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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평점 :
《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원제: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2005)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지음 |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
그는 자신의 심연을 예민하게 들여다보고 언어의 바구니에 상실과 이질성이란 우물물을 어김없이
길어내는 작가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많이 접하진 않았지만, 그의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가끔 작가가 내뿜는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떤 경우엔
그가 현대 문명에도
살아 남은 ‘샤먼’의 숨겨진 사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앞을 지나치는 모든 존재의 생겨남은 한 치의 어김 없이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는 이들 존재의 소멸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는 현대인은 어쩌면 미래에 자신의 운명을 단단히 묶어 놓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목적, 방향감각을 분명히
지니고(있다고 믿고) 나아가는 이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또는 착각)을 의심하지 않는 ‘미래중독자’들인 셈이다. 문명인들의 모든 병은 어쩌면 이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말하는 ‘길을 잃는 사람’은 자신이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이들로 보인다. 이 새롭고 이질적인 감각으로 소멸을 향해 가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듯하다. 길을 잃은 이들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인정하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장 자신의 한 쪽 발을 어디에
내딛을 지에만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솔닛의 글을 따라가다 책의 끝무렵 눈에 들어온 문장들이 있었다.
한 맹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맹인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자신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으로 물건을 팔러 다닌다. 처음 가보는 길을 건널 때, 그는 타인의 도움을 당당하게 요청한다. 길을 잃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들 중에는 바로 이런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나와 상대 사이에 도움을 주고 받는
행위를 ‘의무’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필요한 하나의 ‘원리’로서 이해하는 일이었다. 맹인은 자신의 결핍(눈)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길 잃기의
기술’을
발휘하여 자존과 자유를 얻었으며, 나아가 세상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걸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때, 이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덜 다급하고 덜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명은 구성원 서로를 고립시킴으로써 길을 잃게 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솔닛의 말은 우리 윗 세대에게 이미 있던 하나의 원리, 이들이 자라면서 습득하던 ‘도움 주고
받기’의
문화를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한 가지 도움을 받으면
때로는 이에 대한 보답을 하나의 ‘의무’로서 여기기도 한다. 나아가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삶의 원리로 되찾을 수 있다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현재 ‘적대적인 세상이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할 것’이라 말하는 솔닛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번 독서에서 작가가 말하는
‘길 잃기의 기술’ 가운데 크게 공감하게 된
부분이다. 솔닛의 통찰은 언제나 놀랍고
근사하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걸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때, 이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덜 다급하고 덜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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