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여성의 기원 - 『열녀전列女傳』에 대한 여성학적 탐구
정재서 외 엮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흥미로운 제목과는 달리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 편집이 올드하고 철학적인 접근도 많아 약간 지루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주의, 이런 느낌이랄까?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천 같은 내가 원하는 실제적 접근은 적은 것 같아 아쉽다.

유교, 특히 정주이학이 사회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이 되면서 여성으로서의 구별이 강화되어 급기야는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이 작아지고 남성과 시가에 예속된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한 것 같다.

혼례를 치루고 시집으로 가던 중 가마의 휘장이 떨어지자 숙녀가 사람들 앞에 노출되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한 극단적인 예가 역사서 속에서 칭송받는 식이고 중국의 이런 사례는 그래도 한나라 같은 고대에나 있을 법한 일인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 억압이 강화되고 열녀로 칭송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전족이 유행하여 심리적인 것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주도적인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잔인한 전통인가.

여성, 특히 아름답고 요염한 여성은 권력자의 마음을 뺏는 악의 요소로 규정된다.

군자가 멀리 해야 할 악덕이 되버렸으니 긍정적인 여성상을 갖기가 매우 어려웠을 듯하다.

요즘처럼 자식을 안 낳아서 문제인 사회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고대의 여아살해 관습이 과연 성행했을 법한 사회 환경이다.

유교의 예라는 것이 남녀유별을 넘어 차별과 종속적인 인간상을 구현하게 되니 전제주의 전통사회에서는 적합했을지 모르겠으나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명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오류>

74p

심지어 어려서 죽어 재위 기간이 겨우 1년뿐이었던 인종이 죽었을 때도 2명의 여성이 자결을 했다고 한다.

-> 명나라의 인종, 즉 홍희제는 어려서 죽은 게 아니라 만 46세에 즉위해서 8개월 만에 사망했다.

206p

양기는 동한 말 사람이고 원가 시기는 항제(恒帝 147~167)의 재위 시기이니 역시 동한 말이다.

-> 재위 시기로 봤을 때 항제가 아니라 환제(桓帝)가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얼핏 보고 단순히 선비와 일본의 사무아리를 비교해서 쓴 뻔한 책인 줄 알았다.

읽어보니 전공한 학자의 논문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 내공이 상당하다.

재일교포 3세라는 저자의 약력이 인상적이다.

그만큼 객관적이길 기대하는 탓일까?

제목 그대로 조선의 선비, 즉 일본에 갔던 조선 통신사들이 무사들이 다스리는 일본 사회의 구조를 관찰하고 쓴 문집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일본이 어떻게 비춰졌는지에 관한 책이다.

조선으로서는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전쟁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일본이 재침할 것인지 여부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고,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와는 다른 토쿠가와 막부가 집권했기 때문에 과연 평화 정책을 유지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희화화 되는 것처럼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당파 싸움에 휩싸여 각기 다른 보고를 했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조선의 통신사들은 꽤 깊이 일본 사회를 분석하고 나름의 대책과 전망을 내놓았다.

저술 간행이 활발했었는지, 일본에 다녀온 적이 없는 이덕무, 정약용, 홍대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통신사들의 책을 읽고 일본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그들은 조선을 침략한 토요토미 정권과 토쿠카와는 전혀 다른 정권으로 인식하고 유학을 받아들여 동아시아 유교적 예교 체제에 맞춰 평화정책을 고수할 것으로 내다봤다.

즉 일본의 유교화가 얼만큼 진행되느냐가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전쟁과 평화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척도로 인식됐던 것이다.

맨 마지막에 나온 비판처럼, 당시 조선인들로서는 한중일 세 나라를 넘어서는 국제적 인식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막연히 일본이 중화문명체제에 편입되면 군자화 되어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서양 세력의 침입이 없는 전통사회였다면 우리 조상들이 바램대로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7세기는 서양의 대항해 시대가 이미 시작됐고 특히 일본은 앞장서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 선비들의 바램과는 달리 일본은 유교화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서구화 되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는 조선왕조의 멸망이다.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라는 책에서도 일본의 유학 열풍이 갖는 근대적 의미를 읽은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주자학을 추구하면서 화이론과 중화 문명을 떠받드는 조선 선비들과는 달리, 일본 유학자들, 특히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에 매몰된 조선인을 매섭게 비판했다.

이미 주자학은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더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었으니 조선의 좁은 시선이 안타깝다.

실학자들은 일본의 기술 발전에 놀라워하며 이용후생론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들 역시 재야의 지식인에 불과하고 정권을 잡은 집권층에게 전혀 의지가 없었던 탓에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집권 엘리트층의 국가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새삼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이집트의 역사 2 - 태고부터 페르시아의 정복까지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88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 지음, 김태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권은 470여 페이지라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술술 잘 읽힌다.

특히 대중에게 잘 알려진 18왕조의 투트모세 3세와 이크나톤, 투탕카멘, 19왕조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 등의 시리아 원정과 종교개혁 등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마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년 전의 이야기가 이렇게도 상세하게 전해진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렇게 위대하고 장구한 역사를 가진 파라오의 거대한 제국이 왜 무너지고 말았는지, 그 후 다시는 세계의 중심으로 일어서지 못했는지 이집트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안타깝다.

저자는 1권에서 이집트를 침범한 힉소스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카데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을 제압하면서 다시 일어선 이집트인들은 신왕국 때 남부로는 누비아, 북부로는 시리아를 정복하면서 제국으로 발전해 간다.

특히 투트모세 3세의 17차례에 걸친 원정은 과연 고대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만한 대단한 업적을 남긴 파라오였다.

그는 70대까지 오래 살기도 해서 계모이자 배우자였던 하트셉수트의 영향력 아래 머무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각지에서 바치는 공물과 관개 사업을 통한 농지 획득, 구리와 귀금속 채굴 등으로 왕조는 부유해지나 갈수록 아몬 신전의 사제들 힘이 커지면서 종교에 모든 자원을 쏟아 붓게 된다.

사막 한가운데 도열한 그 많은 신전들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 제국의 모든 자원을 쏟아 부을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종교가 흥기하면 몰락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크나톤의 종교개혁은 비대해진 아문 사제들의 세력을 누르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후기 왕조로 갈수록 더욱더 신전의 세력은 커져서 이들의 지지가 없으면 파라오의 권력 유지가 어려워졌다.

미이라 발굴로 유명해진 투탕카멘은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크나톤의 아들이고 이복 남매끼리 결혼했다.

내반족 등의 신체적 어려움 때문에 병약했을 거라는 추측과 달리 직접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 지휘했으나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역자가 성실하게 최근 성과들을 따로 역주로 소개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전 파라오인 스멘크카레는 이크나톤의 이복 형제로 생각된다.

영화에서 소재로 이용됐던 람세스 3세의 죽음은 놀랍게도 왕비와 그 아들에 의한 경동맥 자상 때문으로 밝혀졌다.

미이라가 남아 있으니 이런 정확한 사인 분석도 가능한 모양이다.

역자는 다른 책을 인용해 구약 성경의 요셉 전설과 출애굽, 모세 등이 모두 허구임을 주장한다.

나 역시 다른 책을 통해 구약성경의 이런 설화들이 바빌론 유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삽입된 후대의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라 이 부분은 다시 읽어봐야겠다.

역자가 전공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성실하게 역주를 달았다는 점이 놀랍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단지 파라오의 이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적인 구조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이집트에 대한 훌륭한 개론서라 하겠다.



<오류>

222p

투텐카톤은 곧 사라졌고, 아케타톤 궁궐의 또 다른 고위 인사인 에예가 뒤를 이었다. 에예는 이크나톤의 유모 티이와 결혼했다. 그는 아케타톤에 자신을 위해 무덤을 굴착해 만들었는데

(역주: 저자는 에예의 아내를 이크나톤의 유모로 추정했으나 현대 학자들은 그녀가 네페르티티의 유모였던 것으로 본다)

-> 내가 알고 있기로는 티이가 네페르티티의 어머니로 이크나톤의 장모인데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이집트의 역사 1 - 태고부터 페르시아의 정복까지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87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 지음, 김태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부터가 지루하고 어려워 보여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책.

읽으면서도 그만둘까 갈등했는데 역시 고전은 훌륭하다.

고대 이집트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구조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단순히 왕조와 파라오 이름 나열하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1920년대 나온 책이라 역자가 성실하게 주를 달아 그 사이 바뀐 부분들을 알려준다.

이렇게 꼼꼼하게 번역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무척 고맙다.

아울러 역주에 나온대로 최근에 나온 이집트 역사도 읽어봐야겠다.


이집트의 번영은 남북을 관통하는 기나긴 나일 강 주변에 지는 농업 생산력 덕택이다.

고대 문명이 큰 강을 끼고 번영한 것도 농사를 통해 인구를 부양하고 문명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나일 강은 규칙적으로 범람하고 그 때마다 땅에 풍부한 영양분을 제공했기 때문에 관개만 잘 조절하면 엄청난 생산력을 얻을 수 있었다.

고왕국 시대의 엄청난 피라미드는 이러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영토와 인민을 지배하는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밌는 것은 분열기로 가면서 이집트의 각 지방, 즉 노모스의 권력이 커져 이들이 세습영주화 되고 마치 중세의 수많은 제후국들처럼 이집트도 지방분권화 됐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처음 알았다.

노모스의 각 지사들을 세습영주로 생각해 백작으로 번역한 점이 인상적이다.

왕 혼자 거대한 나라를 통치하지 못하고 점차 귀족들에게 정치적 권한을 위임하여 연립정권 식으로 바뀌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집트의 학문은 그리스처럼 근원적인 것을 탐구하기 보다는 피라미드 건축과 같은 매우 실용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예술 역시 본질적인 미적 추구보다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진 실용성이 컸기 때문에 정해진 비율대로 생산했다.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는 확실히 다른 문화적 배경이었던 것 같다.

여러 신들이 각 지방에서 만들어졌고 권력 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섞였지만 점차 태양신 레를 중심으로 발전해 유일신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방신 아몬의 위상이 높아져 아몬-레로 발전하는 식이다.

오시리스의 사후 심판이 이집트인의 도덕관념, 즉 착하게 살아야 후세에 복을 받는다는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게 흥미롭다.

인류의 도덕도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점차 진보해 왔던 것이다.

저자는 피라미드를 확실한 분묘로 생각하는데 확립된 정설인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시대 양반가여성의 생애와 풍속
김미란 지음 / 평민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전에 읽었던 책 같은데 제목이 너무 흥미로워 또 빌렸다.

그 때는 좀 지루하다 느꼈었는데 다시 읽으니 생각할꺼리도 많고 재밌다.

양반가 여성들이 죽은 후 남자 형제나 아버지가 쓴 제문이나 묘비명을 통해 당시 사대부 여성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글이다.

의외로 여성들 역시 이름이 다 있었다고 한다.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특별히 남길 기회가 없었고 여성 개인의 삶 보다는 아내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족보에도 이름 대신 누구의 처로 기재되었을 뿐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려하다 보니 더욱 불릴 기회가 없고 신사임당처럼 호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다.

유아 사망률이 워낙 높은 때이고 평균 혼인 연령이 16세였기 때문에 자녀 출산이 아주 많았다.

그 아이들이 다 커서 어른이 됐으면 금방 인구가 넘쳐났을텐데 많이 태어난 만큼 많이 죽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로 유명한 남구만의 경우 형제가 열 셋이었는데 그 중 자신과 여동생 한 명만 살아 남았고 이 경우가 특별하지도 않다.

먹고 사는데 별 문제가 없었을 양반가에서도 이렇게 많이 죽었다는 게 참 안타깝다.

예방접종과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이니 돌 전에 많이 사망했을 것이다.

왜 돌잔치를 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여성들 역시 어린 나이에 출산하면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가문승계의식이 높을 때라 남성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재혼, 삼혼을 해야 했고 양반가의 여자들도 재취 자리로 가는 게 전혀 흠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분사회였던 만큼 노비들의 규모도 엄청났다.

생산성은 오직 토지에서 사람의 노동을 통해 얻던 시절이라 많은 인력을 거느려야 했다.

남자는 열심히 공부해 관직에 진출하고 여자는 노비들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재산을 증식했다.

왕자들은 노비의 규모가 만 단위였고 이름있는 신하들은 천 단위, 지방의 평범한 사대부도 50에서 100명은 거느렸다고 하니 과연 신분제 사회였다는 게 실감이 난다.

봉제사 접빈객이 매우 중요한 사교활동이었던 만큼 이것을 준비해야 하는 안주인의 노력도 대단했다.

기본적으로 조선 사회는 검약과 청렴을 중시하는 생산성이 낮은 사회였기 때문에 세도가라고 해서 요즘 생각처럼 재물이 넘쳐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식구를 이끌고 집안 경제를 책임졌을 양반가 여성들의 고된 삶이 느껴진다.



<오류>

17p

장이순: 장유의 딸, 효종비인 인선왕후의 어머니

-> 인선왕후의 어머니는 김상용의 딸이고, 장이순은 아마도 언니인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