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커피문화 기행
장수한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커피에 관한 책을 검색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맛, '향기(아로마)'라는 것에 대한 탐미가 깃들어 있다. 꽤 오래 전 <커피의 역사>라는 책을 번역하고(개정판까지 나왔으나 지금은 절판인지 품절인지가 되어 지인들한테 인심 좋게 나눠 준 이 책이 내게는 없다.) 그 리뷰를 우연히 보다가 기대했던 책이 아니었다는 식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이 내게는 소설처럼 흥미진진했지만 혹자에게는 사뭇 전문적인(혹은 무거운 교양) 미시사로만 보여서 예상외로 건조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커피는 많은 이들에게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감상의 대상이다. 그건 커피가, 기분 울적하거나 단순히 한가롭다고 여길 때, 그저 담소를 나눌 때, 이른 새벽에, 한밤에, 식후에 마치 떼어낼 수 없는 동반자같은 친근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피에 관한 책은 독자의 구미를 맞추기가 매우 까다롭다. 감상을 어루만지면서도 가볍거나 무겁지 않아야 하고, 지식과 정보, 재미와 인문 교양, 실용이 잘 어울린 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다. 커피 애호가의 수준에서 씌어진 마냥 소박한 책이 아니라 역사가이면서 바리스타이기도 한 저자가 유럽을 순례하며, 곳곳마다의 커피가 개입된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삶의 모습, 경제적인 부분까지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짚어간다. 냉정히 보면 전문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여행기다운 평이한 어휘를 골라 써가며, 사진자료를 듬뿍 넣어 적어놓아서 누구라도 쉽게 커피의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하루 세잔이 넘는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라면, 커피에 마음 한 자락을 기대는 이로서의 의무라 할 최소한의 정보와 교양을 갖추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은 당신이 원하던 그 책이다. 전문적이지만, 커피 향이 풍긴다. 

커피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태생이 이슬람이며, 각성의 이미지다. 커피는 정신을 명료하게 하고, 누워 있던 사물을 일으켜 나와 사물의 거리를 정확히 재게 한다. 물아일체를 간구하는 기독교(천주교도 마찬가지)의 와인과는 정확히 반대쪽에 서 있다. 각성의 음료인 커피는 대화의 매개였고, 도입 초기에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반체제를 상징했다. 원래 커피가 상징하는 깨어남, 대화, 모임이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커피는 사적인 대화의 음료였다. 공적이고 제도적인 부문에 대한 비판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에 도움을 주는 음료였다. 커피하우스가 지배계층의 박해에 여러 번 직면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미지와 역할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는 커피가 새롭게 부상하는 시민게층의 이미지 음료였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80쪽) 

유럽의 어느 사회에서나 커피 마시기는 낡은 음료 관습과 새로운 음료 관습의 충돌을 통해서, 그리고 낡은 사회 계층과 새로운 사회 계층의 대립과 충돌, 또는 화해를 통해서 정착될 수 있었다.(89쪽)
 
이 책으로 다시, 지극히 사적인 음료인 커피가 그 때문에 오히려 매우 정치적(따라서 경제적이기도 한) 음료임을 깨달은 것은 재삼 놀랍다. 많은 경우 혁명이나 개혁이 커피와 이런저런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 커피가 여성들에게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허용되었다든가, 남성들이 카페를 차지할 때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든가 하는 것 역시 아마 이 음료의 정치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커피는 예술, 학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 늘 작가와 예술가들이 커피에 가장 만저 매료되었고, 커피에 대한 사로잡힘을 작품으로 토해냈다. 바흐가 그랬고, 괴테가 그랬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리고 독자인 나 역시도. 나는 하루 일고여덟 잔의 커피를 마시지만 99.99퍼센트는 인스턴트 커피이다. 커피 원두를 막 갈아서 신선한 향이 살아 있는 커피를 자주 접해보지 못한다. 어떤 커피 원두를 어떻게 배합해 얼마 만큼의 시간 동안 끓여 내는지에 별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얼마 전 친구와 커피 전문점에 가서도 친구는 '세고비아'라는 말이 들어간 새로운 커피에 도전했는데, 나는 또다시 익숙한 비엔나 커피를 시켰다. 이처럼 도전적이지 못해서야 어느 세월에 커피의 세계로 들어가 보나 싶었다. <유럽 커피 문화 기행>에서 펼쳐 보여주는 넓고 깊은 커피의 세계, 하여, 나는 오늘도 그 한 귀퉁이에서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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