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기술 1 로버트 그린의 권력술 시리즈 3
로버트 그린 지음, 강미경 옮김 / 이마고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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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이 멋있어서 읽고 싶던 책인데, 막상 고르고 보니 분량이 만만치 않다

700페이지 남짓 되는 분량이라 (미국 책들은 대체적으로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힐러리 자서전도 분량이 너무 많아 두 권으로 분책했다고 한다) 며칠에 걸쳐 나눠 읽었다

다행히 쉬운 내용이라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이성을 유혹하는 연애 서적은 자기 계발서와 더불어 널리 퍼져 있다

이 책이 그런 뻔한 내용을 담았다면 700페이지 씩이나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말도 있지만, 풍부한 역사적 문학적 예화들과 인간의 심리 분석이 돋보이는 책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훌륭한 책은 아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현대 사회는 이성만을 유혹하는 게 아니다

유혹은 도처에 널려 있다

특히 매스미디어에 의한 광고가 일반화 되고, 선거를 통한 대중 정치로 바뀌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을 당하고, 또 남을 유혹해야 한다

유혹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요즘 유행하는 "설득"이라는 단어로 대치할 수 있다

"유혹의 기술"을 다른 말로 바꾸면 "설득의 심리학"이 될 것 같다

저자는 함께 사는 사회에서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인간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도 유혹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마 전에 읽은 "이미지와 환상"에 완전히 대치되는 책이다

부어스틴은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고 실체를 간파하라 충고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을 이미지로 둘러싸 상대가 나의 실체를 보지 못하도록 감추라고 말한다

사회적 현상, 즉 정치라든가 매스 미디어에서는 부어스틴의 말을 참고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이 책을 참조하는 게 현명할 것 같다

 

여러 가지 유혹의 전략, 혹은 인간의 심리에 대해 설명하지만 기본 조건은 본인이 매력적이어야 할 것이다

또 매력의 가장 큰 부분은 외모다

현대 사회가 외모 지상주의라 걱정하지만, 비단 오늘날의 문제는 아님을 보여 준다

다만 과거에는 남자가 지닌 권력을 나눠 갖기 위해 여자에게만 중요했던 외모가, 이제는 남녀 모두에게 중요해졌다는 게 차이다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는 지적 수준과 더불어 개인의 가치를 높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물론 경제적인 능력이야 두 번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기본 조건이다

 

유혹의 기술들을 살펴 보면, 헤어질 때는 과감하게 이별을 고하든가 아니면 상대가 집착하는 것 이상으로 매달리라고 한다

그러면 상대는 금방 질려서 도망갈 거라고 한다

이것은 반대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집착이나 소유욕은 절대 금기라는 얘기다

인간이 유혹에 곧잘 넘어가는 이유는 권태 때문이라고 한다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해결되면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 바로 권태감일 것 같다

흔히 배부른 소리라고 하지만 사는 게 재미없고 지겨워지면 하루하루가 끔찍해진다

이 때 짠 하고 나타나 색다른 즐거움을 주면서 유혹하면 대부분은 쉽게 넘어간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혹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절대 평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연인 관계가 일상화 되면 곧 관계는 깨지기 쉽다

현실이란 늘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므로 또다른 유혹을 기다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저자는 관계 지속을 원하면 재유혹 하라고 충고한다

재유혹이란 색다른 환경을 말한다

여행이나 축제 등의 공간적 변화일 수도 있고, 질투를 유발시키는 삼각 관계일 수도 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뒤르 부인은 변신의 천재였다고 한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같은 드레스를 입은 적이 없고, 처소에 온갖 희귀한 물건들을 장식했으며 (중국 도자기나 비단 같은), 나중에는 아예 극장을 지어 매주 새로운 공연을 선보였다고 한다

사냥에 몰두하던 루이 15세가 문화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바로 그녀의 공연이었다고 하니, 왕의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 하다

그야말로 천일 동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왕의 관심을 유지한 셰헤라자데에 비견될만 하다

(퐁파뒤르 부인은 나이가 들자 젊은 여자를 왕에게 공급하는 방식으로 관심을 유지했다고 하니, 권력을 원하는 약한 여자의 가엾은 발버둥 같기도 하다 장녹수 역시 왕에게 제공되는 여자를 직접 고르는 식으로 연산군의 관심을 유지했다)

 

흥미있는 예화는 "위험한 관계"에 등장하는 발몽과 투르벧 부인이다

이 소설은 "조선남녀상열지사-스캔들"이라는 우리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는데, 정숙한 여인이 바람둥이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바람둥이는 정숙한 여인의 내부에 잠들어 있는 일탈 욕구와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죄책감을 이용한다

당신 때문에 괴롭다고 자학적인 모습을 보이면 마음이 약한 정숙한 부인은 자비와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이뤄진 사랑이 과연 행복할 것인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한가인과 이정진의 사랑이 곧 깨지듯 (이정진은 비오는 날 그녀의 집 앞에서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는 자학적인 행동으로 사랑을 얻는다) 바람둥이에게 유혹이란 그저 게임 에 불과하다

 

여러가지 전략과 기술들을 서술해 놨지만, 이 책의 미덕을 찾자면 상대의 입장에 서서 그가 뭘 원하는지 들여다 보라는 발상의 전환이 새롭다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역지사지"나,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문구가 인간 관계의 황금률임은 익히 알고 있으나, 이 책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 진리를 강조한다

인간은 누구나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기 때문에, 자기 말을 성실하게 들어 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관심을 표명해 주면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라고 한다

즉 내 관점에서 보지 말고, 상대의 관점에서 보라고 한다

쉬운 말 같으나, 참 하기 어려운 충고다

진정한 유혹자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꿰뚫어 채워주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반드시 남을 유혹하려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상대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마음가짐은 모든 인간 관계에 필요한 핵심 상항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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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 2004-12-1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글이었습다..마지막에 '진정한 유혹자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꿰뚫어 채워주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이부분이 맘에 드네요...



 
의료개혁과 의료권력 나남신서 531
조병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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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개혁은 직업적인 이유로 늘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적절한 책을 찾기 힘들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는데, 많지 않은 분량에 핵심을 잘 집어낸 좋은 책이다

(우수 학술 도서에 선정됨)

의료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의사들이나, 시민 단체가 참조해 볼만 하다

 

이 책의 배경은 2000년에 벌어진 초유의 사건, 의사 파업이다

국민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의사들이 파업을 벌였다는 도덕적인 충격 보다는, 기득권층이라 여겨 온 전문가 집단이 정부에 반발해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훨씬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당시 의사들을 지지하는 사회 세력은 거의 전무했는데, 다만 변호사 협회가 전문가들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지지를 보냈을 뿐이다

저자는 의사들의 척박한 의료 환경을 옆에서 지켜 보는 간호사나 병원 노조들이 왜 그들의 파업에 동조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만약 그들이 의사들의 파업에 지지 성명을 냈다면, 집단 이기주의라는 도덕적 비난의 차원을 넘어서 의료계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인식했을 거라며 아쉬워 한다

 

의사들이 저수가 정책에 시달리며, 약가 마진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지를 맞출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한 채, 의사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무조건 의약 분업만 시행하려 든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런데 저자는 근본적인 문제를 의료 환경의 변화로 본다

지금까지 의사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질병 치료에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러 왔다

특히 생의학을 바탕으로 한 서양 의학이 눈부신 성공을 거두면서, 환자들은 치료에 소외되어 갔고 더욱 전문적이고 복잡한 치료가 최선의 치료라 각광받았다

그러므로 의사들은 의약 분업을 논의하는 자리에, 동네 슈퍼 아줌마나 주유소 아저씨가 왜 나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인의 의학적 지식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변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현대는 갈수록 탈권위적인 사회로 변모해 간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정보가 공유되고 이제 환자들은 의료에 있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의학 분야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전문가 집단은 사회의 개방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권위를 내세우며 전문성을 근거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일반인의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게 됐다

이것이 의사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열린 의료란 어쩌면 패러다임의 전환일지도 모른다

의료 행위의 결정 과정에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의 의견을 참조해야 하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에 대해서도 수용할 것을 요구하니, 어찌 보면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훼손시키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그것이 대세라면 결국 어떤 방향으로든 수용해야 살아 남을 것이다

현재와 같이 의사가 치료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생각으로는, 변화하는 의료 환경에서 생존하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미국은 이미 열린 의료를 지향하며, 대체의학 등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한다고 한다

 

의사 파업을 바라보는 저자의 독특한 시각은, 의사와 병원의 분리다

그 동안 정치에 무관하고 진료실에서 개인적인 삶을 살아 온 의사들이 한꺼번에 파업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 의사라는 신분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고 본다

즉 같은 의사라고 동지 의식을 갖은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병원 자본과 프롤레타리아 의사를 구분한다

과거 한국은 의사가 소자본으로 자기 진료소를 운영하는 방식이 대세였는데, 정부가 민간 부문에 의료 사업을 의존하면서 급속도로 의료 자본이 성장하게 된다

의사들이 영리 목적으로 일하면서도 탈자본화를 지향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분업이었는데, 병원 자본이 대량 도입되면서 자체적인 견제가 불가능해진다

의료 체계가 제대로 수립되면 의사들은 자기 영역 환자만 보고 그 외는 다른 병원이나 상위 체계로 넘긴다

말하자면 동료 의사나 병원과 보완재 관계이지, 대체제 관계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종합병원이 이익 창출을 위해 외래 환자 유치에 나서면서 (이것은 전국민 의료 보험과 저수가 정책에 원인이 있다) 동네 의원과 경쟁 관계에 놓인다

큰 병원과 전문 의료진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특성상, 의사 개인이 자본에 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종합 병원은 전공의 선발권이나 의료 환경의 높은 위상을 위해 대학 병원으로 승격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 노력이 신설 의대 설립을 유도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의료 개혁이 종결되면 의사들의 계층 분화가 이뤄질 것이라 예상한다

사실 이것은 새삼스런 주장도 아니다

자본을 소유한 의사와 그렇지 않은 의사의 분화는 이미 "부자 의사, 가난한 의사"의 구분을 일반화 시키고 있다

의사가 자본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1차 의료 기관을 살려야 하고, 그것이 의료비 상승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주지시킨다

병원의 외래 환자에 대해서도 의약 분업을 실시한 것이 그 노력의 일환이다

또한 의료 전달 체계를 확립하여 병원이 의원과 경쟁하는 것을 최소화 시키라고 한다

전문의와 큰 병원, 고가의 검사 기구에 집착하는 국민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현대가 self care의 시대임을 지적한다

이미 미국에서는 자조 집단이 활성화 되서 이 집단의 컨설트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도 생겼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알콜 중독자의 모임인 AA일 것이다

(이 단체의 효과는 정신과 교과서에도 나온다)

출산을 질병이 아닌, 인체의 자연스런 발달 과정으로 인지해 병원이 아닌 집에서, 의사가 아닌 가족의 주도 하에 분만하려는 노력도 TV에 자주 소개된다

저자는 비아그라나 폐경기 후 호르몬 복용 등을 예로 들면서 의학이 생활을 지배한다고 걱정한다

말하자면 과거에는 질병이 아닌 자연스런 노화 과정이었는데, 이러한 생활약물이 등장하면서 개인의 일상을 의료 권력이 통제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에서도 읽은 내용이지만 생활 약물은 (life drug) 개인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준다

이제는 질병이 아니더라도 사는 데 불편한 점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화 연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질병의 치유 보다 예방이 더 중요시 되는 현대의 건강 수준을 만족시키려면 생활 약물의 개발은 당연한 수순이라 본다

 

외부에서 바라 본 의사 집단에 대한 분석을 읽으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열린 의료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교과서적인 진료 요구에 깔려 있는 "부권적 전문주의"를 읽어 낸다

사실 모든 과학이 갖는 불확실성이라는 한계를 인정한다면, 열린 의료는 실수를 줄이기 위한 유일한 대안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많지만, 어쨌든 이론은 그렇다)

특히 저자는 의료 행위에 있어 의사가 유일한 주체가 아니며, 환자는 물론 약사, 간호사, 의료 기사, 대체 의학 등등 기타 집단과의 상호 협조를 요구한다

주도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으나 유일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타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냉정하기 마련이다

변해 가는 의료 환경에 적응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환자 치료에 임하기 위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중요한 문제들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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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 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
아툴 가완디 지음, 김미화 옮김, 박재영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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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다

아마도 직업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번역할 때 원제보다 훨씬 그럴 듯한 제목을 잘 붙이는데, 이 책의 원제는 "Complications"였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의 원제는 "Writing"이었다)

이 단어는 합병증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환자들의 불만을 뜻하는 "complain"과 더불어 병원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일단 레지던트가 (그것도 외과 레지던트가) 한 권의 책을 펴냈다는 것 자체가 존경스럽다

sugury 파트는 년차가 올라갈수록 바쁜 법인데, 그는 8년의 수련 과정 중 7년차이다

미국이라고 해서 특별히 수련 과정이 한가한 것도 아닐텐데 (그래도 한국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들었다 이를테면 당직을 선 날은 다음 날 오전에 병원에 나타나면 안 된다고 한다), 3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쓸 여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 번에 다 쓴 건 아니고,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을 편집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글솜씨는 괜찮은 편이다

개인의 신상 명세서가 아니라, 일선 진료 현장의 의사가 겪는 의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고 냉철한 분석과 자기 반성을 시도한다

이 정도면 단순한 수필집은 아닌 듯 하다

계명대 외과 교수가 쓴 "나는 외과 의사다"라는 책 보다 한 수 위 같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지만, 현대의학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저자의 지적처럼 의학, 혹은 과학 자체의 불확실성에 있다

세상에 100% 완전한 것은 없다는 대명제를 생각해 보다면, 의학에 오류가 없는 게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그 완전할 수 없는 학문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데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상대하는 이상, 도덕적으로 본다면 단 1%의 오류도 없는 것만 의학이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의학이 완전무결 하다면 인간은 죽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의료 현장에서 겪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솔직하고 반성적인 태도로 접근한다

특히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선택을 해야 할 경우, 의사는 고민에 빠진다

선택을 내릴 환자가 가족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저자는 딸의 치료 방법을 결정할 때, 선택권을 다른 의사에게 넘겨 버린다

잘못된 선택일 경우 죄책감 때문에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켜 버린 것이다

현대 의학은 환자의 결정권을 가장 우선시 하지만, 실제로 그 결정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환자는 드물다고 한다

암 환자의 경우 환자에게 선택권을 주면 12%만이 그렇게 한다고 한다

환자들은 의사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일방적으로 쥐고 흔든다고 불평하지만 (즉 치료에서 그들이 소외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목숨이 달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경우 결코 그 책임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실력과 친절"이라는 상투적이지만 본질적인 얘기를 한다

환자에게 최선의 care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상태에서 친절하게 설명한 뒤 환자의 선택을 돕고 조언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 "친절"이라는 단어 속에는 치료가 종결되는 마지막 시점까지 환자에게 끊임없이 어떤 상태이고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 성실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100% 완전할 수 없다면, 적어도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괴사성 근막염이라는, 사망률이 70%에 달하는 질병에 걸린 엘리노어 얘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단순히 봉와직염이라 생각하고 항생제 치료만 할까 했는데, 저자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불길한 생각을 떨치치 못한다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단순히 불길한 느낌에 불과했는데 결국 저자의 그 느낌에 의거해 그녀는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

그렇지만 다리를 자를 위기에 처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걷기도 힘들고, 재발할까 봐 두려움에 떤다

단 1%의 유병률에 걸렸으니, 다른 모든 희귀한 질병이 나에게 닥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일상의 불편함과 질병의 공포에 떨면서도, 그녀는 강인하게 말한다

결국 나는 70%가 죽는다는 이 질병을 이겨냈고, 다리도 자르지 않았으며 현재 잘 살고 있다

큰 어려움을 극복했으니, 다른 일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것이야 말로 왜 하필 나에게 끔찍한 일이 닥쳤냐고 한탄하는, 대부분의 불행한 환자들에게 필요한 모범 답안인지도 모르겠다

또 크고 작은 불행을 겪고 살아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유용한 답일 것이다

 

안면 홍조 때문에 앵커우먼을 포기한 여자나, 200kg이 넘는 고도 비만으로 직장은 커녕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는 불행한 남자의 얘기도 나온다

둘 다 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때로 의학은 환자들의 인격을 위협하는 "사소한" 불편에 대한 해결책을 주기도 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의학은 견딜 수 있으나 심적으로 괴로운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도 얼굴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미 미국의 보험 회사들은 고도 비만의 위절제술의 보험 수가를 인정하고 있단다

(보험 전 수가는 2만 달러)

 

칼 세이건이 말했듯, 과학의 미덕은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개선할 의지가 분명하다는 데 있다

의학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현대 의학의 완전무결성을 믿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여러 실패들을 통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간다는 확신을 가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과 같은 자기 반성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는 혹시 책에 실릴 실패들이 동료 의사들의 명성에 누가 될까 염려했으나, 흔쾌히 인용에 동의해 줬다고 기뻐한다

모든 의사가 책을 낼 것까진 없지만, 어떤 의사든지 의학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며 더 나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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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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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말 독특한 소설이다

아멜리 노통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이렇게 개성있는 소설일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 제목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은 기분이다

제목과 소설 내용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데도, 묘한 어울림을 주면서 시선을 끄는 그런 제목 말이다

책 디자인도 꽤나 개성적이다

원래 노통의 소설들은 길이가 짧은 편인데, 이 소설도 200페이지가 채 못되고, 글씨도 커서 동화책 읽듯 금방 읽어버렸다

소설이 짧으면 완성 구조를 갖기 힘든데, 그녀는 명성만큼 재치있는 결말을 낸다

 

가장 내 마음을 끄는 대목은 발레를 향한 플렉트뤼드의 집념이다

클래식 발레가 추구하는 가장 큰 이상이 바로 중력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저자의 서술처럼 마치 비밀을 캐낸 기분이다

언젠가 발레를 소개하는 책자에서 그녀들은 끊임없이 날기를 원한다는 문장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그저 문학적인 표현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발레리나들은 진짜로 날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혹독한 훈련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공중에서 떠 있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한다

아멜리의 표현대로 옆으로 길게 늘어 선 보조봉은 그녀들의 횃대다

 

플렉트뤼드를 통해 아멜리는 거식증에 빠지는 심리 구조를 잘 묘사한다

음식에 대한 욕구는 본능인데 대체 어떤 이유로 음식을 거부하고 죽어 가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플렉트뤼드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발레리나가 되려면, 즉 공중을 날기 위해서 체중이 적게 나가야 한다는 건 필수 조건이다

발레 학교에서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해골이 되라고 강요한다

날씬한 사람은 보통으로 간주되고, 정상인 사람은 뚱뚱한 암소로 비유된다

이런 상황이니 먹는다는 행위에 두려움을 갖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먹고 싶은 본능을 이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참는 정도다

말하자면 굶는 것이 고통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거식증이 되면 먹는 행위가 오히려 고통이다

 

플렉트뤼드는 훌륭한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학교의 규칙을 완전히 내제화 시켜 자발적으로 음식을 거부한다

칼슘 보충을 위해 유일하게 허용된 탈지 요구르트마저 그녀는 거부한다

결국 골다공증에 걸려 어느 날 다리뼈가 부러지고 만다

 

식욕을 이겨낸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배설의 욕구를 참는 것처럼, 목적을 위해서 음식의 욕구를 이겨 내는 일은 고도의 절제를 요한다

그런데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나 강렬하면 음식 자체를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거식증이 되고 만다

오히려 먹는 행위가 고통이 될 정도로 발레에 대한 그녀의 욕구는 절정에 이른다

이 정도라면 생명을 걸었다고 할 만 하다

그녀는 이제 뚱뚱한 사람들을 혐오한다

저 정도로 먹고 어떻게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사는지, 혹은 저렇게 먹기만 하고 인생의 목표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다

 

사실 나는 하나의 목표에 집요하게 몰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마 대부분 이런 인물을 동경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이겨내는 사람들이니까

또한 이런 사람들은 그 목표에만 매달리니까 성과도 훌륭한 편이다

그 절제력에 반하고, 다시 그들이 이룬 업적에 존경을 표할 것이다

위인전을 보면 대부분 놀라울 정도의 자기 절제를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버리고 목표에만 정진하는 얘기들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사실은 끔찍한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플렉트뤼드는 결국 다시는 발레를 할 수 없게 됐지만, 만약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발레리나로서 성공해 평범한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감정들, 심지어 먹고자 하는 본능마저 메말라 버린 건조한 인간인데 말이다

 

자기 절제가 사실은 자신에 대한 가학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절제는 찬탄받아 마땅한 덕목이지만,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잃는 게 인생이다

그 뒤에 숨겨진 끔찍한 노력과 고통들, 그리고 감정의 메마름, 인간 관계의 단절 등도 늘 염두에 두면서 진짜 세상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항상 뒤돌아 봐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은 (사실 엄격한 의미의 반전도 아니지만) 마지막에 작가 아멜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자살 직전, 첫사랑을 만나 구제받은 뒤 행복한 삶을 살려던 그녀에게 작가의 표현대로 "아멜리 노통이라는 끔찍한 불행이 찾아온다"

소설에 어떻게 자신을 등장시킬 생각을 했는지, 발상이 놀랍다

아마 그래서 겉표지에 나를 죽인 자의 이야기라고 소개를 한 모양이다

동화같은 이야기라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했는데 (솔직히 제대로 결말을 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뒷통수를 치는 결말을 보여준다

아멜리가 각광받는 이유는 이런 비상투적인 결말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플렉트뤼드의 어머니는 19세에 결혼한 후 아이를 임신하는데, 임신 9개월 무렵 남편의 무능력함에 화가 나 총으로 그를 죽이고 만다

그녀 역시 교도소에서 아이를 낳은 뒤 자살한다

아멜리는 플렉트뤼드에게 뱃속에서부터 살인을 관찰한 살인녀의 딸인 네가, 그동안 살인 충동을 어떻게 이겨왔는지 신기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계속 플렉트뤼드의 무의식 속에 살인 본능이 숨어 있다고 자극하고, 결국 플렉트뤼드 역시 어머니처럼 순간적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녀를 죽인다

말하자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작가를 죽인 것이다!!

 

문장이나 구조가 뛰어난 소설은 아니지만, 발상이 신선하다

툭툭 끊는 듯 이어지는 서술 방식도 독특하다

배수아 소설을 보는 느낌도 든다

(그녀 소설보다는 훨씬 재밌다 배수아는 개성적인 듯 하면서도 사실은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를 한다)

일단 분량이 짧아 읽기가 편하다

그녀의 기발한 발상들을 좀 더 들여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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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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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히 최고의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책값도 4만원으로 만만치 않고 (그림이 한 장도 없는데 말이다) 내용도 800페이지에 달한다

워낙 종횡무진 하면서 수많은 이론들과 실험 결과를 서술한 책이라 독서 시간을 따로 내서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며칠간 6시에 출근했다

결론은 아주 유익하다

내용 자체가 어렵진 않은데 워낙 많은 자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상당히 집중을 해야 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빈 서판 이론, 즉 인간의 마음은 백지와 같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통용돼 왔고, 교육이나 여성의 권리, 인류 평등 등을 지지하는 기본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나 역시 여성의 권리 측면에서는, 본질적인 남녀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인 관습과 문화에 의해 여성성과 남성성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부분은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과학이 뇌의 신비를 풀어 감에 따라 빈 서판 이론이 허구라는 사실이 입증되어 가고, 여성성 역시 본질적인 차이는 인정해야 함을 느낀다

 

빈 서판 이론에 대항하는 저자의 주장, 혹은 과학의 결과는 한 개인을 특징지우는 가장 큰 요인이 유전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이 유전의 역할을 증명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반대를 겪는 까닭은, 인종 차별주의나 남성 우월주의 등에 이용될까 두려워서다

특히 이 이론은 사회적 다윈주의나 우생학의 근거로 악용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개인을 집단의 범주로 묶은 뒤 그 범주에 해당하는 규칙으로 다루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빈 서판 이론에 특히 격렬하게 반대할 그룹은 조기 교육 사업자들일 것 같다

교육 분야에서 빈 서판 이론은 특히 신봉되는데, 어린아이 때 어떻게 길러지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일생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고, 지능 발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수많은 장난감과 책 등등에 돈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저자는 어린이란 절대, 마음대로 조작할 있는 물렁물렁한 고무 찰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성격과 인격적 특성과 지능 등이 상당 부분 결정되기 때문에 (즉 유전에 의해), 양육 방식에 따라 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쌍둥이와 입양아 연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로 떨어져 산 쌍둥이는 함께 자란 입양아 보다 훨씬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유전이 아이의 50%를 결정 짓는다면 나머지 50%는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

저자는 양육 태도와 같은 공유 경험이 아니라 (즉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의 경우, 혹은 같은 방식으로 키워진 아이들) 또래 집단과 같은 단독 경험이라고 말한다

형제들을 놓고 봤을 때 집안 환경이 공유 경험이라면, 그들이 다니는 학교의 또래 집단은 각 형제들의 단독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독 경험 역시 사회화에 영향을 끼칠 뿐, 인격적 특성에는 별다를 게 없다고 한다

 

이미 아이의 지능이나 성격이 규정지어져 있다면, 올바른 양육이란 불필요한 것일까?

저자는 부부 관계를 예로 든다

부부는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지만 (신혼 초를 제외한다면), 좋은 관계를 위해 서로에게 잘 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 간에도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써야지, 내가 아이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가정 환경이 나빠서 이렇게 됐다는 식의 주장은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다

또 조기 교육을 위해 쉴 틈도 없이 여러 학원에 보내고 많은 교육비를 쏟아 부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저자는 아이가 접하는 가정 밖의 환경은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면 어른이 그들의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애쓰듯, 아이 역시 자신들의 세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또래 집단의 가치를 내제화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즉 담배를 피우고 주먹질을 잘 하는 게 멋지다고 평가받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 (흑인 슬램가처럼) 아이는 폭력적이 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부모 가정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편부모 가정이 속해 있는 지역이 훨씬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강간에서도 빈 서판 이론은 틀렸다고 지적한다

빈 서판 이론은 강간이 여성 지배를 위한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명백히 그것은 섹스와 관련됐다고 말한다

능력있는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너를 갖추고 돈을 쓰지만, 사회에서 뒤쳐진 범죄자들은 섹스 욕구를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부장 문화의 소멸은 강간의 소멸과 별 관계가 없고, 보다 강력한 치안 유지가 해결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여자들 역시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자동차 열쇠를 꽂은 채로 차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의 주장은 진보주의 철학과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빈 서판 이론이 틀렸다고 보면, 인류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모순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현대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문명 이전 시대가 평화로웠다는 말도 그저 관념적인 얘기일 뿐 현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도킨슨이 쓴 "이기적인 유전자"에 부합되는 얘기다

요즘 나온 "이타적인 유전자"에 대해 말하자면, 보다 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호혜적인 이타주의 전략을 쓴다고 할 수 있다

즉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측면에서만 성립된다는 말이다

 

나는 대체적으로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주장들이 과학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실험과 조사들을 거쳐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

저자가 우려한 것처럼 어떤 신념이나 개념이 옳다는 것은 도덕적인 당위 명령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결과가 특정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체의학 역시 왜 옳은지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단지 도덕적으로 그렇다, 혹은 철학적인 당위성 만으로는 존재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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