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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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히 최고의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책값도 4만원으로 만만치 않고 (그림이 한 장도 없는데 말이다) 내용도 800페이지에 달한다

워낙 종횡무진 하면서 수많은 이론들과 실험 결과를 서술한 책이라 독서 시간을 따로 내서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며칠간 6시에 출근했다

결론은 아주 유익하다

내용 자체가 어렵진 않은데 워낙 많은 자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상당히 집중을 해야 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빈 서판 이론, 즉 인간의 마음은 백지와 같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통용돼 왔고, 교육이나 여성의 권리, 인류 평등 등을 지지하는 기본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나 역시 여성의 권리 측면에서는, 본질적인 남녀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인 관습과 문화에 의해 여성성과 남성성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부분은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과학이 뇌의 신비를 풀어 감에 따라 빈 서판 이론이 허구라는 사실이 입증되어 가고, 여성성 역시 본질적인 차이는 인정해야 함을 느낀다

 

빈 서판 이론에 대항하는 저자의 주장, 혹은 과학의 결과는 한 개인을 특징지우는 가장 큰 요인이 유전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이 유전의 역할을 증명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반대를 겪는 까닭은, 인종 차별주의나 남성 우월주의 등에 이용될까 두려워서다

특히 이 이론은 사회적 다윈주의나 우생학의 근거로 악용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개인을 집단의 범주로 묶은 뒤 그 범주에 해당하는 규칙으로 다루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빈 서판 이론에 특히 격렬하게 반대할 그룹은 조기 교육 사업자들일 것 같다

교육 분야에서 빈 서판 이론은 특히 신봉되는데, 어린아이 때 어떻게 길러지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일생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고, 지능 발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수많은 장난감과 책 등등에 돈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저자는 어린이란 절대, 마음대로 조작할 있는 물렁물렁한 고무 찰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성격과 인격적 특성과 지능 등이 상당 부분 결정되기 때문에 (즉 유전에 의해), 양육 방식에 따라 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쌍둥이와 입양아 연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로 떨어져 산 쌍둥이는 함께 자란 입양아 보다 훨씬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유전이 아이의 50%를 결정 짓는다면 나머지 50%는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

저자는 양육 태도와 같은 공유 경험이 아니라 (즉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의 경우, 혹은 같은 방식으로 키워진 아이들) 또래 집단과 같은 단독 경험이라고 말한다

형제들을 놓고 봤을 때 집안 환경이 공유 경험이라면, 그들이 다니는 학교의 또래 집단은 각 형제들의 단독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독 경험 역시 사회화에 영향을 끼칠 뿐, 인격적 특성에는 별다를 게 없다고 한다

 

이미 아이의 지능이나 성격이 규정지어져 있다면, 올바른 양육이란 불필요한 것일까?

저자는 부부 관계를 예로 든다

부부는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지만 (신혼 초를 제외한다면), 좋은 관계를 위해 서로에게 잘 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 간에도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써야지, 내가 아이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가정 환경이 나빠서 이렇게 됐다는 식의 주장은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다

또 조기 교육을 위해 쉴 틈도 없이 여러 학원에 보내고 많은 교육비를 쏟아 부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저자는 아이가 접하는 가정 밖의 환경은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면 어른이 그들의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애쓰듯, 아이 역시 자신들의 세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또래 집단의 가치를 내제화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즉 담배를 피우고 주먹질을 잘 하는 게 멋지다고 평가받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 (흑인 슬램가처럼) 아이는 폭력적이 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부모 가정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편부모 가정이 속해 있는 지역이 훨씬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강간에서도 빈 서판 이론은 틀렸다고 지적한다

빈 서판 이론은 강간이 여성 지배를 위한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명백히 그것은 섹스와 관련됐다고 말한다

능력있는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너를 갖추고 돈을 쓰지만, 사회에서 뒤쳐진 범죄자들은 섹스 욕구를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부장 문화의 소멸은 강간의 소멸과 별 관계가 없고, 보다 강력한 치안 유지가 해결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여자들 역시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자동차 열쇠를 꽂은 채로 차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의 주장은 진보주의 철학과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빈 서판 이론이 틀렸다고 보면, 인류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모순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현대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문명 이전 시대가 평화로웠다는 말도 그저 관념적인 얘기일 뿐 현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도킨슨이 쓴 "이기적인 유전자"에 부합되는 얘기다

요즘 나온 "이타적인 유전자"에 대해 말하자면, 보다 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호혜적인 이타주의 전략을 쓴다고 할 수 있다

즉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측면에서만 성립된다는 말이다

 

나는 대체적으로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주장들이 과학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실험과 조사들을 거쳐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

저자가 우려한 것처럼 어떤 신념이나 개념이 옳다는 것은 도덕적인 당위 명령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결과가 특정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체의학 역시 왜 옳은지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단지 도덕적으로 그렇다, 혹은 철학적인 당위성 만으로는 존재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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