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공존 - 숭배에서 학살까지, 역사를 움직인 여덟 동물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김정은 옮김 / 반니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전작 <크로마뇽>은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 책은 한번에 쭉 읽히지가 않아 다소 힘들었다.

번역의 문제인가?

문장이 매끄럽지가 않은 것 같아 계속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가축과 인간의 동거에 대해 쓴 흥미로운 책이다.

가장 먼저 인간과 함께 살게 된 동물은 늑대의 후손인 개이다.

대략 15000년 전에 인간이 길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가장 사랑받는 애완견인 개가 역시 인간과 가장 오래 동거동락해 왔던 모양이다.

늑대도 무리지어 대장에게 복종하는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기르기가 쉬웠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늑대와 개의 이종교배종이 있었고 아시아 쪽에서는 그와 다른 개들끼리의 동종교배종이 있었는데 이 아시아 품종이 이종교배종을 대체했다고 한다.

개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반려견으로 거의 사람급으로 대우받고 있지만 이렇게 위상이 높아진 것은 불과 18세기 무렵이라는 게 놀랍다.

상류층에서 사랑받는 동물과 빈민층에서 노동하는 동물의 차이가 명확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가축은 돼지, 소, 말, 염소, 양, 당나귀, 낙타 등이 있다.

철도가 발명되기 전까지 운반자 역할을 했던 동물은 의외로 당나귀였다.

말도 물론 사람을 태우고 쟁기질도 하고 물건도 운반했으나 너무나 값비싼 속도감 있는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물건을 운반하는 힘든 노동은 당나귀와 낙타의 몫이었다.

낙타는 사막이라는 특정한 환경에 적응한 경우라 중동 지역에 국한되어 있지만, 당나귀가 유럽의 운반을 담당했다는 게 의외였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어서 그런지 당나귀라고 하면 서양 동화책에 등장하는 동물 느낌이다.

말은 전차와 기병이라는, 전투의 엄청난 핵심 요소였기 때문에 몽골 제국을 비롯해 인류의 역사를 담당하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심지어 2차 대전 때도 소련과 독일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운송을 담당했다고 한다.

워털루 전투 이후 화포가 주요 공격 수단이 되면서 끔찍하게 살육된 기병대 예가 나온다.

농장에서 쟁기질을 하고 고기을 제공한 소는 농업 생산력 향상에 큰 역할을 한다.

워낙 귀했기 때문에 소고기를 먹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로마 시대에는 소를 바치는 희생제의가 많아 그 때 소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육류를 제공하는 역할은 돼지와 염소, 양 등이 담당했다.

수렵인에서 목축인으로 바뀌면서 부족한 단백질을 가축들이 제공해 줬지만 일상적으로 고기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은 현대 축산업의 발달 덕분이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엄청난 고기 수요를 맞추기 위해 비윤리적 처우를 감내하고 있는 현대 축산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그렇지만 고기에 대한 인류의 욕구를 제한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이니 말이다.

의외로 닭이 안 나왔다.

가축이라고 하면 염소나 양, 당나귀 보다는 닭이 훨씬 친숙한데 말이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사냥감을 쫓아 떠돌아 다니던 구석기인에서 땅에 정착하고 사회를 건설한 신석기인으로 변하는 과정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기후 변화에 따른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가축을 길렀음을 알게 됐다.

목축도 인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식량 이외에도, 기계에 의한 동력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간의 힘 외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바로 동물이었으니 정말 인간과 가축은 위대한 공존을 수만 년 동안 함께 해 온 셈이다.


<오류>

151p

18세기와 19세기의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헝가리 사람들은 기원전 2500년의 고대 이집트인들보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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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6-1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지는 못했는데 저도 잘 읽히지는 않더라고요

marine 2020-06-13 10:01   좋아요 0 | URL
아, 저만 그런 거 아니었네요. 다행 ^^
 
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
최소자교수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 서해문집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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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지 좀 된 책이라 보존서고에서 빌려 봤다.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여러 필자들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라 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다.

동아시아의 조공 체계가 핵심 주제인 것 같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이 사대와 조공 외교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으나, 거대한 중앙집권국가를 무려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 온 중국이라는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어야 하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독특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중국이 서양 열강에 의해 개항한 뒤 서양식 외교 관점에서 실제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 문제가 된 이홍장의 경우가 나온다.

성리학이라는 철학적 바탕 위에서 요즘의 눈으로 보면 불공정한 관계이지만 실제로는 내정 간섭 등을 하지 않고 문화 교류, 특히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이었던 중국식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안보 울타리 안에서 변방을 안정시켰던 나름대로 순기능을 했던 체제였다.

오히려 송나라 때 소식 등은 고려가 가져오는 토산물은 보잘 것 없는데 중국으로부터 많은 재화를 얻어 간다고 고려 사신의 입국을 막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명나라 때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 왜란을 막아 준 예를 봐도 사대외교의 실효성은 확실했던 듯하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빠져 현실을 너무 도외시 한 조선 위정자들의 지고지순한 숭명의리가 답답해 보이기는 하다.

일본처럼 한 발 떨어져 있는 환경이었다면 조선 시대처럼 자발적으로 완벽하게 중국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연행록을 통해 오랑캐라고 비웃었던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적인 화이론을 깨기는 어려웠던 것 같고 오히려 소중화라는, 어찌 보면 본질에서 벗어난 우스꽝스러운 형태의 허울뿐인 자존감으로 변모했던 것 같아 안타깝다.

청나라가 중국의 한족 뿐 아니라 서역의 여러 민족들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었음을 이해하기는 박지원 같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에게도 어려웠을 것 같고, 아무리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남인들이라 해도 근대 시민사회로의 전환은 불가능했던 것 같다.

대동강 유역에 있던 한 무제의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소멸된 후 대릉하 유역을 거쳐 난하 지역까지 교치됐던 과정도 흥미롭게 읽었다.

그들의 후손들이 낙랑왕씨, 낙랑한씨 등을 성씨로 삼아 기자의 후예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국은 낙랑을 수복해야 할 옛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오늘날 동북공정에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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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영 밖으로 달아난 한양 수비군 - 훈국등록 고전탐독 12
윤진영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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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판형에 귀여운 표지가 인상적인 책으로, 짧지만 내용이 알차다.

훈련도감의 일지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도성 군영의 모습을 여러 학자들이 재구성 했다.

우리도 서양처럼 미시사적 접근이 활발해지는 것 같아 역사책 읽기가 아주 재밌다.

양란을 거치고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훈련도감의 인원을 5000명까지 늘렸다.

이들은 군역을 지는 농민병이 아니라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이었다.

그런데 처우가 열악해 모집이 어려워 결원이 생기면 의무적으로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승호제도를 시행했다.

승호군에 뽑히면 장기 복무해야 하므로 가족이 전부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 자급자족 시대이니 먹고 살 수는 있으나, 전답을 팔고 상경하면 당장 잘 곳도 없고 적은 급료로 살아가야 하니 승호를 기피했던 풍속이 이해된다.

당시에도 서울 집값은 대단히 비싸서 시골에서 상경한 군인들의 거주지가 없어 항상 문제였다.

요즘 같은 관사 개념으로 숙식처를 제공하기에는 조선 조정의 재정이 빠듯했던 모양이다.

기왕에 포수와 같은 정예병을 키우는 제도이니 급료를 많이 주고 훌륭한 인재들을 유치하면 좋았을 것을, 오죽이나 대우가 형편없으면 강제로 지방에서 착출했을까 싶다.

조선 후기는 양란 이후 큰 무력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한양 수비군들은 축성 같은 공사판에 동원됐다.

훈련도감에 소속된 장인들이 수공업 제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세곡선을 운송하는 가외일을 통해 재정을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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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일기 - 200년 전 암행어사가 밟은 5천리 평안도 길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9
박래겸 지음, 오수창 옮김 / 아카넷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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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저자가 번역한 서수일기를 먼저 읽고, 새로운 해석인가 싶어 일부러 신간 신청을 하고 읽게 됐다.

특별히 얻은 내용이 많지는 않아서 그저 그렇다.

책의 주인공 박내겸은 국왕을 근시에서 모시는 엘리트 관원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걸 보면,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들은 당대의 대단한 고위 관료들이었나 보다.

평안도나 함경도 같은 북방 지역에서는 과거 급제자도 적고, 설사 급제한다 할지라도 고위직으로 갈 수 있는 이조정랑 같은 좋은 벼슬자리를 내주지 않아 대부분 하위직에 머물고 말았다고 한다.

조선을 세운 사람이 함경도의 무인 이성계인데 완전히 문치주의 나라로 바뀐 점이 흥미롭다.

평안도는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는 곳이고 호란 이후 방어를 철저히 하느라 재정이 아주 풍부했다고 한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고 한다.

사신을 따라가는 공무역이나 밀무역도 지리적 특성상 잦았을 것이고 상업 자본이 모여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으나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어려워 홍경래의 난 같은 자체 모순이 터져 나왔다고 설명한다.

지방 차별은 비단 왕건의 훈요십조에서만 나온 정책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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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진.한 - 최초의 중화제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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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마지막 권을 읽었다.

제일 나중에 번역된 게 가장 초기인 진한 시대이다.

다른 책들도 참 재밌게 읽었지만 이 책도 곳곳에 표시를 많이 해 뒀다.

다만 뒷부분의 문예나 종교 편은 솔직히 지루했다.

원래 글 쓰는 스타일이 이런 건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 독해 능력의 문제인가.

뒷부분이 잘 안 넘어가서 지루하게 읽었다.

정치 경제 부분은 흥미롭다.

서양에서 발간되는 역사책들은 군주 중심의 일회성 에피소드 보다는 사회의 제도에 대한 설명이 많아 입체적으로 한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 이민족과 중화 제국의 관계

북방 유목민들로부터 한족의 땅을 지키는 과정에서 중화라는 개념이 완성되고 중화제국이라는 통일된 정치체가 형성되었다.

타자를 통해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할까.

유목민들 역시 중국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흉노 같은 이민족 나라를 세웠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 사여하는 공물을 부족들에게 얼마나 배분하느냐로 유목민 수장의 권위가 결정됐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들은 약탈을 자행했고 나중에는 내지로 들어와 변경을 지키는 수비군이 됐다.

이 부분이 사실 제일 흥미로웠다.

막연하게 중국은 농민이 곧 군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한 시대에 중국은 전민개병제를 포기했고 농민은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했고 실제 전투를 하는 군인은 이민족들이 맡았다.

마치 로마의 국경을 지키던 게르만족들처럼 말이다.

이들은 당연히 중국 황제나 관리보다는 부대를 이끄는 직속 상관, 부족의 우두머리에 충성했다.

서진이 망한 뒤 5호 16국 시대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이런 이민족들이 군벌로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시대였던 셈이다.

동한 이후 삼국지 시대의 혼란도 지방의 감찰관이었던 자사가 군사를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한 후 그 지역의 군벌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화제국의 가장 큰 적인 흉노는 기병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일시적인 군사 훈련으로는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또 농민들의 군사 훈련은 지방 반란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국경을 투항해 오는 이민족들에게 맡기게 된다.


2. 진시황릉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은 형도, 즉 범죄자들의 노역으로 이루어졌다.

이 부분도 참 흥미롭고 신기했다.

농민들의 요역이나 노예 노동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범죄에 의한 강제 노역형으로 시행됐다고 한다.

마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범죄자들의 추방으로 개발시켰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거대한 건축물 공사 현장에 범죄자들을 투입했고 변경 지대로 강제 이주했으며 군대에 편입시켰다.

국가의 부의 원천인 농사를 지어야 할 농민들을 요역에 자주 동원할 수 없었고, 노비 역시 개인의 큰 재산이었기 때문에 주로 가내 노동, 즉 귀족의 개인적인 서비스업에 종사했고, 광산을 개발한다거나 황릉이나 궁전을 짓는 것 같은 엄청난 역사는 범죄자들을 투입했다.

노역형을 받는 범죄자가 그렇게도 많았을까.

하루 평균 1~6명 꼴로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로 건설 현장은 열악했으나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만 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3. 황제의 발명

동양의 정치체제는 막연히 전제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읽은 로마의 공화정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독특하고 특징적으로 황제라는 절대 군주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다.

한나라 후기로 갈수록 어린 황제들이 외척이나 환관들에게 좌지우지 되는데 이것도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로부터 얼마나 사적으로 가까이 위치하는냐에 따라 권력의 점유가 결정되는 탓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통일하려 했던 조조도 마지막까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정통성의 원천인 헌제를 끌고 다녔다.

유목민의 황제는 여러 족장들 중 일인자였기 때문에 영토를 넓히고 부족원들에게 약탈품을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곧 교체됐기 때문에 한 사람의 절대 권력 아래 복종하고 있던 전제정의 중국과 조약을 맺어도 곧잘 위반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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