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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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독서 에세이는  또 다른 독서로 나를 이끈다.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들이 많아진다. 몰랐던 작가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외국어를 배울까 생각을 한다. 내 세상이 넓어졌다.

한권 한권 책이 흥미롭다.

책을 읽다 멈추고 정보를 찾는다.

또 다른 작품은 뭐가 있을까? 어떤 작품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왜 그동안 이런 작가가 이런 책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나는 정말 작은 세계에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구나

폴란드의 작가들이 , 칠레의 작가가 

가까운 일본에 이렇게 괜찮은 시인이 있었는지 몰랐다.

몰랐던 게 부끄럽지만 이제 아니까 다행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한다

그 고민의 시작점이 제각각 자기가 서 있는 지점에서 시작되어서 

그 과정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

우리의 범위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쓰고 남긴다. 그리고 읽는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남겨놓는다는 것,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는 것이고 동시에 또다른 세계를 소개하는 것


읽기 잘 했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것도 알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는 별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들을 대낮처럼 환한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별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제 안에서 춤추는 별을 찾게 된다. 


설명할 때만, 그리고 설명해준 것만 아는 사람은 설명자에 예속된 존재이다. 혼자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배울 수 있을 때 그는 자유로워질수 있다. 좋은 교사는 유식한 자가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드는 교사이다


그는 학생이 주의를 기울여 알아낸 것이 무엇인지 계속 물어봐주고 학생의말에 경청하기 위해서 곁에 머물 뿐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예술가의 ‘해방하는 수업‘이라고 부른다. 평등이 필요한 것은 시인과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독자들이 제삼자의설명 없이도 작품에 공감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시선으로 그것을 읽어주길 기대한다. 시인 자신이 누군가의 설명 없이사물과 직접 만나며 배운 것을 작품으로 썼듯이 말이다


관습이나 종교에 따라서든, 혹은 책을 만드는 방식으로든, 우리가 애도를 위해 선택하는 모든 제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고인이 살았던 삶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며 그와 정중히, 그리고 천천히 작별하는 것

사회적 제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핵심이전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패도 사진도 없는 분향소에서 우리는 고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세상을떠난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바로 그 제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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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걸 싫어해요.
다른 거 불편하니까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내가 어리석었나? 내가 잘못하고 있나? 나만 모르나 하는 불안을 갖게하는 것들을

누군가의 말이,외침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건
그게 나와 다르고 익숙하지 않아서예요
그런 건 폭력이예요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나는 원하지 않아요
나는 다른 삶을 원해요.
당신의 행동은 폭력이고 나는 거절해요.
그런 말들이 불편해요

그래서 까다롭다. 뭘 모른다. 이기적이다. 라고 ㅇ
하면서
입을 막고 손발을 묶으려고 소리를 지르고 손을 올려요.
두려운거죠
내가 틀렸을지 몰라
내가 모르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누르려고
더크고 세고 강하게 자신을 부풀려요.
너희가 틀렸어
너희가 뭘 몰라
너희들이 너무 예민해

어쩌면 우리는 말하는 법 듣는 법을 몰라요.
그냥 내말만 냅다하고 상대방 말을 듣지않죠
내가 할말만 생각하느라 들을 수없고
상대방말의 틀린점을 잡기워해 곤두서 있어요.
대화는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묻고 듣고 다시 생각해야하는데
침묵이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우린 모든 순간 순간을 말로 채우려고해요.


말을 듣고 생각하고
다르구나 그럴 수 있구나... 하는 고요의 순간이 필요한데
그래서
듣기만하다가 아쉽거나
말을 했지만 후회스럽거나 쓸쓸해지는 순간
차라리 아무말도 말걸
말하기 전으로 돌아가고싶다.
들었던 내귀를 씻고싶다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죠

말을 했고
들었는데
더 단절되는 기분
자꾸 멀어지는 기분
더 외로운

어떻게해야할까요?

마음엔 말들이 그득한데 내놓을 수 없거나
들었지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들었지만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분

우리는
나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하나요?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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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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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면 편안해질거예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어요

그런 말이 이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도 전혀 변한게 없어요

그냥 내가 미친년일뿐이더라구요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들어주지 않고 또 시작이다. 또 지랄이다 라는 반응 이제 나도 지쳤습니다.

말하기는 늘 듣기와 짝궁이 될때 그 가치가 있다. 


말을 듣는다는 건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다.

내 생각이 끼어들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그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건 쉽지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고 내 생각은 그냥 덮어두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도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다.


친족성폭력 3부작을 읽었다.

굳이 푹력피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어쩌면 여성이라면 한번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자꾸 돌아보고 뒤적이게 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꽤 힘을 가진 사람이거나  무지한 사람이거나...

윤희나 유정이나 그 내담자나...

모두 자기를 뒤적이면서 자기안의 분노를 어쩔 줄 몰라한다.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읽는 내 마음일 수도 있다.


말을 하거나 드러내거나 표현하는 건 중요하다.

결국 나만 내 일을 정의 내리고 방향을 잡고 나아갈 수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타인일 뿐이다. 

말을 하지 않는 것. 침묵하는 것도 적극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세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나는 전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열심히 듣고 알려고 애쓸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되고

그래야만 한다고 

잘 했다고...

일단 말을 하고 내 말을 믿을 것이다. 


말을 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더 겸손하게 들어야 한다는 걸 또 배운다. 


다른 단편들도 좋았다. 그리고 너무 익숙해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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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없는 집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1
알렉스 안도릴 지음, 유혜인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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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다보니흘러넘쳐 남은게 없음
탐정이 매력적인 줄 알았는데 아직 자기연민에 잠겨 있고 대를 잇는 폭력과 가부장제 그루밍 성폭력을 그냥 뭉뚱그려 짠 하고 급히 마무리한 느낌
사지않고 빌려보길 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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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공감하는 것과 사실을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것

그 차이를 드라마에서 배운다

<굿파트너>를 혼자 보면서 차은경과 한유리의 대화법에서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차은경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접근을 한다.

그가 딸 재희와 하는 대화는 나와 내 딸들의 대화와 비슷했다.

아이가 힘듦을 이야기하면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해결사 모드로 전환한다.

엄마라는 것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앞에 어떠한 문제도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거나 해결할 수 없어서 절망하고 화가 나는 것

나에게 선택지는 그 두가지 뿐인데 아이가 점점 자랄 수록 나는 후자밖에 할 수 있는게 없어졌다.

해결은 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문제란 점점 진화하는 것이어서 점점 복잡해지고 오묘해지고 잘잘못의 구분이 부명하지 않다. 문제라고 여기는 지점 역시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도데체 그것이 왜 문제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아이에게 좋은 해결사도 못된다.

해결해야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에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고통이다.

차라리 어려워서 노력하고 연구해서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괜찮은데 이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하고 시간을 쏟아부어도 답이 없는 경우  너무 힘들고 짜증이 나고 무력해진다.

그때 화를 낸다.

넌 도데ㅔ 왜 그런 문제에 매달리는 건데

그게 뭐라고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해 니가 지금 그럴 때야?

물론 드라마속 차은경은 나보다 이성적이어서 그리고 여유가 있는 엄마여서 그런 막말을 쏟아내지는 않지만 딸 재희앞에서 자꾸 무너지고 해결중심으로 접근한다.


반면 딸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는 한유리는 재희와의 대화에서 공감을 해준다.

무엇도 질문하지 않고 재희의 말을 그대로 반영한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솔직하게 자기개방을 하고 그때 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화가 났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어쩌면 재희가 원하는 건 그 문제 내가해결해 줄께 가 아니라 어머어머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내가 알아 그거 되게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야 라는 말들이었다.

한유리의 공감대화는 재희의 마음을 열었고 재희가 혼자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너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문제는 어른들이 해결할 일이고 너는 너가 원하는 대로 하면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것ㄴ 역시 그들이 알아허 할거야 라는 말을 근사하게 풀어준다.

너가 가장 우선인 부모들이니까 너의 결정으로 두 사람이 상처받는 일은 없다고 너의 선택을 가장 존중할거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공감의 대화와 문제해결의 대화의 다른 점을 두 사람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법정에서 의뢰인을 앞에 놓고는 두 사람은 다른 위치가 된다.

그 자리에서는 차은경의 문제해결의 대화가 더 필요하다.

공감도 필요하지만 의뢰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온 사람이다.

그때는 차변의 말대로 내 감정 내 입장은 넣어두고 상대가 원하는 것 상대가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 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모를 수 있고 

알지만 말로 잘 풀어내기 어려울 때도 있고

말하기가 어려워서 빙빙 돌릴 때도 있다.

차변은 정확하게 그  지점을 알아낸다.

사실 상대의 문제를 잘 파악하는 차변 역시 공감을 잘한다고 할 수 있다. 

한변은 상대의 말을 내 관점에서 걸러서 다시 재 조립해서 듣는다.

아이를 서로 맏ㅌ지 않겠다고 싸우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나는 그의 말은 부모란 모름지기 아이를 서로 원하고 양육하고 싶어해야한다고 하는 신념ㅔ 차있다.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걸 아직 알지 못한다.

이때만큼은 한변의 공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서로 다른 모양의 퍼즐조각처럼 서로 많이 다른데 그래서 서로가 필요하다.

서로 원하는 지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런 콤비 플에이도 서로가 적당한 경계선으로 나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즉 두 사람이 가족이 아니기때문에 가능하다.


가족이란 그냥  뒤엉켜져 있어서 어디까지가 내 경계인지 모호한 집단이다.

차은경이나 한지상은 둘 다 재희가 내마음이라고 믿는다.

불안한 구석이 있지만 내가 그동안 보살핀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아이가 나를 이해할 거라고 믿고 있다. 나와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서도 상대가 내 입장을 이해할거라고 잘 알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부부이고 가족이라고 믿어서 갈등이 깊어졌다.

상대는 나와 다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 서운한 마음까지  안고 함꼐 할떄 가족은 오래 간다.


한지상에게는 차은경이 가져오는 경제적 안정은 당연시 되었고 그에 더불어 흔히 모성이라고 하면 드러나야할 아이에 대한 무한정한 애정과 희생까기 기대했다.

차은경 역시 한지상의 육아와 살림에 대한 책임을 어느 순간 당연시 했다.

내가 이렇게 서포트를 하고 있고 내 시간이 없을만큼 일에 매달리는 것은 다 가족이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걸 몰라주는 것이 서운했고

늘 육아와 살림은 당연하게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상대의 모책임하고 무신경함에 서운했을 것이다. 

서로 가족이 그러해야한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한다 라는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서로 달랐다. 


그리고 


차은경은 엄마로서 경험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먼저 사회적인 성공을 했고 사회에서 일을 하고 얻는 성취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공감보다는 문제해결에 뛰어나고 그 능력으로 지금껏 살아왔따.

그런 그에게 육아를 하면서 집에 있으라는 건 사실 날개를 꺽는 일이다.

사람마다 능력치가 다르고 좋아하는 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집보다 직장이 더 편하고 성취감을 주는 차은경은 아이와 보낸 육아휴직 기간이 행복했지만 동시에 자신은 사라지고 없는 상실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육아란 온전히 타인에게 집중해야하는 노동이다.

그냥 잠깐 보면서 귀엽고 즐거움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차은경과 재희의 관계처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뒤톧수를 한대 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지칠 수도 있고  절대 어떤 풀이과정도 맞지 않은 난제 일 수도 있다. 

그런 간계에서 에너지가 고갈된다.

사실 양육은 내가 얻는 즐거움과 보람만큼의 에너지를 그대로 빼앗기는 일이다.

아이가 마냥 이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아이. 나의 도움이나 관심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고 생존마저 위태로운 존재. 자라서는 엄마의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엄마가 하면 당연하고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심어주는 시화분위기와 여러가지 거지같은 이론들이 부모를 옥좬다.

그냥 이뻐하고 육아휴직을 쓰고 주말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좋은 아빠 타이틀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부성과 다르게 모성은 하나라도 빠지면   실패가 되고 죄책감을 낳는다.


그 과정에서 엄마들은 많은 차은경들은 (굳이 변호사라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문제해결중심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문제가 내 아이에게 생기면 그때 모든 시선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에게 쏠린다. 엄마가 어떻게 해결하지? 지켜보는 눈들이 생긴다.

아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닌데 엄마가 먼저 지레 겁을 먹고  돌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공감은 뒤로 밀리고 문제해결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아마 드라마는 재희와 차은경이 좋은 관계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아직 외도를 한 배우자에게 좋은 결과를 주는 드라마는 없다.

자기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를 양육할만큼 좋은 아빠였떤 한지상이었는데  외도문제가 생기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차은경에게 자존감이 상했는지. 육아에 지쳤고 외로웠는지 이유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 않다.

다만  그럴 수 있지,.... 라는 마음이 외도가 보태지면 어떤 깐한 마음도 들지 않는다. 


부모도 힘들도 자녀도 힘들다.

나와 다른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

나와 다른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자녀

부모같지도 않은 부모도 있을 거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엇나가는 자식도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그래도 함꼐 살아가려면

나는 늘 주장한다.

적당한 거리.

모르는 사람처럼 

늘 다를 수 있다는 생각 (어제와 오늘 내마음이 다른데 저 사람은 늘 한결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도데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

어쩌면 서로 외롭고  쓸쓸할테지만

나는 차라리 상처나 배신감보다는 외로움을 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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