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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100년 1
권영필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과천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다.
한국근현대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인데 흥미롭게도 전시회의 도록 형태이다.
책바다를 통해 빌려 읽게 됐다.
7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나 참고 문헌이 거의 100 페이지에 가깝고, 무엇보다 도판이 많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미술 각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짧게 집필한 책이라 통일성이 다소 부족하나 대신 지루하지 않다.
사실 기대했던 분야는 최근의 미술 동향인데 아쉽게도 1960년대에서 끝나고 만다.
대신 19세기 후반부터 식민 시대의 현대 미술 태동에 이르는 전사 부분이 아주 흥미롭고 유익하다.
장승업에서 조석진, 안중식으로 이어지는 근대 미술의 흐름이 흥미롭다.
근대성을 확보하기도 어려웠을텐데 식민 지배와 반공 이데올로기까지 더해져 해방 이후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미학을 정립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인상깊은 구절>
6p
초창기 화가들 간에 논란이 되었던 '서화'와 '미술'은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질적인 문화의 차이, 회화의 가치체계에 관한 문제였으며 환쟁이에서 화가로의 변화는 예술가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바꾸어놓는 것이었다. 환쟁이나 화원에 비해 화가라는 말은 적어도 문인에 버금가는 존칭처럼 되었다. 서구의 미술가들이 피나는 투쟁과 노력으로 쟁취한 예술가의 자유와 그 사회적 지위를 우리 미술가들은 덤으로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p
서양미술사는 대체로 정반합의 발전 논리를 취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온 회화가 '사실주의'란 이름의 양식인데 한국의 사실주의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주의이며, 쿠르베가 들고 나왔던 리얼리즘은 아니다. 쿠르베가 말한 '산 예술을 만드는 것'이나 '당대 현실의 객관적 묘사'라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방식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전이 유도했던 심미주의 미술관에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그 밖에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이 미술을 하나의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양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전반의 모던아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은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갖는데 흔히 말하듯 시각성의 혁명만이 아니라 당대 정치, 사회체제에 대한 반역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다다 이후 많은 아방가르드 미술이 크던 작던 그러한 성격을 띄었다. 그러나 한국 미술가들의 경우 그 혁명적 요소는 탈락되고 단지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조형, 예술로서 제작되고 평가되어왔던 점이 강하다. 더구나 모턴아트의 존재의의, 근대예술로서의 징표는 예술의 자유,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근현대 미술을 본다면 어찌되겠는가?
21p
한국이 근대세계로 진입해서 취득한 탈중국중심적 자주국의 위상은 한낱 형식적 조문에 그쳤으며,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서 여러 천년 동안을 속박해왔던 중국중심적 체제로부터 이탈했다는 점에서, 그뒤로 식민지 상태에서도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33p
양반 사대부 버금가는 학예세력으로 성장한 여항문인들은 지배층의 하부구조를 이루며 영달을 꿈꾸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 수립보다는 문인화와 같은 주류를 추종했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조성된 북학주의에 동조한 이들은 청조 문화와의 교류에 앞장섰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풍조는 개항기의 '왜양일체' 인식을 비롯해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등으로 야기된 반일 감정에 기대어 주류를 이루며 지속되었다.
43p
초상사진 가운데에서도 어진은 나폴레옹 복제사진처럼 인기 브로마이드로 일반인들의 수집대상이 되었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사진은 국가 통치의 최고 수뇌인 근대적 군주상으로 개안되었는가 하면, 황실의 가족상과 부부상으로 제작되어 유포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의 기초 구성단위로 새롭게 부각된 부부 중심의 가정주의 인식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53p
사진이 갖는 정확한 현실 재현력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고, 관념적 시각에 머물렀던 회화분야에 표현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 한편 우리나라 서양화 정착은 초기 유학파 대가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초기 서양화는 소위 말하는 선진화가 곧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서 화풍이 정착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이들 유학파 화가들의 국내 작품활동은 극히 미미했으며 당시 거의 모든 미술인들이 참가한 조선미전에서조차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지역단위로 대표적인 화가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단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가 의문인데, 각 지역별로 미술교사 등 일본인 화가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그 지역 서양화 지망생들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 화가들의 화풍이 유사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서양화는 특정 화가들에 의해서 화풍이 주도되어 정착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일본 화가를 통하여 자생적인 발아가 이루어져 뿌리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67p
18세기 후반의 초기 북학은 보수화되고 경화되기 시작한 조선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의미가 적지 않았고, 그 결과 정조대는 조선성리학과 융합되어 현실 반영적이고 현실 개혁적인 성과가 많이 나타났지만, 이러한 개혁의 기운이 마침내 체제를 흔들고 위협하는 데가지 이르게 되자 19세기 이후 그에 대한 역작용으로 경화 현상이 나타나며 현실 반영적인 경향보다도 현실 초월적인 경향이 강한 고증학과 금석학 및 중국 고전서화 중심의 서화일치와 화선 일치를 지향하는 탈속한 학예론으로 전화되기 시작하고, 19세기 중후반경에는 주로 척족 세도정국의 상층 귀족과 그 아래 부용적인 상류 중인들이 국제적인 취향의 문물을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적인 이념으로 변모된 채 오히려 우리의 당대 현실에 대한 진실한 시선을 차단하고 억압하며 소외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86p
새로운 기술 도입과 교육제도의 운영은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말업관을 제도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관립교육기관에서 관비로 교육을 실시하고, 상공업 계층뿐만 아니라 우수한 양반 자제도 다수 지원함으로써 공업기술분야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인 직업관이 부분적이나마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100p
한국에 대한 그들의 첫인상은 대개는 멀리서 보았을 때는 아득하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자연풍광을 지니고 있지만 상륙해서 보면 불결하고 낯선 곳이라는 것이다. ... 일부는 한국의 가정과 여성생활 그리고 아동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살피면서 "한국에는 집은 있지만 가정은 없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서구 근대정치에 익숙해진 탓에 한국의 전근대적인 정치행태에 대해서는 모두 일갈하는데 가장 큰 병폐로 지배층의 학정과 무능을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분개에 가까운 낱말들을 동원해서 질타하기도 한다.
274p
산수를 그리는 오랜 전통이 존재하는 동양에서는 서구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손쉬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현의 대상을 선택하여 그리는 과정에는 대상과 회화 사이의 관계를 규정짓고 대상을 의미화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의식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전통시대의 산수화가 자연의 단면을 즉물적으로 절취하여 모방한 재현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도교적 관념이나 성리학적 도덕을 배경으로 하는 복잡다기한 의미망 속에서 재현되고 소비되었다. 전통사회의 문인들에게 시서화는 오늘날과 같이 독립된 장르가 아니라 서로 융합되면서 감상과 창작의 통로를 간섭하였던 까닭에 산수는 단지 시각적 정보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시정의 문학적 언어를 통해서 이해되고 감상되었다. 때문에 뿌리 깊은 산수화 감상과 창작의 관습 속에 내재된 고유한 전통적 가치관과는 이질적인 새로운 감성 및 형식을 가진 서구적 풍경화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285p
예술 활동은 투쟁의 일환이 되었으며, 그 결과 최악의 경우 작품이 없더라도 혹은 작품이 미적으로 충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선전과 선동'만 되는 것이면 어떠한 종류라도 가능하게 된다.
297p
신무용, 양악, 미술, 문학 등에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고급예술의 주체로 부상하고 장르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기생이 담당하던 시서화, 가무에 이르는 통합적 연희는 요리점 문화로 급격히 퇴락해갔다. 1931년 기생철폐론이 나오고 없어져야 할 서비스걸의 풍속으로 공공연히 비판받던 시기에 이번에는 고급미술 속에 기생 이미지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소재들은 한편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요구하는 지방색 또는 조선색의 구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고유의 전통으로 다시금 자리매김되었다.
334p
동아협동체 건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폐지하는 경제 통제의 구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상통하는 반 자본주의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은 동아협동체론이 암시하는 혁신적인 정치질서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가운데 내선일치론 역시 받아들였다. 내선일체는 일제의 조선 병합 이후 계속된 동화주의 정책의 새로운 버전이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을 동아협동체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조선민족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일선 협동체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이 희망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341p
이러한 행적 중에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순응한 사례가 적지 않지만 소신에 따라 열렬하게 투신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광수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제국의 총력전이 조선 민족에게 부활의 서광을 비춘다고 여겼다. 그들은 조선인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천황의 적자로 인정받고 대동아의 신민으로 거듭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힘없는 민족의 마음 속에 자라난 힘에 대한 선망은 이렇게 민족 자신의 소멸에 대한 열광을 맣았다. 이광수의 도착된 민족의식은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인 사회를 휩쓴 파시즘적 광기의 하나였다.
391p
문제는 오늘날의 미술가가 유산계급을 패트런으로 삼아 생활하지 않으면, 생활을 성립할 수 없다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국민 전체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미술이 국민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그림이라는 것은 사회적 눈으로 보면,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면 사치품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자본가와 결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430p
미군정의 탄압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예술계장의 고문이었던 이승학은 1948년의 한 대담에서 한국미술계에 대해 "미술가들은 정치분야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술을 위해서만 산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524p
서글픈 사실이지만 대다수 관객은 남의 행복에 공감하는 힘, 그것을 상상하는 능력마저 잃고 도리어 불행한 운명에만 현실감과 공명을 느끼면서 거기에 눈물을 쏟고 카라르시스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말하면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행복이란 오직 불행을 감수하는 체념과 자기 부정의 능력 속에 그리고 그럴 때 흘리는 눈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영화는 그 눈물을 상업적으로 이용, 신파물의 범람현상을 빚었는데, 그럼으로써 한국영화가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은 밝힐 나위도 없다.
537p
전쟁이 끝났을 때 놀라울 정도로 사회는 평등화 또는 평준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노비나 천민이 수천 년 존재했고, 양반 상놈 차별이 유난히 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 변화라고 할 만했다. 평준화가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도 한몫했다. 주요 관직은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국인은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못살았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지위와 연결되어 있는 신분차별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여러 모로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인민군이 들어온 지역에서 머슴이나 빈민들은 목청을 높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군인 수가 크게 늘었는데, 군대생활도 평준화에 기여했다. 사회가 평준화되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자연히 경쟁이 치열해졌다. 한국인은 예부터 교육열이 높았는데, 신분차별이 없어지자 교육을 잘 받았느냐, 일류 학교를 다녔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서 교육열이 무섭게 불어닥쳤다. 해방 이후 교육의 기회는 크게 확대되었는데, 전쟁 이후 초중고 입학생은 더욱 늘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교육의 질적 측면은 돌볼 틈이 없었지만, 교육시설을 늘리는 데 적지 않은 투자를 해야 했다.
555p
한국미술가협회의 이탈은 조형이념적 갈등에서 빚어진 건전한 분파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적 감정의 대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작품 이념이나 행동 및 작가정신의 대결과 가치평가에 의한 지향의 방법을 내걸고 일으켜진 건전한 분립이 아니라 집단행동이란 하나의 이념에서 또 하나의 집단행동이란 이념을 내걸고 분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590p
우리 민족의 주정주의적 성향이 주지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큐비즘의 수용을 어렵게 하였다는 논지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613p
이들 모두가 개화화이면서도 한편으로 자강론자들이었던 데서 미루어볼 수 있는 것은 미술에서 민족성을 강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친일파가 아닌 다음에야 일제의 침략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요 시대정신의 영역에도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강조하는 미의식이 환영받을 수 있었다. 김석준이 옛 법을 견지하는 관점을 강조했던 일이나, 장승업과 안중식이 고전 화풍을 추구해나간 것 또는 김석주의 비평을 대물림하여 오세창이 조선 미술사학 저술에 심혈을 기울인 일은 모두 시대정신 및 예술정신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념과 미학은 탈정치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주의 및 심미론과 기예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617p
이 같은 모더니즘마저 조선성, 동양성으로 흡수되어갔던 것은 고유섭, 오지호, 윤희순과 같은 논객들로부터 워낙 거센 비판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이미 시대가 파시즘이 횡행하던 전시체제였던 터에 모더니즘을 전개해 나갈 상황이 아니었던 탓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