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기에 나타난 조선 중기 상속 문화와 가족제도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15
문숙자 외 지음 / 새물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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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디자인이 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산뜻하고 예쁘다.

25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고 내용도 이해하기 쉬워 금방 읽었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분재기라는 명백한 자료를 분석하여 쓴 글들이라 신뢰도가 높다.

책 내에서도 주장이 엇갈린다.

어떤 저자는 장자 우선 상속제가 19세기 초까지도 실제로 행해졌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일제 시대가 되면서 큰 아들에게 몰아주는 일본의 가부장적 관행이 20세기에 정착된 게 아닌가 의심한다.

사실 전통이란 것도 알고 보면 최근 100여 년의 관습인 경우가 많으니 그럴 듯 하기도 하다.

또 다른 저자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17세까지 아들딸 구분없이 균분상속이었다가 전란 후 종법제도가 강화되면서 딸은 타 가문으로 시집간 남이라 생각하고 외손봉사가 사라져 갔으며 그에 따라 유산에서도 배제됐다고 본다.

이 부분은 앞의 저자도 동의하는 바다.

유산을 주는 중요한 근거가 바로 제사를 지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균분상속과 윤회봉사는 같은 맥락인 것이다.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외손의 제사는 정성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 점차 아들들이 제사를 가져오게 됐고, 유산 역시 딸을 배제하고 아들들에게 균분상속 한다.

그러다가 다시 가문을 승계하는 장자를 우대하는 장남우선상속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대를 잇는다는 개념도 강화되어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세우게 된다.

국가에서 정해주는 법이 아니니 (경국대전에는 오히려 균분상속으로 정해져 있다) 일률적으로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역마다 가문마다 다양했을 것 같긴 하다.

대체적으로 17세기 후반부터 딸은 가문에서 배제되었고 남성 위주의 가문 승계의식이 강화된 것은 맞는 것 같다.

죽은 후에 나눠주는 상속 말고도 별급이라고 해서 부모가 살아 생전에 자녀들에게 각기 상속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는 상속이 아니면 재산을 따로 만들기 어려운 시대이다 보니, 오직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거의 유일한 재산 형성 방법이었을 것이다.

재산은 토지와 노비였다.

초기에는 노비 위주로 상속이 됐다가 19세기로 가면 아예 노비들은 상속 문서에 나오지도 않고 토지만 상속이 된다.

시대가 갈수록 인력 보다는 토지의 생산성이 중요시 됐던 것이다.

결혼할 때 떼어 주는 신노비가 있고 (이게 시집갈 때 따라가는 몸종 개념인가 보다) 그 후에도 득남했거나 급제했거나 혹은 병에서 회복되거나 반대로 사별로 생활이 곤궁해지면 부모는 그 기쁨과 애통함을 표현하기 위해 따로 재산을 떼어주는 별급을 시행했다.

자본주의 사회만 돈으로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이렇게 경제적인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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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지방 사회의 재건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8
장경남 외 지음 / 새물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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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문서들이 많이 발굴되면서 미시사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는 모양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나온 시리즈물이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재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필자가 여러 명이면 중구난방 느낌이 많은데, 이 시리즈는 주제가 명확해서인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책값이 요즘은 많이 오른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니까 책값에는 큰 신경을 안 썼는데 200 페이지 전후의 책이, 도판 한 장 없는데도 18000원이다.

많이 안 팔려서 비싸게 책정되나?

물론 책이 전달해 주는 지식에 비하면 비싸다고 불평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제목만 보고 전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런 실제적인 정책보다는, 자료가 고문서, 즉 지방 사족들의 일기이다 보니 당시를 살아낸 양반들의 실제 생활이 중심이다.

그래서 선명한 제목과는 달리 딱히 왜란 극복 과정이 나오지는 않는 것 같다.

중앙 관료로 활약한 정치가들이 아닌 만큼, 지방에서 사족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바로 교육, 즉 강학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서 전후에도 그만큼 위상이 올라가기도 한 듯 한데 구체적인 과정이 나온 것은 아니다.

유명한 의병장들도 있지만 사실은 학자들인데 얼마나 전투력에 도움이 됐을까 싶긴 하다.

마을 사람들의 힘을 한데 모아 저항한다는 의의 정도인가 싶다.

문과는 아니더라도 진사와 생원이 되는 사마시에라도 급제해야 양반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책 속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과거에 도전한다.

물론 학식으로 명망이 높은 유학자들은 처음부터 과거를 보지 않는 경우도 있긴 했다.

<모당일기>를 남긴 손처눌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무려 82세까지 장수했는데, 제자가 200여 명에 달하고 평생을 대구 지역에서 강학하면서 교육에 이바지한다.

이런 분들이 훗날 산림이 되나 싶다.

이 책 중에 재밌는 챕터는 광해군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었다.

보통 광해군이라고 하면, 대명의리를 주장하는 서인 세력에 의해 쫓겨난 비운의 외교 천재, 이런 이미지인데 저자는 아주 맹렬하게 광해군을 비난한다.

외교 정책에 관한 설명은 없고, 광해군 시대에 얼마나 심한 수탈이 있었는지에 포인트를 맞췄다.

영건도감을 만들어 거기에 들어가는 물품을 구하기 위해 전국에 조도관을 보내 백성들을 수탈하고, 실제로 목재 같은 현물이 올라오는데도 받지 않고 전부 방납업자들에게 받도록 해서 무려 10배의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런 수탈로 군 자체가 무너져 버린 사례들이 나온다.

얼마나 방납의 폐해가 컸으면 그렇게 긁어 모았는데도 반정 때까지 궁을 다 짓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왜 광해군은 궁궐 건립에 몰두했을까?

전후 복구에 힘쓰고 오히려 세금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어야 할텐데 말이다.

폐모살제 역시 극력한 대북 세력이 다른 당파를 조정에서 쓸어 버리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음을 지적한다.

민심이 떠난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덕일씨 책을 보면, 인조반정 당시 백성들이 이렇게 좋은 시대에 무슨 반정이 일어났나 어안이벙벙 했다는 표현이 실록에 나온다는데 과연 어떤 게 진실인가 싶다.


<오류>

152p

계운궁을 인헌황후로 추숭했다.

-> 인헌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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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평전 - 대동법을 완성한 조선 최고의 개혁가
이헌창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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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별 4개 주는 책을 만났다.

저자가 경제학자이신 것 같은데, 경세치용을 추구한 김육이라는 대정치가의 일생과 사상을 한 권의 책으로 잘 풀어냈다.

아쉬운 점은 650 페이지에 달하는 너무 긴 내용이라 중언부언이 많아 조금 더 압축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마도 실록에 기록된 내용들을 가능하면 전부 실으려다 보니 이렇게 분량이 많아졌지 않았을까.

또 평전의 특성상 한 인물에 대해 너무 깊게 파고들다 보니 주인공의 업적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느낌도 있었다.

비단 이 평전 뿐 아니라 유홍준씨의 완당평전, 장거정, 표트르 대제, 박현모씨의 정치가 정조, 한명기씨의 최명길 등 근래 읽은 대부분의 책들이 그랬다.

이 책의 특장점은 단순히 인물의 일생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당대 조선의 현실, 특히 경제사적인 면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가장 좋았다.

조선 후기 공납의 전세화를 시도한 대동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시행과정은 왜 더디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지지와 반대를 했는지, 그 명분은 무엇인지 등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근대 유럽의 조세 법률주의가 왜 조선에서는 시행되지 못했는지, 동전의 유통은 왜 그렇게 더딜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읽은 <선비, 사무라이를 관찰하다>에서도 통신사들이 일본의 연공, 즉 세금이 무려 50%에 달할 정도로 매우 무겁지만 그 외 일체 잡세가 없어 오히려 농민들이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 또 그 부를 통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평가를 읽은 적이 있다.

대신 일본의 농민들은 병농이 완전히 분리되어 무사 계급에 의해 강력하게 규제되었고 소출의 절반을 풍흉에 관계없이 내다보니 하루 두 끼에 만족하고 그나마도 매우 적은 양을 먹고도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고 대식은 조선의 문제라는 비판도 있었다.

구한말 외국인이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많은 양의 밥을 먹는 걸 알 수 있다.

전근대 사회의 생산량이 워낙 낮아서 그렇지 조선 사회 자체는 다른 국가에 비해 세율이 높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라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세율은 10%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세종은 토지의 질에 따라 54등급으로 나눠서 더 낮은 세율을 적용했다

그런데 재밌는 게 농지에 부과하는 낮은 세율이 토지가 적은 백성들 보다 지주인 양반들에게 훨씬 이로웠다는 사실이다.

백성을 사랑한 세종은 재원 부족을 결국은 백성에게 공납의 형태로 부과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어딘가에서 재원이 나와야 국가를 운영하는데, 토지가 아니라면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은 결국 각 호마다 세금을 매기는 공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공납은 각 지역의 특산물, 즉 현물을 세금으로 직접 바치는 것인데, 각 고을마다 부과되어 수령이 각 호에 적당히 분배를 한다.

토지 결수에 따라 부과되는 전세에 비해 당연히 기준이 모호할 수밖에 없어 중간 수탈이 심했다.

권세가 있는 사족들은 빠져나가고 땅도 없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됐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 부과됐던 특산물이 더이상 생산이 안 되기도 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상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비용까지 모두 추가로 부과되어 부담이 갈수록 커졌다.

정부에서는 방납 상인을 통해 물건을 구매하고 이 방납업자에게 비용을 지불했는데 이들이 중간에서 남기는 마진도 문제가 됐다.

이 공납을 토지 결수당 쌀이나 무명, 동전으로 지불하자는 것이 바로 대동법이다.

전세처럼 토지 결수당 부과가 되니 재산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더 큰 혜택이 가고 지주층에 불리했기 때문에 전국에 시행되기 까지 100여 년이 시간이 걸렸다.

이 책에서는 김육의 대동법을 크게 평가하고 있지만, 다른 책을 보면 후대로 갈수록 다시 여러 잡세들이 추가되고 현물 요구도 늘어나 삼정의 문란을 초래해 민란이 나게 된다.

유럽처럼 세금 부과시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의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의적인 수취가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민간 경제라는 것이 없고 관의 힘이 너무 컸기 때문에 지방 수령들의 수탈이 심했다.

더군다나 실제 업무를 맡은 아전들은 급료 자체가 없어 중간 수탈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조선시대 경제 제도에 대한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던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다.

김육은 주자학자였지만 성리학적 정신만 가지면 되고 실제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자는 유연한 공리주의자였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반면 산당의 대표격인 송시열 등은 도덕으로써 예치국가를 만들자고 주장한 원리주의자였는데 불행히도 이들이 조선 후반기를 장악해 결국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망하고 만다.

자신들도 이룰 수 없는 도덕 명분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나라를 이끌어 가고자 했던 주자학 원리주의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걸 보면 정말 오래된 민족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오류>

457p

송시열, 민유정 및 민정중이 효종의 배향 공신에 오른 것은 노론의 힘이었다.

-> 민유정이 아니라 민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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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뿌리 (구약) - 오리엔트 문명과 구약성서
민희식.이진우.이원일 지음 / 블루리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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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읽다가 역주에서 인용한 책이길래 관심을 갖고 읽게 됐다.

전공한 학자가 아니라 그런지 단정적이고 비아냥 거리는 문체가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현재까지 밝혀진 이스라엘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했기 때문에 믿음이 간다.

오래 전에 아주 인상깊게 읽었던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를 썼던 핑컬스타인이라는 학자가 등장해 더욱 신뢰가 생겼다.

아주 잘생긴 흑백 사진이라 깜짝 놀랬다.

나이 지긋한 노학자라고 상상했는데 열정적인 소장파 학자였던 모양이다.

간단히 말해 이스라엘 학자들은 성경의 역사를 단군 신화와 같은 개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국의 역사를 성경이라는 신화가 아닌, 실제 고고학적 증거로써 밝히고 싶어 한다.

한국의 단군 신화는 그저 오래된 전승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전세계적인 종교의 경전이다 보니 역사적 사실을 분리해 낸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은 아닐 것 같다.

서문을 보면 저자 역시 가톨릭 신자인 것 같은데 성서의 이야기를 단지 비유로만 해석하고도 신앙의 유지가 가능한가 궁금하다.

심지어 저자는 원죄는 아우구스투스 때 생겨난 개념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전 인류의 죄를 안고 간 예수의 십자가 속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태도가 문제이긴 하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어려운 문제 같다.

다른 책에서도 읽은 바지만, 성경은 수메르와 바빌론 전승, 심지어는 이집트 신화까기 합해져 바빌론 유수 당시를 배경으로 기원전 6세기 무렵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출애굽은 이집트 역사서에도 나오지 않을 뿐더러 고고학적 증거도 없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고, 바빌론 유수 당시 일부 있었을 탈출을 모티브로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길가메쉬 서사시를 노아의 홍수 원전으로 생각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들이 발굴된 시점이 19세기 후반이니 당시까지만 해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해 고대의 증거들을 보존해 주셨나 싶은 생각도 든다.

출애굽 때 홍해에 빠져 죽었다는 파라오 메르넵타의 미이라가 왕들의 미이라 보관소에서 떡 하니 등장하는 식으로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야훼는 정말 사막을 방황하는 유대 부족의 민족신에서 점차 보편적인 유일신으로 발전해 갔는가?

이집트 18왕조의 아크나톤의 유일신 사상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인간이라는 종의 단일성과 보편성을 염두에 둘 때 전 세계의 신화가 비슷하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성경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식의 문제 제기는 얼마 전에 읽은 이슬람 코란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책에 따르면 그래도 코란이 성경보다 더 합리적인 까닭은 구약의 불합리한 표현을 무함마드가 수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지 나중에 나왔기 때문이고 당연히 코란의 근원은 더 먼저 출간된 유대교의 경전 성경에 있다.

이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천사들에게 받아 적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왜 계몽주의 시대에 지성인들이 이신론을 주장했는지 요즘은 이해가 될 정도로 신앙과 역사의 문제가 혼란스럽다.


<오류>

106p

바빌론은 제1왕조 함무라비 (재위 BCE 1792~BCE 11750) 왕에 의해  정비되고

-> 기원전 1792년부터 1750년까지이다.

175p

서기전 13세기 이집트 제19왕조 세티 2세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 세티 2세가 아니라 세티 1세이다.

188p

제18왕조를 세운 아흐모세 1세(1550~1295 BCE)가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 아흐모세 1세는 기원전 1549년부터 1524년까지 재위했다.

320p

사울 (1050~1002 BCE) 다윗 (1200~1050 BCE)

-> 사울은 대략 기원전 1020~1000, 다윗은 1000~962년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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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역사
피터 에이 클레이턴 지음, 정영목 옮김 / 까치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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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일 줄 알았는데 300 페이지 밖에 안 된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먼저 읽은 후 읽어서 그런지 185명의 파라오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쉽게 머릿속에 들어온다.

이렇게 긴 역사를 이렇게 짧은 분량으로 압축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저자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는 아마도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했던 이력 탓인지 무덤과 미이라를 중심으로 파라오의 역사를 설명한다.

자칫 지루하고 난삽해질 수 있는 설명 방식인데 주제에 대한 압축력이 높고 번역도 매끄럽다.

일본인 학자가 쓴 책에서는 피라미드를 반드시 무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이 책에서는 당연히 파라오의 무덤으로 생각하고 실제로 석관도 발굴됐다고 한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 역시 이미 전실은 도굴되었고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것은 석관이 있는 현실이었다고 한다.

도굴꾼들의 침략은 참으로 집요하고 놀라워 비단 최근에만 도굴한 것이 아니고 이미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장례가 치뤄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도굴이 시작됐다고 한다.

오죽하면 사제들이 역대 왕의 미이라를 한데 모아 놓기까지 했을까.

도굴은 결국 화려한 보물을 얻기 위한 경제적 이득에서 비롯된 것이니 인간의 자본주의적 욕망은 본성임이 틀림없다.

무려 5000년 전에 살았던 지배자들의 이름과 재위 년도까지 정확히 기록되고 오늘날에도 그 계보를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이 책에서는 모세의 출애굽을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하고 아마도 람세스 2세의 치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때 많은 건축물들이 지어져 여러 이민족에 대한 인력 동원이 대대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출애굽을 단행한 이스라엘인들을 쫓다가 홍해에 빠져 죽은 파라오 메르넵타의 미이라가 발견되지 않아 성서의 역사적 증거로 언급됐으나 다행스럽게도 발굴됐다.

아무래도 출애굽은 설화라 생각되는 부분이다.

근친혼이 매우 성행했는데 이복남매들끼리의 혼인은 그렇다 쳐도 친아버지와 딸의 혼인은 참으로 놀랍다.

여성 파라오 대신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면 남편이 그 권리를 위임받는 식으로 새 왕조가 개창했다.

파라오는 꼭 친딸과 결혼해야 했을까?

고대인의 사고방식은 지금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 같다.

피라미드처럼 지상으로 높이 솟은 무덤도 놀랍지만, 지하 100m 이상 뚫고 들어간 묘지도 참으로 놀랍다.

세티 1세의 무덤이 그렇다.

오늘날 수백 미터의 높은 건물들도 다 이런 고대의 기술들이 바탕이 됐던 모양이다.

5천 년 전에 벌써 위대한 제국을 만들었던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언제 읽어도 흥미롭고 중국과 비교해 봤을 때, 오늘날의 몰락이 오히려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오류>

263p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38년에 페르시아에서 독살당했고, 그의 젊은 후계자 아르세스는 불과 2년 뒤에 다리우스 3세에게 살해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다.

->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르세스를 살해한 이는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이고, 유일하게 남은 아르키메데스 왕조의 후손인 아르세스의 외사촌 다리우스 3세가 바고아스를 죽인 후 등극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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