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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모델 - 화가의 붓끝에서 영원을 얻은 모델 이야기 명화 속 이야기 5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주헌은 참 글을 잘 쓴다
그가 소개하는 서양 미술사를 읽고 있자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명화를 소개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는 가히 최고의 작가라 할 만 하다
단순히 그림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느낀 점을 독자에게 자연스레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 읽은 그림책 중 이 사람의 책이 가장 편하고 정겹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그림 감상서에 머물지 않고 핵심이 되는 지식과 감상 포인트도 빼놓지 않고 독자에게 자상하게 알려 준다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를 읽을 때도 참 편하고 따뜻했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는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좋은 글 때문에 책 읽는 기쁨이 두 배가 된다

서양화는 인물화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화가와 모델 사이는 감정적으로 꽤 밀착되어 있었다
이해가 간다
특히 자기 마음에 딱 드는 이미지의 모델이 나타나면 그를 상대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고 싶을 것이다
한 두 시간 만에 뚝딱 해치우는 게 아니고 몇 개월씩 작업을 해야 하므로 모델과 화가 사이에 인간적인 정리가 쌓이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 같다
그래서 모델과 결혼하는 화가도 많고, 정부가 되는 경우는 훨씬 많았다

이 책에서는 25명의 모델들이 소개되는데, 가장 바람직한 케이스는 17세기 회화의 대가인 루벤스인 것 같다
"명화의 비밀" 을 보면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 인물의 형상을 캔버스에 투영시킨 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기법이 유행했는데 (우리가 감탄하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림들이 바로 이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루벤스는 이런 기구를 전혀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드로잉 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루벤스의 위대함 중 하나가 바로 이 놀라운 드로잉 솜씨라는 것이다
루벤스는 성격도 좋고 화술에도 능해 유럽 왕실을 돌아 다니며 외교 사절 역할도 했다고 한다
일단 왕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멋진 그림들을 그려 분위기를 화기애애 하게 만든 후 외교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이다
예술가라면 이런 정치 문제나 일상 생활에 완전히 꽝일 것 같은데, 루벤스라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리지만 생활인으로서도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멋지고 유능한 화가는 아내에 대한 사랑도 대단해 아내들을 상대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첫 아내와 의가 매우 좋았지만 일찍 죽는다
34세 때 그는 16세의 둘째 아내와 결혼한다
얼핏 생각하면 도둑놈 같지만, 당시 루벤스는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은 세력가였다
반면 두 번째 아내는 제분업자의 딸로 하층민이었다
주위에서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귀족 출신의 아내를 맞으라고 했지만 루벤스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해 주고 모델 일을 통해 작업에 함께 참여해 줄 현숙하고 자상한 아내를 원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재벌 2세가 가난한 집 여자와 결혼한 셈이다
또 당시 유럽에서 16세는 전혀 어리지 않은, 결혼 적령기였다고 하니 오히려 돈 대신 사람을 택한 루벤스의 인간성에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는 첫 아내와 두 번째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두 아내를 미의 여신으로 함께 등장시키는 그림도 그렸으니 아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이렇게 바람직하고 훌륭한 결혼 생활을 한 사람은 이 책에서 루벤스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루벤스나 렘브란트 등은 자신의 그림 실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한 경우다
그림이 신분 상승의 방법이 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흔히 예술가라고 하면 고흐처럼 세상과 단절돼 자기만의 세계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리는데, 가만히 보면 고흐나 모딜리아니 등 일부 화가에 불과한 것 같다
피카소 같은 경우는 그림을 통해 가난뱅이에서 억만장자가 됐을 정도니, 그림도 하나의 권력이고 자본이 될 수도 있나 보다
예술이 제도권 속에 갇히면 그 생명력을 잃을 위험도 있지만, 그만큼 사회가 예술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바람직하고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피카소는 억만장자가 됐어도 92세에 죽을 때까지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바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일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돈, 권력 유무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는 아내가 유력 집안의 딸인데 죽기 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경우 자기 재산을 상속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덕분에 렘브란트는 아내가 죽은 뒤 평생 동거만 했다고 하니, 좀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동거녀는 사회적 지위도 얻을 수 없고 법적 권리도 없던 당시 풍조를 생각해 보면, 렘브란트 보다는 함께 산 여자들이 더 불쌍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재혼할 경우 자기 아들에게 돌아 갈 재산이 줄어들까 봐 염려하여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대단히 사치스러웠던 렘브란트는 죽기 전 알거지가 됐다고 하니, 재산을 지키려던 아내의 노력도 다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화가들은 대체로 결혼을 속박이라 생각하고 동거를 선호했다
결혼을 했다 할지라도 정부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정부들은 모델을 서다가 감정이 발전되곤 했다
피카소 같은 경우는 정식으로 오래 관계를 맺은 여자만 해서 7명이나 되지만 (92세까지 장수한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정식 결혼은 딱 두 번 뿐이었다
확실히 예술가들은 결혼을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라파엘로는 한 여자와 12년을 살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마르게리타라는 이 여자는 라파엘로의 그림에 성모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림 속에서 그녀는 라파엘로라는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차고 있기도 하다
꽤나 사랑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끝까지 결혼은 거부했는지 모르겠다
라파엘로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마르게리타를 위해 많은 돈을 남겨 준다
단순한 정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의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로 쓰일 만큼 비극적이고 애절하다
목이 긴 여인으로 대표되는 모딜리아니는 마약 중독자에 가난하며 무절제한 남자였다고 한다
피카소 같은 경우는 세탁선이라 이름붙은 가난한 집에서 이 친구들과 어울렸으나 곧 성공해서 이 곳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가난한 지역에서 못 벗어나고 술과 마약에 절어 살았다
이 때 나타난 구원의 여신이 열 네 살 어린 잔이었다
그녀 역시 미술학도였는데, 19세 때 33세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잔의 아버지는 백화점 간부로 둘의 결혼을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착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잔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지도 못하고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열렬한 사랑은 3년 후 뇌막염으로 모딜리아니가 사망하면서 이튿날 임신 8개월의 잔이 투신 자살 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조선 시대에 가문과 정절 이데올로기 때문에 자살을 강요당한 가엾은 미망인들의 죽음과는 또다른 비극성이 느껴진다
임신 8개월이면 출산도 얼마 안 남았으니 모성애 때문에라도 악착같이 살 것 같은데, 대체 모딜리아니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따라 죽었을까?
그녀가 그린 자화상을 보면 대단히 현대적이고 시원시원한 공간배치가 돋보인다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풍부하고 실력도 뛰어났으며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을 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대체 얼마나 깊이 사랑했으면 남편이 죽자마자 출산을 앞둔 몸으로 죽음을 택했을지 쉽게 상상이 안 간다
그저 안타깝고 슬플 따름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그림을 정리하고 화가로서 제 2의 삶을 살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정말 마음이 아프다

화가들이 뽑은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에 등장하는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시녀들" 이라는 그림은 복잡한 배치도 때문에 더욱 유명한데, 펠리페 4세의 큰 신임을 받은 벨라스케스는 두 번째 왕비가 낳은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근친혼을 통해 혈통을 유지시켰기 때문에 (두 왕실은 뿌리가 같다) 마르가리타는 태어나자마자 약혼자가 정해졌다
당시에는 전화도 없고 비디오도 없으니 해마다 초상화를 그려 미래의 시댁에 인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왕실 화가가 된 후 자기 직업과 위치를 너무 사랑했으며 펠리페 4세와의 관계도 대단히 끈끈해서 친구 같았다고 하니, 어린 공주에 대한 애정도 컸으리라
저자는 마치 삼촌이 조카를 그리듯, 마르카리타의 초상화에는 화가의 따뜻한 시선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어린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과 앙증맞음, 그러면서도 공주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어색한 딱딱함 등이 잘 녹아난 듯 하다
이 귀여운 공주님은 겨우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아이를 그린 가장 멋진 그림을 꼽자면 영국 화가 밀레이가 그린 어린 딸 에피를 꼽고 싶다
아버지가 딸을 그려서일까?
다른 초상화에서는 느끼기 힘든 왠지 모를 친근감과 따뜻한 시선이 배어 있다
다섯 살 때 처음으로 교회에 가 설교를 듣는 모습은 어찌나 앙증스러운지 깨물어 주고 싶다
빨간 망토와 성장을 차려 입고 교회 의자에 앉아 나름대로 얌전을 빼는 이 귀여운 꼬마애는, 결국 아버지가 다음 해에 그린 설교 모습에서는 잠이 들고 만다
첫 설교 때는 나름대로 품위를 지키려고 안 졸려고 애를 썼지만, 두 번째 설교부터는 도저히 잠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목도 "나의 첫 설교" 와 "나의 두 번째 설교" 로 그림의 주제를 잘 표현한다
밀레이는 이 그림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심지어 런던의 대주교는 왜 설교가 길고 지루해서는 안 되는지를 이 그림이 잘 보여 준다는 논평까지 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알 만 하다

화가들은 대체적으로 성욕이 강했던 것 같다
성욕이야 인간의 본능이니 없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만, 화가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놀라운 사람들이다
피카소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 등장하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결혼 관계 외에도 많은 정부들을 뒀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실레는 좀 독특하다
보통 누드를 그리면서 모델과 깊은 관계가 되기 마련인데, 실레는 어린 여동생을 누드 모델로 썼다
그는 워낙 어린 소녀의 누드를 좋아해서 미성년자 보호법에 걸려 실형을 살기도 했을 정도다
사춘기 시절부터 누드 그리기를 좋아한 이 화가는 어린 나이에 모델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여동생 게르티의 끼가 훌륭해서 그랬는지 여동생의 누드를 많이 그렸다
단순히 벗겨 놓은 것도 아니고 기묘한 포즈를 많이 취하게 해서 근친상간을 한다는 비난을 들었고 일부 평론가들은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한다
겨우 스물 여덟의 나이로 사망한 실레는 직접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 꽤나 예민하고 날카롭게 생겼다
그래서인지 누드화도 인물의 형태와 감정을 순식간에 잡아내는 식으로 (어찌보면 커리캐쳐처럼) 날카롭게 그렸다
오빠 앞에서 옷을 벗고 모델을 서는 여동생이라...
요즘도 오해의 소지가 많이 생길 일이다

책에 등장하는 케이스 하나하나가 너무 재밌고 흥미진진 하다
저자의 서문에 밝힌 바대로 예술의 경지를 넘어 인간 삶의 희노애락과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나 더욱 감동적이고 흥미롭지 않나 싶다
그림 속의 인물들이 단순히 화가의 재능을 드러내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생생한 인물로 살아서 다가오는 느낌이다
저자의 소망대로 모델들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져서 위대한 예술가와 함께 고민을 나누던 그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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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1-1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주헌씨 프랑스 미술 여행기 밖에 못 읽었지만, 참 좋았어요. 이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기획은 평범한데, 이주헌씨의 글이라면야.

marine 2005-01-14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에 "프랑스 미술 여행기" 아빠에게 선물로 받았어요 읽고 리뷰 올려야겠다^^ 이 책도 읽어 보세요 참,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도 정말 재밌답니다 하이드님의 여행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비로그인 2005-07-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 에뷔테른을 판박이처럼 똑같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더랬습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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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겉멋이 없다고 해야 할까? 노란색의 따뜻한 표지만큼이나 잔잔하고 질박한 감상이 마음에 든다 서양 명화들을 감각적으로, 시대사적으로, 혹은 학술적으로 유려하게 설명한 책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투박하지만 진정성이 숨어 있는 듯한 이런 서술 형식도 새롭게 다가온다

정치범으로 20여년의 세월 동안 한국의 감옥에 갇힌 두 형들에 얽힌 슬픈 가족사가 간간히 여행기 안에 녹아 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감옥에 갇혀서 책으로만 명화를 접하는 형을 대신해 직접 눈으로 보고 감상문을 쓰는 저자의 안타까운, 그렇지만 지나친 감상주의로 흐르지 않고 일견 산뜻한 면도 있는, 읽기 편한 문체다 서양 명화의 소개라기 보다는 그림을 통한 사색이 주를 이룬다 최영미나 한젬마의 그림 읽기 보다는 훨씬 수준있다

문득 저자처럼 두어 달 씩 미술관 순례를 해도 괜찮은 직업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소망이 생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를 줄인다 할지라도 몇 달씩의 휴가를 낼 처지가 못 돼는 나같은 평범한 소시민들은 남의 기행기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할 수 밖에. 안타깝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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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2-3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두요. 전 요즘 회사 때려치고 빠리에서 어케 먹고 살 방법 없나 궁리중이에요.

-_-a 이 책 딸기님이 추천해주셔서 샀는데, 찾아봐야겠어요.

marine 2005-01-0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불어는 절대 못 하니까 아쉬운 대로 런던 같은데 살면 좋겠어요 책은 200페이지 밖에 안 되서 읽기 편할 거예요 덜 유명한 그림도 가끔 나와서 새로워요 하이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거꾸로 서 있는 미술관 - 박정욱의 현대미술 산책
박정욱 지음 / 예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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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대 미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작품을 보면 스스로 느끼는 대신 전문가의 복잡다단한 해석을 듣고서야 거기에 짜맞춰 이해하려고 애쓴다
반면 르네상스 그림들은 참 편하다
그림 안에 숨겨진 신화 얘기나 상징 등을 모른다 할지라도 그림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다
적어도 인상파 화가의 그림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피카소를 거쳐 다다이즘 등에 이르면 비평가의 평론이 없으면 저것도 예술이냐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저 정도면 애들도 한다는 볼멘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배낭 여행 때, 이 책의 저자가 현대 미술의 대표적 전시장이라고 소개하는 퐁피두 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도 책에서 퐁피두 센터가 현대 예술의 메카라는 설명만 듣고 갔는데 그 안의 작품들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헌 옷을 한 방 가득히 걸어 놓은 곳도 있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수 십대의 TV를 상영하는 곳도 있었다
지금이야 뒤샹의 변기를 패러디 한 거라고 이해를 하지만, 당시로서는 화장실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조형들도 도대체 공감할 수가 없었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오르셰 등에서 느낀 감동을 도무지 얻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현대 미술에 대해 책도 읽고 관심도 가지려고 애쓰지만 지금도 현대 미술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어려운 장르다

저자는 현대 미술의 속성을 파괴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과거의 미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현대 미술은 반대로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평범한 관람객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위로한다
저자는 인간에게 파괴의 본능이 있음을 지적하고 현대 미술은 사도마조히즘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일견 일리있는 지적이다
인류 역사를 피로 물들인 수많은 전쟁들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확실히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파괴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계속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파괴는 또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사전 작업인지도 모른다
비록 파괴에 따른 고통과 끔찍함이 뒤따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새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댓가로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현대 예술의 껄끄러움과 난해함, 부담스러움은 우리에게 또다른 예술 세계를 열어 주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긴 인상파 그림만 하더라도 19세기 파리에서는 감상할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쓰레기로 취급받지 않았던가
예술가들은 시대를 앞서는 감각을 가진 게 틀림없다
평범한 관람객이 현대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예술이란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기존 관념을 먼저 깨뜨려야 하고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작품 중 비트킨의 "키스" 라는 사진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 까닭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찍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가지 조작과 합성을 통해 또다른 현실을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의 정신 세계를 구현해 낼 수 있는 도구로써 기능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참화 중에 피어나는 들꽃 한 송이나 구걸을 하는 가운데도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 등 현실에서 포착해 내는 감명 깊은 장면도 많지만, 비트킨처럼 한 사람의 얼굴을 좌우로 합성해 자기 자신과 키스하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도 독특한 느낌을 준다
저자는 이 사진을 두고 죽음과의 키스라고 설명했지만, 나는 도무지 죽음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과 사랑을 나누는 나르시시즘으로 읽혔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도 현대 예술의 또다른 묘미일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 팝아트의 기수라고 한다
"명화의 비밀" 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게 됐는데 막상 그의 그림을 보니 지극히 현대적이고 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호크니를 두고 예술도 하고 돈도 벌겠다는 야심을 밝힌 최초의 세대라고 지적했다
팝 아트란 말 그대로 대중적인 예술이다
텔레비젼이 일반화 되기 이전 대중들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 예술을 찾았고 화가들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재기발랄한 그림들을 공급했다
저자는 1960년대 팝 아트를 일종의 광고들로 본다
그래서인지 팝 아트는 이해하기 쉽다
적어도 눈에 확 들어오고 깔끔한 포스터처럼 느껴진다
이 책에는 호크니가 그린 수영장 그림이 나온다
시원한 수영장을 널찌기 배경으로 잡은 후 다이빙한 직후의 모습을 잡았는데 다이빙한 사람은 안 보이고 그 위로 솟아오르는 물거품만 그렸다
재치있고 산뜻한 구성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팝 아트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은 자기가 먹어 치운 수백개의 캠프벨 수프 깡통을 그렸다
그는 마치 광고처럼 수많은 모나리자 그림을 합성하기도 했다
같은 모양의 깡통이나 모나리자 그림들이 쭉 배열된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꼭 포장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앤디 워홀의 깡통 그림에서 자본의 거대한 힘을 읽어낸다
정말 워홀이 똑같은 제품을 찍어 내는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고발하려고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어쨌든 워홀의 그림은 만화처럼 재밌는 구석이 있어 마음에 든다

저자가 소개하는 프랑스의 건축물들을 들여다 보면 이제 건축도 단순히 실용적 기능을 위해서 짓기 보다는 하나의 예술로써 건축가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임을 느끼게 된다
미관상 보기 좋고 편리한 기능 대신 독창적이고 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건축가의 정신을 구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파리 공원에 있는 라빌레트라는 다리는 데리다의 해체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의미까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건축물도 예술로 볼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을 얻은 느낌이다
또 저자는 earth art를 설명한다
대지예술, 즉 땅을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조경도 하나의 예술이 되어 감상할 여지가 생긴다
단순히 아름답다, 이렇게 미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통해 또 하나의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현대 미술이란 상상력의 확대라는 생각을 했다
정교한 기술로 사물과 똑같이 모사하는 그림은 이미 수백년 동안 그려왔다
사진기가 발명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똑같이 그리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 되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보다 자유로운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이런 그림이라면 애들도 그리겠다는 말은, 어쩌면 기존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유머 감각이 창의력과 연관된다는 말뜻을 확인한다
아직 현대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참 멀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자유로운 발상과 상상력의 세계를 훔쳐 보는 것은 즐겁다
다른 눈으로 접근하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뜻밖의 해결책과 만나게 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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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클래식
박준용 지음 / 마고북스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에 끌려 책을 신청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 600페이지에 이르는 만만찮은 두께를 자랑한다
일단 분량에 질려 며칠 동안 떠들어 보지도 않고 책상에 고이 모셔 놨다가 반납일에 닥쳐 할 수 없이 첫 장을 펼쳤다
생각보다는 술술 읽어졌다
음악이나 미술을 소개하는 책들이 다 그렇듯,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해석보다는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하는데 치중해서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에 수많은 음악가와 연주 단체들을 소개하는지라 완독하려면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이 책의 미덕을 들자면 바흐와 헨델로 시작하는 바로크 음악부터 20세기 현대 음악까지 서양 음악의 전 역사를 훑고 있고, 서양음악의 탄생지인 유럽부터 미국,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의 공연 현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려 준다는 데 있다
즉 이 책 한 권이면 어디 가서 아는 체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과 공연 소개에 열심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 단점이 되기도 한다
덜 알려진 작품이나 오케스트라 등을 소개하는 건 좋은데 저자의 욕심이 워낙 크다 보니,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수십장에 걸쳐 나오면 곧 흥미를 잃게 된다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곧 지루해질 것 같고, 오히려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 특히 각국의 교향악단이나 협주단 등에 관심있는 사람이 읽으면 훨씬 재밌을 것 같다
불행히도 나는 완전 초보자이기 때문에 꽤 많은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서양 음악의 역사를 서술하고 2부에서는 각국의 음악 공연 단체들을 소개한다
바흐와 헨델을 비롯해 모짜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등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지라 재밌게 읽었지만,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 같은 현대 음악가들은 아무래도 흥미도가 떨어졌고, 2부에 등장하는 수많은 연주단체들을 읽을 때는 솔직히 지루했다
일단 각 단체들의 연주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들은 클래식은 음반을 통한 것이 고작이라) 모두 다 비슷하게만 느껴졌다
집에 있는 클래식 음반들은 누구 작품인지 구별하기도 벅차기 때문에 누가 연주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다만 카라얀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그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 하모닉 얘기가 나올 때는 반가웠다
아빠가 객석을 몇 년간 정기구독 한 적이 있어서 지휘자와 연주자들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주빈 메타, 번스타인, 제임스 골웨이 등등 한 번쯤은 읽어 본 적 있는 사람들이 쭉 나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독서도 마찬가지지만 음악 역시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관심을 갖고 함께 듣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가수 신화가 히트친 노래 중에 내가 무척 즐겨 듣는 멜로디가 있었다
귀에 꽂히는 게 무척 인상적이고 대중 가요답지 않게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가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에서 따온 리듬이라고 한다
클래식이라면 지루하고 따분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부터 클래식도 관심만 가지면 대중 가요처럼 쉽게 들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 언젠가 라디오에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피아노곡이 흘러 나와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었는데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라는 걸 알았다
얼마 전에는 비발디의 사계를 전곡 다 들었는데 흔히 알고 있는 부분 말고도 주옥 같이 아름다운 선율이 많은 걸 알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왜 비발디의 사계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곡인지 알게 됐다
결국 어렵다는 선입견이 클래식에 대한 접근을 막는 것이다

지금은 "클래식 100선"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파는 음반들을 듣고 있는데, 귀가 좀 트이면 누가 연주했는지에 관심을 갖고 찾아서 듣고 싶다
클래식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관심을 유발시키는 좋은 방법 같다
특히 줄거리가 있는 오페라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관련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책도 책이지만 직접 공연장 가서 듣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지방에 있기 때문에 유명 공연을 들을 기회가 적지만 꼭 유명한 단체가 아니라 해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의외로 많은 연주들이 공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책에도 무명 연주자나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데 결국 음악이란 생활의 작은 기쁨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영화 보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공연을 접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오늘부터는 지방 신문을 들고 문화면을 열심히 살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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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의 오페라
밀턴 브레너 지음, 김대웅 옮김 / 아침이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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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훨씬 재미없고 지루하다
가끔 외국책을 읽다 보면 정서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특히 인문학 분야의 책은 더욱 그렇다
그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장황한 설명들이 지루해질 때가 있다
(이건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영화를 보면 자잘한 일상의 모습에서도 쉽게 웃음을 터뜨리는 반면 외국 영화는 아무래도 덜 웃게 된다 난 "택시" 가 왜 프랑스의 코메디 영화인지 정말 모르겠다)
이 책 역시 지루하고 따분한 구석이 있긴 한데 그래도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켜 준다
간단히 말하면 오페라에 얽힌 뒷얘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페라에 관한 책을 몇 권 읽고 나면 더 이상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궁금할 게 없으니까 그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창작 과정 등을 설명한 책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읽었는데 솔직히 지루하다
박홍규가 쓴 "비바 오페라" 가 훨씬 재밌다
같은 의미로 김원일이 쓴 "피카소" 가 더 재밌다
한국 사람이 쓴 책이 좀 더 잘 와 닿는다

오페라는 처음부터 오페라로 만들어진 거라 생각했는데, 대부분 원작이 존재한다
소설이 먼저 힛트친 후 작곡가가 곡을 붙여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모짜르트나 베토벤 하면 고전주의 시대 작곡가라 그런지 아주 옛날 사람 같지만 의외로 18세기 사람 밖에 안 된다
특히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 때도 있었으니 완전히 근대인인 셈이다
그런데 왜 아주 옛날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까?
워낙 큰 명성을 획득한 위대한 인물들이라 아득하게 느껴지는 건가?
베토벤은 무척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라 그의 단 하나 뿐인 오페라 "피델리오" 를 두고 극장주와 격한 대립을 했다고 한다
그가 작곡한 "피델리오" 의 원본이 워낙 길고 지루해 길이를 줄이려고 하자 베토벤은 한 음절이라도 바뀌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은 3막짜리가 2막으로 줄어 들어 오늘날 전해지는 걸 보면, 천재들의 고집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바그너가 혁명에 참여했다는 건 참 의외다
바그너 하면 히틀러가 연상되고 왠지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제국주의적 인간 같은데 의외로 드레스덴 혁명에 참가해 스위스로 망명하는 바람에 그렇게도 공을 들인  "로엔그린" 을 11년 후에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가 혁명 정신에 고취됐다기 보다는 "로엔그린" 을 상영할 수 없다고 하자 극장주에게 악감정을 품고 홧김에 혁명에 뛰어들긴 했지만 (저자가 바그너의 의도를 삐딱하게 보고 있으니 독자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어쨌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 그 용기가 대단하다
나중에 바그너는 친구인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한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제자인 뵐로의 아내였으니, 이 사랑도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였을 것이다
바그너는 여자 문제도 복잡했고 정치적 성향 등으로 봐서 꽤나 격정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오페라들은 워낙 거창하고 복잡해서 "니벨룽의 반지" 같은 걸 보려면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인 "춘희" 는 저자 뒤마의 자전적 얘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속사정을 알고 보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결핵에 걸린 가엾은 동백 아가씨 마르그리트의 실제 모델 마리는 뒤마와 사랑했지만, 그가 그녀의 사치스런 생활에 돈을 대 주기 힘들어지자 결국 8개월 만에 헤어지고 만다
아름답지만 돈이 없는 젊은 여성이 19세기 파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춘 뿐이었다고 하니, 슬프지만 그게 현실인 모양이다
소설이나 오페라에서라면 마리와 알프레드가 죽도록 사랑하지만 아버지에 의해 헤어지는데 현실에서의 마리는 돈없는 알프레드, 즉 뒤마를 스스로 떠난다
남자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마리로서는 자신의 우아한 사교 생활을 서포트 할 수 없는 뒤마 곁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뒤마의 아버지 대 뒤마는 호색적이고 정열적인 인간으로 아들의 사랑을 지지했다고 한다
현실은 결국 돈이 우선이었으니, 씁쓰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뒤마가 그녀에게 보낸 이별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을 원하는 만큼 사랑할 수 있는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이 원하는 만큼만 주는 사랑에 만족할 가난뱅이도 아니다, 결국 당신을 떠나는 수 밖에...
결국 그녀는 뒷돈을 충분히 대줄 남자와 결혼했고 한 때는 리스트의 연인이 되기도 했단다
그녀의 사진을 보면 아주 빼어난 미인은 아닌 것 같은데, 교양있고 세련된 매너로 남성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어쨌든 소설 "춘희" 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로 예술사에 길이 남을 여성이 됐으니, 비록 결핵으로 일찍 죽은 가엾은 매춘부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모짜르트가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의 전편이 바로 "세비야의 이발사"다
처음 이 이야기들을 접할 때는 복잡해서 제대로 정리가 안 됐는데 몇 권의 책에서 반복해 읽다 보니 이제야 정리가 된다
난 이해가 안 갔던 게 모짜르트가 로시니 보다 앞선 사람인데 어떻게 "피가로의 결혼"이 "세비야의 이발사" 보다 후편이란 말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두 편의 원작은 모두 루이 16세 시대 사람인 보마르셰의 유명한 희곡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로시니나 모짜르트 모두 기존에 있던 유명한 희곡들을 오페라고 편곡한 것이다
"세비야의 이발사" 의 경우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도 많은데 로시니의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발사 피가로가 바로 보마르셰 자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전편인 "세비야의 이발사" 에서 알마비바 백작은 로지나와 결혼하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런 긍정적인 인물을 후편 "피가로의 결혼" 에서는 사라진 초야권을 부활시켜 자기 아내의 시녀인 수잔나를 가로채려는 나쁜 인물로 탈바꿈 시킨다
보통 한 번 착한 사람은 계속 착한 사람이고 극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선한 인물이기 마련인데, 전편에서 착한 사람이 후편에서 갑자기 나빠지는 변화가 참 새롭다
오페라 자체가 원래 개연성이나 논리적인 면이 좀 부족하긴 한데, 하여간 인물의 이런 입체적인 변화가 이 희곡을 오늘날까지 존속시킨 힘인지도 모른다

모짜르트가 시대의 반항아였다는 것도 신기하게 들린다
그는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 결사대의 일원이었는데 저자의 말로는 특별히 의식이 있어서 가입한 건 아니고 당시에 이것이 유행이라 그가 오페라 "마술 피리" 에 이 소재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마술 피리" 에 등장하는 밤의 여왕이 바로 프리메이슨단을 탄압하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빗댄 것이라고 해서 당시에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박홍규가 쓴 "비바 오페라" 를 보면 이 "마술 피리" 야 말로 시대의 압제에 저항하는 의식있는 오페라라고 하는데, 저항 어쩌고 하는 상징을 갖다 붙이는 건 말도 안 되는 넌센스라는 게 이 책의 논조다
프리메이슨단이 유명하니까 대중들이 흥미있을 만한 소재를 끌어온 것 뿐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모짜르트 자신은 기득권층에 있지 않은 건 분명하다
위대한 천재였을 모짜르트가 음악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귀족이나 왕에게 굽신거렸을 리 만무하다

여러 가지 재밌는 일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오페라 자체도 재밌지만 거기에 얽힌 비화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읽기는 만만치 않다
문화적 차이가 커서 그런 것 같다
또 요즘 얘기가 아니고 2,3 백년 전 얘기다 보니 쉽게 와닿지 않는 게 많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가 근대화에 빨리 성공했더라면 판소리나 탈춤 같은 전통 예술들도 생생하게 살아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지 않을까?
유럽 사람들에게 오페라는 하나의 휴식이고 생활이었다고 한다
텔레비젼도 없고 책도 쉽게 접할 수 없으니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당시 유럽인들에게 오페라는 시간 때우기 좋은 대중 예술이었던 셈이다
유럽의 전통 예술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문화로써 자리잡고, 몇 백년 전의 뒷얘기들도 하나의 책이 되어 극동에 사는 외국인까지 읽고 있는데, 정작 우리의 전통 문화는 그 수명을 다해 그저 전통이라는 이름 만으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처지인 게 안타깝다
판소리나 탈춤, 가야금 같은 전통 예술들이 여전히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생산력 있는 21세기의 문화로써 자리잡는 것은 요원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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