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기의 예술
폴 오스터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굶기의 예술"을 고른 까닭은 "달의 궁전"에서 폴 오스터가 묘사한 배고픔에 대한 미학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라면 내면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애쓰는 작가인데, 그가 좋아하는 대가들 역시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다

역자의 지적대로 폴 오스터를 감동시킨 작가들은 대부분 오스터처럼 유태인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책 제목인 "굶기의 예술"은 노벨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기"에서 따 온 것이다

나는 오스터가 이 책을 읽고 "달의 궁전"에서 마르코가 보여 준 의도된 가난을 서술했으리라 확신한다

잠깐씩 보여 주는 함순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달의 궁전"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달의 궁전"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의도된 가난을 택한 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는 주인공의 독특한 심리 구조였는데, 함순은 그 심리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한다

의도된 가난이란 종교적 의미의 단식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이 아니라, 그저 내적 충동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자기 학대일 뿐이다

극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감으로써, 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예술을 추구하길 원하나, 배고프면 글도 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을 뿐이다

육체적 만족이 없으면 결국 정신적 성취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함순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죽든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일을 하든지 둘 중 하나의 아주 단순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죽으면 예술이고 뭐고 없기 때문에 주인공은 너무도 당연하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어쩌면 예술가의 이러한 치열한 고뇌나 내적 투쟁은 지나치게 미화되고 과장됐을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것이 예술이라는 범주에 속해 있을 뿐, 작가들에게는 먹고 살기 위한 직업으로서의 기능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작가에게 예술성의 추구를 위해 자신을 파괴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치 평범한 의사에게 슈바이처와 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처럼)

위대함은 글쓰기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자신의 생과 동일시 될 때 완성되는 건지도 모른다

 

오스터가 대담한 이집트 출신의 유태 시인 에드몽 자베스 역시 그런 사람이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2차 대전 중에도(즉 독일군이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도) 평화롭게 이집트에서 살던 자베스는, 유태교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집트에서 쫒겨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프랑스로 간 이유는 그가 지금껏 프랑스어로 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자베스는 자신에게 있어 글쓰기란 마치 자신이 유태인이라 낙인찍히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벗어 던지려 해도 벗어 버릴 수 없는 유태인이라는 표딱지처럼, 글쓰기 역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고백한다

유명한 "사자의 서"를 탈고한 후 그 때까지 잠잠하던 천식이 펜을 놓음과 동시에 찾아와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을 한 뒤, 그는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뒤쪽에 나온 오스터의 인터뷰를 보면, 오스터 역시 글쓰기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 주는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문학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다)

나는 오스터가 내면의 세계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작가라 생각했는데 (글을 길에 쓰길 좋아한다는 의미) 초창기에는 시를 썼다고 해서, 좀 놀랬다

시라면 상징과 은유, 함축 등의 기법을 이용해 생각을 압축해서 하고 싶은 말을 훨씬 적게 해야 하는데, 오스터의 이미지와 참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으로서는 거의 평가받지 못했다

오스터가 성공한 시점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산을 물려 받으면서이다

책이 안 팔려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린 오스터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죽으면서 약간의 유산을 남겼고, 그 덕에 몇 년간 글쓰는 데만 전력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곧 "성공"이라는 잔인한 등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고백한다

 

"달의 궁전"에서도 그렇지만 오스터는 우연이라는 기법을 차용하길 좋아한다

그것은 오스터의 표현대로 사건의 정황을 짜맞추려는 유치한 인과관계 성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명확한 인과 관계를 갖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오스터의 소설처럼 가난한 예술가가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도 우연히 한 통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삶의 대부분의 사건들은 우연한 일 투성이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

 

오스터는 소설가로 성공하기 전 평론가 일을 했는데, 여기 실린 글들은 그 당시 잡지 등에 기고한 것들이다

그가 분석한 작가들은 카프카를 제외하고는 다 모르는 인물들이라 완벽한 몰입은 어려웠다

그렇지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 내려는 사람들이라 모두 흥미롭다

특히 첫 장에 소개된 노르웨이 작가 함순의 "굶기"라는 소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가 "달의 궁전"을 읽고 작가의 의도에 대해, 혹은 등장인물의 묘사되지 않은 심리 구조에 대해 온갖 상상을 다했듯, 삶에 깊은 각인을 남긴 작가들에 대해 치열한 분석을 시도한다

(문학적인 분석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카프카의 말처럼 문학이 얼어 있는 강에 도끼를 던지는 정도의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책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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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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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이라면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를 무척 재미없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일본 최고의 독서가라고 하길래, 기대를 잔뜩 갖고 읽었는데 건조한 문체에 질려 간신히 읽었다

그래서 솔직히 이 책 역시 별 기대는 않했는데, 의외로 큰 소득을 거뒀다

역시 일본 최고의 지성인답다

 

이 책에서 가장 새로운 개념은 교양에 대한 정의다

교양이라면 그저 지식인의 스노비즘에 불과하다는 평가절하를 받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비춰 볼 때, 교양인이야 말로 인류 문화의 총체라고 평한 그의 주장은 새로울 수 밖에 없다

그의 주장은 인문학부가 존폐 위기에 선 요즘 같은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시대 역행적이라는 생각조차 든다

대학이 직업 교육장으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됐고, 신입생 티만 벗으면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런 대학생들에게 교양을 기대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기본적인 인간성으로서의 교양이 아니라, 일정한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교양을 갖추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고 불평할 만 하다

 

언젠가 주간지에서 요즘 대학 졸업생들은 회사에 들어오고 나면 실무 교육에 제대로 써 먹을 수가 없다며, 대학이 보다 실제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는 불평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기사는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줬는데, 대학이란 더 이상 학문의 지성소가 아니라 직업 훈련을 받는 곳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과거 유교 사회가 지나치게 학문적인 것에만 몰두해 과학과 기술을 천시한 것에 대한 반발인 양, 오늘날에는 순수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식으로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면 쓸데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철학과에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져 학과를 폐쇄해야 할 지경이라는 뉴스를 접할 때 만큼이나 몹시 착잡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마저 요즘 같은 테크놀로지 시대에 과연 퀘퀘묵은 고전들을 들입다 파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회의였다

(나는 가끔 실생활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참 남감해진다)

 

다치바나는 나의 이 의문과 회의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그가 말하는 교양이란 단순히 고전을 읽는 행위가 아니다

그는 교양을 "시대가 만드는 모든 이념 체계"라고 정의할 때, 현대의 교양이란 과학이라는 말을 한다

사실 우리는 최첨단 과학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동차, 컴퓨터, 유전자 공학, 우주선 등등 우리 주변을 둘러 보면 과학이 생활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 수준은 대단히 미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과학에 속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사이비 과학이란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을 직관에 의존해, 단지 증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과학 지식은, 어떤 직업을 갖느냐에 상관없이 반드시 알아야 할 교양이라고 한다

 

교양을 갖춘다는 것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종합하여 자신의 언어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총체적인 인식을 갖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치바나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사고 과정이란 정보의 수집, 평가, 이용 전달이라고 했다

그는 현대의 교양인이 되려면 인터넷의 검색 기능을 잘 익히는 게 중요한데, 그 덕분에 주입식 암기 교육은 구시대 유물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단순 지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옛날처럼 선생이 불러 주는 내용을 기록한 후 암기해서 시험보는 식의 평가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험장에 교과서도 들고 가고, 인터넷 검색도 허락해서, 단순 지식의 암기 여부를 물을 게 아니라 그러한 여러 지식들을 종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아직도 학교 교육이란, 대학 교육을 포함해서 교사가 불러 주는 내용을 받아 쓴 후 열심히 암기하는 방식이다

대학 입학 시험에 논술이 반영되긴 하지만, 토론 수업을 전혀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학원 강사가 집어 주는 몇몇 주제를 연습하는 식으로 준비하는 게 과연 제대로 된 사고 능력을 키우는 것인지 의심된다

우리나라 교육 제도는 일본을 상당 부분 본뜬 모양인데, 다치바나가 걱정하는 일본 교육의 문제점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와 유사하다

일본 역시 학교란 노는 곳이고, 제대로 된 공부는 학원에서 따로 한다는 식의 사교육 우선주의가 팽배해 있다

공교육에서 원하는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이미 대학 정원보다 입학생 수가 현저하게 모자라기 때문에, 대학은 학생 유치를 위해 입학 시험을 더욱 쉽게 개편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대학은 OX 문제만 풀고 들어가기도 한다

도쿄 대학조차 국영수 세 과목과 사회나 과학 과목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보기 때문에, 의대에 입학한 학생이 생물학을 전혀 배우지 않은 예도 흔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본인이 입시에서 선택하지 않은 과목은 고등학교 때 아예 배우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기본적인 과학 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학생에게 전문적인 대학 교육을 시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대학 당국자들은 실력 미달의 학생들을 위해 보충 수업을 실시한다고 한다

강의를 들을 수준이 안 되는 학생들에게 대학이 보충 수업을 시킨다니, 그렇다면 대체 입학 시험이 왜 필요한 것일까?

저자는 차라리 제비뽑기를 해서 대학 신입생을 결정하는 게 낫겠다고 통탄한다

 

일본의 도쿄대라면 우리나라의 서울대와 같은 위상일 것이다

(단순 비교로 보자면 서울대 보다 훨씬 높은 위상을 가졌을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서울대생은 바보가 됐는가"라는 책이 나왔다면, 일부 사람들은 저자가 서울대 출신인지 아닌지부터 따질 것이다

(강준만이 쓴 "서울대 죽이기"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사람이, 비서울대 출신의 서울대 콤플레스라고 폄훼한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저자는 이런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

도쿄대 출신에다가 3년 동안 교수로 초빙되어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은 학벌주의 사회에 일견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이제는 대학이 그 사람의 품질을 말해 주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어느 대학 출신인가가 그 사람의 보증서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즉 도쿄대를 나와도 바보일 수 있고 (상당하다고 지적한다) 삼류대라고 무시하는 대학을 나와도 훌륭한 사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셈이다

실제로 일본의 대기업들에게 사원들을 대학 출신별로 평가해 달라고 하자, 대부분의 항목에서 쿄토대와 와세다 대학 등이 1,2 위에 랭킹됐고 도쿄대는 7위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런 결과는 도쿄대생이 대학 이름이 주는 우월감에 안주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학생 선발 방식부터가 우수한 인재를 뽑기 힘들게 하고, 커리큘럼도 우수한 인재로 키우기 어렵게 만든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인터넷 시대에 "유비쿼스트 대학"을 강조한다

유비쿼스트란 어디에나 있는, 도처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본인이 배우려고만 하면 어디서든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더 이상 대학만이 지식을 전달하는 유일한 매체가 아님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대학에 들어가 대학 강의에 충실했다고 그가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대학 이외의 수많은 매체들이 (책과 인터넷 등등) 대학보다 훨씬 많은 정보와 지적 자극을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저자는 교양의 필수 요소 중 하나로 인터넷 검색 능력과 문서의 조작 능력을 꼽는다

(또한 저자는 현대가 미디어 시대임을 역설하고 누구나 미디어에 대응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의 자체도 특수한 전공 분야에 치우쳐진 마당에 강의에만 의존하여 학습을 끝내려 한다면, 21세기가 요구하는 진정한 교양인, 다시 말해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사실 저자는 스페셜리스트 보다 제너럴리스트를 높이 평가한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과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전작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제너럴리스트를 추구하는 모습이 왠지 신뢰감을 줄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제너럴리스트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제너럴리스트란 단순히 이것저것 잡다한 지식을 가진 만물박사가 아니다

스페셜리스트가 자기 전공 분야의 좁은 학문에 능통한 반면, 제너럴리스트는 여러 학문들의 기본 정신을 두루 섭렵하여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고, 최종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특히 리더에게 이런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자질이 요구된다

(몇 년 전, 손숙이 환경부 장관에 임명된 것에 대해 배우가 뭘 알아서 환경부 장관을 할 수 있냐고 비판하자, 강준만이 전문가 신드롬에 빠지지 말자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다치바나와 비슷한 논지였을 것 같다)

리더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문제를 대국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수적이다

도쿄대생이라면 대부분이 정부 고위 관료에 진출하는 사람들인데, 제너럴리스트의 자질을 기를 수 있는 교양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교양의 또다른 자질로는 창의성을 들 수 있다

창의성이야 말로 서구 국가에 한참 뒤지는 덕목인데, 일본 대학 역시 교수가 불러주는 내용을 열심히 필기해 암기 여부를 평가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취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어떤 교수는 강의록을 보고 그대로 읽느라 "한자로 된 일"이라던가, "아라비아 숫자로 된 일"이라는 말까지 친절하게 불러 준다고 한다

사실 암기 위주 교육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학생들의 학습 능력 저하를 우려한 미국 교육학자들은 오히려 동양식의 암기 학습을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초 교육에 대한 내용이다

필수적인 부분을 암기한 다음에는 당연히 활발한 토론과 깊이있는 연구가 수행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고등교육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까지 강의록을 불러 주고 베끼는 방식의 교육은 분명 문제가 있다

또 대학을 들어오기만 하면 졸업이 당연하게 인식된 것도, 저자는 대학 당국의 지나치게 인자한 태도라고 꼬집는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누구에게나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제공하되 (물론 기본적인 선별은 필요하겠지만) 일단 시작하면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졸업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교육 수준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타과 학생들은 어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의과대학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유급 제도가 없다면 방대한 양의 의학 공부를 6년 내내 고 3 학생처럼 열심히 공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유급 제도의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저자는 "다치바나 세미나"를 통해 학생들의 정보 수집, 조작, 전달 능력 등을 길러 준다

이 세미나는 자발적으로 조직됐는데, 그가 주제를 주면 팀을 이룬 학생들끼리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책으로 엮으면 다치바나가 평가과 지적을 해 준 후, 공식적인 출판을 통해 타인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이다

(나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출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활동은 실제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데 아주 유용하다

수동적으로 학습하는 게 아니라 직접적인 참여를 끌어 내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동적인 학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활동이 진정한 의미의 교양이라고 말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 최고의 독서가라는 평가답게 상당히 엄격하고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요구한다

모든 학생들이 이 수준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부심을 가져도 될만한 대학의 학생들이라면 그 자부심이 알맹이도 없는 헛된 속물 근성이 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도쿄대생에 대해 아주 시니컬한 비판을 하는데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다, 옛날부터 바보였다"는 식으로 자문자답 한다

다소 과격한 얘기도 있지만, 대학생이라면 (즉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저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대학 시절에 봤다면 좀 더 열심히, 자발적으로 대학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현대는 대학만이 유일한 학습 기관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학습이 끝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대학을 졸업한 사회인 역시 이 책에 귀기울일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교양을 쌓기 위해, 제너럴리스트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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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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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달의 궁전을 다 읽었다

한 소설을 며칠에 나누어 읽기는 처음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을 하룻밤에 다 읽으려고 들면 내용을 음미하지 못한 채 줄거리에 치우치게 될까 봐 하루에 읽을 분량을 정해 놓고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대단히 꼼꼼하고 진지하게 통독한 셈이다

 

오늘 등장한 인물은 에핑의 아들 솔로몬 바버다

마르코는 에핑의 유언장을 전해 주고, 그와 뉴욕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솔로몬이라는 남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특이한 외모를 가졌는데, 160kg의 비만에다가 대머리라는 점이다

책의 주인공이 이 정도의 고도 비만으로 묘사된 예는 일찌기 없었는데, 참 놀랍다

160kg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덩치다

폴 오스터는 이렇게 거대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세상에 적응해 가는지를 자세히 서술한다

(그의 아버지인 에핑과 아들인 마르코가 모두 삐쩍 마른 인물인 걸 보면, 솔로몬은 아마도 돌연변이인 모양이다)

 

솔로몬이 21세기에 살았다면 많은 재산으로 위 절제술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비만은 말 그대로 병이기 때문에 식습관 조절이나 운동 따위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

(그는 결국 등뼈가 부러져 입원한 후 음식을 튜브로 공급하게 되자 지나치게 살이 많이 빠져 면역력 약화로 죽고 만다)

솔로몬은 자신의 육체를 천형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책에서 만족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일부러 공원 등을 산책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법을 연습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침착하는 법도 배운다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사실을 깨달은 솔로몬은 생의 의지를 공부에 쏟아 부어 고등학교 졸업 때는 대표로 연설도 하게 된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미있는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여 졸업 후 여러 유명 대학의 러브콜을 받는다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 첫 직장을 잡은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성욕을 버린 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연애란 꿈도 못 꿔 본 솔로몬은 대학 교수가 된 후 자신감을 얻어 프로포즈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막 대학에 입학한 1학년 생이라는 것이다

몇 번의 구애를 거절당하다 우연히 그녀의 기숙사에서 정사를 벌이게 되는데, 불행히도 기숙사 잡역부에게 현장을 발각당한다

그는 대학에서 쫒겨나고 여학생, 에밀리 역시 학교를 중퇴한 뒤 멀리 떠난다

솔로몬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에밀리는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다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 사라진다

그 후 솔로몬은 그녀에게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 하고, 대학에서 쫒겨 난 후 자신감을 잃어 다시는 연애 따위는 꿈꾸지 않는다

 

그 가엾은 여학생이 바로 마르코의 어머니다

에밀리는 불행히도 단 한 번의 정사로 아이를 가졌고, 미혼모로써 불행한 삶을 살다가 마르코가 7살 되던 해 버스에 치여 죽고 만다

솔로몬 역시 그 경력이 오점이 되어, 또 그 거대한 외모 때문에 다시는 유명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름없는 시골 대학을 전전한다

그는 오히려 시골을 만족스러워 한다

시골 대학생들은 경험의 폭이 적어 솔로몬의 엄청난 장서들만 봐도 충분히 경의를 표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익숙해질만 하면 대학을 바꾸는 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었다

 

처음에 에핑의 아들 솔로몬이 마르코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지나친 우연의 남발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사실 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키티에 대한 것도 별다른 서술 없이 그저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는 식이라 좀 못마땅했다)

폴 오스터는 마르코의 입을 통해 "세상이 갑자기 우연에 뒤덮힌 것 같군요"라고 말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

그렇지만 솔로몬의 생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완전히 책에 빠져 들었다

에핑과 솔로몬과 마르코는 다같이 내면의 세계에 침착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그들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불행이 닥쳤을 때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데, 그들은 그 불행을 고행으로 생각하고 정신적 가치를 높이는 방편으로 여긴다

마르코는 가난 때문에, 에핑은 사막에서의 조난과 불구 때문에, 그리고 솔로몬은 비만 때문에 (여기서 비만이란 단순히 살이 쪘다는 얘기가 아니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고도 비만이다) 운명으로부터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운명을 받아 들이고, 책에서 해답을 찾는다

 

책은 이 삼대를 엮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마르코는 삼촌이 남긴 유일한 유산인 책을 처분하기 위해 미친듯이 그것을을 읽은 뒤 헌책방에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고, 에핑은 눈이 멀고 하반신 마비가 된 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비서가 읽어주는 책에 몰두했고, 솔로몬은 너무나 비대했기 때문에 움직이기도 어렵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 책을 읽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모두 불행한 상황을 독서로써 극복했다

또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책에 몰두하기도 했다

 

마르코의 불행은 키티와의 관계가 끝장난데서 비롯된다

그는 여러 행운들에 의해 아사 직전에 구출되어 에핑과 솔로몬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으나, 키티가 그의 곁을 떠나므로써 모든 것을 잃고 만다

키티는 처음부터 맹목적으로 마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일이 닥쳐도 절대 그의 곁을 떠날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나는 마르코의 행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불행은 늘 어처구니 없는 데서 시작한다

피임에 실패한 키티는 임신을 하게 되고 마르코는 강렬하게 아이를 원하지만, 무용수인 키티는 24세에 엄마가 되어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완강하게 버틴다

마르코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가 일찍 죽고 외삼촌 손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가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나 자신 보다도 더 큰 집단에 속하고 싶었다는 그 문장에서 나는 마르코의 뼈저린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전도 유망한 줄리어드 무용과 학생에게 임신이란 버티기 힘든 무거운 짐에 불과했을 것이다

특히 소설의 앞부분에 키티가 얼마나 무용을 잘 하고, 또 사랑하는지 잘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결별에 대한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키티 역시 부모가 모두 죽은 후 미국으로 이민 와 유색인종으로써, 또 고아로써 혼자 세상을 헤쳐나간 여자다

책에서는 그녀의 내면 세계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지만, 여러 상황으로 유추해 볼 때 그녀가 무용에 자신의 생을 걸었음은 분명하다

결코 평탄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라 어린 시절 다른 큰 집 가족들에게 많은 구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늘 건전하고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려는 마르코를 헌신적으로 돌보는데, 이러한 긍정적인 성격을 유지하게끔 만든 원동력은 무용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무용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그녀 역시 불행한 환경에 함몰되어 인생을 막 살거나 정상적으로 산다 할지라도 우울하고 어두운 성격을 갖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 키티에게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란 더 이상 무용을 할 수 없다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키티는 완강하게 출산을 거부하고 마르코와 격렬하게 다툰 후 결국 유산한 다음 이별한다

(이런 갈등 구조는 남녀 사이에 흔한 일이다 "고백"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연극배우인 정선경과 유부남인 유인촌이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하지만, 원치 않는 임신으로 둘 사이가 파탄났다 남성에게 임신이 격정적인 흥분을 가져온다면, 여자에게 임신이란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 되는 모양이다)

 

물론 키티 곁을 떠난 사람은 마르코다

남에 대해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보살핌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던 마르코는 그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키티 곁을 떠난다

키티는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또 마르코 역시 그녀를 너무나 그리워 하지만 내면적 고통이 이별을 견디는 쪽으로 가도록 한다

(키티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나도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별의 고통을 견뎌 내야 한다는 역설적인 이유로 말이다)

나중에 솔로몬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그가 죽은 후 마르코는 키티에게 전화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매달린다

그러나 너무나 뜻밖으로 키티는 그의 혼란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만나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이 상황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냉담해지는 것이었다"는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마르코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지만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키티의 그 대답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녀는 마르코를 아무 조건 없이 열렬하게 사랑했으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유산) 그가 떠나갔다

가족도 없는 그녀에게 이별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알 만 하다

그녀가 버티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에, 혹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철저하게 냉담해지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정의 증폭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렸을테니까

 

이런 키티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마르코는 엉뚱하게 딴 남자가 생겼냐고 묻는다

대답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이제 다시는 옛날로 돌아 갈 수 없다고, 키티는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키티가 떠난 후 마르코는 삶의 의지를 잃고서 방황한다

에핑의 동굴을 찾으러 떠났지만 (말하자면 그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이미 그곳은 수몰 지역으로 변했고, 설상가상으로 솔로몬이 남긴 유산 만 달러가 든 자동차도 도난당한다

그는 수중에 든 여행자 수표를 아껴 가며, 그 옛날 가난으로 굶어 죽기 직전에 센트럴 파크를 떠돌았던 것처럼, 이제는 태평양을 향해 국토 횡단을 시도한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자동차를 도난당해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에 다다른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그 옛날 가난으로 몸부림 치던 때 아파트 밖으로 보이던 레스토랑 "달의 궁전" 간판 대신, 진짜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삶의 새로운 시작점임을 깨닫는다

그의 수중에는 4백 달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에핑이 사막에서 버려졌을 때처럼 그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각오를 세운다

아마도 그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활기차게 삶을 시작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운이 좋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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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감성 마케팅
김영한.임희정 지음 / 넥서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옛날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결과는 아주 실망스럽다

혹 이 책을 읽고 스타벅스의 감성 마케팅에 대해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하워드 슐츠 회장이 직접 쓴 스타벅스 성공기를 읽기 바란다

어느 대학 교수를 겸하고 있다던데, 교수라는 직함이 주는 기대감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싶던 진짜 이유는 스타벅스에 대한 나의 신실한 애정 때문이다

나는 커피를 무척 좋아하는데 커피숖에서 마시는 커피는 참 맛이 없다

그래서 그나마 고소한 맛이라도 있는 원두커피를 마신다

그런데 스타벅스가 등장하면서 놀랄 만큼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됐다

특히 스타벅스 커피는 향이 깊고 맛이 진한데 일반적인 커피 함유량의 두 배를 넣는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스타벅스는 과대한 카페인을 공급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재료를 아끼지 않아서인지, 스타벅스 커피는 늘 만족스럽다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건 단순히 커피맛 때문은 아니다

스타벅스는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즉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서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문화를 소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고객들은 스타벅스의 커피만 마시는 게 아니라, 스타벅스가 주는 이미지까지 즐기는 것이다

이건 단지 내 생각에 불과했는데, 주간지에서 미국 특파원이 쓴 글을 읽고 남들도 나처럼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미국에서 스타벅스란 하나의 문화 공간이라고 한다

미국은 커피가 워낙 일상화 되서 우리처럼 특별히 커피만 파는 커피숖이 없었는데 스타벅스가 생긴 후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거나 일을 하는 공간이 생긴 셈이다

특히 무선랜 서비스가 되면서 노트북을 들고 기사를 쓰거나 레포트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 미국의 스타벅스는 대화의 장소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업무를 보는 곳으로 변했다고 한다

미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것이 바로 스타벅스가 성공한 진짜 이유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아마도 저자는 한국에 있는 스타벅스만 조사한 모양이다

그럼 차라리 한국 스타벅스의 감성 마케팅이라고 할 것이지...

나는 스타벅스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이해해, 스타벅스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의미라든지, 라이프 스타일을 어떻게 바꿨는지 등에 대해 서술하길 바랬다

그런데 책에서는 여성 고객을 공략하라, 계절별 메뉴를 개발하라, 한가한 시간에도 손님을 유치해라 등의 너무 뻔하고 당연한 얘기 뿐이다

말하자면 굳이 스타벅스가 아니더라도 기업 마케팅에 대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충고 뿐이다

저자는 스타벅스에 대해 쓴 게 아니라, 스타벅스를 예로 들었을 뿐이다

 

돈 주고 안 산 게 참 다행인 책이다

다만 북디자인은 무척 잘 한 것 같다

서점에서 보고 읽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꼈다

스타벅스는 단순히 커피숖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한다

스타벅스가 주는 진짜 의미에 대해, 혹은 나처럼 스타벅스 커피에 대한 애정에 대해 쓴 책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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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환상
대니얼 J. 부어스틴 지음, 정태철 옮김 / 사계절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제가 이번 주에 추천해 드릴 책은 "조선 국왕 이야기" 1,2 권입니다

어렵게 한 권을 다 읽었다

속독하는 독서 습관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한 줄 한 줄 더욱 꼼꼼히 읽었다

저자 초판 서문, 25주년 기념 서문, 역자 서문, 심지어 참고 문헌까지 (무려 20장이나 됐다) 성실하게 읽었다

소설책과는 달리 사회 현상을 비판하는 이런 책들은 읽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이 책은 비교적 쉽게 쓰여지긴 했는데, 워낙 다루는 범위가 넓고, 번역한 책이라 읽는데 애를 먹은 듯 하다

 

이 책의 주제는 역자 서문에 더 잘 나타난다

역자는 그 꼼꼼하다 못해 조잡해 보일 정도로 모든 페이지에 걸쳐 각주를 세심하게 달았는데, 그만큼 역자에게는 큰 의미를 준 책인 듯 하다

그는 이 책과의 만남을 자기 일생의 큰 반환점이라고 했고,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읽어 주길 간절히 바란다

1962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미국보다 30여년 뒤진다는 우리나라 상황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제일 인상깊은 구절은 우리 시대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문제들, 이를테면 공교육 붕괴, 신용 불량자 양산, 기러기 아빠, 지역감정, 권력형 비리 등을 책임져야 할 진짜 장본인은 바로 N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이라는 부분이다

소위 인터넷 세대라 불리우며 2002년 대선을 계기로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이들은 이미지의 허상에 빠져 온 국민이(즉 기득권층이나 민중 모두가) 그 문제들을 양산해 낸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보수 정치인, 미국 등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젊은 세대 역시 이미지의 환상에 빠져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는 진리인 것 같다

 

이미지란 간단히 말하면 가짜다

실체가 아니라 허구라는 얘기다

대표적인 예로 연예인들을 들 수 있다

박신양은 "파리의 연인"에서 멋지고 능력있는 자동차 회사 사장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드라마에서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기주와 박신양을 동일시 하여 박신양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한다

부어스틴의 진단대로 현대 사회는 이미지의 환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미지에 의해 실체가 가려지는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영웅이란 가치 있는 업적을 쌓고 그 가치 때문에 사람들이 숭배하는 인물인데, 대중화 사회가 되면서 더 이상 그들은 받들어 모실 특별한 인물을 원하지 않게 된다

이 영웅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사람이 바로 "유명인"이다

"유명인"이란 하나의 고유 명사로써 쓸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유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업적은 없고 이름만 있다는 것이다

업적이 이름에 가려져 이름 자체만으로 세인의 관심과 돈을 벌어 들일 수 있다면, 그는 유명인의 자격을 얻은 셈이다

이 유명인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집단은 언론이다

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여 돈을 버는 스포츠 신문이나 연예 정보 프로그램이 가장 간단한 예다

 

부어스틴은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린드버그가 어떻게 영웅에서 유명인으로 몰락했는지를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25세의 나이로 단독비행으로 대서양을 횡당한 린드버그는 온 미국인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영웅은 별다른 돈벌이가 되지 못한다

미국 언론들은 그를 유명인으로 깍아 내리면서 엄청난 돈을 번다

이를테면 린드버그의 어린 시절, 린드버그가 좋아하는 것, 린드버그가 추천하는 책 등 린드버그에 관한 온갖 가쉽거리를 만들어 내므로써 신문과 TV 프로그램을 판다

월드컵 당시 신문과 텔레비젼이 군중들이 모인 장면을 단지 찍기만 해서도 엄청난 기사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미국 언론은 린드버그에 관한 아주 사소한 것도 기사거리로 둔갑시킨다

부어스틴이 간파한 것처럼 이것은 사람들의 과도한 기대 심리에서 비롯된다

사실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진짜 기사거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자극적이고 더 새로운 기사를 원한다

언론은 바로 이 심리에 영합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엄청난 기사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 일은 큰 돈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정교하고 전문적으로 행해진다

 

저자는 뉴스나 신문의 기사들을 가짜 사건이라고 정의하는데, 가짜 사건이란 실체와 아무 관련이 없는, 자연발생적이 아닌 계획적으로 조작된 모든 기사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인들의 폭로성 발언이다

그들은 마치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양 자극적인 발언을 하므로써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언론은 그들을 뒤쫓아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기사로 만든다

그러나 정작 시간이 지나면 그런 발언들은 아무 증거도 없는 뜬소문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진다

그들은 세인의 이목을 주목시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 내고, 언론은 충실히 그들의 의도대로 열심히 홍보를 해 준다

(걸핏하면 폭로성 발언을 일삼는 홍준표 의원이 생각난다)

미국의 유명한 극우 반공주의를 몰고 온 매커시 의원은 언론을 다루는데 뛰어난 기술을 가졌는데, 오후에 기자 회견을 하려면 오전에 기자 회견을 통해 오후에 중요한 발표가 있다고 홍보했다고 한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실체가 없는 가짜 사건이 드러날 처지가 되면 증인이 확보되지 않았다, 누군가 발표를 막을 압력을 넣는다는 식으로 발표를 미루면서도 세인의 이목을 다시금 집중시킨다

 

이미지라는 가짜에 가려 진실이 왜곡된 대표적인 경우로 저자는 또 여행을 든다

과거에 여행이란 고행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여행은 돈을 주면 즐길 수 있는 관광으로 전락했다

이제 사람들은 모험을 즐기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유명 관광지라고 사람들이 쫒아 다니는 곳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 버린 채 관람하기 위한 객체로 전락한다

즉 가짜(관광지)가 진짜(자연)를 눌러 버린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무척 고민을 했다

고생하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흔히 패키지 관광을 깃발 부대라고 비난하지만, 여러 단점들이 있지만 안내자와 함께 가는 패키지 역시 좋은 점이 많다

가장 일반적이고 핵심적인 곳을 가장 짧은 시간에 데려다 준다는 점에서, 일주일도 못 되는 휴가를 가진 직장인들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쇼핑지에 끌려 다닌다거나, 돈벌이로 전락한 원주민들의 민속춤을 구경할 때는 왠지 모를 비애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관광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생계 수단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미지란, 특히 광고로 대표되는 이미지란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지배 이념이 되버렸다

그가 후기에서도 밝히는 바이지만, 이제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식으로 수용해야 할지를 논의해야 할 때다

이 책이 쓰여진 60년대는 미국이 최고의 경제 성장을 누리며 자본주의의 폐혜에 대해 막 눈뜰 시점이다

그래픽 혁명 시대에 대한 고찰이 아직은 학계에서 인정받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당시 미국 학자들은 건국 당시 정치 상황 등에 몰두했다고 한다) 부어스틴이 첫 시도를 한 셈이다

부어스틴은 겸손하게도 성급한 전망이나 나아갈 방향 등은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이미지의 허구와 환상에 대해 그는 조목조목 밝히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미지"는 경제적인 이득과 연결되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와 관계없는 "진실"을 잡아 먹어 버린다

"이미지"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 엄청난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미지를 없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가 어떻게 진실을 가리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세대가 할 일은 (부어스틴은 현재 90세다) 어떤 방향으로 이미지를 수용해야 할 것인가의 실제적인 논의다

 

명품을 가지면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환상, 요가를 하면 웰빙 열풍에 동참하게 된다는 착각, 몸짱이 되야 인정받는다는 강박관념, 정작 축구에는 별 관심도 없으면서 붉은 악마에 가입하는 허위 의식 등 우리 주변에는 이미지가 실체를 가리는 일들이 널려 있다

(문득 립싱크 욕하던 신해철의 독설이 생각난다 진짜 음악을 들으려면 콘서트장에 와야지, 왜 TV 앞에 편하게 앉아 욕하냐고 하더라)

이제 우리는 이미지와 실체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미지를 거부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이 실체고 무엇이 이미지인지 조차 모르게 되면, 정체성을 잃은 가짜 삶을 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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