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살인사건 - 검안을 통해 본 조선의 일상사
김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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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읽게 된 책이다.

제목부터 흥미롭고 저자가 19세기에 남아있는 검시 기록들을 꼼꼼하게 분석해 읽기 쉽게 풀어놓았다.

네이버에 연재된 글이라 그런지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느낌이다.

더 오래 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고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벌어진 살인사건들이다.

대한제국 시기면 근대 국가 같은데 사건 기록들을 보면 여전히 전통사회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든다.

상민들은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렸고 이들이 서로 힘을 합쳐 자활조직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또 주변인들에게는 새로운 폭력 집단이 된다.

사회에서 억압받는 남자들은 가정 내에서 가족인 여성을 폭행하고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를 학대한다.

단편적인 사건들이지만 전근대 사회는 사적 폭력이 상당히 일상화 됐다는 느낌이 든다.

말단 지방에까지 행정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국가였으나 시대적 한계상 세세하게 주민들의 일상을 법으로만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은 마을 자치에 맡겼던 것 같기도 하다.

지방관이 지방민과 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를 짧게 했던 조선왕조의 고충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사적 복수의 허용도 전근대 사회의 특징 같다.

마치 프랑스에서 국왕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결투를 통해 시비를 가렸던 것처럼 조선 역시 성리학적 명분론에 근거하여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훼손한 이를 향해 사적 복수를 감행하고 이것이 또 법에 저촉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찬양하는 분위기였다는 게 신기하다.

오늘날과 매우 다른 개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피해를 입힌 사람을, 심지어 살인자라 할지라도 사적으로는 절대 폭력을 가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권의식이나 개인의 존엄성 같은 가치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발달해 온 것 같다.

처음부터 당연하게 있었던 게 아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쟁취한 진보적 가치관들인 것이다.

확실히 전근대인들은 현대인과는 다른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이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대를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달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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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2 - 한중일 동아시아史를 한 바늘로 꿰어낸 신개념 역사서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2
이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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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보다 두꺼워 걱정했는데 역사 이야기라 술술 잘 읽힌다.

다만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를 한꺼번에 서술하려다 보니 많은 정보를 압축한 부분이 있고, 특히 일본사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 읽기가 좀 어려웠다.

일본사는 좀더 공부가 필요할 듯 하다.

처음에는 한중일 역사를 같이 다룬다고 해서 기획이 신선하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세 나라가 각자의 길을 간 느낌이 든다.

신라 통일 무렵과 임진왜란 정도가 좀 엮이는 것 같고 그 외에는 서로 크게 상관하지 않고 지냈던 것 같다.

중국과 한국도 조공외교라는 대외적 관계에서만 접촉을 할 뿐 큰 내정간섭 없이 발전했던 듯하다.

그래서 결국 중국 역사 따로 한국 역사 따로 일본 역사 따로 독립된 이야기들을 병렬식으로 모아 놓은 느낌이다.

일본 역사를 굉장히 건조하게 사건들만 늘어놓았는데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생뚱맞다.

일본도 많은 시행착오 끝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해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겠지만 객관적 실체와 그 배경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느닷없이 제국주의의 환상을 깨달으라는 일갈이 황당하게 느껴진다.



<오류>

118p

희종의 조카인 완안양이 희종을 살해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는 나중에 폐위되었기 때문에 해릉왕이라 불린다.

-> 해릉왕은 희종의 조카가 아니라 사촌형제이다.

278p

경태제는 원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준(朱見浚)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 한자가 잘못됐다. 朱見濬 이다.

313p

태종의 외손자 남이 등

-> 남이는 태종의 외손자가 아니라 외증조부이다.

즉, 남이의 할머니 정선공주가 태종의 딸이다.

434p

이때 옹립된 주유승은 홍광제로 불린다.

-> 주유승이 아니라 주유숭이다.

435p

버마까지 추격한 오삼계 군대에게 홍광제가 죽고

-> 버마까지 오삼계가 추격해서 죽인 이는 홍광제가 아니라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이다.

453p

1939년 임칙서를 보내 아편을 단속하게 했다.

-> 1939년이 아니라 1839년이다.

500p

이하전 같이 代 수도 맞고 인물도 출중한 왕위 계승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이어가기 위해 방계인 데다 정치 경험도 없는 철종을 무리하게 즉위시킨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 헌종 사후 철종이 즉위한 것은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위해 무리하게 즉위시킨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살아있는 왕손 중에서 헌종과 혈연관계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하전은 도정궁, 즉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당시 왕실과는 실제적인 혈연관계가 전혀 없었다.

훗날 철종을 이어 즉위한 고종 역시 당시 왕실로서는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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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 - 한중일 동아시아史를 한 바늘로 꿰어낸 신개념 역사서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
이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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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2권 나온 기념으로 1권도 같이 읽었다.

한중일 세 나라를 한꺼번에 서술하려다 보니 깊이있는 해석이 다소 부족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한권으로 통일성 있게 담아 내기도 쉽지는 않은 일 같다.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한국사, 동아시아사 이런 책들의 문제가 너무 많은 사건들을 한꺼번에 서술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연대별 사건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단지 알려주기만 한다면 그냥 연표보는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들어가야 비로소 독자에게 책읽는 기쁨을 줄 수 있다.
무려 70만 년 전 구석기인부터 시작해 고대가 끝나는 당나라 말까지가 서술됐다.
한중일이 서로 영향을 받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해서인지 유럽처럼 얽혀 있기 보다는 각자의 길을 간 느낌이다.
책봉체제는 내정간섭 보다는 확실히 대외적인 외교 차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유럽처럼 왕실간의 통혼도 없었고 완전히 다른 민족으로 생각되어 일찍부터 각자 민족국가를 이룩했던 것 같다.
맨 처음에 저자는 기원전 25세 무렵 생겨난 랴오허 문명을 문헌 기록상 기원전 7세기에 처음 등장한 고조선의 기원일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 부분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일단 시대가 너무 떨어져 있고 문명권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서의 국가를 1:1로 연결짓기는 어려운 듯하다.
위진남북조 시대와 일본의 헤이안 시대가 특히 복잡한데 짧은 분량으로 비교적 잘 요약해 줘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2권은 500페이지가 넘어 긴장을 좀 해야 할 듯.

<오류>
45p
유방이 척부인 소생의 사남 유여의를 총애하기도 했기 때문에
-> 유여의는 3남이다. 4남은 훗날 황제가 된 문제이다.
211p
양견의 장녀였던 여화이고, 황자 우문천을 낳았다. 이가 바로 훗날의 정제이다.
-> 양견의 장녀는 선제의 황후이긴 하나 정제의 친모는 아니다. 정제의 친모는 주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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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후궁 비사
후단 지음, 이성희 옮김 / 홀리데이북스(Holidaybooks)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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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 위주의 책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중국에서 출간된 책들이 정말 많이 번역되는 것 같다.

양이 많아져서인가, 질적으로도 책의 수준이 올라가는 듯해서 이제는 안심하고 읽어도 될 듯 하다.

저자 약력만 보고 박영규씨 같은 대중 작가인가 싶어 책 내용에 대해 약간 우려했는데 서문에 공약한 대로 TV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자극적인 에피소드는 일체 배제하고 사료를 바탕으로 저자의 식견을 첨부하여 논평하는 괜찮은 역사서다.

중국사는 정치적으로만 조금 알고 있을 뿐이라서, 황실의 속사정은 어떠했는지 궁금해서 읽게 됐고 만족스럽다.

황제의 친인척에 대한 저자의 책도 곧 번역될 예정이라고 하니 같이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책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다.

일개 농민에서 황제가 된 정말 대단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생산력도 남달라서 수많은 여인들을 취하고 자식들도 40여 명에 이른다.

원말에 군문에서 유행한 독특한 풍습이 바로 의자녀 제도이다.

전에도 주원장이 곽자흥의 양녀의 남편이었다는 게 신기했었다.

곽자흥이 자녀가 없었나 싶었는데 심지어 친딸은 후궁으로 봉해지고 친아들 둘도 모두 후에 봉해진다.

자녀가 없어서 양녀를 들이는 게 아니라 의사 가족을 형성함으로써 보다 친밀하고 충성스런 관계를 맺는 것이다.

마치 로마 제정 초기에 양자 제도처럼 말이다.

주원장 역시 자신의 부하나 조카들처럼 가까운 이들에게 주씨 성을 내려 양자로 삼아 친위부대처럼 활용한다.

이들은 주원장이 중원을 정벌할 때 가장 먼저 앞장선 충신들이었고 대부분은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분봉되기도 한다.

물론 주원장의 잔학하고 냉정한 성품으로 대부분은 끝이 좋지는 못했다.

난세를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품성이 냉정하고 권력의지가 매우 강해 친인척의 굴레에 속박당하지 않는 모양이다.

조선 건국에 앞장선 태종 이방원도 이복 형제들을 죽이고 훗날 친인척을 전부 죽여버린 것처럼 주원장도 가족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간다 싶으면 바로 제거해 버렸다.

이런 잔혹한 성품은 공의적인 측면에서는 외척에게 좌지우지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으나 사적으로 보면 얼마나 냉혹한가.

가족도 단칼에 정리할 정도이니 아무 상관없는 신하들쯤은 수만명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로 처결해 버렸을 것이다.


너무나도 잔인한 순장 풍습에 대해 길게 서술이 됐다.

명 황실에서도 장례 때 인형을 묻는 것마저 비인간적인 행태라고 비판한 유교적 관례를 의식한 탓인지 두리뭉실하게 실록에 기록했으나, 한확의 여동생인 여비 한씨의 유모 김흑이 귀국해 조선왕조실록에 순장 당시가 자세히 기록됐다.

사실 공녀 제도부터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광활한 중국 땅에 미녀들이 널려 있을 것이고 다들 황실에 들어와 총애를 받고 싶어할텐데 왜 굳이 말도 안 통하는 먼 조선 땅에서 궁녀를 보내라고 닦달을 했을까?

단순한 이국적 취향인가, 아니면 복속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인가?

물자도 아닌 외국 여자가 꼭 그렇게 필요했던 것일까?

전쟁 포로도 아닌데 굳이 양가집 규수들을 선발해 후궁으로 앉히는 제도의 본의를 모르겠다.

이 제도는 선덕제까지 있었던 것 같고 정통제 즉위부터는 없어진 듯하다.

정통제는 순장 제도도 없애버린다.

홍무제 사망 당시 40여 명에 달하는 비빈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고, 뒤를 이은 영락제와 홍희제, 선덕제 모두 모시던 비빈들이 순장당했다.

자식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황태후가 지목하면 죽어야 했던 모양이다.

황태후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같던 정적을 남편 사후 제거하는 방법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인종의 정비였던 장황후는 자식을 셋이나 낳고 지위가 귀비에 이른 곽씨도 순장시킨다.

주원장은 무려 69세에 막내딸을 낳는데, 3년 후 죽으면서 이 불쌍한 아기의 어머니도 같이 순장된다.

보통 아이가 어리면 보육을 위해서라도 살려두는데 얼마나 끔찍한 풍습인지 짐작이 된다.


책에서 가장 길게 서술한 주제는 영락제가 과연 마황후의 적자인가 하는 것이다.

황위를 찬탈하고 독재 권력을 휘두른 황제에 대한 민가의 반발심 탓인가?

상식적으로는 그냥 야사에 불과할 것 같은데 왜 이 멀쩡한 황제가 서자 소문에 휘말렸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영락제가 마황후 소생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어떤 책에서는 고려 여인의 소생이라고도 하지만, 또 다른 책에서는 이런 건 다 야사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내 생각에도 결정적인 증거가 있지 않는 이상 정사의 기록을 의심하는 것은 음모론에 불과한 것 같다.

그리고 이미 황제위에 올라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적통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한 건지 모르겠다.

현대인들에게도 적통이 좋다는 선호 사상이 있는 것인가?


아들에 대한 황실의 집착도 안타깝다.

서양처럼 여성도 가문의 계승권이 있었더라면 불행한 여인들의 숫자가 줄어들었을까?

혹은 청나라처럼 황위 계승에 적서 차별이 없었다면 궁중의 암투는 줄어들었을까?

고대가 남성 위주의 사회이긴 하지만 반드시 아들만이 대를 잇는다는 개념은 정상적인 가정을 얼마나 심하게 파괴하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정말 여성 상위 시대라고 할 만큼 역차별 논란이 심한 걸 보면 격세지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만인의 어머니인 황후 자리마저도 단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명나라 황후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놀랍다.


<오류>

40p

절대 다른 어염집의 딸과 아낙네를 함부로 빼앗아 본 적이 없다

-> 어염집이 아니라 여염집이다.

47p

어떻게 했길래 예쁜 아내 한 명을 공짜로 얻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시동생 두 명까지 얻을 수 있었을까?

-> 주원장이 곽자흥의 양녀 마황후와 결혼하고 의동생인 곽흥, 곽영이 그를 따랐다는 문장이니, 시동생이 아니라 처남으로 번역해야 한다.

49p

사실 주원장은 곽녕비의 얼굴을 봐서라도 시동생에게 큰 자리를 주고 싶어 했다.

-> 곽녕비의 남동생이므로 시동생이 아니라 처남이다.

297p

선덕 연간이 되자 강제로 중국 조정에 끌려왔던 조선 국적의 집찬비, 창가비들은 하나 둘 김흑을 찾아와 자신도 김흑과 함께 귀국해 부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태후에게 말씀을 드려줄 것을 부탁했다.

-> 선덕 연간이 아니라 영종이 즉위한 이후이므로 정통 연간이다.

약 10여 명이 죽었는데, 이는 순종이 내린 유지였을까?

-> 순종이 아니라 선종이다.

362p

서달의 차녀가 황제의 큰 매형인 주체에게 점 찍혔는데, 당시 주체는 이미 서달의 장녀와 결혼을 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 황제인 주체에게, 혹은 언니의 남편인 주체에게 등으로 문맥을 바꿔야 한다.

378p

주원장의 형부 이정에서 그 아들 이문충에게 전해지고

-> 이정은 주원장의 둘째 누나 남편이므로 형부가 아니라 매형으로 번역해야 한다.

383p

직접 소장을 처리하고 판결을 내린다면 모후가 조정의 조회에 참가하고 수렴첨정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 장태후는 영종의 할머니이므로 모후가 아니라 조모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녀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황제의 외삼촌 둘이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철저히 공직에서 떠날 것을 주문했다.

->황제인 영종의 외숙이 아니라 진외종조부들이다. 즉, 이들은 영종의 아버지인 선종의 외숙들이다.

419p

헌종은 아버지 선종의 재능을 물려받은 단청의 명수였으며

-> 헌종의 아버지는 영종이고, 선종은 할아버지이다.

444p

만귀비는 자신의 본가 친척이자, 첩실 관계 제부의 누나가 아닌가?

-> 첩의 언니의 남편이므로 제부가 아니라 형부의 누나라고 바꿔야 한다.

488p

과거는 황제의 어린 외삼촌이었지만, 지금은 나라의 외숙부인 국구가 되었고 황제는 그들 둘만 보면 꼬박꼬박 외삼촌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 과거는 황제의 어린 '처남'이라고 번역해야 문맥에 맞다.

639p

장황후의 명예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이자청이 궁으로 진격할 때

-> 이자청이 아니라 이자성이다.

667p

효애철황후 장씨(1620-1664년 사망)

-> 1664년이 아니라 1644년에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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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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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준에서는 어렵다는 말 밖에는...

표지 디자인도 예쁘고 책 판형도 읽기 딱 좋게 잘 만들어졌으나 중앙아시아사에 대한 배경지식 부족으로 저자가 설명하는 바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적인 내용은 몽골이 원 제국 멸망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치 울루스, 차가다이 칸국, 일 칸국, 대원 제국으로 나뉘어졌고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며서 19세까지도 계속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칸국은 러시아나 청나라에 흡수됐을지라도 혼인 정책과 고위직 등용을 통해 그 나라 역사에 중요한 인적 자원을 제공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흔히 오이라트를 서몽골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이들이 비록 몽골어를 쓰지만 국외자라는 확실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민족적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라고 해서 다 몽골인은 아니라는 얘기.

반대로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의 여러 칸국은 물론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등도 넓은 의미의 몽골 후예로 보고 있다.

투르크와 몽골이 전혀 다름을 강조하면서도 몽골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좀더 공부가 필요한 지역사다.


<인상깊은 구절>

38p

몽골제국 계승국가들의 유목민 지배층은 스스로를 몽골인 혹은 몽골인의 후예로 여겼다. 이들에게 돌궐제국, 셀주크제국, 호레즘제국, 카라한 왕조, 킵착 유목민 등과 같이 몽골제국의 출현 이전 존재했던 투크르계 국가나 집단을 선조로 여기는 계승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13세기 전반기에 몽골제국에 정복된 다양한 투르크계 언어 사용 집단들은 결코 하나의 민족 혹은 종족 집단이 아니었다. 우선 이들은 체질인류학적으로 다양한 집단을 이루었다.이들은 주로 황인종에 속했지만 적잖은 수는 혼혈 인종 혹은 백인종에 속했다. 유전학적으로도 단일 투르크 민족이란 현재뿐 아니라 몽골제국 시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현대 킵착 부족민(현 카자흐스탄의 한 부족), 투르크멘인(오구즈인의 후예), 유구르인(위구르인의 후예), 사하/야쿠트인(철륵 유목민의 후예)은 유전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이한 부계 기원을 갖는다. 이들이 공통의 선조 집단으로부터 갈라져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중세 시기의 위구르인, 킵착 유목민, 셀주크제국의 오구즈인, 카라한 왕조의 투르크인 등은 서로 다른 기원 신화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를 동일한 민족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몽골제국 내에서 주치 울루스나 차가다이 울루스를 구성한 유목민들이 '소수의 몽골인'과 '다수의 투르크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몽골인과 다양한 부계 기원과 정체성을 가진 비몽골인 집단들로 이루어졌다. 후자 그룹에 속한 유목민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투르크' 민족이라고 보지도 않았고, 동시대인들고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개별적인 차원에서는 오히려 몽골인에 비해 소수였고 결국 칭기수 울루스들에 포함되어 '몽골인'이 되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와 킵착 초원의 몽골제국 계승국가들은 몽골제국 등장 이전에 이미 소멸했거나 몽골제국에 정복되어 소멸했던 돌궐제국, 셀주크제국, 호레즘제국, 카라한 왕조, 킵착 유목민 집단 등을 자신의 선조로 내세운 적이 없다. 티무르제국, 무굴제국, 우즈벡 칸국, 크림 칸국의 공식 역사서들과 카자흐 칸국의 구전 설화들은 공통적으로 칭기스 칸과 몽골인을 자국의 선조로 기술한다. 주치 울루스와 차가다이 울루스의 몽골 후예들은 몽골어는 잊었지만 몽골인의 정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41p

티무르제국의 지배층을 구성한 유목민 집단은 바블라스, 잘라이르, 술두스, 아를라트, 카라우나스 등과 같은 몽골계 부족민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차가다이인'이라고 불렀다. 즉, 티무르제국은 '차가다이 울루스' 그 자체였고, 그 지배층을 이룬 집단은 '차가아티 몽골인'들이었다. 따라서 티무르제국의 출현은 차가다이 울루스 내에서 권력의 중심이 칭기스 가문에서 몽골 바를라스 부 출신의 티무르 가문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몽골계' 국가가 '투르크계' 국가로 변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43p

여기서 간과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투르크 정체성이 돌궐 정체성과는 무관했다는 사실이다. 돌궐제국에 대한 기억은 몽골제국의 등장 이전 이미 내륙아시아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사실상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편 현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초원 지역, 즉킵착 초원의 몽골제국 후예들은 투크르 집단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애당초 투크르 집단명은 서돌궐계 부족들 사이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카자흐인과 크림 타타르인 같은 몽골제국의 후예들뿐 아니라 볼가강 유역의 여러 투르크계 언어 사용 집단들은 투르크 집단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54p

티무르는 정복지 대부분을 토착 세력을 통해 간접 통치했다. 방대한 전역을 적접 지배하기에는 차가다이인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정주 농경 지역이었던 서차가다이 울루스와 일 칸국의 옛 영역은 자신과 아들들이 직접 통치했다.

57p

투르크멘은 9세기 들어 아랄해 북안의 초원 지대에 등장한 오구즈 유목민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구즈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몽골제국의 등장 이전에는 셀주크제국을 세웠고 그 이후에는 오스만제국, 카라 코윤루, 악 코윤루, 사파비제국을 세웠다.

투르크멘 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황인종에 속했던 다른 투르크계 유목민들과는 달리 혼혈로 인해 이란계 정주민의 외모를 갖게 된 집단이었다. 투르크멘인이 기후 등의 조건 때문에 작은 눈과 코, 넓은 얼굴 등을 특징으로 하는 투르크인의 형질을 상실하고 타직인(이란계 정주민)의 외모를 갖게 된 집단이라고 기록한다.

몽골제국 후예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티무르제국의 일원들은 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동족으로 보지 않았을뿐더러 이들을 멸시하거나 적대시했다.

59p

몽골계 바를라스 부 출신의 티무르 일족은 칭기스 일족을 포함한 몽골 후예들과의 통혼을 통해서 몽골인 혈통을 이어나갔다. 이는 티무르제국을 몽골제국의 계승국가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이다.

67p

무굴제국 황제들이 몽골어를 사용했던 것도 아니고 3대 황제 악바르 이후로는 더 이상 중앙아시아인의 외모를 지녔던 것도 아닌데 무굴제국을 몽골제국의 계승국가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무굴제국의 건국자 바부르가 칭기스 칸과 티무르의 혈통을 이어받은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무굴제국의 건국 집단 및 핵심 지배층이 바부르와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당시 힌두스탄이라고 불린 인도로 이주해 온 '차가다이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란계와 인도계 모친을 둔 무굴 황제들은 중앙아시아인이 외모를 상실했지만 자신들이 몽골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75p

바부르가 말하는 '투르크인'은 현대적 의미의 '투르크인'이 아니었다. 바부르는 '투르크인'이라는 집단명을 티무르 제국의 일원으로 지칭하는 데만 사용했다. 다른 투르크어 사용 집단인 우즈벡인, 카자흐인, 오스만인, 키질바슈인(사파비 제국의 투크르멘인)은 '투르크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현대 터키인의 선조인 오스만 투르크인은 '룸Rum인', 즉 로마인(비잔틴인)이라고 불렀다. 한편 바부르는 칭기스 칸은 '모굴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바부르가 사용한 '모굴인' 명칭 역시 현대적 의미의 '몽골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바부르의 투르크인 정체성은 현대적 의미의 '투르크인' 정체성이 아닌 '티무르 일족 정체성'이었다.

몽골와 포스트 몽골 시기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인'은 '타직인/사르트인'이라 불린 이란계 정주민에 대비되는 내륙아시아 유목민을 의미했으며 몽골인이 투르크인의 주류라고 인식되었다. 즉, 나바이는 칭기스 칸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이주해 온 몽골제국의 건국집단을 자신의 선조로 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바이나바부르의 '투르크인' 정체성에 대해 논할 때 이들이 차가다이 울루스 이전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카라한 왕조나 셀주크제국의 투르크인이 아닌 '몽골인'을 자신의 선조로 여겼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94p

모굴인은 차가다이인이나 두 주치 울루스계 민족인 우즈벡인과 카자흐인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차가다이인의 몽골인 정체성은 몽골어가 아닌 몽골인 후예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동차가다이 울루스의 모굴인을 '몽골인'으로, 서차가다이 울루스의 차가다이인, 즉 티무르제국의 일원들을 '투르크인'으로 보는 일부 시각은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119p

일 칸국은 이외에도 이란이 시아파 이슬람 국가, 이란계, 투르크계 주민 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가 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시아파 이슬람은 울제이투 칸의 후원을 받았으며, 많은 수의 투르크어 사용 유목민이 몽골지배기에 이란으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근대 이란'을 일 칸국의 유산으로본다.

131p

맘룩 술탄국은 일 칸국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했는데 특히 키트부가가 이끄는 몽골 원정군을 격파한 1260년의 아인 잘루트 전투는 몽골 군대의 불패 신화를 깨고 몽골제국의 북아프리카 진출을 저지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승리였다. 따라서 맘룩 술탄국은 동시대인들에게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로 여겨졌던 국가이다. 그러나 맘룩 술탄국은 몽골 세계의 일부를 이룬 국가이기도 했다. 맘룩 술탄국 내에서 활약한 몽골계 맘룩들이 그 증거다.

143p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제국의 지배가 남긴 유산이었다. 몽골제국의 러시아 정복 이전의 모스크바는 외딴 시골 소도시에 불과했고 모스크바 공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스크바가 15세기 후반 러시아를 통일하게 될 신흥 국가로 발전하는 데에는 주치 울루스의 정치, 군사적 비호가 결정적인 역할을했다.

주치 울루스의 우즈벡 칸은 유리 3세를 자신의 누이 콘차카와 혼인시켰고, 유리의 후임 이반 1세에게는 러시아 전역에 대한 조세 징수권을 주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다른 공국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해 주치 울루스의 수도 사라이에 보내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부를 축적한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공국으로 성장했다. 주치 울루스는 아울러 러시아 내 반몽골 반란 진압 임무도 모스크바에 맡겼다. 그 결과 타 지역의 주민들이 계속해서 부유하고 안전한 모스크바의 영토로 몰려들었고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인구 증가와 국력 강화로이어졌다.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 관구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왔는데 이는 모스크바가 14세기 초중반 러시아의 중심부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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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2020-07-1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몽골의 후예라고 동시대인들은 모두 생각했다를 쓴 독자입니다

이견을 제시해서 죄송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왕조가 몽골의 후예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의 몇 페이지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고 보시나요? 무굴 제국과 그 전신인 티무르 제국은 몽골의 후예라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공식적으로 몽골의 후예라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이 책에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설명)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유익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초기러시아제국, 청제국, 오스만제국, 사파비왕조가 그 출현 및 발전 과정에서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지 이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몽골 제국의 후예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몽골 제국이 이들 제국들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 준다는 점입니다. 이런 책은 아주 드뭅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이 우즈벡 칸국, 카자흐 칸국, 북원 등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중앙아시아사학자들에게는 상식적인 일입니다. 별로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이 주장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이 가졌던 몽골 제국 계승성을 실제로 규명하는 일입니다. 이 책만큼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책은 없습니다.

이 책은 투르크와 몽골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한 바 없습니다. 어느 페이지에 그런 내용이 나오나요? 이 책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투르크란 민족은 근대 이전에는 없었다라는 점입니다.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들은 많았지만 이들 대부분이 투르크란 집단명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보지 않았다고 최신 연구들을 통해 밝힙니다. 투르크 민족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투르크어를 사용하던 칭기스 칸의 후예들이나 몽골계 부족민들 혹은 이들에게 동화된 집단들이 스스로를 몽골인 혹은 몽골 제국의 후예라고 여길 수 있었다고 이 책은 설명합니다. 특히 1장의 상자글들에서요.

이 책에서 몽골 제국의 후예로 다루는 집단들은 저자가 그렇게 규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칭기스 칸의 혈통을 이어받았거나 몽골계 부족들이 주축을 이룬 집단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 스스로가 몽골 제국의 후예라고 주장했습니다. 저자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marine 2020-07-10 16:53   좋아요 0 | URL
반박글은 쓸 수 있지만 ˝이 책을 읽어 보신 게 맞는지˝와 같은 표현은 매우 무례하게 느껴집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니 좀더 예의를 갖춰 주길 바랍니다. 제대로 이해를 못했을 수는 있겠으나 책을 읽지도 않고 감상문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1) 제가 이해하기로는 저자는 몽골이 단순히 북원 멸망 후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주치 울루스, 차가다이 울루스, 북원, 일 칸국 등의 형태로 계속 존재했다고 강조합니다. 모스크바 대공국이나 청나라, 사파비 왕조 등에 혼인정책과 고위직 등용을 통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후예로 본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학술적으로는 올바른 표현이 아닐 수는 있겠으나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독자의 느낌으로 쓴 문장입니다.
148p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주해 온 칭기스 일족과 군 지휘관들은 러시아의 지배층에 편입되었다. 이들이 16세기 러시아 상류층에서 차지한 비율은 17~20%에 달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 내에서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차지하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수치다. 특히 몽골인의 혈통을 계승한 러시아의 귀족층 인사들 중에는 러시아의 국가 수반의 자리에 오른 이들도 여럿 있었다.˝
287p
˝오스만제국의 일부 문인들은 칭기스 일족과 오스만 황제들이 같은 조상에서 갈라졌다고 보았다. ... 오스만 왕조가 단절될 경우 크림 칸국의 칭기스 왕조가 뒤를 이어야 한다는 암묵적 견해도 오스만 지배층 내부에 존재했다.
몽골제국은 근대 이란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중반까지 이란을 지배한 사파비제국은 이슬람 신비주의 종단인 사파비야에서 기원했는데, 이 종단은 일 칸국과 잘라이르 왕조의 후광과 재정 지원을 받으며 일 칸국의 중심부였던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번성한 종교 집단이었다. 일 칸국의 후예들은 투르크멘 유목민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고 추정되는데 이런 까닭에 19세기 이란을 지배한 투르크멘계의 카자르 왕조는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후예를 자처했다.˝

2) 투르크와 몽골인에 대해서 인용한 부분은 너무 길어서 본문에 따로 적겠습니다.


책사랑 2020-07-1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marine님이 무례하게 느끼신 표현 죄송합니다. 책을 읽어 보셨냐는 표현은 삭제하겠습니다. 본문에 인용하신 <인상깊은 구절> 부분만 보아도 세심히 읽어 보셨습니다.

저는 marine님이 평이한(?) 평점을 주신 이유가 글 끝에 언급하신 ˝(이 책이 오스만, 사파비, 무굴 등을 몽골의 후예로 보는 것은) 몽골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라는 평가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marine님께서 적으신 <인상깊은 구절>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근대 이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정체성의 본질에 대해 세심하게 설명하고 또 몽골인들도 그러한 투르크 정체성에 ˝포함˝되었다고(상자글들과 ˝투르크인의 계보˝라는 책 제목 설명에서도 언급) 이야기합니다. 투르크와 몽골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양집단/개념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사파비, 러시아, 오스만에 대한) 영향과 (직계 후예 국가들에게 이어진) 계승성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하신 부분들은 객관적 사실(러시아와 사파비가 받은 몽골 영향)이거나 이들 나라들의 자체 주장(오스만의 몽골관, 카자르의 몽골관)입니다. 이 책이 이들 국가들을 몽골로 규정한 사례들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의 특징은 몽골의 범위를 넓게 잡은 점이 아니라 무엇이 몽골이고 왜 몽골인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역사적 근거가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또 수많은 관련 정보들을 제공한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이런 점들에서 드문 책입니다. 몽골 제국을 과장적으로 다루는 책, 글들이 많은데 이 책은 그런 성격의 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덧붙이자면 몽골 제국이 러시아, 이란, 오스만, 델리 술탄국, 맘루크 등에 미친 영향 관련 내용들은 이 책이 처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연구들을 요약 소개하는 것들입니다. 출처들을 분명 표시하고 있습니다.

앞 글에 포함되었던 제 무례한 표현 죄송합니다. 사실 marine님이 위의 감상문에 적으신 느낌이 사실 제 소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받는 느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 달아 주신 것도 고맙습니다.





marine 2020-07-11 12:17   좋아요 0 | URL
저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역사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다만 책읽기에 아주 많은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 읽어 보지도 않고 대충 서평을 쓴다는 점 때문에 저도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 자체가 어려워서 100% 다 이해를 못했습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사는 저에게는 아직 너무 어려워서 댓글에 대해 정확히 반박도 못하겠구요.
책 한 권을 읽으면 기록을 남기기 위해 알라딘에 몇 줄 감상문을 쓰지만 제 개인 블로그에는 몇 시간에 걸쳐 중요한 문장을 옮겨 적고 있습니다. 나름 이렇게 열심히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 저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제 수준에서는 맞다 틀리다 더 주장을 못할 것 같고 다만 제가 옮겨 적은 저 부분들을 읽고 막연히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책사랑 2020-07-1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직장생활을 하시면서도 개인 블로그에 몇 시간에 걸쳐 중요한 문장을 옮겨 적으신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진정한 독서가이자 연구자이십니다. 위에 발췌하신 부분이나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는 역사 전공자이신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