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 폴리틱스 - 21세기 뉴 클래식,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황상익.장대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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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의 부제인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이 시사하는 것처럼, 저자는 인간의 정치적 행동들이 사실은 먼 옛날 유인원들로부터 진화해 왔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침팬지 연구는 단순히 흥미있는 동물의 관찰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본성을 밝힐 수 있는 자성의 기회가 된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물 행동학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미덕은 오랜 시간에 걸친 (8년여) 끈질긴 관찰에 근거하여 이론을 정립했다는 데 있다


저자도 밝힌 바지만, 인간과 동물의 사색적 비교에 머무른 탁상 공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저자는 관찰에 근거한 이론 수립이 네덜란드 연구의 전통이며, 그런 의미에서 동물원에 다수의 종을 수용하기 보다는 적은 종을 넓게 수용해 충분한 관찰의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 훨씬 바람직한 것 같다


일본의 경우만 해도 원숭이들의 방목을 통한 행동 연구가 일반적인데, 우리나라도 협소한 우리를 벗어나 집단으로 거주할 수 있는 넓은 환경을 제공하므로써, 동물학자들이 그들의 사회성과 습성을 연구할 기회를 제공하면 좋겠다


 


네덜란드 아넴 동물원의 침팬지 집단에 네 마리의 성인 수컷이 산다


보통 적은 수컷과 많은 암컷,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한 무리를 이루는데 이 무리의 지도자는 나이가 가장 많은 이에론이었다


한동안 권력을 휘두르던 이에론은 새로 등장한 루이트에 의해 지위가 흔들린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에론이 암컷 무리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권력 투쟁은 단순히 두 수컷만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많은 수의 암컷들과도 연관된다


힘의 우위에서는 루이트가 앞서지만, 암컷들의 지지를 받는 건 이에론이다


그러므로 루이트는 함부로 이에론을 공격하지 못한다


 


한동안 무리의 지지를 바탕으로 불안하게 서열 1순위를 유지하던 이에론은, 새로운 수컷 니키가 나타나면서 권좌에서 ?겨나게 된다


놀랍게도 루이트와 니키가 연합 작전을 편 것이다!!


루이트는 니키와 손잡고 이에론을 공격하는 한편, 니키와 이에론이 함께 있으면 반드시 방해를 한다


또 암컷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열세한 쪽을 도우므로써 암컷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한편, 자신의 지지 기반도 넓힌다


(이것은 루이트의 독특한 전략으로써, 보통은 우세한 쪽을 돕는다고 한다)


 


그런데 니키가 성장하면서, 루이트의 권좌도 흔들리게 된다


그러자 루이트는 과거의 정적, 이에론과 연합해서 니키를 핍박한다


원래 암컷 무리는 이에론 편이었기 때문에, 니키는 무리로부터 공격당한다


한동안 루이트 지배 체제 유지되다가, 이에론이 니키 쪽으로 돌아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이에론과 니키가 연합해서 루이트를 공격하고, 니키가 1순위 이에론이 2순위로 서열을 정한다


니키는 성격이 거칠고 젊어서 암컷 무리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데, 이 간극을 메우는 게 이에론이다


오랫동안 암컷 무리의 지지를 받았던 이에론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니키 밑으로 들어감으로써, 겉으로는 주종 관계이나 실상은 연합 정권을 수립한다


 


아넴 동물원 침팬지 집단의 권력 갈등을 보면서,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서열 다툼은 단순히 육체적인 힘의 우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는데, 연합, 배신, 편가르기 등등 수많은 사회적 변수들이 존재한다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활동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나이가 많아 경륜이 있는 이에론은, 암컷 내 일정 세력이 있는 루이트 보다, 지지 기반이 전혀 없는 니키와 연합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할 줄 안다


그래서 처음에는 루이트와 연합하는 듯 하다가, 다시 니키에게 붙어 2인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설마 동물들이 이런 정치적 행위를 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서열이 높아서 얻게 되는 이득으로는 먹이와 섹스가 있다


먹이가 불충분한 야생 상태와 달리, 동물원은 충분한 먹이가 모두에게 제공되므로, 섹스 기회로써 권력을 드러낸다


즉 1인자는 가장 많은 섹스를 할 수 있고, 아랫 서열들은 1인자의 눈치를 보면서 몰래 섹스를 한다


(루이트가 1인자일 때는 이에론의 섹스 기회를 제한한 반면, 니키가 1인자가 된 후에는 이에론이 마음껏 섹스를 할 수 있었다 연합 정권의 파트너에 대한 배려인 셈이다)


섹스가 본능이란 것은 동물들의 세계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다


인간 역시 단순화 시키면 먹이와 섹스를 위해 투쟁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두 가지를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권력이고,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이 정치이므로, 정치란 단순히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특성일 것이다


 


저자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침팬지나 인간에게 모두 존재하는, 본능이라고 본다


다만 인간은 그 의지를 숨기고 (이상, 도덕, 희생, 봉사 등의 단어로 포장하여) 침팬지는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모든 인간 관계를 권력 관계로 정의한 푸코의 견해가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시 권력)


또한 도덕과 무관하게 (부도덕이 아니라 비도덕을 의미한다) 생존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 이론도 얼핏 타당해 보인다


궁극적인 목표는 이득의 획득이지만, 사회 구조나 인간 관계는 변화무쌍 하고 복잡다단 하므로 침팬지 사회처럼 (심지어 그들의 사회에서도)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해서, 도덕이나 봉사, 희생 등 이타적인 부분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정치적 인간"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니며, 사실은 훨씬 오래 전부터 진화해 온 본능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8년 동안 성실하게 침팬지를 관찰한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장기적인 연구가 나와, 우리나라 필자가 쓴 책을 읽게 되길 바란다


 


뒷얘기를 하자면, 당시 연구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현재 (이 연구는 1970년대에 행해졌다) 루이트는 새로운 권력 다툼에서 성기가 잘린 후 과다 출혈로 사망했고 (이 사건은 수컷 숙소에서 일어났다 즉 중재해 줄 암컷이 없는 상태였다), 새로운 강자 댄디가 등장하자 이에론은 니키를 버리고 댄디와 연합한다


그들의 공격에 ?기던 니키는 불행히도 도랑을 건너다 익사하고 만다


그 후 댄디가 1인자가 되고 몇 년 후, 예전에 찍은 필름을 상영했는데 니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댄디가 이에론 무릎에 앉아 으르렁 거리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침팬지들이 서로를 독립적인 개체로 인지하는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이에론은 자연사 하고, 댄디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구 당시 40세였던 암컷의 우두머리 마마는 20여년 후에도 여전히 장수하며 (보통 50세가 평균 수명) 무리의 존경심을 유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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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과학
토머스 루이스 외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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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얼마 전 감동하면서 읽은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과 완전히 대립되는 책이다

정 반대의 주장이군, 이렇게 생각했는데 맨 뒤의 각주를 보니 아예 그의 책에 나오는 이론들을 인용하면서 잘못됐다는 코멘트를 달았다

우정이나 예술, 사랑 등의 가치를 단순한 화학 작용, 혹은 권력 관계 등으로 파악한 핑커의 진화 심리학은 변연계의 진정한 기능인 감정과 애착을 무시한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주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만큼 우리의 뇌나 정신 세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세 명의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들이 쓴 이 책은 변연계의 기능에 주목한다

흔히 연수는 생명 현상에 관계된 일을 하고, 대뇌 신피질은 추상적 사고에 작용하며, 변연계는 감정을 담당한다고 알려졌다

저자들은 포유류에게만 변연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새나 물고기, 악어 등은 부모 자식간의 애착 관계가 없고,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것의 진위는 동물학자들에게 물어 봐야 할 것 같다)

그에 비해 포유류는 변연계가 있기 때문에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애착 관계도 형성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개와 주인의 관계다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은 잡아 먹기 위한 가축으로서 개를 키운다고 하지만, 보편적으로 개나 고양이 등을 기르는 까닭은 정을 주고 받기 위해서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를 가축이 아닌, 애완 동물이나 반려 동물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개와 사람의 애착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예가 있다

개에게 공을 던지면 금방 물어 오고 주인의 손에 뺏으려고 한다

만약 주인이 공을 개에게 줘 버리면 개는 그 공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말하자면 주인과 놀기 위해서 공을 탐내는 것이지, 공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나 역시 개를 키우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자주 경험한다)

즉 개는 사람과 정서를 공유할 감정적인 능력이 있다

 

저자들은 지금까지 사회나 과학이 신피질의 사고 능력에만 관심을 보여 왔으나,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변연계의 감정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부모 자식 간의 애착 관계다

저자들은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기 위해 부모로부터 떼어 놓는 미국의 교육 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하는데, 아기를 다른 방에서 재우는 것부터 베이비시터에게 맞기고 직장에 나가는 워킹맘까지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사실 부모 자식 간의 감정 교류나 함께 있는 시간의 절대량 따위는 굳이 논증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는 얘기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도 당위성이 인정되는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즉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서 아이가 혼자 클 경우, 그 아이가 자라 반드시 애정 결핍의 문제를 갖는가에 누가 그렇다고 100% 자신할 것인가?

또 어머니가 24시간 아이의 양육을 전담한다고 해서, 베이비시터와 자란 아이에 비해 감정적으로 월등히 우월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부모와의 애착을 중요시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으나, 어머니가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의 양육을 전담해야 올바르게 자랄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변수들 때문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부모에게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어머니란 아이의 양육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티븐 핑커는 여기에 대해, 유전적 특징과 단독 경험을 강조해 부모의 양육 태도는 큰 영향을 못 미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변수과 원인 인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 가지 가설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흔히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자극을 받아 확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저자들은 왜 이것이 불가능한지를 과학적으로 논증한다

우리의 신경계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특정 방식으로 판단하는 회로가 형성되어 있다

같은 일을 당해도 반응하는 것이 제각각이듯, 어떻게 인지하느냐는 각자의 프로그램에 달려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어렸을 때의 강렬한 경험과 같은 (성폭력이나 왕따 경험 등) 외부 인자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내제적인 가치라고 한다

그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진 프로그램이라, 본인 스스로도 인지하기 어려울 뿐더러 (마치 공기의 존재를 모르고 살듯) 정신과 의사의 몇 시간 진료 따위로 쉽게 바뀔 수 없는 문제임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심리 치료를 하려면 적어도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한데 (즉 내제적 가치를 바꾸려면) 보험회사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또 의사나 환자 역시 그것들이 단 몇 번의 치료로 해결될 거라는 환상을 버리라고 한다

이 지적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수십년 동안 외부의 사건을 인지하고 판단해 온 문제 해결 시스템이 일순간의 충고나 치료 따위로 바뀔 수 있다면, 저자의 말처럼 처음부터 병이라 진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지 시스템을 바꾸려면 장기간의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끔찍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뉴런은 끊임없이 반복하면 경로를 바꿀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라고 희망을 준다

(앤서니 라빈스의 책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자기계발서 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한 신경회로의 변화를 제안한다)

 

번역은 "사랑을 위한 과학"이라고 멋지게 했지만, 원제목인 "A General Theory of Love"가 훨씬 잘 어울린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연애와 다른 개념이다

흔히 남녀간의 순간적인 연애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기 쉬운데, 저자들이 말하는 love란 오랜 시간의 감정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상호작용 할 수 있는 attachment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남녀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부모 자식간, 친구간 등 다양한 범위로 확대될 수 있다

회사에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인데, 인간과 달리 회사는 감정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을 희생해 가며 일을 해도 어느 순간 해고할 수 있다

스타를 동경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를 사랑하고 동경해도 브라운관의 스타와는 어떤 애착 관계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저자들의 인간 중심주의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특히 환자를 질병 중심으로 볼 게 아니라, 애착 관계를 먼저 형성하라는 충고는 무척 유용하다

(대체 의학이나 민간 요법 등이 효과의 검증 여부와 상관없이 특정 위치를 점하는 것도, 환자 중심적 자세 때문이라고 한다 플라시보 효과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돈이나 명예 등 외부적인 가치보다 가족간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등 내적인 가치에 중심을 두라는 말도 깊이 공감하는 바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이 관점으로 볼 수는 없다

스티븐 핑커가 지적하듯, 우리의 유전자는 도덕적으로 무장하지 않았으므로 바람직한 방향이 반드시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결국 상황에 맞는 취사 선택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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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3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오재국 옮김 / 범우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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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고전을 읽기로 결심하고 처음 고른 책이다

"죄와 벌"을 볼까 하다가, 영화로 만들어진 이 책이 좀 더 쉬울 것 같아 "닥터 지바고"를 골랐다

결론은 절대 쉽지 않다

중학교 때 본 러시아의 방대한 설원과, "라라"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어울리는 배우 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절대 이런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뒤에 해설을 보니, 원래 러시아 소설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나왔다

내가 느끼기로는 라라와의 사랑도 중요한 모티브가 아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지바고를 통해, 혁명이 혹은 공산주의가 어떻게 개인을 말살해 가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이 책이 소련에서 출판 금지되고, 노벨 문학상 사퇴 압력을 받은 건 당연하다

이 정도 수위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나왔어도 당연히 금서 목록에 올랐을 것이다

 

러시아 소설이 어려운 이유는 일단 주인공들의 복잡한 이름에 있다

영어에 익숙해서 러시아식 이름을 발음하기 어렵고, 또 워낙 길어서 한 눈에 쉽게 안 들어 온다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몇 번이나 발음해 보고 겨우 익힌 것이다

지바고의 본명은 "유리 안드레예브치 지바고"인데, "유라"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얼핏 생각하면 "유리"라고 불릴 것 같은데 "유리"라고 부르면 존칭이 되고, "유라"는 가까운 사이에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역자가 친절하게 해석을 붙여 놨다

라라의 본명도 "라리사 표도로브나 기샤르"인데 "라라"라고 불린다

"유라"나 "라라"라는 애칭들은 어찌나 발음하기 좋은지 몇 번이나 중얼거려 봤다

소설 속에 묘사된 여주인공은 그 아름다운 이름에 잘 어울리는 멋진 여성이다

 

혁명에 의해 인텔리 지식인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보여 주려는 의도 때문인지,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거의 없다

이를테면 지바고가 어떻게 라라를 사랑하게 됐는지, 토냐와 지바고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그 과정이 전혀 없다

함께 자란 토냐와 유라는 어느 날 갑자기 결혼했고, 전쟁터에서 만난 유라와 라라도 갑자기 사랑하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의 심리 묘사가 제일 큰 재미인 법인데,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상당히 불친절 하다

대신 작가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혁명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뺏어가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혁명의 가장 큰 폐해는 개인의 의지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말이야 말로 공산주의가 왜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다

 

원래 삶이라는 게 도덕성과는 별 상관없이 흐르는 것이지만, 지바고가 가족을 버리고 라라와 사는 장면은 읽기 괴로운 부분이었다

그의 아내 토냐로 말할 것 같으면, 소녀 시절부터 함께 자란 남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내며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정숙한 여자다

그런데도 남편은 중요한 순간마다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고 자의든 타의든 여러 차례 가족을 버린다

1차 대전 당시는 군의관으로 전쟁터에 있었고, 혁명 발발 이후는 빨치산에게 끌려 가 억류되었으며, 그들이 국외 추방의 위기에 놓였을 때조차 라라와 함께 살았다

귀족 출신의 토냐가 공산주의 혁명 이후 가해지는 압박들을 견뎌 나갈 때, 단 한 순간도 지바고는 그녀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가족에 대해 안타까워 하지만,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실천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체념하고 더욱 라라와의 사랑에 몰두한다

작가는 지바고의 시선에서 서술하기 때문에, 절대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사실 소설이나 인생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지만, 소설에서 소외된 토냐 가족의 슬픔이 면면히 전해지는 기분이다

 

토냐는 그야마로 정숙하고 헌신적인 여자로 나오는데, 지바고가 전쟁터에서 라라를 만났다는 편지를 받은 후, 미리 앞서가 가족 걱정하지 말고 그녀와 잘 지내라고 답장한다

물론 그 당시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는데, 토냐는 미리 물러서 버린 것이다

어떤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남편을 쉽게 포기하는 그녀의 행동들이 이해가 안 갔는데, 소설을 읽다 보니 남편을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토냐는 지바고를 상당히 우상시 하고, 고귀한 사람이라 믿기 때문에 그가 가족을 떠나도 잡을 수 없다고 미리 체념해 버린 듯 하다

말하자면 감히 내가 붙잡고 있을 분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지바고가 없는 동안 정적인 라라와 잘 지내고 (그녀의 도움으로 해산을 한다) 국외 추방을 당하면서도 지바고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눈물어린 편지를 쓴다

라라와의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가족이 해외로 쫒겨난 상황에서도 하인의 딸과 재혼하는 지바고가 다소 뻔뻔해 보인다

아내가 낯선 나라에 정착해 아이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안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자숙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는 재혼 후에도 가족을 러시아로 불러 들일 계획을 세운다

사실 이건 현실적이지도 않고 단지 마음의 죄책감을 벗기 위한 제스쳐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좀 더 솔직한 심정으로, 토냐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겼음 좋겠다고 말한다

 

지바고의 직업은 의사인데, 전형적인 의사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다

의사라면, 즉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냉정하고 감성이 메마른 성격을 상상하기 쉬운데, 지바고는 오히려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 예리한 감수성 때문에 혁명에 동참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낯선 마을에 들어섰을 때, 한 노파가 요즘 같은 혼란한 세상에는 의사 따위의 직업이라고 속이는 게 편하다고 충고하는 것처럼,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이 혁명에 휘둘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도 의사는 밥 먹기 살기 위한 직업이었을 뿐 (그래도 그는 오진을 안 하는 유능한 의사로 나온다) 사실은 시인이었던 지바고는 혁명 정신에 위반되는 행동들을 많이 보여, 결국 체포 위기에 놓인다

그가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비참한 일생을 마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지바고는 모스크바로 간 후 갑자기 등장한 이복 동생의 도움을 받아 시를 쓰고 병원에 출근하면서 재혼을 하고 잘 산다

비록 귀족이었던 옛날의 영화를 되찾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살아 간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겨우 40을 갓 넘은 가엾은 나이이긴 하지만), 혁명 때문에 극적인 인생을 산 건 아니다

가족과 헤어지긴 했으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어쨌든 살아 간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현실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혁명 정신에 대항하는 주인공의 삶은 극적이고, 큰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작가는 사건의 극적 구성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플롯이 약하고 우연성에 의존한다는 비판은, 그래서 나온 건지도 모른다

 

라라의 남편으로 등장한 파샤를 보면서 문득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온 최대치가 생각났다

10권짜리 소설로 읽었는데 (그런데 희한하게 소설보다 드라마 각색이 훨씬 낫다) 공산주의에 자신을 함몰해 가는 최대치의 피폐한 인간성이 잘 그려졌다

파샤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과정을 마치고 지성인이 되지만, 혁명 정신에 몰두하여 가족을 떠나 전쟁에 자원한다

(여기서도 왜 그가 라라를 떠나 전쟁터로 나가는지 자세한 묘사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난다는 식이다)

죽을 위기를 넘긴 후 위대한 혁명가가 되어 돌아 온 파샤는, 대부분의 열성적인 혁명가들이 그렇듯 당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결국 자살한다

그는 라라를 무척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떠난다

혁명 과업을 완수시킨 후 멋지게 나타나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결국 평생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지바고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아이와, 지바고의 가족을 생각해 남편과의 재결합을 원했던 라라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라라가 원한 건 그 따위 업적이나 명예가 아니라, 파샤 그 자신인데 정작 당사자는 아내에게 그럴듯한 업적을 선물하기 위해 계속 피해 다니는 것이다

파샤 역시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함몰시키고 만 불행한 사상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장하림을 사랑하면서도 의무감 때문에 최대치를 기다리는 (평생 기다리고만 마는) 불행한 윤여옥의 모습이 겹친다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폐해는 개인의 의사를 하찮게 여겨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비단 공산주의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인텔리 계층의 지식인이 개인의 사고와 개성을 압박하는 공산주의 혁명 아래서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를 "닥터 지바고"에서 잘 보여준다

러시아라는 거대한 배경과 숙명적인 여인 라라와의 사랑도 더불어 잘 조화된 아름다운 소설이다

(그렇지만 절대 독자에게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등장 인물이나 지역 이름 때문에 쉽게 읽혀지지는 않으나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더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범우사에서 1988년에 출판됐는데, 역자에 따르면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복권이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금은 아마도 작가적 위상을 확립했을 것 같다

국외 추방 명령에 대하여 "러시아를 떠나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고 흐루시초프 수상에게 간청했던 파스테르나크의 조국 사랑이 이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는 결국 그 충격 때문인지 1년 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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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전쟁 - 인체는 질병과 어떻게 싸우는가
매리언 켄들 지음, 이성호,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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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학문적인 책이다

"인체는 질병과 어떻게 싸우는가?"라는 광고 문구를 보고, 소설 형식의 흥미로운 책일 거라 기대했는데 거의 면역학 교과서 수준이다

이 정도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면, 아마도 면역학 전공자가 아닐까 싶다

하긴 면역학 교과서도 소설처럼 흥미로운 면이 있다

생화학이나 면역학 등을 배울 때 그 씨스템들이 워낙 정교하여,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저자의 주장처럼 유전자 연구가 더욱 발달하면, 질병 치료의 개념은 면역력을 키우는 쪽으로 갈지도 모른다

수많은 질병의 치료법이 수액 요법과 침상 안정인 걸 보면, 어지간한 병은 인체 내의 면역 시스템이 해결해 주는 듯 하다

그 면역력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은 아니다

흔히 일반인을 대상으로 출판된 건강서들을 보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등 학문적인 논증은 없고 충고 형식이 대부분인데, 이 책에서는 그런 충고를 찾기 힘들다

면역 시스템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질병의 침투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그런 면에서는 정직한 교양 도서란 생각도 든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뇌와 면역계가 화학적으로 대화한다는 문장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면역력이 떨어져 질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자는 그 까닭을 학문적으로 논증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가 면역계에게 화학적 분비물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의 몸은 전기적 자극과 화학적 전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체가 유기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전달 시스템을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화학물질에 의한 뉴런 사이의 신경 전달 과정을 "화학적 대화"라는 멋진 단어로 표현한 저자의 문학 적 재능도 상당해 보인다

 

저자는 흡연과 음주의 폐해에 대해 역설한다

위생 환경이 좋아지고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감염성 질환은 상당 부분 개선됐으나, 생활 습관에 의한 만성 질병이 늘어나는 추세다

담배의 해악이야 새삼 논증할 필요조차 없지만, 저자는 입증되지 않은 건강 학설에 대해 연구할 게 아니라, 확실하게 해롭다고 밝혀진 담배를 끊는 길이 건강의 최우선임을 강조한다

특히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기 때문에 더욱 상승 작용을 한다

저자는 고도로 정제된 영양제의 효능에 대해서도 반신반의 한다

식품을 통한 섭취가 아닌, 정제 형태의 영양제는 반드시 유익하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건강 식품을 찾아 해맬 게 아니라 적당한 운동과 금연, 절주, 편안한 마음가짐 등 생활 습관의 변화만이 건강을 보장한다고 한다

깊이 새겨 들을 말이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다

사이비 과학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학에 대한 일정 수준의 교양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체의 신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과학적으로 알고 싶은 분이라면 읽기를 권한다

그렇지만 가벼운 독서를 원한다면 말리고 싶다

면역학을 전공 필수로 배운 사람이지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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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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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산 정약용이라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졌다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 동안 그는 수백권의 책을 썼는데,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요즘은 실학이 유교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되기는 하나, 어쨌든 그가 위대한 학자였음은 분명하다

정약용이 유배됐던 강진의 다산 초당에 가 본 적이 있다

유배지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매일 이 곳을 오르내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18년씩이나 시골 벽지에 버려진 한 천재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이덕일의 역사서는 실록과 문집에 의거한 정확한 사실이라는 게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그의 해석들은 다소 편향된 기분이다

같은 자료를 보고도 한 쪽으로만 몰아간다고 해야 할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재밌게 읽었지만, 지나치게 송시열을 깍아 내린다는 기분이 들어 편치 않았다

또 "사도 세자의 고백"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기록들을 인용하면서 정확한 사실들을 제시하지만, 사도 세자를 지나치게 치켜 세운다든지, 혜경궁 홍씨의 고백을 철저하게 위선적인 것으로 모는 집필 태도가 불편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구절 중 이런 게 있다

실록이나 한중록에서는 사도 세자를 정신병자로 묘사하나, 사도 세자의 행장에서는 더없이 총명하고 훌륭한 군주로 나온다며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묻는다

그러나 실록은 비교적 객관적인 기록이고, 행장은 죽은 후 고인의 좋은 점만을 모은 문집이다

어떻게 이 둘을 비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또 그의 서술은 워낙 사료 인용이 많아 다소 지루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확한 근거를 대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 의미에서 정약용에 관한 책도 망설임 없이 골랐다

 

1권을 읽었는데, 정약용의 개인사 보다는 그가 처한 정치 현실에 관한 얘기가 많다

18세기를 강타한 정치 문제라면 천주교와 사도 세자일 것이다

정권을 잡은 노론은 반대파인 남인을 치기 위해, 이 두 문제를 끊임없이 정쟁에 이용했다

불행히도 정약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인들이 천주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진 경로는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하고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기 마련인데, 조선에서는 서학을 공부하는 양반층을 중심으로 자연 발생된다

중국 외에는 쇄국 정책으로 일임한 폐쇄적인 조선에 서양의 종교가 학문을 통해 스스로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지나치게 경직된 성리학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학문은 개방성을 유지할 때 발전할 수 있는데, 청나라가 들어선 후 조선은 소중화에 빠져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모두 사문난적시 했다

이것에 대한 반성으로 실학이 생기고, 좀 더 나아가 천주학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나 역시 천주교인이지만, 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로마 시대 십자가형을 당한 성인들의 순교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많은 교인들이 끔찍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불교나 기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천주교는 서양에서 전래됐다는 사실 만으로도 거부감이 들기 마련인데, 얼마나 믿음이 깊었으면 순교까지 할 수 있었을지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특히 사대부였던 이승훈이나 이벽, 권철신 등의 순교는 더욱 존경스럽다

평민들과는 달리 주자학으로 길러지고 가문에 묶여 있을 사람들인데, 양반이라는 특권을 거부한 채 신앙을 고집한 그들의 믿음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벽의 아버지는 심지어 아들의 배교를 위해 스스로 목을 매달 정도였으니, 아들이 느꼈을 심적 고통을 알 만 하다

 

정약용은 천주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혼인으로 넓게 엮어진 것은 알지만, 그 집안은 유독 천주교인과 인연이 많았다

아마도 남인들끼리 혼인을 하고, 그 남인에서 천주교를 받아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약용의 매형이 조선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이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다고 사형당한 윤지충이 그의 외종 육촌이 된다

형 정약현의 사위는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이고, 셋째 형 약전은 국문장에서도 천주교인임을 당당히 밝혀 사형당한다

또 정약현의 처남이 조선 최초로 천주교를 일으킨 이 벽이다

그의 인척 관계를 보면, 천주교에 관심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 때 천주교가 심한 박해를 받은 가장 큰 원인은 제사를 모시지 않는 문제였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현재 천주교에서는 부모의 제사를 인정한다

시대가 달라지면 달리 적용될 수 있는 교리의 문제를, 왜 교황청에서 강직된 태도로 일관했는지 모르겠다

제사가 허용되더라도 조선의 특성상 탄압이 있었겠지만, 그 강도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어쨌든 옳은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대부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처참하게 죽어 갔다

 

정약용과 정조는 매우 특별하고 가까운 관계였는데, 정조가 그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남인이었고, 정조는 노론 일색인 조종에 쉽게 그를 등용하지 못했다

책에는 정조가 얼마나 카리스마 넘치는 왕인지 잘 묘사된다

비록 자신의 반대당인 노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으나, 신하들을 휘어잡고 정국을 주도하는 강한 왕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일견 태종이나 세종, 영조 등에 비견될 만 하다

(임진왜란이 정조 시대에 일어났다면, 선조처럼 만주로 피난가자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서 굶어 죽는 걸 목격한 비운의 아들이기 떄문에, 노론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는다

그러나 즉위 후에도 함부로 그들을 처단할 수 없을 만큼 노론은 큰 세력이 됐다

숙종이 환국을 통해 노론과 남인의 등용을 반복한 것과 달리, 영,정조 시대에는 이미 왕 혼자 정국을 운영하지 못하게 된 듯 하다

정조는 아버지의 원한을 25년의 치세 내내 서서히 갚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즉 사도 세자 일로 죽이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를 들어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다

정조처럼 신하들과 정국을 장악한 왕이 일거에 원수들을 처결하지 못한 걸 보면, 정당 정치의 싹이 보였다는 평가도 맞을 듯 하다

 

1권은 정조의 죽음에서 끝난다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남인이란 이유로 이런저런 한직을 전전한 정약용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에 의해 주도된 신유박해 때 유배되어 18년 동안 강진에 머문다

참으로 긴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결국은 유배지에서 풀어 준 걸 보면, 이미 그가 아무 영향력도 없다는 걸 입증하는 기분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열린 미래를 지향하여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혔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얘기 같다

특정 사상에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으나, 탄압받아 마땅한 사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조의 말처럼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을 탄압할 것도 없이 저절로 사멸할 것이다

사상 탄압을 할 시간에 그 관심과 여유를 바른 학문에 돌리는 학문적 아량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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