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환상
대니얼 J. 부어스틴 지음, 정태철 옮김 / 사계절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제가 이번 주에 추천해 드릴 책은 "조선 국왕 이야기" 1,2 권입니다

어렵게 한 권을 다 읽었다

속독하는 독서 습관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한 줄 한 줄 더욱 꼼꼼히 읽었다

저자 초판 서문, 25주년 기념 서문, 역자 서문, 심지어 참고 문헌까지 (무려 20장이나 됐다) 성실하게 읽었다

소설책과는 달리 사회 현상을 비판하는 이런 책들은 읽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이 책은 비교적 쉽게 쓰여지긴 했는데, 워낙 다루는 범위가 넓고, 번역한 책이라 읽는데 애를 먹은 듯 하다

 

이 책의 주제는 역자 서문에 더 잘 나타난다

역자는 그 꼼꼼하다 못해 조잡해 보일 정도로 모든 페이지에 걸쳐 각주를 세심하게 달았는데, 그만큼 역자에게는 큰 의미를 준 책인 듯 하다

그는 이 책과의 만남을 자기 일생의 큰 반환점이라고 했고,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읽어 주길 간절히 바란다

1962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미국보다 30여년 뒤진다는 우리나라 상황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제일 인상깊은 구절은 우리 시대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문제들, 이를테면 공교육 붕괴, 신용 불량자 양산, 기러기 아빠, 지역감정, 권력형 비리 등을 책임져야 할 진짜 장본인은 바로 N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이라는 부분이다

소위 인터넷 세대라 불리우며 2002년 대선을 계기로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이들은 이미지의 허상에 빠져 온 국민이(즉 기득권층이나 민중 모두가) 그 문제들을 양산해 낸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보수 정치인, 미국 등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젊은 세대 역시 이미지의 환상에 빠져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는 진리인 것 같다

 

이미지란 간단히 말하면 가짜다

실체가 아니라 허구라는 얘기다

대표적인 예로 연예인들을 들 수 있다

박신양은 "파리의 연인"에서 멋지고 능력있는 자동차 회사 사장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드라마에서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기주와 박신양을 동일시 하여 박신양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한다

부어스틴의 진단대로 현대 사회는 이미지의 환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미지에 의해 실체가 가려지는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영웅이란 가치 있는 업적을 쌓고 그 가치 때문에 사람들이 숭배하는 인물인데, 대중화 사회가 되면서 더 이상 그들은 받들어 모실 특별한 인물을 원하지 않게 된다

이 영웅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사람이 바로 "유명인"이다

"유명인"이란 하나의 고유 명사로써 쓸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유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업적은 없고 이름만 있다는 것이다

업적이 이름에 가려져 이름 자체만으로 세인의 관심과 돈을 벌어 들일 수 있다면, 그는 유명인의 자격을 얻은 셈이다

이 유명인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집단은 언론이다

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여 돈을 버는 스포츠 신문이나 연예 정보 프로그램이 가장 간단한 예다

 

부어스틴은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린드버그가 어떻게 영웅에서 유명인으로 몰락했는지를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25세의 나이로 단독비행으로 대서양을 횡당한 린드버그는 온 미국인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영웅은 별다른 돈벌이가 되지 못한다

미국 언론들은 그를 유명인으로 깍아 내리면서 엄청난 돈을 번다

이를테면 린드버그의 어린 시절, 린드버그가 좋아하는 것, 린드버그가 추천하는 책 등 린드버그에 관한 온갖 가쉽거리를 만들어 내므로써 신문과 TV 프로그램을 판다

월드컵 당시 신문과 텔레비젼이 군중들이 모인 장면을 단지 찍기만 해서도 엄청난 기사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미국 언론은 린드버그에 관한 아주 사소한 것도 기사거리로 둔갑시킨다

부어스틴이 간파한 것처럼 이것은 사람들의 과도한 기대 심리에서 비롯된다

사실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진짜 기사거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자극적이고 더 새로운 기사를 원한다

언론은 바로 이 심리에 영합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엄청난 기사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 일은 큰 돈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정교하고 전문적으로 행해진다

 

저자는 뉴스나 신문의 기사들을 가짜 사건이라고 정의하는데, 가짜 사건이란 실체와 아무 관련이 없는, 자연발생적이 아닌 계획적으로 조작된 모든 기사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인들의 폭로성 발언이다

그들은 마치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양 자극적인 발언을 하므로써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언론은 그들을 뒤쫓아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기사로 만든다

그러나 정작 시간이 지나면 그런 발언들은 아무 증거도 없는 뜬소문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진다

그들은 세인의 이목을 주목시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 내고, 언론은 충실히 그들의 의도대로 열심히 홍보를 해 준다

(걸핏하면 폭로성 발언을 일삼는 홍준표 의원이 생각난다)

미국의 유명한 극우 반공주의를 몰고 온 매커시 의원은 언론을 다루는데 뛰어난 기술을 가졌는데, 오후에 기자 회견을 하려면 오전에 기자 회견을 통해 오후에 중요한 발표가 있다고 홍보했다고 한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실체가 없는 가짜 사건이 드러날 처지가 되면 증인이 확보되지 않았다, 누군가 발표를 막을 압력을 넣는다는 식으로 발표를 미루면서도 세인의 이목을 다시금 집중시킨다

 

이미지라는 가짜에 가려 진실이 왜곡된 대표적인 경우로 저자는 또 여행을 든다

과거에 여행이란 고행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여행은 돈을 주면 즐길 수 있는 관광으로 전락했다

이제 사람들은 모험을 즐기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유명 관광지라고 사람들이 쫒아 다니는 곳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 버린 채 관람하기 위한 객체로 전락한다

즉 가짜(관광지)가 진짜(자연)를 눌러 버린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무척 고민을 했다

고생하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흔히 패키지 관광을 깃발 부대라고 비난하지만, 여러 단점들이 있지만 안내자와 함께 가는 패키지 역시 좋은 점이 많다

가장 일반적이고 핵심적인 곳을 가장 짧은 시간에 데려다 준다는 점에서, 일주일도 못 되는 휴가를 가진 직장인들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쇼핑지에 끌려 다닌다거나, 돈벌이로 전락한 원주민들의 민속춤을 구경할 때는 왠지 모를 비애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관광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생계 수단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미지란, 특히 광고로 대표되는 이미지란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지배 이념이 되버렸다

그가 후기에서도 밝히는 바이지만, 이제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식으로 수용해야 할지를 논의해야 할 때다

이 책이 쓰여진 60년대는 미국이 최고의 경제 성장을 누리며 자본주의의 폐혜에 대해 막 눈뜰 시점이다

그래픽 혁명 시대에 대한 고찰이 아직은 학계에서 인정받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당시 미국 학자들은 건국 당시 정치 상황 등에 몰두했다고 한다) 부어스틴이 첫 시도를 한 셈이다

부어스틴은 겸손하게도 성급한 전망이나 나아갈 방향 등은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이미지의 허구와 환상에 대해 그는 조목조목 밝히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미지"는 경제적인 이득과 연결되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와 관계없는 "진실"을 잡아 먹어 버린다

"이미지"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 엄청난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미지를 없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가 어떻게 진실을 가리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세대가 할 일은 (부어스틴은 현재 90세다) 어떤 방향으로 이미지를 수용해야 할 것인가의 실제적인 논의다

 

명품을 가지면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환상, 요가를 하면 웰빙 열풍에 동참하게 된다는 착각, 몸짱이 되야 인정받는다는 강박관념, 정작 축구에는 별 관심도 없으면서 붉은 악마에 가입하는 허위 의식 등 우리 주변에는 이미지가 실체를 가리는 일들이 널려 있다

(문득 립싱크 욕하던 신해철의 독설이 생각난다 진짜 음악을 들으려면 콘서트장에 와야지, 왜 TV 앞에 편하게 앉아 욕하냐고 하더라)

이제 우리는 이미지와 실체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미지를 거부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이 실체고 무엇이 이미지인지 조차 모르게 되면, 정체성을 잃은 가짜 삶을 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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