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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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 쓴 연작소설. 이야기들 하나 하나가 어쩌면 이리 날카롭고, 둥글둥글하면서도, 구수하고, 웃음이 나고, 그리고 아플까! 충청도 어느 곳의 몇 동네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들이 감칠맛나게 그려져 있다. 재미있다. 농촌의 현실을 이야기하되, 어느 쪽으로 지나치게 굴러가 빤히 끝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서리마다 작가가 지키고 섰다가 이야기의 바퀴가 진창으로 빠지지 않게 살짝 밀어주어서 모든 이야기들이 살살 알맞게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오호, 모르고 지나갔으면 한참 아쉬웠을 작가와 작품. 

다만 앞부분 작가의 말이나 뒷부분 작품 해설이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느낌이 있다.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한 세평을 미리 이야기해놓아서 생각을 더 나아가지 않게 하는 느낌, 뒷부분의 해설에서 이미 독자가 느끼는 걸 '다 안다'는 듯이 써놓은 부분이 좀 섭섭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려서.(사실 이건 그냥 투정이다. 마음이 딱 맞는 이들을 만나 선수를 빼앗긴 느낌인.) 

-돈이 되지 않는 농촌을 돈이 되는 도시로 바꾼다 하니, 조만간 만나기 어렵게 될 농촌과 농민들의 풍경을 나라도 적어 두려고 했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농촌의 현실을 우스개감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적잖이 걱정된다.

-오래전의 이야기같다는 평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요즘 내가 사는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엮은 글이다.(작가의 말에서. 7쪽) 

이런 염려와 변명은 작가 입장에서 할 만하나, 작품의 질이 그 모든 걸 상쇄한다. 임진택 씨가 해설해 놓았듯이 마침내 이문구 선생의 계보를 잇는 수준 높은 작품이 나왔음을 기쁘게 여기는 독자 입장에서 보건대. 독자 누구라도 소리 내어 읽어볼 수밖에 없게 하는 맛깔나는 문장들. 읽으며 간단 없이 키득거려야 하는 보기 드문 이야기들. 개중에는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리는 페이소스까지. 정말 작가가 써놓았듯이 도시 사람들이 시골 가서 그네들은 맛 없어 밀쳐놓은 음식을 시골의 맛이네 뭐네 하며 심취하는 그런 웃긴 느낌이긴 하지만 시골음식처럼 간이 깊고 알맞다. 2008년 마지막에 발견한 보석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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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09-01-02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구 선생님 계보라니 .. 흥미가 생기네요. 전 새해를 맛깔나는 책으로 시작할수 있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파란흙 2009-01-05 11:27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으며 간만에 흥분됐어요. 순전히 제 느낌만일수도 있지만 이문구 선생을 떠올렸더랬죠. 좋은 책으로 새해 시작하시고, 파란님과 주변에 좋은 일 많이 생기기 기원합니다.
 
지귀, 선덕 여왕을 꿈꾸다 푸른도서관 27
강숙인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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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선덕여왕은 젊고 아름다우며 하늘거리는 금관 아래 영롱한 귀걸이를 한 모습이다. 그분의 예순 넘은 나이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버지 진평왕의 재위가 53년 동안 이어졌고, 선덕여왕의 재위는 16년. 그녀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그랬겠구나. 그동안 선덕여왕 아닌 덕만 공주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이 참 희한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나이 든 공주였던 그녀. 더 희한한 것은 불과 며칠 전 지귀설화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던 우연의 일치다. 이 책을 만나려고 그랬던가 싶은. 나는 순수한 지귀의 사랑이 화마(火魔)로 화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 결말이 늘 마음 아팠다. 과유불급이라는 걸까? 사랑도? 다정도 지나치면 병이라 하니, 시쳇말로 스토커 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은 걸까? 지귀의 사랑은? 그러나 생각컨대 상대를 괴롭혀 내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리 깊어도 사랑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그런 사랑 말이다. 여왕, 지귀, 광덕..그들 각자의 사랑.  

평생을 홀로 산 선덕여왕에게는 정말 사랑이 없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개연성 있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만약 지귀 이야기가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면 영묘사 화재 사건과는 어떤 고리를 지니고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상상에서도 출발한다. 그리고 상상이 한 자리에 모인다. 예순이 넘은 여왕은 어린 화랑 가진을 사랑했고 그건 그녀 인생의 유일하고 때늦은 사랑이었다. 비밀스럽고 비밀스러워 결국 홀로 간직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랑. 열일곱의 평민인 지귀는 선덕여왕을 사랑한다. 때이르고, 가여운 사랑. 여왕의 사랑은 눈부시고 아름다운 젊음에 대한 동경과 섞였고, 지귀의 사랑은 충성과 섞였다. 그래서 사랑이 덜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더 진한 핏빛을 띠었다.그들의 사랑 역시 다른 사랑과 똑같이 아름다웠다. 슬픈 아름다움.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책의 많은 부분은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어내게 된 배경에 할애되어 있다. 그런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김춘추 측의 고민과 이를 저지하려는 반대쪽(비담, 염종)의 울분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생히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회오리가 사랑을 뒤흔들게, 그렇게 안배해 놓았다. 참 얄궂기도 한 작가의 상상력이다. 선덕여왕이 사랑한 가진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 책에서는 결국 반란을 일의는 염종의 아들이다. 역모의 끝은 비극이다. 지귀는 가진의 인품에 반하여 그의 낭도가 되고 싶어 했지만 은혜를 베푼 김유신의 사주를 물리치지 못하고 염탐을 한다. 그의 흠모의 대상은 역적이 되고 만 가진이며, 그의 사랑은 조국 또는 선덕여왕이다. 어떻게 보면 삶에는, 사랑에는 늘 저런 이율배반적인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아름답되, 슬픈 것이다.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상상력과 애잔한 사랑에 쉬지 못한 채 단숨에 책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나는 <마지막 왕자> 이래 강숙인 작가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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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지리를 만나다 - 생활 속 지리 여행
이경한 지음 / 푸른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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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범위에 대해 새삼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지리라는 것으로 묶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서다. 이 책은 마치 지리가 아닌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한 쉽고 부드러운 에세이. 아무리 제목에서 일상에서 만난다고 써 놓았지만 이렇게 하고도 '지리' 운운할 수 있겠나 싶어 사전에서 '지리'를 찾아 보았다. 지구 상의 기후, 생물, 자연, 도시, 교통, 주민, 산업 따위의 상태.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랬구나. 정말 많은 것들이 지리에 포함되는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리학자의 눈으로 본 세상이다. 저자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일에 지리가 들어 있다. 극장 좌석에서부터 납골당의 위치까지, 지리적 시각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참 당연한 듯하지만 새삼스럽고도 놀라운 일이다.  

그간 나는 일상에서의 지리라고 하면 내비게이션과 인터넷 지도검색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에 지리가 들어가는 지리정보시스템이니까. 그것의 편리성만 염두에 두었었다. 그런데 저자는 내비게이션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시각을 지녔다.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운전을 하다 보니 자기 주도적 운전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운전자는 머리 속에 도로 정보를 많이 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래 각인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장소의 지리적 현상이나 정보를 눈에 담을 기회도 줄어든다. 즉, 길눈이 어두워진다.(21쪽) 이 말은 일견 당연한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람들의 DNA 속에서 전승되고 계발되는 지리 정보 습득 능력의 저하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인공적인 시스템이 정지되는 날엔. 더구나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을 유심히 보는 습관마저 앗아가는 저런 도구들은 어쩌면 아름다움과 조화를 찾아내는 능력마저 떨어뜨려 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지리 정도 습득의 수동성이 가져오는 비인간화.(물론 이런 생각은 독자의 오버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또 하나. 우리의 산하 분류 체계는 신경준의 '산경표'에 집대성되어 있는 백두대간, 호남정맥 등의 전통적인 표현과 일본 지리학자인 고토 분지로가 1930년에 [조선산악론]에서 주장한 분류체계로서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의 표현 두 종류라는 것이다.(71쪽) 읽으면서 얼른 전통적인 분류체계에 호감이 갔고, 산맥이라는 이름이 싫어졌다. 그런데 학자인 저자는 좀 달랐다. 각 각 분류체계의 장단점을 설명하면서 필요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자고 다독인다. 마음이 급히 좁은 민족주의로 기울었던 귀 얇은 독자는 또 고개를 끄덕인다. 참 가벼운. 

지리학자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상당히 문학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시적이거나 서정적인 표현이 꽤 많이 눈에 띈다. 폭포의 형성과정인 침식을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살아 있는 폭포는 계속해서 상류 방향으로 이동한다. 어느 책에서 '강은 산을 넘지 못하고'라는 표현을 썼지만 강은 산을 넘을 수 있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128쪽) 그리고 편향수와 방풍림을 설명하면서는 또 이렇게 썼다. 나무는 지역의 기후에 적응하면서 자란다. 그리고 그 지역의 기후를 자신의 몸에 문신처럼 각인해 둔다. 세월의 풍상을 자신만의 기억 코드에 저장해 두고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환경 적응의 전형을 보여준다.(156쪽) 이런 식의 문학적인 표현들은 그저 지리학자의 글이겠거니 재미를 기대하지 않고 읽다가 맛이 우러나는 느낌을 받는 대목들이다.

이 책, 물론 지리에 대한 상식과 지식이 풍부히 들어 있다. 그런데 그게 전혀 전문적이어서 어떻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정말로 에세이처럼 편안히 읽힌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리는 이 책의 구성에서 보이듯 입지, 환경, 사회와 문화, 지형 경관, 기후와 식생, 경제 활동에 두루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그것이 모두 우리의 일상과 연관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지리와 참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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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커피문화 기행
장수한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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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관한 책을 검색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맛, '향기(아로마)'라는 것에 대한 탐미가 깃들어 있다. 꽤 오래 전 <커피의 역사>라는 책을 번역하고(개정판까지 나왔으나 지금은 절판인지 품절인지가 되어 지인들한테 인심 좋게 나눠 준 이 책이 내게는 없다.) 그 리뷰를 우연히 보다가 기대했던 책이 아니었다는 식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이 내게는 소설처럼 흥미진진했지만 혹자에게는 사뭇 전문적인(혹은 무거운 교양) 미시사로만 보여서 예상외로 건조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커피는 많은 이들에게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감상의 대상이다. 그건 커피가, 기분 울적하거나 단순히 한가롭다고 여길 때, 그저 담소를 나눌 때, 이른 새벽에, 한밤에, 식후에 마치 떼어낼 수 없는 동반자같은 친근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피에 관한 책은 독자의 구미를 맞추기가 매우 까다롭다. 감상을 어루만지면서도 가볍거나 무겁지 않아야 하고, 지식과 정보, 재미와 인문 교양, 실용이 잘 어울린 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다. 커피 애호가의 수준에서 씌어진 마냥 소박한 책이 아니라 역사가이면서 바리스타이기도 한 저자가 유럽을 순례하며, 곳곳마다의 커피가 개입된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삶의 모습, 경제적인 부분까지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짚어간다. 냉정히 보면 전문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여행기다운 평이한 어휘를 골라 써가며, 사진자료를 듬뿍 넣어 적어놓아서 누구라도 쉽게 커피의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하루 세잔이 넘는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라면, 커피에 마음 한 자락을 기대는 이로서의 의무라 할 최소한의 정보와 교양을 갖추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은 당신이 원하던 그 책이다. 전문적이지만, 커피 향이 풍긴다. 

커피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태생이 이슬람이며, 각성의 이미지다. 커피는 정신을 명료하게 하고, 누워 있던 사물을 일으켜 나와 사물의 거리를 정확히 재게 한다. 물아일체를 간구하는 기독교(천주교도 마찬가지)의 와인과는 정확히 반대쪽에 서 있다. 각성의 음료인 커피는 대화의 매개였고, 도입 초기에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반체제를 상징했다. 원래 커피가 상징하는 깨어남, 대화, 모임이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커피는 사적인 대화의 음료였다. 공적이고 제도적인 부문에 대한 비판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에 도움을 주는 음료였다. 커피하우스가 지배계층의 박해에 여러 번 직면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미지와 역할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는 커피가 새롭게 부상하는 시민게층의 이미지 음료였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80쪽) 

유럽의 어느 사회에서나 커피 마시기는 낡은 음료 관습과 새로운 음료 관습의 충돌을 통해서, 그리고 낡은 사회 계층과 새로운 사회 계층의 대립과 충돌, 또는 화해를 통해서 정착될 수 있었다.(89쪽)
 
이 책으로 다시, 지극히 사적인 음료인 커피가 그 때문에 오히려 매우 정치적(따라서 경제적이기도 한) 음료임을 깨달은 것은 재삼 놀랍다. 많은 경우 혁명이나 개혁이 커피와 이런저런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 커피가 여성들에게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허용되었다든가, 남성들이 카페를 차지할 때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든가 하는 것 역시 아마 이 음료의 정치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커피는 예술, 학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 늘 작가와 예술가들이 커피에 가장 만저 매료되었고, 커피에 대한 사로잡힘을 작품으로 토해냈다. 바흐가 그랬고, 괴테가 그랬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리고 독자인 나 역시도. 나는 하루 일고여덟 잔의 커피를 마시지만 99.99퍼센트는 인스턴트 커피이다. 커피 원두를 막 갈아서 신선한 향이 살아 있는 커피를 자주 접해보지 못한다. 어떤 커피 원두를 어떻게 배합해 얼마 만큼의 시간 동안 끓여 내는지에 별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얼마 전 친구와 커피 전문점에 가서도 친구는 '세고비아'라는 말이 들어간 새로운 커피에 도전했는데, 나는 또다시 익숙한 비엔나 커피를 시켰다. 이처럼 도전적이지 못해서야 어느 세월에 커피의 세계로 들어가 보나 싶었다. <유럽 커피 문화 기행>에서 펼쳐 보여주는 넓고 깊은 커피의 세계, 하여, 나는 오늘도 그 한 귀퉁이에서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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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철학소년 - 생각의 스위치를 켜라
김보일 지음, 구연산 그림, 고흥준 편집 / 북멘토(도서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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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 생각의 스위치를 켜라 등의 말이 표지에 적혀 있다. 딱 그 말대로 쓰이고 그려진 책이다. 청소년에게 보라 해놓고 턱없이 어렵고 머리 아프고 빽빽한 책들에 일침이라도 놓아주려는 듯 수준을 정확히 맞추었다. 글의 양도 알맞다. 하나의 꼭지가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짧고 명료하게 끝난다. 툭 던지듯 말 건네놓고, 생각 좀 해볼까 싶다가, 아, 머리 슬슬 아파지는데? 할 때쯤 확 끝나 버린다. 대부분의 꼭지가 세 쪽, 길어야 네 쪽이다. 게다가 그 속에는 그림도 들어 있으니까 읽기에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다. 쉬운 어휘와 간결한 문장도 부담을 확 앗아가 버렸다. 이렇게 쉽고 짧아도 할 말 다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할 말 다 한다. 아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던져서 철학 종합선물 세트 같은 느낌까지 든다. 중학생 정도에서 생각해 볼만한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을 망라해 놓았다. 큰 테마는 , 생각을 생각하자, 다양한 생각, 다양한 세계,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자, 과학 그리고 우리 삶의 터전까지 5개로 잡고 각각에 열 몇 개 정도의 꼭지를 넣어놓았다. 굳이 세어 보니 합이 79개이다. 거기에는 '다르다와 틀리다는 어떻게 다를까?' 같은, 제목만 보면 하도 많이 들어 와서 식상할 것같은 이야기도 들어 있고, '일본인은 과연 경제적 동물일까?' 같은 의외의 제목도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성인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는 이야기 같아서 읽어 보면 어딘가는 '좀 다른 점'이 낱낱의 꼭지마다에 숨어 있다. 슬쩍 훑어보고 '아는 이야기'로만 치부할 것은 아닌(이 책을 읽어 볼 성인에게 하는 말임)! 더구나 아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울 수 있다. 특별히 다독, 다작, 다상량하는 아이를 제외하고서. 

와중에 나와 내 딸(중2)에게 충격적이었던 한 대목. '지구의 주인은 누구일까?'라는 제하의 글이다.

지구상 모든 생물의 중량을 합치면 약 3조 톤인데 그 중 60퍼센트가 바로 미생물이다.(217쪽)

  우주는 약 130억 년 전에 탄생했으며, 지구는 약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고 38억 년 전에야 비로소 생명체가 태어났다. 생명체가 오늘날처럼 진화하기까지 전 기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세월 동안 단세포 생물로 살았으며,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던 생물 종은 무려 3천억 종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99.99퍼센트는 멸종했고, 지구의 역사 46억 년을 1년으로 놓고 계산을 해 본다면 인류가 태어난 것은 고작 12월 31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늦게 나타나고도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219쪽)
  
굵은 대목이 특히 충격적이었던 부분이다. 미생물의 저 대단한 무게라니! 게다가 갑자기, 우주의 탄생 이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고(카오스와 코스모스라는 말로밖에 가늠되지 않는데, 그게 결국 신화가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로), 90퍼센트 정도로 막연하게 알고 있던 멸종률이 99하고도 .99까지 간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고 기함했다. 인류, 언제든 소멸할 수 있는 종. 정말 별것 아니구나 싶은 통렬한 느낌이랄까.  

기말고사 기간이라 평소보다 조금 더 공부하는 딸에게 몇 꼭지를 읽어주며, 기말고사 끝나고 꼭 읽어보라 했다. 쉽고 재미있고 그러면서 가볍지 않다고. 아마 저자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어서,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림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싶다. 칭찬. 호감 가는 스타일에 아이디어가 반짝 반짝 빛난다. 꼭지가 많아서 양도 만만찮고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구연산이란 이름은 그림작가로서만 쓰는 이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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