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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평점 :
토니 모리슨이 추적하는 타자화의 과정
- 《타인의 기원》를 읽고
토니 모리슨을 소개하는 데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경력은 언론 최고의 상인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이다. 여기에 한 가지 정보를 덧붙인다면, 그가 평생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문제와 마주하고 탐구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경력에서 놀랐던 부분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1993년에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수상했다는 사실이었다. ‘인종’과 ‘성’에 따라 다르게 흘러갔던 시간을 감지할 수 있었던 기록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소설가와 학자로 존재감을 분명히 남겼던 인물이다. 오늘 읽은 에세이 《타인의 기원》은 작가가 평생 추구해온 작업과 관심을 간결하게 정리한 글이었다.
저자는 무엇보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왜 필요했던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선 저자는 한 집단이 강한 결속을 바탕으로 타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구도를 유지한 채 이 집단을 지배 내지는 통제하는 데서 오는 이득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짐작하겠지만, 이 ‘타자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인종 차별이다. 작가 토니 모리슨이 평생 관심을 갖고 허물고자 했던 공고한 성이었다. ‘인종’이라는 개념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지적한 바 있는, 현생 인류의 ‘허구 지어내기 본능’에 딱 들어맞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는 토니 모리슨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하는 역사가 넬 페인터의 말 “인종은 관념이지 실재가 아니다.”(15)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허구적인 인종 개념에 근거한 타자화 과정은 ‘타자화된 집단’에 대한 지배권(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한 집단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상황 역시 역사가 브루스 바움의 한 마디, “인종은 권력의 결과물이다”(57)라는 말로 표현된다.
세계사에서 대표적인 인종차별 사례는 미국의 ‘노예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비단 미국인들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모든 ‘인종’을 포함하는 인간 집단에서 타자화의 과정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
이 메커니즘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이 타자화 메커니즘은 인간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전쟁과 애국심, 당파간의 대결, 계급 간의 투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여성’으로서 주로 백인에 의한 인종 및 남녀 차별의 문제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고민해왔다. 이는 그가 이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와 같은 작업을 평생 멈추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다만 《타인의 기원》에서는 주로 인종차별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서구 백인 사회에서 이 ‘인종’이라는 개념이 ‘권력과 통제의 필요’에 의해 발명되어진 관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 관념에 공고히 뿌리내린 ‘인종적 우월감’이 이들 집단의 결속 도구, 접착제가 되어 주었음을 거듭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자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저자에 따르면,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 이 대목을 읽고 곧바로 떠오른 기억이 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한 아이(아이는 자신이 국내 모 재벌 기업의 손녀라고 말하곤 했다)가 수업 중에 나를 보고 ‘아파트 경비원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이는 나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어보였다. 그저 해맑게 내가 입은 검은색 바지와 남색 폴로 티셔츠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모리슨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의 부모가 나와 같은 차림을 한(또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타자화하는 모습을 바로 아이가 습득하고 내면화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토니 모리슨이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언급한 타자화 과정 역시 남이 하는 것을 따라 배운다는 점에서 내가 겪은 경험과 다를 바 없을 것이었다.
다만 이 경험에서 내가 안타깝고 두려웠던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직 들여다보고 성찰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성장 후에도 지닐 수 있는 ‘무지의 선량함’이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습관적으로 말하거나, 상대방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성인이 되지 않길 바랄뿐이었다. 이 ‘무지의 선량함’이야말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따져보게 된다. 물론 나 역시 ‘무지의 선량함’을 가진 자의 범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의도적이지 않고,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선한’ 말과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지는 않은지, 나아가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악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무심코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거듭 질문해볼 일이다.
이제 저자는 인종차별의 정체성 정치에 관한 논의를 좀 더 정교하게 문학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는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백인 집단이 동원한 방법 두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는 이미 익숙하게 보아온 ‘폭력’이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힘든 방법으로, 제도 자체를 ‘낭만화’하는 일이다. 제도 유지를 위해 폭력에 호소하는 방식은 이미 많은 문학에서 제시되고 있다. 당장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가 떠오른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신체적·심리적 폭력은 타자화된 대상을 통제하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이다. 작가의 분노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보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들(백인 노예 주인들)이 채찍질을 하다가 지쳐 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하는 처벌은 교정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엄연히 사디즘 행위다.”(62)라고 말이다.
한편 토니 모리슨은 어렸을 때 집을 방문한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증조할머니는 방에 들어와서 바닥에서 놀고 있던 모리슨 자매를 보고 한 마디 내뱉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지팡이로 자신을 가리키며 “섞였구만, 이 애들.”(24)이라고 했던 것이다. 흑인에게 ‘섞였다’는 말은 단순히 ‘혼혈임’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는 말이 아니었다. 이 말은 ‘조상 중에 누군가가 백인 노예 주인에게 강간당했다’는 표현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섞였다’라는 표현은 흑인 가족에 대물림되어 상처를 주는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역시 ‘인종’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흑인들에게 (후손의 자기혐오와 같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나아가 저자는 영국 귀족 토마스 티슬우드의 일기를 통해, 노예에 대한 강간을 엄연한 ‘주인의 권리’로 여기고 있었던 정황을 고발하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노예 제도 유지에 동원되는 보다 정교한 방법은, 이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무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선호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토니 모리슨은 문학에서 그 예를 찾는다. 하나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노예 제도의 낭만화 장치를 언급한다. 백인으로서 스토 여사의 작품은 결국 백인 독자를 위해 쓴 소설이라고 지적한다. 백인과 흑인 아이의 순수함과 같은 장치를 통해 ‘노예 제도의 성과 낭만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41)고도 말한다. 토니 모리슨의 비판적인 시각은 우리가 단순히 노예제도에 대한 묘사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정밀하게 대상을 들여다보도록 주문한다.
저자의 민감한 눈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밍웨이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도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낭만화하는 방식을 찾아내었다. 이를 테면 《가진 자와 못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에서 럼 밀수업자 백인과 배에 탑승한 흑인이 쿠바 관리들과 충돌하여 총을 맞은 상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다. 두 사람이 모두 다친 상황에서 ‘흑인은 더 심하게 다친 백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나약한 흑인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에덴 동산 The Garden of Eden》에서는 헤밍웨이가 ‘검은 육체는 매우 아름답다’는 주제로 ‘판에 박힌 인종적 관념을 에로틱하고 매혹적인 느낌으로 교묘히 바꿔버렸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남성의 시각에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있는 독자(나를 포함하여)가 놓칠 수밖에 없는 지점을, 토니 모리슨은 정밀하고 능숙하게 짚어 독자를 일깨워준다.
평생 여러 방식의 ‘차별’ 문제에 주목하여 탐구했던 작가의 에세이 《타인의 기원》은 얇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는 20세기 흑인들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상황인데도, 여전히 실제적인 위험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우며 ‘흑인성’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지금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미 익숙한 성차별뿐만 아니라,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난민들에 관한 문제,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 문제, ‘성소수자’와 퀴어 축제와 관련한 문제 등에서 이 ‘타자화’의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는, 아마도 ‘타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에 대해 상상해보는 일은, 나 역시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울러 ‘어느새 타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의 연약함까지도 끌어안는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 ‘타자화’ 과정에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허구적 관념’에 기반한 ‘권력과 통제의 욕망’이 숨어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대작가가 타계한 지 4주기가 되어간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책에 소개된 그의 말 한마디를 인용하기로 한다. 어쩌면 이 두 문장에 책의 주제가 다 담겨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종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극화하기 위해 시종일관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종이라는 구성물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철저히 무의미한 개념인지 알리고 싶었다.”(112)
[책속으로]
[1] "인종은 관념이지 실재가 아니다."(15) - 역사가 넬 페인터의 말
[2]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
[3]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
[4] "(해리엇 비처) 스토는 노예제도의 성과 낭만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으며, 게다가 그것에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41)
[5]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은 ‘진짜’ 미국인이 되려면 태어난 나라와의 연을 끊거나 그 연을 아주 경시함으로써(자기 부정) 백인성을 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성’이 무엇인가 하는 정의는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곧 ‘피부색’과 동일한 의미가 되었다."(44-45)
[6] "인종은 권력의 결과물이다."(62) - 역사가 브루스 바움의 말
[7] "노예를 굳이 전혀 다른 종으로 취급해야 하는 필요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자기 자아가 지극히 정상임을 확인하려는 그들(백인들)의 절박한 시도가 아닐까 싶다."(62)
[8] "헤밍웨이는 이런 판에 박힌 인종적 관념을 에로틱하고 매혹적인 느낌으로 교묘히 바꿔버리기도 한다."(84)
[9] "이탈리아나 러시아 인이 미국으로 이민 오면 ‘고향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즉 백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 (이것은) 어쨌거나 항구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여러 장점과 특정한 자유도 따라온다. 반면 아프리카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한 번도 그런 선택권을 가져보지 못했다."(89)
[10] "오직 이타적으로 남을 돌보는 일만이 진정한 성숙에 이르게 한다."(92)
[11] "나는 기필코 값싼 인종주의를 무력하게 만들 것이며, 피부색에 대한 쉽고 간단하며 일상적인 집착을, 노예제도 그 자체를 상기시키는 이 집착을 절멸시킬 것이다. 그 신빙성조차 떨어뜨릴 것이다."(95)
[12] "나는 인종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극화하기 위해 시종일관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종이라는 구성물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철저히 무의미한 개념인지 알리고 싶었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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