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의 말 - 광기와 지성의 SF 대가, 불온한 목소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필립 K. 딕 지음, 데이비드 스트레이트펠드 엮음, 김상훈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왼쪽: 1960년대 초 모습 / 오른쪽: 1970년대 모습)





인간의 조건을 집요하게 탐구했던 작가의 인터뷰

- 필립 K. 딕의 말


필립 K. (Philip K. Dick,1928.12.16 1982.03.02데이비드 스트레이트펠드 지음

김상훈 옮김 | [마음산책] | (2023)

 



나는 글 쓰는 게 좋네. 정말로 좋아하지. 난 내가 창조한 등장인물들을 사랑하거든. (...) 책을 탈고하면 상실감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질 정도라네. (...) 소설을 탈고한다는 건 친구들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38)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의 원작자이자 SF 대가 필립 K. 딕의 인터뷰집 필립 K. 딕의 말을 읽었다. 딕은 캘리포니아의 명문 대학에 들어갔지만, 쓸모없는 지식을 배운다는 실망감과 불안증, ROTC 교련에 대한 거부감으로 대학을 중퇴했고, 곧이어 레코드 판매점 알바생이 되었다. 미래의 위대한 SF 작가에게 청년 시절은 대학을 관두고 나온 이후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십여 편의 소설을 광적으로 써댔지만 대부분 출간되지 못했던 암울한 시기였다.


 

이런 시절, 그에게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끝없는 자기 의심과 불안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처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쓰는 행위만으로도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그런 청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소설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소설을 쓰며 우정을 나누었던소설 속 등장인물과 영영 헤어지는 일과 같다, 라고 했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에서 작가 이전에 고독한 한 인간의 모습을 대면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잃어버린다고 상실감을 느끼는 남자. 나는 이걸 애착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가상의 인물과 형성한 긴밀한 유대감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진다.


 

광기와 지성의 SF대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작가에게 글쓰기의 기능은 글쓰기 자체였다. 그는 글쓰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표라고 했다.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써야 했던 그는 많이 쓰던 시절에, 5년 동안 장편 소설 열여섯 편을 썼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광기나 다름없는 작업 속도다.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던 딕의 글쓰기 생활을 엿보건데, 글쓰기(또는 그 행위)에 대한 그의 집착을 견딜 수 있는 부인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다. 훌륭한 작가와 훌륭한 남편이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일종의 불안증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글쓰기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글을 써댄 작가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난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던 게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되었던 거야.”(91) 어쩌면 이 위대한 작가에게 편집증은 그를 작가로 만든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인공지능이 큰 화두다. 하지만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가 로봇 R.U.R.(1921)에서 로봇이란 용어를 처음 쓴 이후, 그리고 아이작 아시모프가 아이, 로봇(1950)에서 로봇 공학의 3원칙을 천명한 이래로 과학자들이 뛰어난 성능의 로봇과 인공지능을 개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사람들이 줄곧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질문들을 간단히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딕이 인터뷰 곳곳에서 강연이나 작품을 통해 하려던 작업이 곧 진정한 인간을 정의하는 일이었다고 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작품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주제 두 가지 가운데 첫 번째 주제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첫 번째 주제는 본질적인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인간을 단지 인간인 척하는 존재와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네.”(152)


 

생물학적으로 인간일지라도 우리 가운데에는 안드로이드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작가에게 진정한 인간이란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예를 들자면, 그릇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아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54)가 딕에게는 진정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둘러싼 부조리에 맞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존재다. 그럼 작가가 집요하게 써나갔던 미래사회의 모습과 안드로이들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던 노력으로 수렴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인 인상으로 판단하자면, 작가 필립 K. 딕은 지독히도 고독했던 인물이었으리라. 물론 스스로 자처한 면이 있긴 했지만 어떤 이유가 되었건 그에게 글쓰기란, 자신을 고립시키는 보이지 않는 망토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안증과 우울감, 그리고 인터뷰어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일종의 피해망상이라는 증세와 마주할 수 있게 해준 삶의 조건이 아니었던가 싶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성찰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작가는 자신이 기득권이 아니며, 강자가 아니었기에 약자에게 공감한다고 했다. 또한 이것이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루저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졌던 이유로 볼 수도 있겠다.


 

필립 K. 딕의 말에서는 작가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와 더불어 말년의 생각들이 부분적으로 담겨있는데, 그 중에서 작가에 관해 한 언론(<악튀엘 Actuel>)이 발표한 기사 내용 중에서 인상 깊은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인용하며 마무리해본다.

 


놀라움은 피해망상의 해독제다. 놀라움을 많이 경험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당신이 피해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해준다.”(89)


 

원문의 놀라움이란 용어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이 용어를 삶에서 느끼는 경이와 같은 것으로 대체해보았다. 삶의 경이로움은 정확히 예상된 대로 일어나는 삶과 공고한 신념 체계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다. 오히려 우연성 속에서, 예기치 못한 발견의 순간 따라오는 경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놀라움을 느낄 줄 아는 존재야 말로 작가가 줄곧 질문으로 던지던,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필립 K. 딕이 끊임없이 글을 쓰며 44권의 장편과 120편에 달하는 중단편을 발표하며 이루어낸 작업은 결국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1] "나는 글 쓰는 게 좋네. 정말로 좋아하지. (...) 책을 탈고하면 상실감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질 정도라네. (...) 소설을 탈고한다는 건 친구들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38)

[2]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서 내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군. 나는 소설에서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네. (...) 내가 쓰는 소설은 그의 용기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겠지."(39)

[3] "(자신의 강연 <The Human and the Android>를 통해) 진정한 인간을 정의하고 싶었네. 왜냐하면 우리 중에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안드로이드인 사람들이 있으니까. (..) 컴퓨터는 날이 갈수록 예민한 사고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도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잖나."(53)

[4] "(진정한 인간이란) 예를 들자면, 그릇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아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 권위에 대한 일종의 망설임인데, 나는 이런 태도를 십대들, 이른바 ‘양아치 punk’라고 폄하되는 세대에서 봤다네."(54)

[5] "글쓰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표야.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 이를테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아내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글쓰기의 기능은 글쓰기라고나 할까."(66)
: 글쓰기의 기능에 대해.

[6] "개인의 삶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 (...)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사생활 범위의 축소야. (...) 모든 것이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간 거야."(75)

[7] "우리는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으므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었어. 따라서 우리는 위선적으로 행동하거나, 거짓말을 할 여유 따위는 없다고 해야겠지. (...) 감시받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완전히 정직하게, 일관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해."(77)

"감시의 역기능은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겠지. 이건 인구가 밀집한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 무슨 얘긴지 알겠나? 고립이나, 은둔 따위는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야."(77)

[8] "놀라움은 피해망상의 해독제다. 놀라움을 많이 경험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당신이 피해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해준다."(89)
: 딕에 관한 <악튀엘 Actuel> 기사 인용 내용.

[9] "전체주의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좌파 파시즘, 심리학적 운동, 종교운동, 마약 중독 재활 단체, 권력자들, 책략가들 따위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어. (...) 내가 옹호하는 대의는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의야. (...) 하지만 난 강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자에게 공감한다네.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본질적으로 반(反)영웅들인 건 바로 그 때문이야. 거의 루저에 가까운 친구들이지만, 나는 혹독한 세상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특질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네."(114)

[10] "첫 번째 주제는 본질적인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인간을 단지 인간인 척하는 존재와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네."(152)
: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의 주제를 이야기하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3-05-04 1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10여년 사이 몰라보게 늙었네요.
작가가 된다는 건 이런 외모의 변화도 감수해야하는 건가 봅니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으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탓도 있을 것 같고.ㅠ

얄라알라 2023-05-07 15:09   좋아요 1 | URL
사진 밑 캡션을 유심히 보았는데, 최대 19년 차이일 텐데 참 많은 변화가 느껴지네요.
장편 44권
120편의 중단편...후덜덜한 수준으로 창작을 하신 분이라, 산고로 치면 몇 년 내내 산고 겪으신 것과 같겠어요

얄라알라 2023-05-07 15: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한 책 함께 읽기, 올리버 색스 책을 마지막으로 요샌 겹치는 책이 많지 않았지만
저도 드디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읽으려 합니다
초란공님 올려주신 이 책은 안타깝게도 제가 사는 지역 전체 도서관에 한 권도 없어서 구매각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데, 리뷰를 너무도 이해 잘 가게 매끈하게 써주셔서 소설 읽기 전에 큰 도움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6-08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초란공님^^

이 페이퍼, 당선이네요. 넘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 책은 못 읽고, 다른 걸로 필립 K 딕 접했어요.
다시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