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 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
아툴 가완디 지음, 김미화 옮김, 박재영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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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다

아마도 직업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번역할 때 원제보다 훨씬 그럴 듯한 제목을 잘 붙이는데, 이 책의 원제는 "Complications"였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의 원제는 "Writing"이었다)

이 단어는 합병증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환자들의 불만을 뜻하는 "complain"과 더불어 병원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일단 레지던트가 (그것도 외과 레지던트가) 한 권의 책을 펴냈다는 것 자체가 존경스럽다

sugury 파트는 년차가 올라갈수록 바쁜 법인데, 그는 8년의 수련 과정 중 7년차이다

미국이라고 해서 특별히 수련 과정이 한가한 것도 아닐텐데 (그래도 한국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들었다 이를테면 당직을 선 날은 다음 날 오전에 병원에 나타나면 안 된다고 한다), 3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쓸 여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 번에 다 쓴 건 아니고,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을 편집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글솜씨는 괜찮은 편이다

개인의 신상 명세서가 아니라, 일선 진료 현장의 의사가 겪는 의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고 냉철한 분석과 자기 반성을 시도한다

이 정도면 단순한 수필집은 아닌 듯 하다

계명대 외과 교수가 쓴 "나는 외과 의사다"라는 책 보다 한 수 위 같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지만, 현대의학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저자의 지적처럼 의학, 혹은 과학 자체의 불확실성에 있다

세상에 100% 완전한 것은 없다는 대명제를 생각해 보다면, 의학에 오류가 없는 게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그 완전할 수 없는 학문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데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상대하는 이상, 도덕적으로 본다면 단 1%의 오류도 없는 것만 의학이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의학이 완전무결 하다면 인간은 죽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의료 현장에서 겪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솔직하고 반성적인 태도로 접근한다

특히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선택을 해야 할 경우, 의사는 고민에 빠진다

선택을 내릴 환자가 가족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저자는 딸의 치료 방법을 결정할 때, 선택권을 다른 의사에게 넘겨 버린다

잘못된 선택일 경우 죄책감 때문에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켜 버린 것이다

현대 의학은 환자의 결정권을 가장 우선시 하지만, 실제로 그 결정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환자는 드물다고 한다

암 환자의 경우 환자에게 선택권을 주면 12%만이 그렇게 한다고 한다

환자들은 의사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일방적으로 쥐고 흔든다고 불평하지만 (즉 치료에서 그들이 소외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목숨이 달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경우 결코 그 책임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실력과 친절"이라는 상투적이지만 본질적인 얘기를 한다

환자에게 최선의 care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상태에서 친절하게 설명한 뒤 환자의 선택을 돕고 조언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 "친절"이라는 단어 속에는 치료가 종결되는 마지막 시점까지 환자에게 끊임없이 어떤 상태이고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 성실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100% 완전할 수 없다면, 적어도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괴사성 근막염이라는, 사망률이 70%에 달하는 질병에 걸린 엘리노어 얘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단순히 봉와직염이라 생각하고 항생제 치료만 할까 했는데, 저자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불길한 생각을 떨치치 못한다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단순히 불길한 느낌에 불과했는데 결국 저자의 그 느낌에 의거해 그녀는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

그렇지만 다리를 자를 위기에 처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걷기도 힘들고, 재발할까 봐 두려움에 떤다

단 1%의 유병률에 걸렸으니, 다른 모든 희귀한 질병이 나에게 닥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일상의 불편함과 질병의 공포에 떨면서도, 그녀는 강인하게 말한다

결국 나는 70%가 죽는다는 이 질병을 이겨냈고, 다리도 자르지 않았으며 현재 잘 살고 있다

큰 어려움을 극복했으니, 다른 일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것이야 말로 왜 하필 나에게 끔찍한 일이 닥쳤냐고 한탄하는, 대부분의 불행한 환자들에게 필요한 모범 답안인지도 모르겠다

또 크고 작은 불행을 겪고 살아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유용한 답일 것이다

 

안면 홍조 때문에 앵커우먼을 포기한 여자나, 200kg이 넘는 고도 비만으로 직장은 커녕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는 불행한 남자의 얘기도 나온다

둘 다 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때로 의학은 환자들의 인격을 위협하는 "사소한" 불편에 대한 해결책을 주기도 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의학은 견딜 수 있으나 심적으로 괴로운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도 얼굴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미 미국의 보험 회사들은 고도 비만의 위절제술의 보험 수가를 인정하고 있단다

(보험 전 수가는 2만 달러)

 

칼 세이건이 말했듯, 과학의 미덕은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개선할 의지가 분명하다는 데 있다

의학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현대 의학의 완전무결성을 믿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여러 실패들을 통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간다는 확신을 가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과 같은 자기 반성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는 혹시 책에 실릴 실패들이 동료 의사들의 명성에 누가 될까 염려했으나, 흔쾌히 인용에 동의해 줬다고 기뻐한다

모든 의사가 책을 낼 것까진 없지만, 어떤 의사든지 의학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며 더 나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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