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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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이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잊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들려줄 사람이 없어 혼자만 간직하고 있다가 터질 것 같이 긴박한 사람도 있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에게 그 이야기가 시시할 수 있고 벅차서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 사이 어딘가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든 그 이야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 가치를 모를 때가 있다.

그런 경험이 있었어.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잊고 지내고 있다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맞아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어

 

지난 토요일 점쟁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내가 아빠에게 많은 것들을 받았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냈다. 참 많이 미워하고 멀리했던 사람이었다. 절대 한자리에 오래 있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렸듯이 나 역시 그를 내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아팠고 어쩌면 이 순간들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순간 있었다.

순간이라고 표현하는 건 나는 그 생각을 오래하지 않았다.

미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관계가 끝날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비극이 싫었고 슬픔이 싫었고 불편함이 싫었다.

그런 일들은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고 누군가가 내 앞길에 놓인 여러 불편한 것들을 치워주길 기대하고 또 기대했다. 무슨 근자감이었는지 나는 내가 평탄할거라고 믿고 있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프고 입원했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고 항암을 하는 동안에도 그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하지 않았다. 내 삶에는 비극은 없다고 믿었다. 아니 비극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나와 친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애물들을 치워주고 있었다.

그런 행동은 그의 인생관에 전혀 맞지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부모라는 입장에서 혹은 아내의 간절한 바람으로 그 짓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몰랐다.

아니 나는 모르지 않았다. 알았지만 그냥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점쟁이는 나의 그런 운이 이제 다 했고 이제는 내가 가진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많이 외로울 것이고 힘들 것이고 계속 베풀기만 해야한다고

내가 베푼다는 건 그만큼 많이 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줄 것도 없다.

내가 많이 주어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만큼 많이 받아서 채운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니 마음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그렇게 아낌없이 주었던 사람이 이제 없구나 라는 사실을 그가 돌아가시고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와 내가 가진 이야기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내가 태어났을 무렵이 마침 퇴근 이후여서 삼남매중에 유일하게 부친이 와서 태어난 나를 보았고 안았다는 엄마의 이야기가 있다. (내가 기억할 턱이 없다)

이촌동 살 때 밤에 몹시 아팠을 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의사에게 가기 위해 그의 등에 업힌 기억이 있다. 그는 절대 자식이나 손자들을 안거나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날을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업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의 성정에 늦은 시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내의 성화에 혹은 아픈 딸을 위해서 딸을 업고 남의 집에 민폐를 끼치러 가는 그 길이 얼마나 아득하고 부대꼈을까

언니가 친구들이랑 놀러가서 삐진 나를 데리고 미술관에 함께 갔던 기억도 있다. 언니는 어쩌면 놀러 간게 아니라 학교 숙제로 미술관에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아무튼 별 일도 아닌 일로 삐진 나를 엉겁결에 떠맡은 그와의 외출이 내키지 않은 내가 함께 미술관에 갔다.

어쩌면 엄마는 그렇게 둘을 짝지워 내 보내고 편안한 저녁시간을 가질 속셈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참 많이 어색했다. 그와 나 단 둘이 뭔가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극사실화에 놀라는 나에게 좋은 그림이란 사실과 똑같은 것에 있지 않다는 그의 설명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 그 설명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고 또 잘난척 하네 아는 척 하는 하는 마음으로 들었던 그 마음도 기억한다. 그리고 서점에서 책을 사주었고 (그 책 제목은 80일간의 세계일주였다.) 그리고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하고 돌아왔다. 도저히 둘이서 함께 무얼 먹는게 편하지 않을 것 같다는 무언의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 부산에 가서 둘이서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그때도 대화는 별로 없었다.

수술 이후 서울 북촌길을 걸으면서 그가 그 근처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했던 일들을 들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때 주인집에서 함께 미국으로 가자고 했을 때 따라갔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주인집에서 무슨 생각으로 서울대에 다니던 입주가정교사를 데리고 미국으로 함께 가자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가족을 두고 따라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시골에 있는 가족을 두고 나만 생각하고 그냥 훌쩍 떠났다면 그는 자유롭고 좀 더 홀가분하지 않았을까

외롭고 내성적이고 공부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던 소년이 그려졌다.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이 없지 않았을텐데.. 그때 그냥 그렇게 충동적인 결정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고리타분한 그의 성정에 외국 생활이 맞지 않고 뻔뻔하지도 못해서 외롭고 고독하고 힘든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엄마가 늘 하는 말처럼 공부를 잘해서 마침 사법시험이 되어서 남들이 우러러 보는 직업을 가져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직장생활을 했다면 참 많이 힘들었을 성격이었다고

혼자 잘해해는 일들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아도 되는 일, 그리고 적당히 존경받고 거리감을 둬도 되는 일 그 일이 정말 그에게는 천성이었을까

혼자 공부하고 혼자 즐거워하는 모습들도 기억한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하고 내성적인 그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주었던 여러 가지들 기억들 돈, 시간, 추억, 여러 가지 감정들

정말 좋았어 아직도 그리워 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일상에서 잊고 살았고 내 삶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나 점차 그도 참 많이 노력하고 애썼구나 라는 건 알 수 있다.

그렇게 자기 가족을 챙기고 다시 처자식을 챙기는 일

그의 어깨에 오종종 올라있는 열명이 넘는 가족들이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을까

그가 도망가지 않아서. 묵묵히 견뎌주어서 그만큼 나머지 가족들이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그 말이었구나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 그의 나이를 지나가면서 무조건 당연한 일은 없다는 걸 세삼 깨닫는다.

 

 

 

처음 이 책은 지루했다.

청소도우미가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그냥 반납할까 고민도 했다. 왜 이 이야기가 페이지터너라고 불릴만큼 재미있다고 한 걸까? 외국과 우리 정서가 다른 탓인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하나씩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점차 나도 빠져든다.

처음 내가 매력을 느낀 건 캐리루이즈의 이야기였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에 런던 극장가를 걷던 캐리루이즈는 야구방망이를 든 갱단에게 공격받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눈 앞에 펼쳐진 그 끔찍한 광경을 제외하면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캐리루이즈는 가방을 뒤져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물건을 꺼냈는데 알고 보니 하비 니콜스 백화점 회원카드였다. 그녀는 그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높이 쳐든 채 경찰이다라고 외치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갱단은 도망쳤지만 그 전에 야구방망이로 그녀의 옆통수를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캐리루이즈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젊은 의사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극장에서 쏟아져 나온 관걕 중 하나였고 이제 관객드은 쓰러진 두 사람 주위를 에워ᄊᆞ고 있었다.

자기야 난 그때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간 줄 알았어. 그이는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였거든 그런 남자가 내 손을 잡으면서 괜찮을 거라고 날 두고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야” “ 그이 말이 맞았어 나는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이의 손을 꼭 잡았더니 50년이 지난 후에도 난 그 손을 잡고 있었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이의 손을 잡고 있었지 암튼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이 언제인지 제니스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주인공을 찾아서)

 

(누구나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

베키의 이야기는 실화인가요?“ 그녀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심사숙고했고 이야기는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우리 삶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보통의 평범한 사람에게도 비범한 힘의 선의가 있으며 그로 인해 늘 희망이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시작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재니스는 이번만큼은 이야기를 수집할 여유가 없다. 머릿속이 베키 생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베키의 동생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 좋은 결말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고 싶다. 부모님은 배키를 탓했을까? 그때 베키는 몇 살이었을까? 하지만 재니스의 경험상 어린아이일 때는 그 점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결코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고 죄책감과 책임도 기꺼이 떠안는다. 그 짐이 자신에게 너무 버거우며 사실은 어른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모든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난다.)

그는 놀라면서도 감동했으며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렇다면 b부인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스파이 이야기?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지 않으면 소멸한다.)

착한 사람에게 단점이 있듯이 악당에게도 장점이 있는 거야. 재니스 순진하게 굴지 마. 나쁜사람이든 악당이든 자네가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들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야.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말해봐

부인의 말을 듣고 개뻐해야 정상이죠. 어머나 나쁜 사람에게도 좋은 점이 있구나. 하고요. 하지만 왠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책 속 이야기일 때는 그냥 받아들일 수 있어요. 당차고 못된 성격에 그걸 보완하는 장점은 거의 없는 베키 샤프도 좋아할 수 있죠. 하지만 실화일 때는 누군가가 하지만 저들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걸 견딜 수 없어요. 왜냐하면 현실에선ㄴ 네 바로 그거예요 제 삶에서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쁜 사람과 힘든 일을 견디며 살아야 하니까요. 전 오랫동안 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왔어요. 사람은 단순히 선악으로 나눌 수 없어. 그이는 망상에 빠져 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이기적이고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형편없는 아빠고 거짓말하고 과장하고 내가 마룻바닥을 닦아서 번 돈을 물 쓰듯이 쓰면서 내가 하는 일을 무시하지 그러면서 또 하지만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그이의 장점을 찾죠. 계속 새 직장을 구하고 백수 사태로 오래 있지 않고 날 때리지 않고 다른 여자를 쪼아다니지 않고 가족끼리 외출도 하고 꽤 유쾌한 성격이기도 하고 펍에서 만나는 그이의 친구들은 그이를 좋아하는 것도 같고 내가 부탁하면 쓰레기도 버려주잖아 근데 그거 아세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하기는 개뿔 그러니까 균형있게 봐야 해 그리고 이봐 네가 쓰레기라고 생각한 사람도 사실은 장점이 있어 라는 부인의 말을 난 견딜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난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려고 이미 오랫동안 노력해 왔으니까요. 지금 부인이 내게 요구하는 태도로 이미 살아왔다구요. 아 이건 흑백논리가 아니야. 재니스 하지만 빌어먹을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엿같은 상황에서도 좋은 점을 보려고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나면 나를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고 훈계는 말이 듣기 싫을 때가 있죠. 가끔은 지붕에 서서 이 모든 게 엿같고 더 이상 못 해 먹겠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외치고 싶어요.“

 

(마음이 머무는 곳이 곧 집이다.)

차에서 내리며 재닛는 자신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한 감정이 죄책감임을 꺠닫는다.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어요.

하지만 이건 자네 이야기야. 재니스 자네는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해.

그런가요?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요? 제가 결말을 바꿀 수도 없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자네가 틀렸다는 거야. 때떄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희망뿐이야.

 

(재니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 어떠면 여동생 조이와 함께 겪었던 그 시간들을 조이와도 나누지 않았다. 본인은 조이보다 큰 아이라고 믿었고 조이를 지켜야 하는 존재라고 믿으면 자신도 여전히 어린 아이이고 보호가 필요한 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걸 왜 내 엄마는 모르고 있고 조이는 알면서 혹은 알지 못한 채 그들에게 이쁨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지 그리고 그 광경을 슬프게 지켜봐야 하고 불안하게 지켜내야 하는 건지 그리고 그 어린 재니스가 어떻게 어린 조이를 지켜내고 남자를 없애버렸는지는 천천히 다른 이야기처럼 시작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재니스의 입을 통해 다시 구성되고 다시 의미를 가진다. 내가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이다 그래서 지금 현재 삶에서 속죄하면서 살아야 한다. 누구든 나를 좋아할 리 없다. 마이크의 행동들을 나는 견디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들 사이먼도 나를 좋아할 수 없다. 내가 그의 동의 없이 멀리 있는 기숙학교로 그를 보내버렸기 때문에 그는 나를 미워한다. 동생은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나를 무서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모든 혼자만의 생각들이 이야기를 통해 내 속에서 나오면서 이야기는 다른 결말을 가진다. b부인이 원한 건 그런 거였다. 이야기는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청자에게 닿는 순간 그 이야기는 화자의 것만이 아니다. 이야기는 살이 붙고 의미가 첨가되고 바뀌어 가면서 다른 이야기로 다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재 구성한 이야기는 다른 결말을 가지고 나는 그 이야기에서 비로소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 내 이야기지만 더 이상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다.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

 

(슬픔은 죄책감처럼 무겁지 않다.)

저는 대체로 항상 죄책감을 느끼고 거의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요. 동생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데 죄책감을 느껴요. 어른이 되고 보니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조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누리지 못했다는데 여전히 죄책감을 느껴요. 아저씨가 죽은 뒤에 조이의 삶이 더 힘들어졌다는 데도 죄책감을 느끼고요. 그게 제 탓인 것 같아요.

조이는 엄마의 사랑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 어린 소녀였는데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자넨 겨우 열세 살이었잖아

전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없어요. 하지만 조이는 다르죠 조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죄책감은 병과 같은지 몰라요 자기도 모르게 걸리는 거죠.

죄책감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들어오는 것같아요. 문을 두드리고 밖에서 얌전하게 기다리지 않는다고요.

번식력이 아주 강한 잡초처럼

 

(종이에 적힌 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살면서 좋았던 일을 공유할 뿐 아니라 화자의 나쁜 기억을 내보내는 기능 바람에 먼지가 흩날리듯 나쁜 기억을 흩어지게 하는 기능도 있는 걸까

 

지금 그녀는 놀랍도록 자신을 잘 통제하고 있다. 차분한 절망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모두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어때요?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할 건가요?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요. 멈추고 싶지도 않구요. 사람들의 이야기속에서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어쩌면 내게도 서너개의 이야기가 생길 거예요. 이제라도 따라잡아야 겠어요.

 

나는 몇 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그의 나의 이야기는 몇 개가 되려나

그는 나와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고 지키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나와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늘 연결된다. 타인의 경험이 나의 경험일 수 있고 내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내게 묘한 희망이나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 귀를 내게도 기울인다. 내게 있는 이야기는 몇 개 인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웃으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는 이야기도 필요하다. 조금 더 진지하게 이야기하다보면 이 상대가 나를 떠날 수도 있다는 부담으로 조금 두려워하면 꺼내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했고 저주했고 그리고 무언가를 저질러버렸다는 이야기들

내가 남편을 미워하고 이혼을 생각하기도 하고 지금 몹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서 가족들이 조금은 성가시기도 하다는 이기적인 이야기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은 어쩌면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구성된 존재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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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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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황석희)

 

화낼 준비가 되어 있다.

화낼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먼저 화를 내야 상처받지 않는다는 착각, 먼저 공격해야 방어에 유리하다는 계산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도 모르는 새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다.

 

2. I’m not defined by you (나는 당신에게 정의되지 않는다. 네가 뭔데 날 정의해)

어떤 사람이 나를 고구마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고구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말엔 날 정의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남들 말에 딱히 휘둘릴 일도 아니다.

 

3. 서른의 불안감을 어떻게 이겨 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사실 서른의 불안감을 이겨 낸 게 아니라 그저 떠안고 살았던 것 같다. 불안이 내 속을 아무리 좀먹어도 피가 철철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선천성 무통증 환자처럼,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안 아팠던 걸까.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아파서 아픈 줄도 몰랐는지도.

 

4. 어떤 논리가 있든 어떤 사정이 있든 내 마음에 안들면 틀렸다고 주장하는 태도

이런 상황이 연출되면 대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목소리 큰 사람과 싸우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5. 자식들은, 특히나 궁하게 자란 자식들은 그저 부모의 인생이 불행했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대로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나는 그 시절을 한번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당신의 불행을 멋대로 단정했을까

 

6.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보통 셋이 이야기할 때 둘이서 다른 한 명을 철저히 무시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린 너무나 당연하게 아이 앞에서 이렇게 대화해 왔다. 아이가 대화를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번역을 한다는 건 소통이다.

당신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다.

서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어도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상대방의 언어가 나와 다를 때가 있다. 같은 모국어가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경우

그래서 상대방의 뜻이 오역되고 내 뜻이 오역되기도 한다.

타인은 늘 낯선 존재다

내가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일뿐

타인은 어제 알던 사람도 오늘은 다른 사람이다.

내가 미루어 짐작했던 일들. 내가 배려한다고 믿으며 삼켰던 말들 묻지 않은 말들이 때로는 서로를 오역하는 일이 된다.

상대가 먹을 수도 있다고 믿고 먹지 않은 과일이 냉장고에서 썩어갈 때

상대는 내가 사놓은게 마음에 들지 않아 먹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원망을 삼킨다.

혼자 있고 싶구나 여겨서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올 때

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나 하는 마음에 서운함으로 빈 마음을 채운다.

늘 고생해서 힘든 시간만 보냈을거야 라며 가엾은 마음을 품을 때

사실 고생이 많았지만 사이사이 행복하고 예쁜 기억들은 지워져 버린다.

상대를 단언하지 말라

그는 내가 아니다.

사람이란 납작한 존재가 아니다. 너무 다면적이어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스스로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미움을 받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

나를 잘 아는 건 결국 상대에게 가까워지는 길이다.

번역을 한다는 건

다른 언어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

사람사이에도 번역이 필요하다.

사람사이에도 노력은 늘 필요하다.

 

나는 노력이라는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사랑도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을 한다는게 사랑이 아닌게 아니라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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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돌아오다
사쿠라다 도모야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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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슴하고 오래씹어야 느껴지는 맛. 추리물로는 느슨하다 싶지만 곤충에 대한 정교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추리보다 사람사이의 관계, 가치관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슬픈 일이지만 유난히 슬프고 마음이 아린 건 곤충을 통해 사람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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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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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러운 작가의 따뜻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해파리 좀비 이야기나 나무로 변한 남자이야기 그리고 우연히 만난 동창과의 따뜻한 밥 한끼들

이게 뭐지 라는 생각에 조금 더 읽으면 상황이 파악될까 호기심에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게 뭐야 뭐야 하면서 계속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탁 ! 하고 걸리는 게 있고 순간 얼음이 된다.


1. 빛이 나지 않아요 

인간이란 무엇일까

어떤 상황까지 우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인간인 걸까

지선씨는 해파리로 변하겠다고 결심하고 과정을 받아들이지만 쉽게 해파리가 되지 못한다.

아직도 남은 마음이 있어서였을까 

인간의 모습으로 살면서 견뎌내는  삶을 살았던 지선씨의 깊은 원염이 지선씨의 선택과 상관없이 지선씨를 인간으로 남게 한다.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하는 동안 마음을 정리하지만 그 정리는 결국 계속 사랑하겠다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해파리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품는 마음이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파리도 사랑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거기까지 지식이 없는 인간이라...) 

지선씨를 만나면서 나는 생각을 한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뭘까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와서 안정된 수입이 생기고 더 이상 천정에서 물이 새지 않은 집에서 적금을 부으면서 살 수 있다면 꿈이나 미래는  잊고 현실에 맞춰 사는 것이 옳은 걸까

책을 읽는 나는 생각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

안전한 일상이 하루하루 쌓이는 그 평온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아직은 지킬것이 없는 너에게는 평온하고  어제와 똑같은 일상의 가치를 모르는 구나 

누군가는 나를 속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일상이 균열되는 것이 가장 불안한 나같은 인간도 있다는 걸 

그건 나 자신의 불안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킬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에서 오는 것이라고 

너는 지켜야 할 것이 너 자신뿐이라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해파리가 되고 싶다고 결정을 내리는 지선씨도 한편에서는 부러웠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기로 결정한 구를 나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구의 선택도 그만큼 절실하고  최선이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너는 구를 설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음을 너도 알았다고 나는 믿는다.

더 늦기 전에 한 번 더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싶다. 음악을 하고 싶다. 그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지르고 싶다는 마음을 응원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해파리를 치우면서 적금을 부으면서 집을 고치면서 밥을 차려먹을 구 역시 나는 응원한다.

인간은 다양하다. 어떠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존재여서  어떤 선택이든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다고 믿을 뿐이다.

그리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선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읽고 난 뒤 드는 생각

왜 사람들이 해파리에 쏘이면 해파리가 될까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바다에 둥둥 떠서 빛을 쏘는 해파리

무해하고 무익한 존재  

사실 익과 해 역시 누군가의 기준에서 정해지는 것

해파리는 그냥 해파리이고 물속에서 떠있는 존재일 뿐이다. 누군가 다가오면 두려워서 독을 쏘기도 하겠지만 내버려두면 그냥 마냥 떠다니지 않을까 

인간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면서 점점 무거워지는 무게를 이제는 그만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이 해파리가 되는 건 아닐까

낯선 존재는 두렵고  위험하지만 점점 해파리가 되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무심해지고 무감해진다.

해파리로 변신시켜 바다로 보내는 일과 그 해파리가 뭍으로 밀려와 쌓이는 것을 죽이고 정리하는 일 

구와 너의 일을 보면서 그리고 익숙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삶에서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과 익숙해져서 안온하고 무감하게 살아가게 되는 일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나 생각해 보다가 

그 생각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기도 하다. 


2. 여름은 물빛처럼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점잖아보이는 망고 두개를 산다. 집에 돌아가 망고를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다.

그러나 집에는 낯선 남자가 있고 그 남자는 헤어진 전 주인을 찾고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 나무가 된 남자와 동거가 시작된다.

천성이 착해서였을까, 어쩔 수 없이 남자를 살게 했고 남자를 위해 에어컨을 포기하기도 하고 함께 커피를 나눠 마시기도 한다.

함께 라디오를 듣고 사연을 보내고 사연이 나오는지 목을 빼고 기다리기도 하고 푸념을 하고 푸념을 듣고 자기 방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을 다른 기분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가끔은 불안이 나를 대신해서 인생을 살아주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한다.


나무가 된 산과 함께 살면서 너는 불안했을까 그냥 편안하구 무심했던 것도 같다.

늘 거기 산이 있었다고 감각으로

가끔 일을 땡땡이치고 가던 물가대신 이제 집에서 피톤치드를 하듯이 숲의 냄새를 맡는다. 

산은 겨우 하나의 나무이지만 하나의 숲이기도 했다.

산은 왜 그 자리에 나무가 되어버렸나

산 역시 앞 이야기의 지선씨처럼 견디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어서 계속 견디는 중이었을까

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울만큼 사랑받은 기억이 적은 산이  여기서 잠시 쉬어가며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조금씩 환대받고 의지하고 의지되는 존재로 힘을 키우는 시간이었을까

어느날 정말 산이 뿌리째 떠났다.

바닥에 떨어진 장판의 흔적이 있다. 

너는 창밖에 있던 양심의 거울을 훔쳐 온다. 그리고 낯선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눈다.

일상에서 조금의 비틀어짐이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가 무너지지도 않는다. 

산을 통해 너는 조금씩 삶을 비틀어 본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정도지만 너는 알 것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는 나에게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며 변하지 않은 존재이다.


3. 낯선 밤에 우리는...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기 위해 병원을 다니던 희애는 병원근처 지하철 입구에서 옛동창인 금옥을 본다.

자기 몸만한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사람들에게 전도전단지를 나눠주는 금옥

오랜만에 만나도 둘은 서로를 알아본다.

사실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 동창을 아는 척 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모른 척 하고 싶은 건 나만은 아닐거라 믿는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다가오는 금옥을 희애는 내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희애에게는 자신의 상황을 모르지만 자신을 잘 알았던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결혼생활이 불행하지는 않다.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게 그렇게 크게 자리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계획이 틀어지고 생각대로 되지 않고 주변의 기대감이 커질수록 그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나와 남편만의 것이 아니다. 

자꾸 내가 작아지고 내 주위가 더 커지는 경험들 그렇게 커지는 주변에 내가 압박받고 몰리는 기분

그런 마음이 나를 쓰러지게 하고 금옥의 집에서 첫 한끼를 함께 한다.

별다른 반찬없다.

사실 갓한 밥과 금방한 반찬은  게다가 남이 해주는 밥상은 언제나 맛있다.

그렇게  희애는 허기진 관계를 따뜻한 밥상으로 채워나갔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하지는 않았지만 희애에게 금옥의 방은 하나의 은신처였고 마지막 보루같았을 것이다.

언제든 갈 수 있는 곳, 언제든 잊어도 괜찮은 곳

누구에게 말하지 않지만 혼자 간직하면 왠지 든든한 묵혀둔 적금같은 거

희애는 금옥과 접선하듯이 만나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다가 설겆이를 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전도성과가 없던 금옥이 거리에 보이지 않고 출산에 대해 압박을 심하게 느낀 희애는  절박하게 금옥을 찾는다.

그리고 다시 만나 먹게 되는 포근하고 따뜻한 달걀찜 

어쩌면 그 음식이 최후의 만찬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다행이고 서로 내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능청스러운 작가의 따뜻한 이야기들

이게 뭐지? 라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하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 로 끝나는 세편의 이야기들

당황스러운 만남이었고 짧은 만남이지만 오래 기억될 수 있는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들 

짧은 순간이지만 지선씨와 산과 그리고 금옥과의  그 시간들은 따뜻했을 것이다. 

짧은 이야기를 읽으며 환대에 관해 생각한다.

누군가를 따뜻하게 맞이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사람이었을까

내가 견딜 수 없어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무딘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날카롭게 버려진 칼날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환대의 기억이 있는가

환대를 받고 쭈뼛했을 어린 나는 환대가 두려웠었다. 그냥 가마가만 다가가고 이야기 하고 그래요 라고 긍정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냥 그런 시간들 밍밍하지만 적당히 따뜻하고 포슬포슬한 달걀찜같은 그런 시간이 쉽지 않은 사람이 나였다.

말이 많았지만 무심하게 다가가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세편의 화자들이 부러웠고 슬펐다.

그냥 가만가만 스치는 관계들

그런 기억들이 쌓여 따뜻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배웠다.


누군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상황과 형체로 다가올 때  자꾸 이유를 찾고 원인을 찾고 결과를 찾으려고 하지말고

그냥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 라면서 받아들이고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

모두가 원하는 것인데 모두가 가능하지 않은 그 작은 일 

내게도 지선씨가. 산이 그리고 금옥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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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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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아이는 아빠에게 나이프의 k는 묵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장실에 불려갔었다고 규칙들과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글자 하나일 뿐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글자 하나, 맨 앞에 놓인 단 한글자 때문에 아이는 교장실에 불려갔다. 아이는 k가 묵음이 아니라고 우겼다고 말하지 않는다. 묵음일 수 없다고 아이는 우기고 또 우겼따, “맨 앞에 있는 걸요! 첫 글자잖아요! 소리가 있어야죠그리고서 아이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양 괴성을 질러댔다. 아이는 아빠가 말해준 것 그 첫 음을 단념하지 않았따. 평생 읽고 교육받아온 선생님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2. 파리

레드가 아는 유일한 사랑은 하루의 조용한 순간들 속에서 자신에 대해 느끼는 단순하며 복잡하지 않고 외로운 사랑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이야기 속에 주말마다 들르는 식료품점 통로에 그 자리에 한결같이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매일 밤 어둠 속 같은 자리에서 고요함 속에서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것이었다. ‘

 

3. 슬링샷

그는 내게 자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따. 나는 그가 볼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내 존재르 부정할 수 있는 사람-과 함꼐있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후회하고 어리석게 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그가 내게서 돌아섰을 때 나는 나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손을 뻗어 인체해부모형안에 있는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위장이었다. 작은 플라스틱 조각 당연히 그건 실제가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3. 랜디 트래비스

아빠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랑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침묵이 사랑이고 자제심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고 완전히 드러내 보이는 것은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라고. 사랑에 대해 주절거리는 건 우습다고 생각했다. 랜디 트레비스는 어던 남자이기에 건강 외모 명성 돈을 갖고고 그렇게 주절거리는 걸까?’

 

4. 매니페디

있잖아 미스 에밀리는 나 같은 남자는 절대 안 만날지도 몰라 그래도 난 꿈꾸고 싶어 기분이 좋거든 오랫동안 그런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어. 제길 내게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아 그렇지만 그게 내가 헤쳐나가는 힘이야. 매 시간 매일을 해쳐나가게 해. 나 같은 남자가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는지 알려줄 필요 없어, 조금이라도 꿈꿀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그녀의 얼굴도 보이는 것과 다르게 망가지고 삐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얼굴을 인정하지도 거기서 희망을 보려 하지도 않았다 희망은 그녀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든 그것이 그 자리에 없다는 걸 뜻했으니까

 

5. 세상의 가장자리

엄마는 전쟁에 대해 알았다. 어둠 속에서 총을 맞는 게 어떤 건지 품안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게 어떤 건지 폭탄이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곳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면 그런 건 몰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모르는 게 많았다.’

종종 어마의 얼굴이 나온다. 그 시절처럼 여전히 젊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꿈속의 그녀는 입술을 움직이며 항상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한다. 꿈은 단 몇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우리 사이에 다시 풀어놓기에는 그걸로 충분히다. 그런 꿈에서 꺠어나면 마흔다섯 살의 나는 그때의 심경을 생생하게 느끼며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비통해진다.’

 

6. 당신은 너무 창피해

이 말 한마디만 할게. 꼭 기억해! 진심으로 엄마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어 엄마가 되고 나서 그걸 깨닫지

 

7 저 멀리 있는 것

8. 지렁이 잡기

 

누구도 묵음은 왜 발음하지 않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며 그냥 외우라고 했었다.

그냥 외웠고 그걸 외우고 안다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왜 발음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몰라도 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이는 아빠가 가르쳐준 그 발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 안되는지 똑똑한 선생님들도 설명을 못하면서 무조건 발음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이라서 자신도 잘 몰랐을테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자신이 왜 발음되지 않은 알파벳인지 알지 못하거나 납득하지는 못하지만 알게 되었거나 아무 말도 없이 받아들이거나 그렇다.

늙은 여인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은 남자를 떠나버렸고

공장 노동자 레드는 뾰족한 코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못생긴 자기 얼굴에 안도하기도 한다.

친구와 함께 자라고 배웠지만 달라진 모습에 모습을 숨기기도 하고 기어이 라오어를 주장하는 부모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받아들이는 나이가 된다.

 

짧은 이야기들은 소설같기도 하고 수필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처럼도 읽혔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사람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면서 자기 이야기를 짧게 들려준다.

그들은 주장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치지 않았다.

쭈삣거리며 나와서 나는... 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시 슬며시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다.

엄마역할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을 뒤늦게 알지만 내뱉지 못하는 상황들

무언가 깊게 심취할 무엇이 필요했던 순간들

내 고향을 잃으면 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현실을 알게 되고 인정하면 여태 쌓아온 나 자신을 부정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보이지 않은 시간속에도 찰라의 눈에 띄고 즐거운 시간들도 있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할머니의 말이 내 삶의 일부분을 지나가기도 했다.

 

내게도 발음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모른 척하거나 모르거나 그럴 뿐이다.

그리고 나도 묵음들에 대해 이유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외워서 익히고 있는중이다.

 

병원을 다녀오며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그 표현이후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자기의 문제를 드러내고 이야기했을 때 아무도 호응하지 않거나 모른 척 하거나 차마 뭐라고 이야기하기 난감해 침묵을 지킨다면 말을 한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말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 듣고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누구도 허공속에서 내 목소리가 흩어지는 걸 원하는 사람이 없다.

목적하는 대상이 없더라도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듣고 답해주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하고 명명을 하고 상황을 정리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탓을 하거나 침묵을 한다면 내가 겪고 있는 내 상황이나 그때의 사건이 중요한게 아니라 지금 이순간 그 경험을 한 나 자신이 문제가 되어버린다.

 

묵음이었던 사람들이 있었어

세상에는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소수자가 있고 그림자 노동이 있고 누군가가 있지) 내가 미처 세상을 다 알지 못했구나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렵다.

그 다음 어떻게 해야한다는 몰라서이기도 하고

또 하나 개인적인 이유는

나 자신이 평안하지 않고 불안하고 위기 상황이면 다른 누가 묵음이든 뭐든 중요하지 않다.

그냥 눈을 감아버린다. 한결같지 않은 내 모습이 부끄러워 한결같기 위해 눈을 감기도 한다.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그 여운은 깊고 진하다.

다만 그 진한 여운이 여운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 주변에는 언제나 누군가 있다.

내가 모를 뿐이다.

나도 당신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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