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는 없다 역사적 인간 2
이영림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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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좋은 책들을 정말 많이 읽는 것 같다.

어쩐지 가쉽거리 같은 가벼운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정말 훌륭하다.

유럽의 절대주의 성립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한번에 날려준 책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군주는 일종의 이미지에 불과했고 이들도 귀족들과 지방 세력과 협력하여 양보하면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뿌리깊은 지방 세력들을 어떻게 일순간에 다 무너뜨리겠는가, 혁명의 시대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보여지는 이미지였을 뿐, 실제로는 대귀족들을 길들이기 위해 법복귀족을 양성하고, 재정가들에게 돈을 빌리고 지방 귀족들에게 권한을 나줘주면서 정말 바쁘게 움직이던 시대였다.

근대국가로의 구조적 변신이 아니었던 만큼 모순이 누적되어 결국은 프랑스 대혁명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왜 영국과 달리 혁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프랑스 사회의 근본적 문제점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

17세기 유럽은 만성적인 전쟁 상태였다는 지적이 중요해 보인다.

백년전쟁을 통해 전사 귀족들이 몰락했고 왕은 부르주아들에게 관직을 주면서 법복귀족으로 임명해 귀족의 범위를 넓힌다.

이들은 면세 특권을 갖고 있어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둬여 하는데 생산성이 워낙 낮아 그 돈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정가들에게 세금을 걷을 권리를 준 후 미리 돈을 받는 식으로 해결했다.

이런 징세청부업은 멀리 로마 시대부터 있어온 관행이다.

관료제가 확립된 동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문 징세 방법이다.

그런데 전쟁이 지속되어 돈이 끝없이 들어가는지라 결국 왕은 재정가들에게 거액의 돈을 빌리게 되고, 재정가들 역시 나라에 돈을 대기 위해 투자를 받는데, 놀랍게도 이 때 투자자들이 대귀족들이다.

화폐경제가 이미 확립되었기 때문에 이런 투자도 가능했다고 한다.

산업과 금융이 발달했으면 다른 사업에 투자를 했을텐데 프랑스 대귀족들은 영국과 달리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재정가들에게 투자를 한 셈이다.

그러니 요즘 이미지와 달리 프랑스에서 자본주의 산업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다.

왕은 관직을 팔아 돈도 마련하고 혈통귀족에 대응하는 법복귀족층도 만들어 낸다.

법복귀족, 즉 관직을 가진 귀족들이 바로 부르주아들이었던 모양이다.

순수한 자본가 계층이 아니라 돈을 벌어 관직사회로 들어온 것이다.

중국처럼 관직이 있어야 돈을 벌고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중국에서도 상인이 돈을 모으면 공장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사서 지주가 될 뿐이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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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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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 같다.

평전이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는 걸까?

저자의 다른 책 <수양제>와 <중국통사>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 <옹정제>는 정말 이야기책 같다.

옹정제라고 하면 60년 지배에 빛나는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끼어 13년 통치한 어쩐지 별로 한 게 없는 느낌의 황제인데 의외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옹정제의 탄탄한 정책 아래 아들 건륭제의 대외정벌이 가능했던 것이다.

비슷한 예인지 모르겠는데 천자의 사명감을 갖고 일중독에 빠진 이 황제를 보니 마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떠올랐다.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와는 달리 북경 밖으로 유람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오직 자금성 편전에 틀어박혀 일하고 또 일했던 성실함의 대명사인 황제!

정말 매혹적이다.

저자의 평가대로 만기친람에 육체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13년 통치가 최대치였을 것이다.

이 사람도 정조처럼 50대에 과로사 했던 건 아닐까 싶다.

서류왕이라 불렸던 펠리페 2세가 생각나기도 한다.

펠리페 2세는 너무나 세세한 작은 일까지 전부 간섭했기 때문에 오히려 거시적인 시각을 잃었다는 비판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옹정제의 통치 방식은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나 보다.

청나라 황제들이 비교적 유능했던 이유는 이들이 소수민족으로서 거대한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천명을 받았다는 소명의식 때문이라는 분석이 신선하다.

우리 생각으로는 만주족 오랑캐가 중국을 일시적으로 장악한 느낌인데, 생각해 보면 100년도 채 못 간 원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그 세 배인 270여 년을 집권했고 오늘날 거대한 중국 판도를 만들어냈으니 대단히 성공적인 봉건왕조였음이 분명하다.

한족의 장자상속제를 따르지 않고 황자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을 뽑는다는 경쟁 방식도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장 강희제에게 선택받은 옹정제부터 이렇게 유능했으니 말이다.

앞서 읽은 청나라 역사책에서는 아무리 청조가 대단했어도 결국은 봉건왕조에 불과했고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던 반면, 이 책에서는 이런 한계에 대해서는 깊이 서술하지 않고 있다.

18세기 초반 황제에게 유럽같은 근대식 지도자를 바라는 게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정조에게 왜 근대화에 실패했냐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주비유지>라는 옹정제의 문서 코멘트 모음집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지방 관리가 황제에게 보고서를 보내면 거기에 답을 단 것들을 책으로 출판했고 이것을 저자와 학생들이 무려 40여 년 동안 통독하면서 연구했다고 한다.

정말 일본인들의 연구 자세는 대단하다.

그래서 이렇게 흥미진진한 평전이 나오는 모양이다.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선시대 근엄한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코멘트들이 아주 날카롭고 실제적이라 옹정제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쓸데없는 미사여구 늘어놓지 말고 결론만 말해라, 나는 바쁘다, 따로 가르칠 것 없으니 인사 필요없고 임지로 빨리 내려가라, 너 같은 멍청이는 처음 본다 등등.

정말 재밌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정조어찰이 발견되어 내용을 읽어보면 정조의 불같은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으니, 황제들도 매우 개성적인 한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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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정예 군대의 탄생 고전탐독 2
노영구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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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등록을 분석한 이 시리즈 기획도 신선하고 내용도 참 마음에 든다.

정치 이야기만 읽다가 조선 시대 군대 얘기라니, 정말 흥미롭고 여러 필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한 것도 매력이다.

편집 디자인도 관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잘 해서 읽기도 편핟.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으니 이런 세세한 분석도 가능한 듯하다.


1. 임진왜란 이후 정부에서는 일본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훈련도감을 창설했다.

포수와 살수, 즉 조총 같은 화기병과 창이나 칼 들고 싸우는 근접전을 수행하는 살수로 구성됐다.

조선은 예로부터 활쏘기에 능했기 때문에 여기에 사수까지 포함시킨다.

여진과 싸우기 위해 마병, 즉 기마병도 추가한다.

처음에는 오갈데 없는 자원병을 모아 직업군인을 만들었으나 수준이 떨어져 승호군이라 하여 각 지방에서 우수한 인력을 차출한다.

이게 참 문제인 게, 급료를 잘 주면 서로 지원했을텐데 서울로 강제로 끌고 와 숙식도 어렵고 돈도 적게 주니 승호군에 뽑힌 가족은 느닷없는 날벼락이었다.

심지어 60세에 군역이 끝나면 다른 사람을 채워 넣어야 비로소 은퇴가 가능했다.

훈련도감에서는 쌀을 급료로 주고 보인을 설정해 그들에게서 포목을 받았으나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 난전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고 한다.

자급자족 시대다 보니 훈련도감에 속한 장인들이 여러 물건들을 만들었고 군영에서는 병사들의 호구지책으로 이것들을 파는 것을 눈감아 줬다.

정부에 물자를 대고 독점권을 얻은 시전 상인으로서는 훈련도감의 난전이 큰 불만이었기 때문에 이 둘간의 다툼이 생겼다.

난전이라고 하면 불쌍한 백성들이 시전 상인들에게 핍박받았다는 이미지인데 실제로는 군영을 등에 업고 장사를 하는지라 시전 상인들이 억울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라가 가난해서 상비군을 유지하기가 이렇게 어려웠었나 보다.

심지어 훈련도감에서는 돈도 만들어서 유통했다.

포목과 쌀이라는 상품화폐가 주로 유통됐으나 흉년이 들어 물건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돈을 만들어 유통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종이에 돈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리라는 지하자원을 캐서 주조했기 때문에 돈을 만드는 것 자체에 비용이 많이 발생해 마구 만들 수도 없어 자연스럽게 통화량이 조절됐다고 한다.

훈련도감뿐 아니라 지방의 각 관아에서도 돈을 만들어 유통했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라 중앙 정부에서 만들어 지방까지 보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조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가 온전한 화폐경제가 아니었던 배경이 이해된다.


2. 인조반정 성공은 훈련도감 대장의 배반 탓에 손쉽게 궁궐이 뚫렸기 때문이다.

훈련도감이 전 궁궐의 호위를 전담했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대장을 매수하니 궁궐문이 바로 열려 버렸다.

광해군은 자신의 근위병 장악에 실패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조선시대 때 호랑이 피해가 하도 많아 착호군을 조직해 군사를 이동시켰는데 이귀가 이 착호군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올라와 반정군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도 이숙번이 왕릉 공사 명목으로 지방군을 이끌고 올라왔던 예와 비슷한 것 같다.

조선시대 호랑이가 많았던 것은 나라에서 일종의 그린벨트처럼 금산을 지정해 벌목을 막았기 때문에 삼림보호처럼 숲이 우성했던 탓이다.

특히 궁궐의 후원이나 왕릉은 정책적으로 숲을 육성했기 때문에 호랑이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또 만주에서 여진족이 흥기해 호랑이 사냥에 나서자 조선으로 이주해온 경우도 많아졌다고 한다.

한 해에 백 명 이상 사망자가 나올 정도였으니 오죽하면 착호군을 조직해서 사냥에 나섰을까 싶다.

시베리아의 모피처럼 호랑이 가죽이 상품성이 있었으면 금방 멸종됐을텐데.

조선시대 범이라고 하면 꼭 호랑이만 지칭하는 게 아니고 소호라고 하여 표범도 포함됐다고 한다.



<오류>

285p

숙종이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 있는 공릉으로 갈 때

-> 명종의 능은 강릉이고, 공릉은 예종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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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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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처음 나왔을 때 알라딘에서 구입만 하고 안 읽었던 책이다.

무려 15년만에 읽게 되다니.
번역도 매끄럽고 일회성 에피소드에 그치지 않고 당시 몽골 유목 사회와 통일 과정, 그리고 다시 분열까지 한 편의 소설처럼 흥미롭게 잘 쓰여진 책이다.
몽골이라고 하면 엄청난 대제국만 상상했는데 의외로 이 유목국가도 처음에는 그저 작은 부락민에 지나지 않았고 테무친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전 세계로 뻗어갈 수 있었다.
그의 사후 제국이 갈라지고 결국은 중원에서도 쫓겨나 사막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허약한 시스템도 이해가 된다.

<오류>

56p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3세기에 고원의 초원지대에 첫 제국을 건설했던 훈족(흉노족이라고도 부른다)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 흉노는 기원전 3세기에 초원을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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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의 세계
프란츠-요제프 브뤽게마이어.볼프강 쉔클룬 외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마고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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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책장에 꽂아뒀던 책인데 정말 몇 년만에 드디어 읽게 됐다.

코로나 때문에 도서관 방문 횟수가 줄어드니 집에 있는 책을 찬찬히 읽게 된다.

시의성에 떨어지나 싶어 망설이다가 읽게 됐는데 내용은 아주 만족한다.

이런 훌륭한 책에 리뷰가 없다니 아쉽다.

독일어 번역서는 아무래도 영미권과는 달라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 책은 그런 이질감이 없고 번역도 매끄럽다.

다만 인용되는 중국 역대 인물이나 저서의 한자어 표기가 없어 아쉽다.

쉔구아 <붓의 즐거움> 이 도대체 누구의 책이란 말인가?

역자도 누군지 다 확인이 어려웠다고 밝히긴 했다.

서구인이 쓴 책이다 보니 아무래도 책의 궁극적 주제는 왜 서기 1000년 무렵에는 중국과 이슬람이 앞서 갔으나 결국은 서양인이 세계를 주도하게 됐느냐를 밝히고 있다.

미국도 결국은 유럽 문명의 확대라는 결론짓는다.

중국은 너무나 빨리 중앙집권국가를 확립했으나 유럽과 같은 경쟁 체제가 없었고 인구가 넘쳐 났기 때문에 산업화에 실패한 것일까?

봉건국가에는 매우 적합한 체제였으나 근대화를 주도하기에는 너무나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항상 궁금한 점이 왜 중국에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가이다.

중국 인구가 1억에서 4억으로 팽창할 때 유럽은 1억에서 1억 9천 정도로 늘었고 그나마도 신대륙으로 유입됐다고 한다.

흑사병 이후 인구 부족이 봉건제도를 해체하고 근대화로 접어들게 한 중요한 요인인데 이 시기에 오히려 중국은 인구가 무섭게 팽창했다.

너무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중국 경제는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멜서스의 인구론에 빠지고 인건비가 너무 싸서 굳이 기계 도입이 필요없었으며 근대화 개인주의 사회로 넘어갈 동력이 없었다고 해석한다.

일본은 하나의 개별 문화권으로 언급하는 걸 보면 확실히 세계적인 위상이 다른 모양이다.

일본 역시 서구의 근대화를 모방했기 때문에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문화권에 대해서도 같이 언급하고 있어 신선하긴 한데 다소 중구난방적인 부분도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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