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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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ulveda) 지음 |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4)

 



삶의 터전을 연애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사랑하라

 



사랑에 관한 책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나중에는 그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숱한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는 이야기였네.

 


백인들의 문명이 세계의 자원과 금을 탐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아마존의 운명은 결정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문명은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혜롭게 살아가는 수아르 족과 같은 원주민을 미개인으로 규정하고, 숲을 밀어버렸으며, 동물과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대며 재앙을 몰고 왔다.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뒷담화와 무례한 오지랖으로 상처를 받았던 노인은 아내와 함께 문명이 개발하기 시작한 작은 마을 엘 오딜리오로 나와 정착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문명과 함께 혹은 그 이전에 오지에서 문명이 들어오도록 길을 만들곤 했던 선교사들이 아마존의 오지 마을 엘 이딜리오에도 도착한다. 마을을 떠나는 선교사 신부가 배를 기다리며 졸다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든 노인. 그는 더듬더듬 책을 읽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문자 없이, 때로는 글을 필요로 하지 않은 수아르 족과 밀림 속에서 살았던 노인은 글자를 읽으며 자신이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앞에서 인용한 대목은 아직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지 못한 노인이 선교사 신부에게 어떤 종류의 책이 있는지 묻고 나서 연애 소설에 대해 신부가 해준 답변이었다. 신부는 자신도 지금껏 연애소설은 두 권밖에 읽지 않았다면서. 신부의 대답은 신의 사랑을 제외하고 인간들의 사랑, 연애의 감정이 무엇인지 피상적으로만 이해했을법한 답변이었다.


 

연애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신부가 내린 정의를 읽다보니 학창 시절 거의 유일하게읽어보았던 책들인 무협소설이 떠올랐다. 무협소설에는 다양한 캐릭터를 지닌 영웅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남녀 주인공들이 함께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을 키워가던 그런 소설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칠레 작가 세풀베다의 대표작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이렇게 아마존 지역의 어느 오지 마을에 사는 노인을 서서히 장면 속에 등장시킨다. 작가는 아마존과 그 곳에 거주하는 원주민, 동식물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백인 문명과 책읽기를 이 소설에서 대비시킨다. 노인은 선교사의 책 소개를 듣고 어느 때보다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노인의 책읽기는 우리가 어릴 때 책을 처음 접하고 글자를 읽어나가기 시작하며 느꼈던 기쁨, 몰입의 행복감을 환기시켜준다. 음식을 음미하듯 한 음절 한 음절 따라 읽고, 낭독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또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 식으로 단어가 문장이 되자 노인은 이를 반복해서 읽었던 것이다. 독서와 관련한 인간의 인지기능을 연구하는 어느 연구자[1)]는 책 읽기가 인류에게 익숙하지 않은, 애초에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문자를 발명하고도 한 참 후에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접근이 가능했던 책은 인간에게 문자를 읽고 이야기를 음미하는 순수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어쩌면 불길한 예언과 함께 말이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라는 긴 이름의 이 노인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굶어죽을 정도로 힘들게 살다가 수아르 족으로부터 돌봄과 가르침을 얻는다. 밀림에서 자연과 더불어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것. 이즈음 아마존을 개발하려는 문명에서 온 이들, 금을 캐어 일확천금을 노린 노다지꾼들이 밀림에 출몰하면서 서서히 비극은 시작한다. 노인은 원주민 친구를 죽인 백인에 대한 복수를 총으로대신했다. 하지만 수아르 족에게는 이들만의 계율이 있었으니, 복수를 하더라도 이들의 방식을 따라야 했다. 노인은 백인의 총으로 복수를 했기에, 부족의 계율을 어긴 셈이 되었고, 부족을 떠나야 했다. 다시 엘 이딜리오라는 작은 마을로 돌아오게 된 노인은 이 곳에서 책을 알게 되고, 글을 읽는 기쁨을, 책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발견한다. 다만 이렇게 순수한 기쁨도 어느 날 떠내려온 금발의 백인 시체로 오래가지 않았다.


 

사망한 백인은 밀림 속에서 살쾡이 새끼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 먹이를 구하러 집을 비웠을 암살쾡이는 이제 인간을 상대로 복수에 나섰던 것이다. 이 금발의 양키는 밀림의 첫 번째 복수였던 셈이다. 노인의 말대로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153) 숱한 역사에서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을의 읍장은 사람을 공격하는짐승을 제거하기 위해 수색대를 꾸린다. 읍장은 밀림에 경험이 많은 노인에게 강요하듯 수색대에 포함시켜 밀림 속으로 길을 떠난다. 밀림 속에서 읍장이 보여주는 행동은 자연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맨발로 가라는 제안을 거부하고 장화를 신고 가다가 전갈이 바글바글한 진흙탕에 빠져 결국 장화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한 밤중에 전등을 키고 밀림을 깨워 일행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밀림의 법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자연의 이미지와는 매우 다르다. 밀림은 동물이 배설물을 배출하면 곧이어 밀림의 개미를 비롯한 동물들이 달려드는 곳이다.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밀림 속에서 생명을 잃으면, 개미들과 새들을 비롯한 숲 속의 동물들은 반나절도 안 되어 사체의 백골만을 남겨놓는다. 노인이 죽음에 대해 갖게 된 시각 역시 깊은 밀림 속에 살며 밀림의 규칙을 익힌 수아르 족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153)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밀림에 사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밀림 세계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이렇게 바라보게 된 노인은 지나치게 대담한 행동을 하던 암살쾡이가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새끼들이 사람의 손에 죽었고, 상처를 입고 비쩍 말라버린 수컷 살쾡이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상황을 떠올려본다. 아마도 암컷 살쾡이는 수컷의 고통이 긑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마지막 선택, 죽음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난 후 노인은 암살쾡이의 입장에서 이 짐승이 원하던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노인이 보기에 살쾡이는 속임수를 쓰며 조심스럽게 행동하기 보다는 대담한 맞대결의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다. 노인은 이 대결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소설은 이제 인간과 동물, 문명과 밀림 간에 벌어지는 최후의 대결로 이어진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유랑을 하게 된 작가였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신자유주의 정책과 권위주의적 강압 정책을 내세운 피노체트 정권의 위협으로부터 오로지 살기 위해모국을 떠나야 했던 인물이었다. 소설 속 노인 역시 자신이 살던 곳에서 자신을 압박하며 숨 막히게 만드는 삶을 피해 고향을 등진 사람이었다. 세풀베다도 유랑하는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작가의 눈길은 전 세계를 집어삼키는 백인 문명의 위력과 폐해, 그리고 희생자들에게도 머물렀다. 한 때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그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인간이 자연과 맺는 파괴적인 관계를 비판하고 회복을 촉구하는 소설을 쓰게 된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개발 문명 세력의 사주로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소설은 이렇게 탄생했다.


 

소설 속에서 노인은 사람을 공격하는 밀림의 짐승을 죽이려는 수색대에 마지못해 합류하게 되지만, 살쾡이와 벌인 최후의 대결 후 그는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린다. 자연 속에서 공존의 지혜를 잃어버린 인간은 자연의 복수에 또 다시 자연을 파괴하는 악의 순환 고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이러한 대결은 노인에게 결코 명예롭지 못한 싸움이었다. 인간이 자연과 벌이는 이런 무모한 대결과 갈등은 노인이 좋아하는 연애 소설 속의 사랑에 빠진인물 사이의 관계와 대비된다. 연인 사이의 행복을 가로막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연인들은 서로를 보살피며 결국에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노인은 부끄러움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강물에 엽총을 던져 버리고, 다시 연애 소설이 있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자연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자신만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으로 가는 길일 테다. 어쩌면 연애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통속적 구도와 교훈이야말로 자연을 파괴하며 자멸할 위기 앞에 놓인 인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아닐까



[참고] 1) 매리언 울프, 책 읽는 뇌, 다시, 책으로의 저자.


[1]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45)

[2] "낮에는 인간과 밀림이 별개로 존재하지만, 밤에는 인간이 곧 밀림이다." (130)
- 수아르 족 인디오의 말

[3]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서면 끝까지 헤매는 곳이 밀림이라고요." (138)

[4] "그들(수아르 족)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밀림 세계의 냉혹한 원칙에서 나온 죽음이었다." (153)
- 노인의 ‘죽음’에 대한 시각

[5]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 금발의 양키는 짐승의 어린 새끼들을 쏴 죽였고, 어쩌면 수놈까지 쏴 죽였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하지만 암살쾡이의 복수는 본능이라고 보기에 지나치리만치 대담했다. (...)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153)

[6]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 놓고 만 거야." (171)
- 죽어가는 수컷 살쾡이를 총으로 죽여 고통을 끝내준 노인의 독백

[7]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179)

[8]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이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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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1-25 15: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톤 체홉의 사랑에 관하여, 라는 단편 소설집을 보면 표제작은 불륜 관계의 사랑을 포기하고
아프게 결별하고,
그 안에 있는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연인-은 둘이 함께 하길 다짐하죠. 그들 앞엔 숱한 어려움이
있겠죠. ^^

초란공 2021-11-25 16:16   좋아요 1 | URL
소설가는 다종다양한 고난을 겪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저는 감사하게도 얌전히(?) 읽기를 바랍니다^^ 소설을 읽으면 혹시라도 있을 고난을 견딜 힘이라도 생길지도 모르겠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