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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미술의 거울 프랑스
윤세홍 지음 / 청암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이번 여름 휴가 때 근 20년 만에 파리를 다시 가게 됐다.
가기 전에 많은 미술책들을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막상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려고 하니 방대한 양에 질려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온 것 같아 아쉽다.
여러 미술관이 다 좋았지만 특히 오르세 미술관에서 도판으로만 보던 인상파 작품들을 눈으로 봤을 때의 그 감동이란!
특히 마네의 그림은 크기도 대작이지만 너무나 선명한 색채감과 강렬한 평면성, 검은색의 사용 등으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마네가 인상주의의 선구자였는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정도였다.
가장 의문이 들었던 점이, 이렇게도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명작이 되고 어떤 그림은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느냐는 것이다.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는 유명한 작품들 외에도 좋은 그림들이 넘쳐났다.
명작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벨 에포크 시대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풍성함과 선구적인 자세는 탁월했던 것 같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프랑스 미술을 콕 집어 서술한 이 책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읽게 됐다.
표지나 제목은 읽고 싶은 마음이 1도 안 들게 생겼는데,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미술 500년을 잘 정리했고 이 작은 책에 도판도 비교적 많이 실렸으며, 인상주의 이후 현대 미술이 추구하는 바에 대한 철학을 잘 설명해 준다.
미술은 근대 이후 목적으로부터 해방되어 수단이 아닌, 예술 그 자체가 되었고 화가들은 장인에서 내면의 미적 욕구를 분출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선이 먼저인가 색이 먼저인가 하는 질문은 회화의 핵심은 형태가 아닌 색면 그 자체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분량이지만 알기 쉽게 미술 사조와 철학을 설명해 주는 유익한 책이다.
50p
<최후의 만찬>은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이 아닌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 그의 도전이 실패한 그림도 많다. 당대에 확립된 다 빈치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62p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별 가운데 태양'이라고 불렸던 티치아노는 평생에 걸쳐 초상화, 풍경화, 그리고 신화적, 종교적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640여 점 남겼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색채주의며, 그는 일생 동안 그런 특징을 유지했다. 기나긴 생애의 마지막 무렵 그는 극적인 양식과의 단절을 완수했고, 그것은 이미 바로크적 특성을 향해 있었다.
126p
로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회를 받았으나,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켜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 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적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30p
코로는 그때까지 형성된 풍경화의 고전적 기법에 새로운 개인적인 시정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밀레나 쿠르베와 같은 방법으로 농부나 노동을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밖에 있었다.
134p
1845년까지만 해도 평론가와 컬렉터들은 코로의 작품에 그리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평론가들, 특히 보들레르, 고티에, 상플뢰리 등이 자연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와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그림을 시처럼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보들레르는 "코로는 현대적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 시기에 쿠르베와 밀레는 주변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는데, 코로는 두 사람의 방법에 동조하지 않았다.
136p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쿠르베의 태도는 실증주의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에밀 졸라나 공쿠르 형제의 예술 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근대 정신의 발현이다.
140p
자연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과 서정적인 정취가 바르비종파 그림의 특색이었다.
141p
빛과 형태를 유희적으로 분석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이성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순수 상태에서 얻어진 시각의 느낌만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인상주의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 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대상을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 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이들은 빛의 변화에 따라 전혀 양상을 달리하는 풍경과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미묘한 뉘앙스를 표현하는 데에서 쾌감을 누렸다.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상주의가 미술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 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겨 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 미술의 최종 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가정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46p
그들은 이른바 '외광파'로서 언제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자연계의 모든 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 고유의 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 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으로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 부분에도 명도가 낮은 색채인 파랑과 보라를 사용하였다.
빛의 광휘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색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색, 특히 보색 관계에 있는 색들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 위에서 융합되고, 게다가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한 색감을 보여 준다.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이 색채 원리를 더욱 철저화한 데서 출발하였다.
(왜 인상주의 그림들이 관람자의 마음을 확 사로잡는지 이해가 된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본질이었던 것이다)
147p
쇠라의 경우 인상파가 경시한 화면 구성이나 형체의 질서를 다시 정밀하게 확보한 것은 신인상주의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152p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였지만 시력이 나빠서 주로 실내의 정경을 그린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신고전주의 대가인 앵그르에게서도 그림을 배웠는데, 앵그르는 그에게 "선에 충실하도록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 조언을 충실히 따른 드가는 소묘에 매우 뛰어났으며, 산업화되어 가는 근대 사회의 모습을 화려한 색채로 그렸다. 드가는 발레리나의 얼굴은 대충 그리는 대신 몸의 균형이나 독특하게 뒤틀린 자세 등을 섬세하게 나타냈다.
156p
쿠르베는 "회화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사물의 재현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추상적 대상은 회화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주의 미학을 펼쳤는데, 이러한 회화 이념에 대한 반발로 상징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징주의 미술은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고 비합리성을 추구함으로써 일상적인 이미지의 왜곡과 비사실적인 우화 세계 및 주제의 기묘한 병치를 일으켰으며, 이는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개념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현실적 주제보다는 신화적이고 신비한 주제를 도입하여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어떤 감정이나 사고에 상응하는 조형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해설이나 설명 없이 감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미술에 대한 추구가 상징주의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했음을 말해 준다.
159p
나비파는 색채 분석에 의존하여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파의 작품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만큼, 화면을 하나의 창조라고 생각하고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여 자신의 사색을 전개하는 고갱의 작품 경향을 새로운 계시로 받아들였다. 평면적인 병렬이나 장식적인 구성을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리는 형태나 색채는 작가의 해석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화풍과 이론으로부터 결별하고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기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작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보였다.
'종합'은 인상주의의 색채 분할과 그 기법의 해체적, 분석적인 경향에 반대하는 개념으로서의 종합을 의미한다. 고갱은 자연에서 광선과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데 전념한 인상주의 방식이 지극히 피상적이며, 사상이나 지적 사고를 소홀히 여긴다는 한계를 자각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인상주의 기법이 대상을 오히려 해체시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하였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주체성에 기반을 둔 형태와 색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주관과 객관의 종합을 목표로 하였다.
회화 기법에 있어서는 명암이나 입체감의 표현이 없는 순수한 색면과 선을 토대로 구성 요소들을 거의 이차원적으로 배열한 새로운 장식적인 회화 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이차원의 평면을 강조하는 종합주의의 기법은 주제의 느낌이나 기본 개념을 색면과 선이라는 형식에 종합시키고자 했다.
반면 에두아르 뷔야르와 피에르 보나르는 색채를 정성스레 다음어서 신변 제재를 정감있게 묘사하는 앵티미즘으로 나아갔다. '앵티미즘'이란 '친밀한'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intime 에서 파생된 말로, 서양 근대 회화의 한 경향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일상적인 신변의 광경과 가정 내의 정경, 모자상 등을 제재로 삼는 가정적인 친밀감이 넘치는 회화를 말한다.
168p
야수파는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며 인상파 이후의 새로운 시각과 기법을 추진하기 위해 순색을 구사하고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의 원색을 굵은 필촉을 사용하여 병렬적으로 화면에 펼쳐 대단한 개성의 해방을 시도하였다. 새로운 색의 결합에 대한 기본적인 의도 때문에 이를테면 공기나 수목에 붉은색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색채 체계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명암이나 양감도 파기하였다. 격렬한 정신의 표현과 강렬한 색채는 고흐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그림이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색과 형태에 의한 하나의 조형 질서임을 확인시킨 점에서는 고갱과 나피파의 회화관에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색채의 고양에 기초를 둔 야수파 운동은 결국 외계의 질서를 그대로 화면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폭을 자아 해방의 장소로 생각한 점, 그리고 색과 형태의 자율적인 세계를 창조하려 한 점 등에서 20세기 최초의 예술 혁명이었다.
(내가 인상파나 고흐, 마티스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강렬한 색채감 때문이다. 특히 마티스의 그림을 보면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존 회화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 든다. 형태는 마치 색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 같다)
171p
마티스 역시 세잔의 누드화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세잔에 심취해 있었고, 피카소는 당시 미술계에서 가장 진보적으로 평가되면서도 화상들의 후원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마티스를 꽤나 의식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피카소는 더더욱 마티스를 능가하는 보다 혁신적인 누드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피카소로서는 야수파 화가들이 영감을 얻은 아프리카의 조각과 가면들을 보다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173p
브라크는 무엇보다 대상에 뒤지지 않는 공간을 탐구하고 이른바 '물질화'하고자 했다. 피카소의 관심이 아직까지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면, 브라크는 대상과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새롭게 구축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178p
1905년경부터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이래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 버리려 했던 미술 운동을 표현주의라 부른다. 표현주의 화가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회화의 선, 형태, 색채 등은 표현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구성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무시했으며, 형태, 색, 구도의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19세기말 이전에는 감성적인 메시지의 명료한 전달을 위해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구성의 조화가 종속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규범의 완전한 파괴는 없었다. 뭉크는 불안, 공포, 애정, 증오와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한 화가로서 표현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p
슈비터스에게 메르츠는 '시각으로 확장될 수 있는 모든 예술 형태'를 의미했으며, 이것은 쓰레기임에도 불구하고 조형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우연한 만남과 의외성, 미술적 생명력을 지닌 메르츠는 산업적 詩情 을 감지하게 되며 또한 추상적 차원으로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