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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ㅣ 시대의 아이콘 평전시리즈 2
앤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 역사비평사 / 2021년 4월
평점 :
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
-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앤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역사비평사] (2021)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은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대한 짧고 강렬한 평전이다. 잡지 편집자이면서 인물에 관한 논픽션작가인 앤 C. 헬러의 군더더기 없는 글이 돋보인다. 간결한 평전인 만큼 아렌트의 대표적인 정체성을 규정하는 세 가지 사항에 크게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먼저 아렌트를 세계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게 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철학자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던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특히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공적·사적 관계, 그리고 유럽 대륙이 나치의 광풍에 휘말린 1930년대에 아렌트가 자신의 운명과 마주해야했던 경험 및 그가 지나야 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로 독자를 이끈다. 마지막으로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그를 다시 깨어나게 한 사건, 곧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언급하고, 이어서 그를 지식인 사회에서 인정받게 했던 역작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이 말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 중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아렌트는 <뉴요커>지의 기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44)이라고 말이다. 아이히만 자신은 ‘상부에서 시키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렌트의 기준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복종’은 나치를 지지한 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어렸을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학교 폭력 현장을 생각해보자. 눈앞에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을 경우,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방관자로 있었다면, 이 방관자는 결국 폭력에 대한 지지나 다름없다는 경고가 된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왔을 때는 또 어떤가. 집단 자체가 하나의 모순 덩어리인 상황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종종 거대한 생산 장치를 이루는 하나의 작은 부품처럼 되어야 한다. 부당한 것, 불합리한 것들이 있을 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 방관자로서 살아갈 때 결국 우리는 우리 삶을 규정하는 거대한 부조리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아렌트는 현대 사회와 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유형을 진지하게 고찰하여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우리를 어떤 선택의 경계로 내몬다. 더 이상 방관자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각 구성원의 판단과 행동 그 자체가 곧 정치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우리 삶의 문제점을 보다 더 진지하게 마주할수록 우리는 방관자일 수 없다.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요약해놓았다.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이 문장만을 본다면 아렌트는 시대를 너무 빨리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아렌트는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비추어 놓은 것만 같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의식은 그가 미국으로 망명을 한 이후 쏟아낸 글들을 거치며 보다 총체적인 시각을 형성해 갔고, 결국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편 아렌트에게 재능을 갖춘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는 또 다른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아렌트가 ‘유대인의 문제’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야말로 비로소 그에게 고유한 문제, 그와 불가분의 관계인 ‘정치적’ 문제가 되었던 셈이다. 유럽 역사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증오’는 꽤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어느 사회든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개신교를 비롯한 현지의 종교 및 문화에 대한 ‘동화’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동화’의 문제는 꽤나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였다. 단순히 종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경멸의 시선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들에게 동화의 문제는 곧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내면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06). 이는 곧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이 상황이야말로 창과 방패의 관계, 곧 모순이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동화’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어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만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단순히 고향을 떠나고, 고향을 상실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는 것, 곧 언어도 잃어버릴 위기를 에 놓이는 걸 의미했다. “가장 간명한 표현 수단인 ... 언어도 잃어버렸다.”(162) 이 말은 아렌트의 어머니 마르타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립된 생활을 하며 남긴 하소연이었다. 표류하는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렇게 다층적인 삶의 조건이 아렌트에게는 자신과 전혀 무관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들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사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9년 째 되던 1949년에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이 바로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인 셈이다. 저는 이 책을 ‘고독, 뿌리, 소속의 상실에 관한 명상록’(164)이라는 문구로 요약하면서, 책의 목적이 ‘사람을 잉여란 존재로 만드는 사악한 의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고독’, ‘소속감의 상실’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는 징후가 아닐까 해서다. 계층과 세대 간 갈등과 소외, 역사 및 전통과의 단절과 괴리가 이토록 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런 증상은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후기 산업사회의 모습, 이를테면 고도의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소외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이 70여 년 전 아렌트가 했던 경고를 떠올리게 하지 않은가. 우리 삶을 점점 더 좌지우지하고 정치력을 거머쥔 대기업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전체주의 세력과 다를 바 없다는 자각을 준다. 아렌트가 말한 상황과 현재 우리 사회의 조건이 잘 부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얼마나 취약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아렌트의 사상에 비추어 더욱 실감하게 된다.
저자 헬러는 아렌트가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아렌트의 행보는 어린 시절부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라 이해된다. 그럼 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밝힌 바를 이용하여 정리해보면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 안의 작은 아이히만’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우슈비츠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순간, 그리고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이런 문제들은 그에게 고유한 문제,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어두운 시대의 삶》은 아렌트의 사상과 저작들에 이미 익숙한 독자들보다는 입문자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아렌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표 저작 몇 가지를 중심으로 여기에 영향을 준 아렌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앤 C. 헬러는 태생적 조건(20세기 전반 유럽의 유대인)으로 경계인이 된 아렌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있지 않고, 이방인이 되고자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익숙함과 구태와 거리를 두고 새롭고 공정한 시각으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했던 한 정치철학자의 삶을 소개해주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래픽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도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은 ‘탈출’이라는 키워드로 미국으로의 망명 이전의 한아 아렌트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책이다. 이 그래픽노블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좀 더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책 속으로]
[1]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 재판을 받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말
[2]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3] "사람들이 모두 내면에 작은 아이히만을 갖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바로 그것이었다."(42)
[4]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이다."(44)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마지막에 쓴 문장
[5] "최소한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장점들을 강화시키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변호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111)
[6]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는 없었다."(117) "유대인이라는 것이 나의 고유한 문제가 되었고,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121)
[7] "내 삶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계기는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알게 된 날이었어요."(156)
[8] "(대규모) 만장일치는 합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광신과 히스테리의 표현과 다름이 아니다."(159)
[9]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10]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그녀는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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