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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평전 - 대동법을 완성한 조선 최고의 개혁가
이헌창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평점 :
오랜만에 별 4개 주는 책을 만났다.
저자가 경제학자이신 것 같은데, 경세치용을 추구한 김육이라는 대정치가의 일생과 사상을 한 권의 책으로 잘 풀어냈다.
아쉬운 점은 650 페이지에 달하는 너무 긴 내용이라 중언부언이 많아 조금 더 압축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마도 실록에 기록된 내용들을 가능하면 전부 실으려다 보니 이렇게 분량이 많아졌지 않았을까.
또 평전의 특성상 한 인물에 대해 너무 깊게 파고들다 보니 주인공의 업적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느낌도 있었다.
비단 이 평전 뿐 아니라 유홍준씨의 완당평전, 장거정, 표트르 대제, 박현모씨의 정치가 정조, 한명기씨의 최명길 등 근래 읽은 대부분의 책들이 그랬다.
이 책의 특장점은 단순히 인물의 일생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당대 조선의 현실, 특히 경제사적인 면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가장 좋았다.
조선 후기 공납의 전세화를 시도한 대동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시행과정은 왜 더디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지지와 반대를 했는지, 그 명분은 무엇인지 등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근대 유럽의 조세 법률주의가 왜 조선에서는 시행되지 못했는지, 동전의 유통은 왜 그렇게 더딜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읽은 <선비, 사무라이를 관찰하다>에서도 통신사들이 일본의 연공, 즉 세금이 무려 50%에 달할 정도로 매우 무겁지만 그 외 일체 잡세가 없어 오히려 농민들이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 또 그 부를 통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평가를 읽은 적이 있다.
대신 일본의 농민들은 병농이 완전히 분리되어 무사 계급에 의해 강력하게 규제되었고 소출의 절반을 풍흉에 관계없이 내다보니 하루 두 끼에 만족하고 그나마도 매우 적은 양을 먹고도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고 대식은 조선의 문제라는 비판도 있었다.
구한말 외국인이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많은 양의 밥을 먹는 걸 알 수 있다.
전근대 사회의 생산량이 워낙 낮아서 그렇지 조선 사회 자체는 다른 국가에 비해 세율이 높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라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세율은 10%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세종은 토지의 질에 따라 54등급으로 나눠서 더 낮은 세율을 적용했다
그런데 재밌는 게 농지에 부과하는 낮은 세율이 토지가 적은 백성들 보다 지주인 양반들에게 훨씬 이로웠다는 사실이다.
백성을 사랑한 세종은 재원 부족을 결국은 백성에게 공납의 형태로 부과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어딘가에서 재원이 나와야 국가를 운영하는데, 토지가 아니라면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은 결국 각 호마다 세금을 매기는 공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공납은 각 지역의 특산물, 즉 현물을 세금으로 직접 바치는 것인데, 각 고을마다 부과되어 수령이 각 호에 적당히 분배를 한다.
토지 결수에 따라 부과되는 전세에 비해 당연히 기준이 모호할 수밖에 없어 중간 수탈이 심했다.
권세가 있는 사족들은 빠져나가고 땅도 없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됐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 부과됐던 특산물이 더이상 생산이 안 되기도 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상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비용까지 모두 추가로 부과되어 부담이 갈수록 커졌다.
정부에서는 방납 상인을 통해 물건을 구매하고 이 방납업자에게 비용을 지불했는데 이들이 중간에서 남기는 마진도 문제가 됐다.
이 공납을 토지 결수당 쌀이나 무명, 동전으로 지불하자는 것이 바로 대동법이다.
전세처럼 토지 결수당 부과가 되니 재산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더 큰 혜택이 가고 지주층에 불리했기 때문에 전국에 시행되기 까지 100여 년이 시간이 걸렸다.
이 책에서는 김육의 대동법을 크게 평가하고 있지만, 다른 책을 보면 후대로 갈수록 다시 여러 잡세들이 추가되고 현물 요구도 늘어나 삼정의 문란을 초래해 민란이 나게 된다.
유럽처럼 세금 부과시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의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의적인 수취가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민간 경제라는 것이 없고 관의 힘이 너무 컸기 때문에 지방 수령들의 수탈이 심했다.
더군다나 실제 업무를 맡은 아전들은 급료 자체가 없어 중간 수탈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조선시대 경제 제도에 대한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던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다.
김육은 주자학자였지만 성리학적 정신만 가지면 되고 실제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자는 유연한 공리주의자였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반면 산당의 대표격인 송시열 등은 도덕으로써 예치국가를 만들자고 주장한 원리주의자였는데 불행히도 이들이 조선 후반기를 장악해 결국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망하고 만다.
자신들도 이룰 수 없는 도덕 명분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나라를 이끌어 가고자 했던 주자학 원리주의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걸 보면 정말 오래된 민족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오류>
457p
송시열, 민유정 및 민정중이 효종의 배향 공신에 오른 것은 노론의 힘이었다.
-> 민유정이 아니라 민유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