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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평점 :
내 수준에서는 어렵다는 말 밖에는...
표지 디자인도 예쁘고 책 판형도 읽기 딱 좋게 잘 만들어졌으나 중앙아시아사에 대한 배경지식 부족으로 저자가 설명하는 바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적인 내용은 몽골이 원 제국 멸망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치 울루스, 차가다이 칸국, 일 칸국, 대원 제국으로 나뉘어졌고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며서 19세까지도 계속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칸국은 러시아나 청나라에 흡수됐을지라도 혼인 정책과 고위직 등용을 통해 그 나라 역사에 중요한 인적 자원을 제공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흔히 오이라트를 서몽골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이들이 비록 몽골어를 쓰지만 국외자라는 확실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민족적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라고 해서 다 몽골인은 아니라는 얘기.
반대로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의 여러 칸국은 물론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등도 넓은 의미의 몽골 후예로 보고 있다.
투르크와 몽골이 전혀 다름을 강조하면서도 몽골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좀더 공부가 필요한 지역사다.
<인상깊은 구절>
38p
몽골제국 계승국가들의 유목민 지배층은 스스로를 몽골인 혹은 몽골인의 후예로 여겼다. 이들에게 돌궐제국, 셀주크제국, 호레즘제국, 카라한 왕조, 킵착 유목민 등과 같이 몽골제국의 출현 이전 존재했던 투크르계 국가나 집단을 선조로 여기는 계승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13세기 전반기에 몽골제국에 정복된 다양한 투르크계 언어 사용 집단들은 결코 하나의 민족 혹은 종족 집단이 아니었다. 우선 이들은 체질인류학적으로 다양한 집단을 이루었다.이들은 주로 황인종에 속했지만 적잖은 수는 혼혈 인종 혹은 백인종에 속했다. 유전학적으로도 단일 투르크 민족이란 현재뿐 아니라 몽골제국 시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현대 킵착 부족민(현 카자흐스탄의 한 부족), 투르크멘인(오구즈인의 후예), 유구르인(위구르인의 후예), 사하/야쿠트인(철륵 유목민의 후예)은 유전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이한 부계 기원을 갖는다. 이들이 공통의 선조 집단으로부터 갈라져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중세 시기의 위구르인, 킵착 유목민, 셀주크제국의 오구즈인, 카라한 왕조의 투르크인 등은 서로 다른 기원 신화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를 동일한 민족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몽골제국 내에서 주치 울루스나 차가다이 울루스를 구성한 유목민들이 '소수의 몽골인'과 '다수의 투르크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몽골인과 다양한 부계 기원과 정체성을 가진 비몽골인 집단들로 이루어졌다. 후자 그룹에 속한 유목민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투르크' 민족이라고 보지도 않았고, 동시대인들고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개별적인 차원에서는 오히려 몽골인에 비해 소수였고 결국 칭기수 울루스들에 포함되어 '몽골인'이 되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와 킵착 초원의 몽골제국 계승국가들은 몽골제국 등장 이전에 이미 소멸했거나 몽골제국에 정복되어 소멸했던 돌궐제국, 셀주크제국, 호레즘제국, 카라한 왕조, 킵착 유목민 집단 등을 자신의 선조로 내세운 적이 없다. 티무르제국, 무굴제국, 우즈벡 칸국, 크림 칸국의 공식 역사서들과 카자흐 칸국의 구전 설화들은 공통적으로 칭기스 칸과 몽골인을 자국의 선조로 기술한다. 주치 울루스와 차가다이 울루스의 몽골 후예들은 몽골어는 잊었지만 몽골인의 정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41p
티무르제국의 지배층을 구성한 유목민 집단은 바블라스, 잘라이르, 술두스, 아를라트, 카라우나스 등과 같은 몽골계 부족민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차가다이인'이라고 불렀다. 즉, 티무르제국은 '차가다이 울루스' 그 자체였고, 그 지배층을 이룬 집단은 '차가아티 몽골인'들이었다. 따라서 티무르제국의 출현은 차가다이 울루스 내에서 권력의 중심이 칭기스 가문에서 몽골 바를라스 부 출신의 티무르 가문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몽골계' 국가가 '투르크계' 국가로 변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43p
여기서 간과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투르크 정체성이 돌궐 정체성과는 무관했다는 사실이다. 돌궐제국에 대한 기억은 몽골제국의 등장 이전 이미 내륙아시아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사실상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편 현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초원 지역, 즉킵착 초원의 몽골제국 후예들은 투크르 집단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애당초 투크르 집단명은 서돌궐계 부족들 사이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카자흐인과 크림 타타르인 같은 몽골제국의 후예들뿐 아니라 볼가강 유역의 여러 투르크계 언어 사용 집단들은 투르크 집단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54p
티무르는 정복지 대부분을 토착 세력을 통해 간접 통치했다. 방대한 전역을 적접 지배하기에는 차가다이인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정주 농경 지역이었던 서차가다이 울루스와 일 칸국의 옛 영역은 자신과 아들들이 직접 통치했다.
57p
투르크멘은 9세기 들어 아랄해 북안의 초원 지대에 등장한 오구즈 유목민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구즈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몽골제국의 등장 이전에는 셀주크제국을 세웠고 그 이후에는 오스만제국, 카라 코윤루, 악 코윤루, 사파비제국을 세웠다.
투르크멘 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황인종에 속했던 다른 투르크계 유목민들과는 달리 혼혈로 인해 이란계 정주민의 외모를 갖게 된 집단이었다. 투르크멘인이 기후 등의 조건 때문에 작은 눈과 코, 넓은 얼굴 등을 특징으로 하는 투르크인의 형질을 상실하고 타직인(이란계 정주민)의 외모를 갖게 된 집단이라고 기록한다.
몽골제국 후예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티무르제국의 일원들은 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동족으로 보지 않았을뿐더러 이들을 멸시하거나 적대시했다.
59p
몽골계 바를라스 부 출신의 티무르 일족은 칭기스 일족을 포함한 몽골 후예들과의 통혼을 통해서 몽골인 혈통을 이어나갔다. 이는 티무르제국을 몽골제국의 계승국가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이다.
67p
무굴제국 황제들이 몽골어를 사용했던 것도 아니고 3대 황제 악바르 이후로는 더 이상 중앙아시아인의 외모를 지녔던 것도 아닌데 무굴제국을 몽골제국의 계승국가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무굴제국의 건국자 바부르가 칭기스 칸과 티무르의 혈통을 이어받은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무굴제국의 건국 집단 및 핵심 지배층이 바부르와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당시 힌두스탄이라고 불린 인도로 이주해 온 '차가다이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란계와 인도계 모친을 둔 무굴 황제들은 중앙아시아인이 외모를 상실했지만 자신들이 몽골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75p
바부르가 말하는 '투르크인'은 현대적 의미의 '투르크인'이 아니었다. 바부르는 '투르크인'이라는 집단명을 티무르 제국의 일원으로 지칭하는 데만 사용했다. 다른 투르크어 사용 집단인 우즈벡인, 카자흐인, 오스만인, 키질바슈인(사파비 제국의 투크르멘인)은 '투르크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현대 터키인의 선조인 오스만 투르크인은 '룸Rum인', 즉 로마인(비잔틴인)이라고 불렀다. 한편 바부르는 칭기스 칸은 '모굴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바부르가 사용한 '모굴인' 명칭 역시 현대적 의미의 '몽골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바부르의 투르크인 정체성은 현대적 의미의 '투르크인' 정체성이 아닌 '티무르 일족 정체성'이었다.
몽골와 포스트 몽골 시기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인'은 '타직인/사르트인'이라 불린 이란계 정주민에 대비되는 내륙아시아 유목민을 의미했으며 몽골인이 투르크인의 주류라고 인식되었다. 즉, 나바이는 칭기스 칸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이주해 온 몽골제국의 건국집단을 자신의 선조로 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바이나바부르의 '투르크인' 정체성에 대해 논할 때 이들이 차가다이 울루스 이전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카라한 왕조나 셀주크제국의 투르크인이 아닌 '몽골인'을 자신의 선조로 여겼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94p
모굴인은 차가다이인이나 두 주치 울루스계 민족인 우즈벡인과 카자흐인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차가다이인의 몽골인 정체성은 몽골어가 아닌 몽골인 후예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동차가다이 울루스의 모굴인을 '몽골인'으로, 서차가다이 울루스의 차가다이인, 즉 티무르제국의 일원들을 '투르크인'으로 보는 일부 시각은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119p
일 칸국은 이외에도 이란이 시아파 이슬람 국가, 이란계, 투르크계 주민 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가 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시아파 이슬람은 울제이투 칸의 후원을 받았으며, 많은 수의 투르크어 사용 유목민이 몽골지배기에 이란으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근대 이란'을 일 칸국의 유산으로본다.
131p
맘룩 술탄국은 일 칸국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했는데 특히 키트부가가 이끄는 몽골 원정군을 격파한 1260년의 아인 잘루트 전투는 몽골 군대의 불패 신화를 깨고 몽골제국의 북아프리카 진출을 저지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승리였다. 따라서 맘룩 술탄국은 동시대인들에게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로 여겨졌던 국가이다. 그러나 맘룩 술탄국은 몽골 세계의 일부를 이룬 국가이기도 했다. 맘룩 술탄국 내에서 활약한 몽골계 맘룩들이 그 증거다.
143p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제국의 지배가 남긴 유산이었다. 몽골제국의 러시아 정복 이전의 모스크바는 외딴 시골 소도시에 불과했고 모스크바 공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스크바가 15세기 후반 러시아를 통일하게 될 신흥 국가로 발전하는 데에는 주치 울루스의 정치, 군사적 비호가 결정적인 역할을했다.
주치 울루스의 우즈벡 칸은 유리 3세를 자신의 누이 콘차카와 혼인시켰고, 유리의 후임 이반 1세에게는 러시아 전역에 대한 조세 징수권을 주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다른 공국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해 주치 울루스의 수도 사라이에 보내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부를 축적한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공국으로 성장했다. 주치 울루스는 아울러 러시아 내 반몽골 반란 진압 임무도 모스크바에 맡겼다. 그 결과 타 지역의 주민들이 계속해서 부유하고 안전한 모스크바의 영토로 몰려들었고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인구 증가와 국력 강화로이어졌다.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 관구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왔는데 이는 모스크바가 14세기 초중반 러시아의 중심부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