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주제가 칭기스 칸이 아닌 그 딸들이라 너무나 읽고 싶던 책이었다.

인천시는 관내 도서관끼리 상호대차가 안 돼서 서구도서관까지 직접 가서 빌린 책이다.

잘 몰랐던 칭기스칸의 딸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칭기스 칸의 환생이라 일컬어지는 만두하이의 일생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식으로 재구성하는 부분이 흥미를 돋우기보다는 몰입을 방해하는 듯해서 아쉽다.

칭기스 칸은 여덟 명의 딸들이 있었는데 역사 속에서 많이 지워졌다고 한다.

그녀들은 사위국으로 시집가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뒷받침 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는데 아버지 사후 남자 형제들 특히 우구데이에게 핍박을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칭기스 칸의 사위는 구레겐이라는 지위를 받고 몽골의 동맹 세력이 됐는데 전장에 끌려 다녀 일찍 사망하면 딸이 통치를 하게 된다.

그런데 고려는 흥미롭게도 부마국이면서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고 덕분에 원의 공주들이 고려를 좌지우지 하지 못했다고 나온다.

몽골인이면서도 한국인이었던 고려 왕들의 인간적 고뇌가 잠시 나와 인상적이었다.

칭기스 칸 사후 몽골의 대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며느리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북원으로 쫓겨간 이후 분열된 몽골을 통일한 다얀 칸과 왕비 만두하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르지긴 가의 후손들이 씨가 마른 상황에서 살해된 칸의 미망인 만두하이는 권력있는 장군과의 혼인을 거부하고 유일한 적손 바얀 뭉케를 칸으로 세우고 혼인한다.

7세의 어린아이가 칸이 되고 16세 연상의 만두하이는 남편을 앞세우고 오이라트 부족과 반란자들, 명나라를 제압한다.

둘은 이상적인 부부가 되어 무려 8남매를 낳는데 특이하게도 세 번이나 쌍둥이 형제를 낳아 보르지긴 가문은 번창하게 된다.

그녀는 35년간 전투 현장에서 남편과 생사를 같이 하고 70대에 자연사한다.

가히 복된 삶이고 영웅이라 할 만하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 성화제는 19세 연상의 만귀비 치마폭에 빠져 살았으니 극명하게 대조적이다.

원나라 이후 북원의 역사가 모호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72p

칭기스 칸에게는 튼튼한 말과 궁술이 뛰어난 탁월한 기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스텝 지역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런 말들과 궁수를 자랑해왔다. 그의 독특한 성공은 어떤 비밀스러운 기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독특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조직하는 능력에서 나왔다.

77p

칭기스 칸은 추종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을 스텝 지역에서 나는 것들로만 충당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평화, 우유, 고기를 누리게 되었으므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동경하게 되었다. 

172p

어떤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의 게르를 마구 찢는 술 취한 자처럼, 보르지긴 가문은 자신들을 장엄하고 권세 있는 집안으로 만들어준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들은 한때 영광스러웠던 몽골 제국의 부서진 파편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퇴락의 과정으로 추락했다.

174p

그의 후계자들은 할아버지 칭기스 칸의 정신을 계속 숭상하고 또 그를 사실상 신격화했지만, 그가 창조한 모든 것을 파괴했다. 하지만 그것을 파괴하면 할수록 칭기스 칸을 더욱더 의식적으로 소중한 경배 대상으로 만들었다. 

180p

보르지긴 가문의 남자들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통지했지만, 이제 반드시 필요한 군사 장비를 구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천막을 설계하고 장식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4p

칭기스 칸 시절의 구레겐과는 다르게, 고려의 사위들은 오지의 전장에 파견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고려로 시집간 몽골 왕비들은 알라카이 베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고려 왕들은 몽골어를 잘하고, 몽골 친척들도 많았으며, 몽골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몽골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베이징 궁정의 상전들이 볼 때 몽골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은 동시에 한국어를 했고, 한국 친척들이 있었고,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백성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처럼 보였다. 이처럼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능력은 고려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의 이런 정신분열적 생활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에게 커다란 개인적 희생을 요구했다.

203p

중국에서 하마하여 그곳에서 1세기 이상 살아온 몽골 인들은 가혹한 몽골의 생활 조건에서 살아남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들에게 사냥은 정교하게 의식화된 스포츠일 뿐 생존 기술이 아니었다. 사냥이라고 하면, 수송용 코끼리를 준비하고, 지루한 저녁을 즐겁게 해줄 무희들을 동원하고, 사냥감을 대신 쫓아줄 숙달된 전사를 대동하고, 몰이꾼을 시켜서 왕실 가족이 궁수를 데리고 기다리는 곳까지 사냥감을 몰아주면 천천히 쏘아 잡고, 그 다음에는 그 사냥감을 대기 중인 요리사에게 주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오락용 행사였지 생존을 위해 힘들게 뛰어야 하는 생계형 행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야생 동물을 뒤쫓는 방법을 몰랐고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말리는 법은 더더욱 몰랐다.

220p

몽골 족은 지난번 중국 통치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중국을 통제하기보다는 정복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점이었다. 이번에 몽골 족은 중국을 점령하거나 경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223p

이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 때문에 민간에는 이런 말이 생겨났다. "귀족들은 모이면 죽고, 개들은 가뭄이면 죽는다." 이런 속담은 세력 있는 자들에게 위협 혹은 경고가 되었다.

247p

소규모 몽골 야영지들을 정복하는 것은 첫 싸움에 나선 젊은이와 모험을 전혀 해보지 못한 노인에게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정복당한 부족들은 하나같이 가난했다. 본격적인 침략과 약탈을 하려면, 그들은 고비 사막 남쪽의 실크로드와 중국 도시들을 목표로 삼아야 했다.

250p

몽골족과 명 조정은 서로에 대하여 또 자기 자신에 대해여 엉뚱하면서도 때때로 어리석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모든 사회는 나름대로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그에 대한 일련의 거짓말과 망상을 만들어낸다. 이런 것들은 명백하게 모순되는 증거가 나타나는데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몽골 족은 자신들이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비 사막 북쪽으로 쫓겨간 후에도 자신들이 중국과 세계 대부분 지역의 적법한 통치자라고 생각했다.

299p

몽골 사회에서 개인은 친인척에 기대어 필요한 지원을 얻어가며 인생을 살아나갔다. 친인척으로 된 연결망 바깥에서는 종교, 시장, 형제적 조직 등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불행은 가족이 없는 것이었다. 몽골 신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고아였다. 고아의 슬픈 운명과 공허한 미래를 슬퍼하는 노래나 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두 번째로 비극적인 인물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재혼할 만한 친척을 뒤에 남기지 않은 과부였다.

303p

전임자들, 특히 남편의 증조부인 에센은 중국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런 사례들은 몽골 족에게 중국의 대군과 요새 도시들을 정복할 군사적 힘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칭기스 칸은 이미 당대에 화약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지만 무기의 발전은 몽골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마상에서 활을 잘 쏘는 능력을 빛바래게 했다. 아무리 훈련을 잘 받고 실전 경험이 많다고 할지라도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 전사는 대포와 소총을 상대로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정주 문명은 유목 문명보다 화약을 더 잘 다루었다.

305p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대칸이었으므로 전쟁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전쟁 기술은 아무리 빨리 배워도 빠른 것이 아니었다.

328p

그녀는 황금 왕자의 부정적인 사례로부터 고비 북부의 몽골인들과 남부의 몽골인들을 단합시켜 공동의 노력에 나서도록 하는 게 아주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사 남북 몽골인이 단합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을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예전 세대의 스텝 통치자들이 선호했던 영토의 점령 및 확대 정책과는 다르게 만두하이는 지역적 선별 전략을 추구했다. 불복종하는 백성들로 구성된 거대 제국을 정복하고 조직해서 통치하기보다는 몇몇 거점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331p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 어떤 정통성 주장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는 법이었다. 전쟁에서 이긴다면 베그-아르슬란은 얼마든지 몽골 역사의 천명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336p

변경 위수병 중에는 사회 부적응자, 유배자, 범죄자들이 많았다. 이런 병사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정은 때때로 민간 행정관을 변방에 보내어 이런 병사들을 잘 교육하고 단속하여 적진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명나라 군대에서 출세길은 병기보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변방의 장교들은 세련된 글쓰기 솜씨를 연마했고 군사적 승리보다는 어휘와 비유의 기교를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베이징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던 교양있는 관리들은 이런 문학적 군사 보고서를 아주 매력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362p

만두하이 부부는 상대방을 제거하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함께 지냈으며 서로에게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부부간의 금실도 아주 좋았다.

364p

칭기스 칸도 말에서 추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몽골의 역사 기록에서 연대기 작가나 관찰자들은 칸이 말에서 떨어진 사건을 결혼, 전투, 정주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타 사건들보다 더 자세하고 심각하게 다루었다.

377p

만두하이는 몽골 역사의 흥망성쇠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제국의 외양을 꾸미거나, 중국이나 무슬림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갈 의도가 전혀 없었다. 만두하이는 몽골 백성과 그녀의 자녀들을 위해 안전하게 보호된 유목 국가 몽골을 추구했다. 도시와 낯선 땅으로 이루어진 제국은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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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을 빛낸 그림들
정준모 지음 / 컬처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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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한국 미술 100년>을 너무나 흥미롭게 읽어 근대 미술을 정리하는 목적으로 읽게 됐다.

108점의 많은 그림들을 양질의 도판으로 소개하고 간략하게 화가들의 일생에 대해서도 언급해 정리하는데 도움이 됐으나 시대상과 작가 나열이라는 지루한 집필 방식이 아쉽다.

앞서 읽은 책처럼 당시 시대 분위기와 예술 작품이 갖는 시대사적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이있는 분석이 주가 됐다면 훨씬 의미있는 책이 됐을 것 같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근대미술가 개론 편은, 시대사적 사건과 화가들만 잔뜩 나열해서 지루했고 식민당국인 일본의 예술 정책을 평면적으로 비난하는데 그쳐 아쉽다.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양의 대가들을 먼저 접했고 모더니즘으로 범위를 넓히다 보니 이제는 우리 미술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우리 근현대 미술의 다양함과 완성도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탓에 막연히 서구에 비해 내세울 게 없다고만 생각했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근대 회화전을 관람하면서부터 조금씩 관심이 생겼고 이번에도 책에 나온 작가들의 그림을 검색해 보면서 눈길을 끄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고루하다고만 여겼던 수묵화가 현대적인 미의식과 만나 얼마나 세련되고 개성있게 변모되는지 새삼 감탄했다.

이당 김은호에서 시작되는 신감각주의 영향으로 박노수와 장우성, 장운상 등의 수묵채색화가 마음을 끈다.

근대 화가들의 대부분은 일본 유학을 통해 서화가 아닌 미술을 받아들였고 프랑스와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았다.

단순히 아카데미즘에 그치지 않고 앵포르멜이나 큐비즘, 표현주의, 야수파 등 당시 유행하는 시대적 흐름을 자기화 하는 여러 화가들의 노력과 성과가 대단하다.

재불 화가 이성자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세 아이를 떼어놓고 프랑스로 유학갔다고 나와서 찾아 봤더니 남편의 외도로 이혼 후 아이들과 생이별 하고 떠난 아픈 사연이 있었다.

검색해 보니 책에 소개된 작품 보다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그림들이 많다.

또 요절한 화가들도 있지만 의외로 장수한 화가들도 많아서 놀랬다.

피카소가 92세까지 살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손동진이 98세, 문학진이 96세, 김병기가 무려 103세로 여전히 생존 중이고, 한묵이 103세, 장발이 101세, 채용신, 김흥수, 이성자, 김영기, 김인승, 장우성, 전혁림, 천경자 등도 90대까지 장수했다.

장수와 화가는 흥미로운 관계 같다.

서양 미술은 쉽게 관람하기 어렵지만 우리 근현대 미술은 당장 미술관에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좋다.


<인상깊은 구절>

222p

남종화의 정신은 사실적 정신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다. 따라서 대상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보다는 대상이 담고 있는 뜻의 전달이 중요시된다. 그런 뜻은 손끝의 재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극히 담백한 정신의 표출이 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교에 앞서 뜻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남종문인화의 시조라 불리는 당대의 왕유가 말한 것처럼 의재는 평생 이 가르침을 지켰다.

245p

이 논쟁의 요지는 임화의 '예술 운동이 정치 투쟁 전선에 적극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김용준이 '프로다운 예술 형식을 먼저 창조할 것'을 요구하면서 비롯되었다. 김용준은 계급 해방의 수단이자 이를 촉진하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예술로서의 기본 형식과 내용을 갖춘 프로 미술을 통해 본질을 잃지 않는 정신주의적 프로 미술을 주장하고, 기능론에 편중된 프로 미술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며 마르크스주의 미학, 볼셰비키 예술론을 비예술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용준은 가장 근본적인 것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문제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무정부주의, 사회주의가 출현했다면, 예술에서 반 전통은 반 아카데미즘이고, 따라서 반 전통적인 입장에서 출현한 미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러시아 주성주의를 프로 미술의 형식으로 제시했다. 김용준의 주장은 임화를 비롯한 프로 미술계로부터 무산계급적 현실 인식에 기반하지 않은 데카당한 이론이란 지적을 받았지만, 심영섭, 김주경 등은 김용준과 같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오류>

22p

대조전에 오일영과 이용우가 그린 <봉황도>와 <백학도>

-> 오일영과 이용우가 <봉황도>를 그렸고, 김은호가 <백학도>를 그렸다.

277p

이용우, 보성전문학교 창설

->이용우는 화가이고 보성전문학교 창설자는 이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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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미술 - 미술사 연구총서 4
김이순 지음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신간 <조선왕실 원의 석물>을 너무 재밌게 읽고 다른 책도 찾아 보게 됐다.

2007년에 출간된 책이라 시의성에 떨어질까 봐 걱정했는데 도판이 정말 훌륭하고 조각, 특히 용접조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좋은 기회였다.

저자의 전공이 조각이라 그런지 한국의 근현대미술이라는 제목보다는, 한국의 조각미술사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용접조각이란 무엇인가, 구상조각이 사실 재현 조각과 어떻게 다른가, 이우환의 모노파가 한국 단색주의에 미친 영향, 설치 미술과 영상 미술의 특성, 조각가 김복진과 권진규의 예술관 등에 대해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적인 내용, 특히 실존주의와 한국적 미니멀 조각에 대한 부분은 다 이해하지 못했다.

서양의 미니멀주의와 한국의 미니멀 조각이 어떻게 다른지 막연히 느껴지긴 하지만 정말 작품에서 평론가들이 말하는 그런 추상적인 사고는 전혀 와닿지가 않는다.

전통 미술이 대상의 재현에 초점을 맞춰 얼마나 똑같이 묘사하는지 기술적 부분을 중시하므로 장인이라 불린 반면, 현대의 예술가들은 구체적 형상을 표현하는 구상이든 비구상이든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정신성의 추구가 가장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철학자라고 해야 할까?

예술가란 기술적 측면보다 정신의 표현이 훨씬 본질적인 것 같다.

그렇다면 조영남 대작 사건도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해프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에 실린 권진규 조각가에 대한 대담이 인상적이었다.

한 작가의 일생을 전기가 아닌, 작품을 통해 돌아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임을 느낀다.

우리나라 미술사가 좋은 게, 평론을 읽고 당장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미술 향유층이 두터워져 좋은 미술가들이 많이 나오고 평론이 활발해져야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많이 감상할 수 있을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32p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1868년에 설립한 게이오 의숙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민간 계몽활동을 벌이는 한편, 이러한 계몽은 정부의 혼자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지식인 등 사회의 엘리트층이 정부와 협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근대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집권적 정부 하에어 이를 지지할 근대국민의 형성이 필요했고, 또 이러한 일에 앞장설 민간 지도력으로서 관료주의를 벗어난 지식인과 기업가들의 후원이 당시의 과제였던 것이다.

75p

동경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김복진이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의식을 갖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99p

일제가 1930년대 후반의 전시체제에서 한국 여성들에게 근검절약하여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할 것을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병사가 될 국민'을 낳아 키우도록 촉구했다는 직접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 1938년부터 비상시국임을 강조하며 한국 여성들에게 강요한 것은 후방에서의 노동과 의식주의 긴축, 절미 등의 근검절약이었다. 1942년 이전에 일제는 우리에게 황군에 지원하기를 권장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내선일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을 전쟁터에 내보낼 정도로까지는 조선인의 충성심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101p

일제가 한국작가들에게 특별히 시국미술을 제작하도록 강요했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실제로 한국작가들이 시국미술을 적극적으로 제작한 예도 드물다. 실제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한국작가들이 시국색을 직접 띤 작품을 제작하기를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자연 연구와 함께 고전 연구를 통해 로컬 컬러를 띤 작품'을 제작하여 문화를 개척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당시 신문 사설에서조차 한국 미술가들에게는 여전히 '반도의 전통과 풍속'을 통해 향토색을 표현하고, 각자 자신이 타고난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작품제작에 전념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113p

서양미술에서 베르트 모리조, 케테 콜비츠, 모더존 베커 등의 여성미술가들이 어머니로서 경험과 자의식이 반영된 초상적 성격의 모자상을 제작했던 경우와 달리, 앞서 살펴본 작품들은 대부분 남성작가의 작품이었고, 이옥순 같은 여성작가의 작품조차 일반적인 남성작가의 모자상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183p

우리의 실존주의는 진정한 저항과 참여의 기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박서보가 강조하는 저항이나 부정의 개념은 진정한 현실참여나 저항의 의미라기보다는 전통과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지극히 미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90p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혈통과 가문을 귀중히 여겼지만 진작 우리의 전통 미술에서 가족을 주제로 다룬 작품을 찾기가 어렵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들은 대를 이어가는 엄숙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여 있는 듯하며, 가족간의 단란함이나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207p

<길 떠나는 가족>에서 가족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가장의 모습과 가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행복해 하는 식구들의 모습은, 현실적으로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돌보고 가족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 가장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며, 이는 전후 사회에서 가장들이 이상적으로 바라던 가족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6p

이우환은 "최고의 표현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빗겨 놓음으로써 세계를 좀더 신선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심문섭은 "자연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수정하지 않고 표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주 약간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조각가의 역할이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245p

예술가의 몸을 승화된 신체로 보았다는 니시다는, 작가에 의한 표현 작용(예술 행위)이 없으면 세계와의 만남이 불가능하고, 예술작품으로 성립하려면 사실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物과의 대립을 통하여 자연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우환의 모노하 작품을 보면,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제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작가가 매우 신중히 선택하고 배열한다. 이러한 과정은 인위적으로 사물을 가공하지는 않더라도, 작가의 적극적인 개입 ('모노'의 선택과 배열, 장소 선정 등)을 통해 작품이 성립됨을 의미한다. 작가의 철저한 개입에 의해서만 '있는 그대로의 모노(物)'가 '미술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우환의 논리로 보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작가의 개입여부에 달려 있다.

254p

이우환은 미술가들이 선망하던 비엔날레 출품의 기회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 자신의 모노하 이론에 부합하는 작가를 선정함으로써 이우환과 모노하는 한국화단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되었다. 

262p

전후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들은 앵포르멜 미술뿐만 아니라 구상미술로 전쟁의 잔혹성을 표현했는데, 작가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러한 작품들은 사실재현적인 미술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279p

구상조각은 삶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드러내는 요소가 결여된 추상조각에 대한 반발을 토대로 형성된 미술인만큼, 현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한다. 은유성이 있다는 점에서 구상조각은 전통의 사실조각이나 추상조각과는 다르다. 

282p

인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서양식 조각개념은 불상조각이나 장승 등 전통조각에서처럼 인체를 관념적으로 표현하던 조각개념에서 벗어난 것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인체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했던 우리의 근대조각은 아직 작가의 내면의식을 직접적으로 담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때문에 김복진이 사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이념을 조각 작품으로 구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294p

풍속, 기법, 유물 등 소재적인 측면에서 전통의 요소를 찾거나 타자에 의해 발견된 정체성을 내면화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는가 하면, 때로는 서구를 '물질주의'로 타자화하여 정신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주를 이뤄왔다. 한국적인 미술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화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사항이지만, 사실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화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에릭 홉스봄이 '전통'이란 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낸 '창조물'로서 국민을 결집시키기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였다고 주장했듯이, 애초 '한국적인 것'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한국인의 의식을 결집시키기 위한 가상의 표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320p

미국은 록펠러 재단 같은 탄탄한 후원에 의해 새로운 비디오 아트를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예술에 뒷받침이 충분하지 못했던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비디오 아트가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없었다. 끊임없이 첨단의 장비가 요구되는 영상미술은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에 의해서만 작가들의 샘솟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구체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59p

권진규 스스로 자신을 장인이라 일컬은 것은 상징적 의미도 있겠지만 그의 꼼꼼한 석고취형 과정과 성형과정에서 드러나는 치밀함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356p

"권진규의 작가정신이야말로 한국미술사에서 그가 갖는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주문제작, 시류, 모방에 머무는 작가들과는 대별되는 것이지요. 그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의 모노노 아와레(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비애, 주변에서의 소외 등의 도식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권진규의 죽음의 이유를 이제는 가난과 질병, 사회적 소외로 집약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작가로서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의 필연적 선택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전증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때 작가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이지요."

"작가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한계를 느꼈을 때 조용히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자살은 현실 도피적인 방식으로서의 생의 마감이 아니라 진정 작품을 사랑한 작가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단절되어 도피의 방식으로 생을 마치는 작가가 아닌 것이죠.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지라도 그것은 창작을 이룰 수 없었던 작가에게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권진규에 대해 환상을 깔고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담아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현대 시기를 살아간 작가가 이룬 독보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권진규에 대해서는 이제 자살의 비애보다는 작가정신이 살아있는 작가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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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100년 1
권영필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과천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다.

한국근현대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인데 흥미롭게도 전시회의 도록 형태이다.

책바다를 통해 빌려 읽게 됐다.

7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나 참고 문헌이 거의 100 페이지에 가깝고, 무엇보다 도판이 많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미술 각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짧게 집필한 책이라 통일성이 다소 부족하나 대신 지루하지 않다.

사실 기대했던 분야는 최근의 미술 동향인데 아쉽게도 1960년대에서 끝나고 만다.

대신 19세기 후반부터 식민 시대의 현대 미술 태동에 이르는 전사 부분이 아주 흥미롭고 유익하다.

장승업에서 조석진, 안중식으로 이어지는 근대 미술의 흐름이 흥미롭다.

근대성을 확보하기도 어려웠을텐데 식민 지배와 반공 이데올로기까지 더해져 해방 이후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미학을 정립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인상깊은 구절>

6p

초창기 화가들 간에 논란이 되었던 '서화'와 '미술'은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질적인 문화의 차이, 회화의 가치체계에 관한 문제였으며 환쟁이에서 화가로의 변화는 예술가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바꾸어놓는 것이었다. 환쟁이나 화원에 비해 화가라는 말은 적어도 문인에 버금가는 존칭처럼 되었다. 서구의 미술가들이 피나는 투쟁과 노력으로 쟁취한 예술가의 자유와 그 사회적 지위를 우리 미술가들은 덤으로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p

서양미술사는 대체로 정반합의 발전 논리를 취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온 회화가 '사실주의'란 이름의 양식인데 한국의 사실주의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주의이며, 쿠르베가 들고 나왔던 리얼리즘은 아니다. 쿠르베가 말한 '산 예술을 만드는 것'이나 '당대 현실의 객관적 묘사'라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방식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전이 유도했던 심미주의 미술관에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그 밖에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이 미술을 하나의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양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전반의 모던아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은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갖는데 흔히 말하듯 시각성의 혁명만이 아니라 당대 정치, 사회체제에 대한 반역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다다 이후 많은 아방가르드 미술이 크던 작던 그러한 성격을 띄었다. 그러나 한국 미술가들의 경우 그 혁명적 요소는 탈락되고 단지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조형, 예술로서 제작되고 평가되어왔던 점이 강하다. 더구나 모턴아트의 존재의의, 근대예술로서의 징표는 예술의 자유,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근현대 미술을 본다면 어찌되겠는가?

21p

한국이 근대세계로 진입해서 취득한 탈중국중심적 자주국의 위상은 한낱 형식적 조문에 그쳤으며,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서 여러 천년 동안을 속박해왔던 중국중심적 체제로부터 이탈했다는 점에서, 그뒤로 식민지 상태에서도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33p

양반 사대부 버금가는 학예세력으로 성장한 여항문인들은 지배층의 하부구조를 이루며 영달을 꿈꾸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 수립보다는 문인화와 같은 주류를 추종했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조성된 북학주의에 동조한 이들은 청조 문화와의 교류에 앞장섰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풍조는 개항기의 '왜양일체' 인식을 비롯해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등으로 야기된 반일 감정에 기대어 주류를 이루며 지속되었다. 

43p

초상사진 가운데에서도 어진은 나폴레옹 복제사진처럼 인기 브로마이드로 일반인들의 수집대상이 되었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사진은 국가 통치의 최고 수뇌인 근대적 군주상으로 개안되었는가 하면, 황실의 가족상과 부부상으로 제작되어 유포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의 기초 구성단위로 새롭게 부각된 부부 중심의 가정주의 인식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53p

사진이 갖는 정확한 현실 재현력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고, 관념적 시각에 머물렀던 회화분야에 표현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 한편 우리나라 서양화 정착은 초기 유학파 대가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초기 서양화는 소위 말하는 선진화가 곧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서 화풍이 정착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이들 유학파 화가들의 국내 작품활동은 극히 미미했으며 당시 거의 모든 미술인들이 참가한 조선미전에서조차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지역단위로 대표적인 화가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단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가 의문인데, 각 지역별로 미술교사 등 일본인 화가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그 지역 서양화 지망생들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 화가들의 화풍이 유사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서양화는 특정 화가들에 의해서 화풍이 주도되어 정착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일본 화가를 통하여 자생적인 발아가 이루어져 뿌리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67p

18세기 후반의 초기 북학은 보수화되고 경화되기 시작한 조선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의미가 적지 않았고, 그 결과 정조대는 조선성리학과 융합되어 현실 반영적이고 현실 개혁적인 성과가 많이 나타났지만, 이러한 개혁의 기운이 마침내 체제를 흔들고 위협하는 데가지 이르게 되자 19세기 이후 그에 대한 역작용으로 경화 현상이 나타나며 현실 반영적인 경향보다도 현실 초월적인 경향이 강한 고증학과 금석학 및 중국 고전서화 중심의 서화일치와 화선 일치를 지향하는 탈속한 학예론으로 전화되기 시작하고, 19세기 중후반경에는 주로 척족 세도정국의 상층 귀족과 그 아래 부용적인 상류 중인들이 국제적인 취향의 문물을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적인 이념으로 변모된 채 오히려 우리의 당대 현실에 대한 진실한 시선을 차단하고 억압하며 소외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86p

새로운 기술 도입과 교육제도의 운영은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말업관을 제도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관립교육기관에서 관비로 교육을 실시하고, 상공업 계층뿐만 아니라 우수한 양반 자제도 다수 지원함으로써 공업기술분야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인 직업관이 부분적이나마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100p

한국에 대한 그들의 첫인상은 대개는 멀리서 보았을 때는 아득하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자연풍광을 지니고 있지만 상륙해서 보면 불결하고 낯선 곳이라는 것이다. ... 일부는 한국의 가정과 여성생활 그리고 아동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살피면서 "한국에는 집은 있지만 가정은 없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서구 근대정치에 익숙해진 탓에 한국의 전근대적인 정치행태에 대해서는 모두 일갈하는데 가장 큰 병폐로 지배층의 학정과 무능을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분개에 가까운 낱말들을 동원해서 질타하기도 한다.

274p

산수를 그리는 오랜 전통이 존재하는 동양에서는 서구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손쉬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현의 대상을 선택하여 그리는 과정에는 대상과 회화 사이의 관계를 규정짓고 대상을 의미화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의식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전통시대의 산수화가 자연의 단면을 즉물적으로 절취하여 모방한 재현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도교적 관념이나 성리학적 도덕을 배경으로 하는 복잡다기한 의미망 속에서 재현되고 소비되었다. 전통사회의 문인들에게 시서화는 오늘날과 같이 독립된 장르가 아니라 서로 융합되면서 감상과 창작의 통로를 간섭하였던 까닭에 산수는 단지 시각적 정보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시정의 문학적 언어를 통해서 이해되고 감상되었다. 때문에 뿌리 깊은 산수화 감상과 창작의 관습 속에 내재된 고유한 전통적 가치관과는 이질적인 새로운 감성 및 형식을 가진 서구적 풍경화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285p

예술 활동은 투쟁의 일환이 되었으며, 그 결과 최악의 경우 작품이 없더라도 혹은 작품이 미적으로 충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선전과 선동'만 되는 것이면 어떠한 종류라도 가능하게 된다. 

297p

신무용, 양악, 미술, 문학 등에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고급예술의 주체로 부상하고 장르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기생이 담당하던 시서화, 가무에 이르는 통합적 연희는 요리점 문화로 급격히 퇴락해갔다. 1931년 기생철폐론이 나오고 없어져야 할 서비스걸의 풍속으로 공공연히 비판받던 시기에 이번에는 고급미술 속에 기생 이미지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소재들은 한편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요구하는 지방색 또는 조선색의 구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고유의 전통으로 다시금 자리매김되었다.

334p

동아협동체 건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폐지하는 경제 통제의 구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상통하는 반 자본주의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은 동아협동체론이 암시하는 혁신적인 정치질서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가운데 내선일치론 역시 받아들였다. 내선일체는 일제의 조선 병합 이후 계속된 동화주의 정책의 새로운 버전이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을 동아협동체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조선민족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일선 협동체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이 희망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341p

이러한 행적 중에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순응한 사례가 적지 않지만 소신에 따라 열렬하게 투신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광수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제국의 총력전이 조선 민족에게 부활의 서광을 비춘다고 여겼다. 그들은 조선인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천황의 적자로 인정받고 대동아의 신민으로 거듭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힘없는 민족의 마음 속에 자라난 힘에 대한 선망은 이렇게 민족 자신의 소멸에 대한 열광을 맣았다. 이광수의 도착된 민족의식은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인 사회를 휩쓴 파시즘적 광기의 하나였다.

391p

문제는 오늘날의 미술가가 유산계급을 패트런으로 삼아 생활하지 않으면, 생활을 성립할 수 없다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국민 전체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미술이 국민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그림이라는 것은 사회적 눈으로 보면,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면 사치품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자본가와 결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430p

미군정의 탄압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예술계장의 고문이었던 이승학은 1948년의 한 대담에서 한국미술계에 대해 "미술가들은 정치분야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술을 위해서만 산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524p

서글픈 사실이지만 대다수 관객은 남의 행복에 공감하는 힘, 그것을 상상하는 능력마저 잃고 도리어 불행한 운명에만 현실감과 공명을 느끼면서 거기에 눈물을 쏟고 카라르시스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말하면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행복이란 오직 불행을 감수하는 체념과 자기 부정의 능력 속에 그리고 그럴 때 흘리는 눈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영화는 그 눈물을 상업적으로 이용, 신파물의 범람현상을 빚었는데, 그럼으로써 한국영화가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은 밝힐 나위도 없다.

537p

전쟁이 끝났을 때 놀라울 정도로 사회는 평등화 또는 평준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노비나 천민이 수천 년 존재했고, 양반 상놈 차별이 유난히 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 변화라고 할 만했다. 평준화가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도 한몫했다. 주요 관직은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국인은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못살았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지위와 연결되어 있는 신분차별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여러 모로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인민군이 들어온 지역에서 머슴이나 빈민들은 목청을 높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군인 수가 크게 늘었는데, 군대생활도 평준화에 기여했다. 사회가 평준화되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자연히 경쟁이 치열해졌다. 한국인은 예부터 교육열이 높았는데, 신분차별이 없어지자 교육을 잘 받았느냐, 일류 학교를 다녔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서 교육열이 무섭게 불어닥쳤다. 해방 이후 교육의 기회는 크게 확대되었는데, 전쟁 이후 초중고 입학생은 더욱 늘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교육의 질적 측면은 돌볼 틈이 없었지만, 교육시설을 늘리는 데 적지 않은 투자를 해야 했다.

555p

한국미술가협회의 이탈은 조형이념적 갈등에서 빚어진 건전한 분파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적 감정의 대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작품 이념이나 행동 및 작가정신의 대결과 가치평가에 의한 지향의 방법을 내걸고 일으켜진 건전한 분립이 아니라 집단행동이란 하나의 이념에서 또 하나의 집단행동이란 이념을 내걸고 분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590p

우리 민족의 주정주의적 성향이 주지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큐비즘의 수용을 어렵게 하였다는 논지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613p

이들 모두가 개화화이면서도 한편으로 자강론자들이었던 데서 미루어볼 수 있는 것은 미술에서 민족성을 강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친일파가 아닌 다음에야 일제의 침략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요 시대정신의 영역에도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강조하는 미의식이 환영받을 수 있었다. 김석준이 옛 법을 견지하는 관점을 강조했던 일이나, 장승업과 안중식이 고전 화풍을 추구해나간 것 또는 김석주의 비평을 대물림하여 오세창이 조선 미술사학 저술에 심혈을 기울인 일은 모두 시대정신 및 예술정신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념과 미학은 탈정치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주의 및 심미론과 기예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617p

이 같은 모더니즘마저 조선성, 동양성으로 흡수되어갔던 것은 고유섭, 오지호, 윤희순과 같은 논객들로부터 워낙 거센 비판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이미 시대가 파시즘이 횡행하던 전시체제였던 터에 모더니즘을 전개해 나갈 상황이 아니었던 탓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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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02-0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네요!ㅎ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
전수연 지음 / 책세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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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에 읽었던 책인데 푸치니 전기를 읽다가 선배 베르디 얘기가 나오길래 다시 읽게 됐다.

푸치니는 후대 사람이라 특별한 언급은 없어 아쉽다.

음악가가 아닌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는 베르디라는 관점이 흥미롭다.

주제가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베르디라고 할 수 있다.

총을 들고 독립 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음악으로서 이탈리아의 독립을 지지했고, 지방분권으로 나눠져 있던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정신적 지주가 된다.

독립 운동과 오페라라니, 과연 음악의 나라답다.

위인의 찬양에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흥미로웠다.

베르디가 두번째 아내 주세피나와 바로 결혼하지 않고 오랜 동거 끝에 전쟁이 일어나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후에야 비로소 혼인신고를 한 점은 독특했다.

우리 정서 같으면 당장 결혼을 해야 아내의 지위가 튼튼해질텐데 왜 굳이 10년을 넘게 동거한 후에야 비로소 결혼했을까?

그 동거 때문에 아버지와 진짜로 호적을 정리하기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주세피나가 낳은 사생아들 때문이었을까?

그에 대한 언급이 특별히 없어 호기심이 생긴다.

푸치니 역시 친구의 아내와 야반도주 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어 대조된다.

그러고 보니 바그너 역시 후배의 아내이나 친구의 딸인 코지마를 데리고 도망쳤다.

과연 열정적인 음악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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