시킨 범죄에 대한민국은 ‘공범’으로 기억될 것이고, 그 책임은 남은 국민들의 몫이 될 것이다. 오늘 일본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원전 오염수 방류일을 기억해두겠다.
[참고] 절판되긴 했지만, '일본인이 가장 많이 읽은 후쿠시마 원자력 비판서'라는 부제가 달린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이자 물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책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도 추가해둔다. 지난 달에 읽었는데 리뷰로 쓸 기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