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 최정예 군대의 탄생 ㅣ 고전탐독 2
노영구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12월
평점 :
훈련도감 등록을 분석한 이 시리즈 기획도 신선하고 내용도 참 마음에 든다.
정치 이야기만 읽다가 조선 시대 군대 얘기라니, 정말 흥미롭고 여러 필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한 것도 매력이다.
편집 디자인도 관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잘 해서 읽기도 편핟.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으니 이런 세세한 분석도 가능한 듯하다.
1. 임진왜란 이후 정부에서는 일본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훈련도감을 창설했다.
포수와 살수, 즉 조총 같은 화기병과 창이나 칼 들고 싸우는 근접전을 수행하는 살수로 구성됐다.
조선은 예로부터 활쏘기에 능했기 때문에 여기에 사수까지 포함시킨다.
여진과 싸우기 위해 마병, 즉 기마병도 추가한다.
처음에는 오갈데 없는 자원병을 모아 직업군인을 만들었으나 수준이 떨어져 승호군이라 하여 각 지방에서 우수한 인력을 차출한다.
이게 참 문제인 게, 급료를 잘 주면 서로 지원했을텐데 서울로 강제로 끌고 와 숙식도 어렵고 돈도 적게 주니 승호군에 뽑힌 가족은 느닷없는 날벼락이었다.
심지어 60세에 군역이 끝나면 다른 사람을 채워 넣어야 비로소 은퇴가 가능했다.
훈련도감에서는 쌀을 급료로 주고 보인을 설정해 그들에게서 포목을 받았으나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 난전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고 한다.
자급자족 시대다 보니 훈련도감에 속한 장인들이 여러 물건들을 만들었고 군영에서는 병사들의 호구지책으로 이것들을 파는 것을 눈감아 줬다.
정부에 물자를 대고 독점권을 얻은 시전 상인으로서는 훈련도감의 난전이 큰 불만이었기 때문에 이 둘간의 다툼이 생겼다.
난전이라고 하면 불쌍한 백성들이 시전 상인들에게 핍박받았다는 이미지인데 실제로는 군영을 등에 업고 장사를 하는지라 시전 상인들이 억울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라가 가난해서 상비군을 유지하기가 이렇게 어려웠었나 보다.
심지어 훈련도감에서는 돈도 만들어서 유통했다.
포목과 쌀이라는 상품화폐가 주로 유통됐으나 흉년이 들어 물건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돈을 만들어 유통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종이에 돈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리라는 지하자원을 캐서 주조했기 때문에 돈을 만드는 것 자체에 비용이 많이 발생해 마구 만들 수도 없어 자연스럽게 통화량이 조절됐다고 한다.
훈련도감뿐 아니라 지방의 각 관아에서도 돈을 만들어 유통했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라 중앙 정부에서 만들어 지방까지 보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조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가 온전한 화폐경제가 아니었던 배경이 이해된다.
2. 인조반정 성공은 훈련도감 대장의 배반 탓에 손쉽게 궁궐이 뚫렸기 때문이다.
훈련도감이 전 궁궐의 호위를 전담했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대장을 매수하니 궁궐문이 바로 열려 버렸다.
광해군은 자신의 근위병 장악에 실패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조선시대 때 호랑이 피해가 하도 많아 착호군을 조직해 군사를 이동시켰는데 이귀가 이 착호군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올라와 반정군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도 이숙번이 왕릉 공사 명목으로 지방군을 이끌고 올라왔던 예와 비슷한 것 같다.
조선시대 호랑이가 많았던 것은 나라에서 일종의 그린벨트처럼 금산을 지정해 벌목을 막았기 때문에 삼림보호처럼 숲이 우성했던 탓이다.
특히 궁궐의 후원이나 왕릉은 정책적으로 숲을 육성했기 때문에 호랑이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또 만주에서 여진족이 흥기해 호랑이 사냥에 나서자 조선으로 이주해온 경우도 많아졌다고 한다.
한 해에 백 명 이상 사망자가 나올 정도였으니 오죽하면 착호군을 조직해서 사냥에 나섰을까 싶다.
시베리아의 모피처럼 호랑이 가죽이 상품성이 있었으면 금방 멸종됐을텐데.
조선시대 범이라고 하면 꼭 호랑이만 지칭하는 게 아니고 소호라고 하여 표범도 포함됐다고 한다.
<오류>
285p
숙종이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 있는 공릉으로 갈 때
-> 명종의 능은 강릉이고, 공릉은 예종비 장순왕후의 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