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산 정약용이라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졌다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 동안 그는 수백권의 책을 썼는데,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요즘은 실학이 유교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되기는 하나, 어쨌든 그가 위대한 학자였음은 분명하다

정약용이 유배됐던 강진의 다산 초당에 가 본 적이 있다

유배지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매일 이 곳을 오르내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18년씩이나 시골 벽지에 버려진 한 천재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이덕일의 역사서는 실록과 문집에 의거한 정확한 사실이라는 게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그의 해석들은 다소 편향된 기분이다

같은 자료를 보고도 한 쪽으로만 몰아간다고 해야 할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재밌게 읽었지만, 지나치게 송시열을 깍아 내린다는 기분이 들어 편치 않았다

또 "사도 세자의 고백"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기록들을 인용하면서 정확한 사실들을 제시하지만, 사도 세자를 지나치게 치켜 세운다든지, 혜경궁 홍씨의 고백을 철저하게 위선적인 것으로 모는 집필 태도가 불편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구절 중 이런 게 있다

실록이나 한중록에서는 사도 세자를 정신병자로 묘사하나, 사도 세자의 행장에서는 더없이 총명하고 훌륭한 군주로 나온다며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묻는다

그러나 실록은 비교적 객관적인 기록이고, 행장은 죽은 후 고인의 좋은 점만을 모은 문집이다

어떻게 이 둘을 비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또 그의 서술은 워낙 사료 인용이 많아 다소 지루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확한 근거를 대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 의미에서 정약용에 관한 책도 망설임 없이 골랐다

 

1권을 읽었는데, 정약용의 개인사 보다는 그가 처한 정치 현실에 관한 얘기가 많다

18세기를 강타한 정치 문제라면 천주교와 사도 세자일 것이다

정권을 잡은 노론은 반대파인 남인을 치기 위해, 이 두 문제를 끊임없이 정쟁에 이용했다

불행히도 정약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인들이 천주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진 경로는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하고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기 마련인데, 조선에서는 서학을 공부하는 양반층을 중심으로 자연 발생된다

중국 외에는 쇄국 정책으로 일임한 폐쇄적인 조선에 서양의 종교가 학문을 통해 스스로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지나치게 경직된 성리학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학문은 개방성을 유지할 때 발전할 수 있는데, 청나라가 들어선 후 조선은 소중화에 빠져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모두 사문난적시 했다

이것에 대한 반성으로 실학이 생기고, 좀 더 나아가 천주학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나 역시 천주교인이지만, 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로마 시대 십자가형을 당한 성인들의 순교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많은 교인들이 끔찍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불교나 기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천주교는 서양에서 전래됐다는 사실 만으로도 거부감이 들기 마련인데, 얼마나 믿음이 깊었으면 순교까지 할 수 있었을지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특히 사대부였던 이승훈이나 이벽, 권철신 등의 순교는 더욱 존경스럽다

평민들과는 달리 주자학으로 길러지고 가문에 묶여 있을 사람들인데, 양반이라는 특권을 거부한 채 신앙을 고집한 그들의 믿음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벽의 아버지는 심지어 아들의 배교를 위해 스스로 목을 매달 정도였으니, 아들이 느꼈을 심적 고통을 알 만 하다

 

정약용은 천주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혼인으로 넓게 엮어진 것은 알지만, 그 집안은 유독 천주교인과 인연이 많았다

아마도 남인들끼리 혼인을 하고, 그 남인에서 천주교를 받아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약용의 매형이 조선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이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다고 사형당한 윤지충이 그의 외종 육촌이 된다

형 정약현의 사위는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이고, 셋째 형 약전은 국문장에서도 천주교인임을 당당히 밝혀 사형당한다

또 정약현의 처남이 조선 최초로 천주교를 일으킨 이 벽이다

그의 인척 관계를 보면, 천주교에 관심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 때 천주교가 심한 박해를 받은 가장 큰 원인은 제사를 모시지 않는 문제였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현재 천주교에서는 부모의 제사를 인정한다

시대가 달라지면 달리 적용될 수 있는 교리의 문제를, 왜 교황청에서 강직된 태도로 일관했는지 모르겠다

제사가 허용되더라도 조선의 특성상 탄압이 있었겠지만, 그 강도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어쨌든 옳은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대부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처참하게 죽어 갔다

 

정약용과 정조는 매우 특별하고 가까운 관계였는데, 정조가 그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남인이었고, 정조는 노론 일색인 조종에 쉽게 그를 등용하지 못했다

책에는 정조가 얼마나 카리스마 넘치는 왕인지 잘 묘사된다

비록 자신의 반대당인 노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으나, 신하들을 휘어잡고 정국을 주도하는 강한 왕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일견 태종이나 세종, 영조 등에 비견될 만 하다

(임진왜란이 정조 시대에 일어났다면, 선조처럼 만주로 피난가자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서 굶어 죽는 걸 목격한 비운의 아들이기 떄문에, 노론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는다

그러나 즉위 후에도 함부로 그들을 처단할 수 없을 만큼 노론은 큰 세력이 됐다

숙종이 환국을 통해 노론과 남인의 등용을 반복한 것과 달리, 영,정조 시대에는 이미 왕 혼자 정국을 운영하지 못하게 된 듯 하다

정조는 아버지의 원한을 25년의 치세 내내 서서히 갚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즉 사도 세자 일로 죽이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를 들어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다

정조처럼 신하들과 정국을 장악한 왕이 일거에 원수들을 처결하지 못한 걸 보면, 정당 정치의 싹이 보였다는 평가도 맞을 듯 하다

 

1권은 정조의 죽음에서 끝난다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남인이란 이유로 이런저런 한직을 전전한 정약용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에 의해 주도된 신유박해 때 유배되어 18년 동안 강진에 머문다

참으로 긴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결국은 유배지에서 풀어 준 걸 보면, 이미 그가 아무 영향력도 없다는 걸 입증하는 기분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열린 미래를 지향하여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혔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얘기 같다

특정 사상에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으나, 탄압받아 마땅한 사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조의 말처럼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을 탄압할 것도 없이 저절로 사멸할 것이다

사상 탄압을 할 시간에 그 관심과 여유를 바른 학문에 돌리는 학문적 아량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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