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읽거나 말거나 - 쉼보르스카 서평집 ㅣ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봄날의책 / 2018년 8월
평점 :
사포의 시와 장미허브
-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
새로운 일을 하게 되어 책읽기가 쉽지 않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핑계겠지만, 일이 끝나면 거의 탈진 상태로 집에 돌아와 책을 펼치면 10분이 안되어 책상에 머리를 박고는 한다. 무언가를 읽는 게 힘들어졌다. 쓰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요새는 여러 블로그나 서재의 좋은 글들을 읽을 기력도 나지 않아 아쉽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수입은 줄어들어도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으려나 했건만, 내 몫의 삶을 살아내는 일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래서인지 매일 아침 흔들흔들 언덕을 오르내리는 마을버스 안에서 잠시 펼쳐보는 책읽기가 꿀맛이다.
최근에 아내가 직장에서 장미허브 하나를 받아왔다. 톡톡 건드리고 쓰다듬으면 기분 좋은 향이 공기에 가득해지고, 못생긴 내 손에서도 향기가 난다. 햇빛이 잘 안 드는 집이건만 그래도 거실 창가에 가까이 해놓고 통풍을 신경써주어서 그런지 잘 자라고 있다. 조금 웃자란 부분을 끊어서 빈 화분에 장미허브를 옮겨 심었다. 아내가 장미허브는 이렇게 해도 잘 자랄 수 있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며칠간 시들지 않고 상태를 유지하는 걸 보면 생존의 기로에서 한창 사투를 벌이는 모양이다.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매일 지켜보고 있다. 새로 심은 녀석도 톡톡 건드리고 쓰다듬어 보면 여전히 향이 퍼진다. 제약이 있긴 하지만 식물의 경우 본체로부터 나누어진 일부가 살아내는 모습을 보면 늘 감탄하게 된다.
장미허브를 톡톡 건드리다가 쉼보르스카의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에 눈이 가서 펼쳐보았는데, 마침 사포의 시집에 대해 짧게 리뷰를 남긴 페이지가 나왔다. 쉼보르스카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었던 사포가 남긴 시는 1만 여 편으로 추산된다. 그 중에서 전해지는 시는 550편이고, 다시 이 가운데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불과 몇 편이란다. 규모로만 보자면 ‘빈약한 파편’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쉼보르스카는 그의 시대에도 여전한 ‘사포 열풍’을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했던 시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머리와 팔, 발이 소실된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언급한다. 니케 상 주변에 떨어져 있는 손과 발 일부 조각들을 가리키면서 “만약 니케상에서 단지 몇 개의 발가락만 남았더라면, 과연 감탄할 사람이 있겠는가”(44)라면서 말이다. 마찬가지로 간결하면서도 절제되고 정곡을 찌르는 언어를 사용하기로 유명했던 시인, 자신이 쓴 시를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쳤던 시인 쉼보르스카가 생각하는 시의 본연은 뺄 단어가 보이지 않는 그런 완전체에 가깝다.
“몇 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는 단어 하나만 사라져도 시 전체 의미가 훼손될 수 있다.”(44)
하지만 시인은 비록 사포의 시가 대부분 잘게 부서진 조각 같긴 하지만 “시詩란 돌을 깎아내어 만드는 조각품이 아니다”(44)라고 말한다. 오히려 파편처럼 남아 있는 시와 시어를 통해, 시인의 숙련된 경험과 직관을 통해, 오히려 위대한 시인을 상상했다. 사포의 시집에 대한 아주 짧은 리뷰이지만, 나는 사포의 시들이 오히려 이 장미허브를 닮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각처럼 몇 개의 이파리만 남은 생명이 빈 화분을 만나 다시 살아내듯이, 단어만 남은 시어, 빈약한 파편들로 이루어진 사포의 시를 통해 고대의 시인은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 곁에 있는 셈이다.
흐린듯하지만 바람이 살살 부는 주말, 2000년 넘게 단어 몇 개가 살아남아 전해지고 여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 시와 시인의 삶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혹독한 전쟁을 겪으면서도 이 시를 읽었거나 시인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또 다른 시인의 삶도 떠올려본다. 모처럼 새로 심어 놓은 장미허브 앞에 앉아 잎을 톡톡 건드려보기도 하고 쓰다듬으며 향기를 맡아 보는 아침이다.
[1] "시詩란 돌을 깎아내어 만드는 조각품이 아니다" (44)
[2] "몇 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는 단어 하나만 사라져도 시 전체 의미가 훼손될 수 있다." (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