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1632)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in, 1606-1669) 1606년에 태어난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이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에 얽힌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게 것은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 읽던 중에 이와 얽힌 이야기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해부학 수업이 있던 (1632 1),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는 제발트는 소설에서 우선 상황의 의전적 성격에 주목한다. 저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해부 행사는 레이덴 대학의 해부학 실험실이 아닌, 암스테르담의 화물계량소에서 공개 해부행사가 열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던 네덜란드의 분위기로 인해 당시에는 암스테르담의 하우트흐라흐트에 있는 유대인 구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무역이 활발했으며, 따라서 수입과 수출하는 물류의 계량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구역에서 1639년부터 1658년까지 19 살았다고 한다.

 


다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자.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직접 시연하던 해부 행사의 실험 대상인 시신은 해부 행사 당일 새벽에 절도죄로 사형을 당한 사형수 아드리안 아드리안스존, 일명 아리스 킨트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는 교수형을 당한 직후 그의 시신이 화물계량소로 이송되어 공개 해부 행사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시신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모자를 쓰고 깔끔하게 입은 튈프 박사의 옷차림과, 해부 과정을 관찰하고 있는 다른 참관자들(의사들) 또한 호화로운 정장차림이다. 소설가 제발트는 자료 조사를 통해 의전적인 해부 행사의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 주목하는 부분은 일반적인 해부 절차가 하복부를 절개하고 가장 먼저 부패가 시작되는 내장을 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시신의 손과 부분의 해부를 먼저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도죄로 사형을 내린 정황도 황당하긴 하지만, 제발트가 주목한 부분은 해부작업이 범죄를 저지른 손을 먼저 해부함으로써 의식이 갖는 보복적인 성격과 대중 교화적인 목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보이는 손은 시신에 가해진 폭력을 표시한다 제발트는 지적하고 있다. 행사가 의전적인 성격이라는 점은 해부작업이 끝난 엄숙하고 상징적인 연회가 개최되었다 사실이 뒷받침해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왕립미술관에 있는 가로 2미터 세로1.5미터에 달하는 그림을 보면 보다 실감나게 느낄 있을 같다.

 


한편 참관자들의 시선은 대개 시신의 해부 부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튈프 박사 너머의 해부학 서적에 주로 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유가 그림에서는 시신의 중심을 천으로 가리고 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알몸으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제발트는 이유보다는 시신의 부러진 목과 뒤틀어 놓은 손이라는 육체성이 이미 해부학 교과서에서 보이는 하나의 도표, 하나의 인간 도식으로 환원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시 그림을 보고 생각을 해보니 의미를 조금 깨달을 있었다. 시신의 해부에는 이미 죄인의 몸을 사용한 것이고, 하나의 식은 물체에 불과하다. 교과서에 부분적으로 그려진 육체의 도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일 것이다


 

토성의 고리 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행사 당일(1632 1), 당시 36세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참석했다는 점이다. 그림에서는 데카르트의 초상을 참조해볼 , 데카르트가 그려져 있지는 않은 같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학문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저서 방법서설  5 41세가 되던 1637 출판했을 ,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부학에 관한 내용을 여러 쪽에 걸쳐 언급할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시의 경험과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축적되었기 때문임을 있다.

 


하나 흥미로운 연결점은, 렘브란트가 그린 해부학 행사가 이루어진 10개월 후인 1632 11월에 렘브란트가 7 살게 하우트흐라흐트의 포르투갈-유대인 공동구역의 같은 블록 내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렘브란트이 공동구역에 1639년부터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스피노자가 7 되던 해에 이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렘브란트가 스피노자보다 26 연상이므로, 아마도 렘브란트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고 유명한 상인인 스피노자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자들과 대화가가 이런 공간에서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보면 무척이나 흥미롭다. 스피노자보다 36 연상이었던 데카르트와는 아마도 만났을 가능성 보다는 당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데카르트의 저서를 통해 그를 멀리서 보았을 같긴하다. 하나의 그림과 텍스트를 가지고 옆길로 빠져 나름의 상상을 엮어보았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점을 가지고, 해부학 행사가 있던 , 데카르트(당시36) 렘브란트(당시26) 같은 공간에서 각자 자신의 활동에 몰입했을 광경을 아울러 상상해보았다





[참고도서]

[1]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2] 스피노자 스티븐 내들러 지음 | 김호경 옮김 | [텍스트]

[3]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지음 |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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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엔가 오래 전에 만났던 <토성의 고리>
를 다시 읽었습니다.

제발트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경건
하게 읽었는데 이전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캄포 산토>도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읽고
이번에는 리뷰를 쓰야지 싶었는데... 생각대
로만 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초란공 2019-12-08 23:55   좋아요 0 | URL
저도 동감합니다. 이번에 렘브란트의 그림이 나왔던 부분을 다시 보니 새롭게 보였어요. ^^ <캄포 산토>는 저도 읽고 싶네요. <기초시>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영국에 있다는 ‘제발트 길‘도 걸으면 제발트가 묘사한 우울한 분위기가 다시 떠오를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