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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연습 : 내 아이를 바라는 대로 키우는
신규진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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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을까? 혹시 나의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이 내 아이를 망치는 건 아닐까

그 불안감은 엄마들을 모두가 가는 길로 가게 한다. 그래 남들이 다 하는게 그래도 맞을 거야. 그래서 학원정보를 캐러 다니고 학교 선생님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괜찮은 교재 친구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등등 그렇게 남들이 보면 쓸데 없는 치맛바람을 일으킨다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행동력이 없는 사람도 나름 불안하다.내가 잘 하고 있을까

행동력은 없지만  스스로 걱정이 많은 사람 혹은 적어도 나는 휩쓸리고 싶지 않아.. 하는 엄마들은 아마 교육서를 읽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 혹은 나만 모르는 은밀한 비책이 나온 건 아닌지..늘 궁금하고 불안하다.

 

어쩌면 좋은 부모 섹션의 도서들은 이런 엄마의 불안 심리를 건드리고 다독이는 능수한 세일즈맨같다. 그래그래 잘 하고 있잖아. 괜찮아 너만 그런 건 아니야. 워낙 요즘 애들이 별나야지

하긴 별나다 별나다 해도 그 나이때 다그랬지 뭐.. 어려울 거 없어 아이 마음을 이해하고 잘 받아주면 돼. 물론 부부 사이도 좋아야 하고 양육자의 인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 잘 알지.

불안해서 책장으르 넘기는 엄마를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뭔가 은밀하고 소중한 정보를 줄것처럼 닥오지만 사실 모든 것은 상식이고 일반론이다

하긴 어느시대건  아이를 키운다는 건 늘 있어왔던 일이고 우리 부모가 그랬고 우리가 그러고 있고 나중에 우리아이도 그렇듯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과 신뢰 그 이상은 모두가 중언부언일 뿐ㅇ다.. 거기 조금 요즘 트렌드에 맞는 공부법 진학법들이 양념으로 얹어질 뿐이다.

 

부모는 어떤 대단한 비책으로 자식을 키우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교양있고 바르게 살아가면 그 뿐이다. 어떤 말도 어떤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 아이는 내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행동을 보고 내 뒷모습에서 느끼며 자란다.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여러 매체에서 혹은 우리 이웃에서 보여지는 반듯하고 착한 아이들에게는 늘 반듯하고 선한 부모가 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닌 부모라는 거다.

 

아.. 난 알고 있었는데....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이번에도 또 낚였구나.

육아서가 뭐 대단한 걸 전해 줄리 없는데.. 어짜피 답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데 너무 기본적인것이라 잊고 있었고 그래서 많이 불안했었고 무언가 짧고 강하게 효과를 보는 무언가 요행을 바란 내가 어리석었을 뿐이다. 답은 늘 내 안에 있다.

 

하지만 이런 책이 주는 장점도 있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일깨워주는 것... 아하.. 맞아 이런 건데.. 별거 아닌데  하는 작은 깨달음을 주는 정도.나만 그런건 아니라는 위안도 함께 말이다.

 

사실 이 저자의 이 전 책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대로 큰다" 나 이번 이 책이나 별 다른게없다. 저번 책이 이론이나 서술 위주라면 이책은 개별 사례가 중심이라는 것 두권이 많이 중첩된다.

이제는 아이들의 여러 문제 사례나 고민들이 여기저기 넘쳐나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접할 수 있고 부모된 입장에서 반성도 가능하다. 남의 자식 볼 거 없이 내 자식을 가만히 오래 들여다 봐도 알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아하... 하며 무릎을 칠 만한 건 없다.

 

 

내가 삶이 즐겁고 여유있으면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여유가 생기고 아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 사실 부모는 아이만을 생각하는 존재라지만 내가 우선 되지 않으면 관계가 건강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아이의 건강한 정서와 건강한 관계를 위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다시 얻은 깨달음이다.

 

이젠 제목에 낚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내 아이를 믿고  눈을 맞추자는 것도 또하나의 깨달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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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인 모욕이 가장 고통스러운 모욕이자 모욕적인 고통이 된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없는 인간 자신의 고통을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이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아무 고통도 없는 것처럼 자신을 숨기고서야 비로소 사회에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을 숨겨야 사회에 포괄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유령이 아닌가?

 

아픔과 이로움의 이면에는 그것을 침묵하는 친구들이 있다. 고통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것이겠지만 그만큼 그것에 대해 침묵하는 사람들, 그것을 내밀하고 사적인 것으로 만든 세력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죽음은 침묵을 폭로하는 또는 당사자들에게 그 사실을 인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자살이다. ......

 

                                 우리가 잘못 산게 아니었어... p 180

 

어쩌면 우리가 모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어서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뭐 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긴 해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예요 성적도 좋았고 수업태도도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애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선생님들에게도 관심받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일것이다. 그래서 친하고 싶어하고 부러워하고 싶어하는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고 꽤 괜찬은 아이라고 보는 시선도 잘못된 건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그렇게 반듯하고 성적이 좋고 태도가 좋은 아이에게 그렇게 악마같은 면도 있다는 걸 왜아무도 모랐을까.. 어쩌면 그렇게 대단한 아이이니까 그런면쯤은 인간적인 면으로 그저 하나 있는 단점정도로 넘어가도 되지 않나하고 여겼던 걸까

모두가 맞다 옳다고 하는 상황에서 아니라고 목소리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목소리를 내야하는 아이가 존재감도 없고 성적도 별로고 태도도 좋지 않은 아이라면 누구나 쉽게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니가 질투하니까.. 너랑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그게 어딘데...

그 애가 그럴 리가 없어.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그 나이때는 다그런거 아니야? 그걸 못참아하는 니가 좀 이상하고 튀는 거야..

사람하나 유령만드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다들 한 방향으로 가면서 그게 옳다고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어른이란 후손에게 무엇을 전수해야 하는 지 아는 사람이다. 후손이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이 경험이 삶에 주는 의미를 아는 사람읻. 또한 어른이란 이 지혜를 전달하는 방법 언어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혜에는 두가지 뜻이담겨 있다. 하나는 삶의 교훈이라는 의미에서의 지혜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잘 전달하는 지혜를 말한다. 단적으로 말해 어른이란 후손들이 제대로 잘 경험할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우고 지혜를 건네주는 사람이다. 이 것이 바로 스승의 고유한 역할이자 어른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 그런데 우리 사회를 둘러보라. 우리 사회에 어른은 없다. 어른이 무엇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이 경험을 후손에게 전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없다. 어버이는 존쟇지만 이들은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데 열중하지 자식들이 깨닫고 경험의 주체가 되게 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어른은 사라지고 애새끼와 꼰대들만 남았다.

 

어른들에게는 그저 말잘듣고 성적이 좋기만 하면 다른 모든 것이 좋다고 믿어버리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다. 드러나 보이는 것 자신들에게 편하고 맞는 것이기만 하면 다 옳은 것이고 맞는 것이다. 그 법칙이 뒤집어지는 일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이다.

내 눈에 모범생이 곧 모범생이며 그 이면이란 있을 수없다.

그 아이가 그럴 리 없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참다참다 했을 것이다.

난 내 제자를 믿는다.

그 믿는 제자에 말썽을 피우거나 성적이 좋지 않거나 말안듣는 제자는 없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믿음이 없고 믿어줄 건덕지가 없다, 그들은 또 그들 나륾의 아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것대로 고착화되어있다. 문제아.

문제는 그들이 일으키는 것이고 그들이 조용하면 세상이 조용한 것이고 그들은 절대 살면서 억울하거나 분한 일은 있을 수 없다. 모범생 역시 살면서 억울하거나 분한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어른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보고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수연이가그럴리가 있겠니. 너랑 제일 친한 친구잖아. 보면 항상 같이 다니고 있던데... 그리고 수연이도 너랑 단짝이라고 했단다. 아마 수연이가 메사가 뛰어나다보니 질투도 나고 그랬겠지만 그렇다고 엄한 애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내가 수연이랑도 이야기해 보겠지만 너도 잘 생각해봐. 수연인 니 생각 끔찍하게 하던데...

결국 그애가 옳고 나는 틀렸다.

한번 세워진 기준은 웬만해서는 뒤집어지지 않는다

 

 

지혜는 오래 묵을수록 더 가치가 있지만 정보는 새로운 것일 때만 의미가 있다. 경험이 죽고 스펙터클이 된 체험만 소비하는 사회에서 교육이 겪을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위기다. ..................

체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실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저기로 달려가야하고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과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여유가 들어갈 틈이 없다. 실시간의 행동은 반응이지 실천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른 사건이 찾아오고 마음은 다시 긴박햊ㄴ다. 조금 전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나 가치 실패로부터 사유하고 교훈을 찾아내는 일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대처가 중요하다. 매순간 순간 사라져가는 시간에 매몰되느라 순간은 짜릿할 지 몰라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실시간에는 역사가 없다.

반면 경험의 시간은 지금 여기의 시간이다.  이 실시간 과 지금여기 의 시간은 종이 한장 차이다. 둘 다 지금 벌어지는 사건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경험의 시간은 긴박함이 아니라 충실함과 기쁨의 시간이다. 사유와 교훈의 시간이다. 지금 여기에 충실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의 자체 그리고 산다는 것의 의미이지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경험의 시간은 실천의 시간이다. ...교육의 목표하는 행동하는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공감은 삶을 견뎌나가는 가장 큰 힘이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보호해주지 못하고더 이상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하게되었을 때 허무함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너도 나도 같이 상처받았다 라는 공감이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공감될 때 그래서 내가 그에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인정 받을 때 삶은 살아갈 만한 것이 된다. 이 상처가 나만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처임을 깨달았을 때 시대에 대한 인식이 되고 더불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용기가 될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응원 받는 느끼믈 가질 수 있다.

 

모두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을까. 사실은 나도 무서웠다고.  그애가 아니라면 그 타겟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도 있었다고.. 나도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나쁜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게 동조하지 않으면 나만 도드라져서 쟤는 뭐가 잘나서 저 혼자 튀는 거야? 혼자 잘났다는거야? 저거 미친거 아냐? 하는 말이나 들으며 그 다음으로 내가 타겟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일이 두려웠다고, 그래서 모르는 척  눈을 돌리고 귀를 막고 외며했다고 말이다. 누군가 단 한명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면 다들 공감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나도 그랬다고 나도 입닫고 귀막고 있는 이 순간이 숨막히게 힘들고 싫었노라고

누군가 함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고백을 하고 부끄러움을 털어놓는다면 그래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힘들었어. 나도 무서워서 그랬어. 내가 따돌림 당할까봐 내가 도드라져서 왕따를 당할까봐 무서워서 모른 척 한거야 정말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어쩌면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꼭꼭 숨겨놓은 이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가 점점 아이들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함께라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서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고 이건 옳지 않다는 것 이럴 수록 우리가 모두 함께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텐데,,

서로의 상처를 털어놓는다면 서로의 부끄러움을 털어놓는다면 우린 어쩌면 친구가 되었을 것이고 서로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그 누구도 믿을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고 점점 나빠져갔다.

 

 

우리는 학교에서 관계를 배우기보다는 권력을 먼저 배운다. 아니 관계가 곧 권력이라는 진실을 너무 빨리 너무 일찍 깨닫는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만이아니다. 학생과 학생 사이에도 엄처난 폭력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왕따를 경험한 친구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한 학생은 "어짜피 삶이란 정글"이고 "인생은 폭력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존재했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기억해주지 못하는 유력 같은 존재였다. 때린 교사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일진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상기하면서도 이들에 의해 죽은 사람의 고통은 아무에게도 공감되지 못하고 있었다. p  134-135

 

 

정신의학자 하지현에 따르면 적선을 하는 쪽이 동감이고 거지와 자신 사이에 공통의 운명 같은 것을 직감하고 공포를 느껴 외면할 수 있는 쪽이 공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보고 동감하는 사람은 후쿠시마 주민들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사람이다. 감정이입이 되면서 나는 사라진다. 대신 그 주민들의 불쌍한 처지만 남는다. 불쌍한 마음에 모금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감은 다른 것이다. 공감하는 사람은 후쿠시마를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는 사람이다. 후쿠시마는 단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암흑과 실체를 드ㅓ내는 사건이다. 따라서 공감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이 아니라 공포일 수도 있고 공포에 따른 외면일 수도 있다. 공포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쿠시마를 보는 순간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험사회에 대한 공통의 운명을 직감하게 되고 시대ㅔ 대한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후쿠시마 주민들을 동시대인으로 끌어안게 된다 공감이야 말로 동시대인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능려기다. ..............................................................................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 인간성의 핵에 자리한다. 이것이 공감의 본질이고 윤리의 시작이다. (이언 매큐언)

이자크 디네센은 '모든 슬픔은 고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 이사람이 동료다. 동료란 내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동료란 또한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슬픔에 공감하는 동료가 있을 때 ㄴ 삶이 아무리 비루하더라도 나는 삼이 견딜만하다고 느껴진다. 동료가 공유하는 것이 바로 언어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는 어어가 같을 때 우리는이 친구에게 내가 공감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슬픔을 타인에게 나누어지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공감된다고 느꼈을 때 인간은 자기연민에 빠지고 우울증을 겪게된다. 김상봉은 플라톤이 비극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우울증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울증과 비극은 전혀 다르다. 우울증은 오로지 정신의 허약함만을 드러내어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라면 비극은 고통받는 타인의 자리에 우리들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즉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자기 고통을 초월하고 극복한다.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아이 씨바 졸라 아파 아이 씨바 졸라 아파"

" 와 씨바 졸라 아프겠다"

그냥 욕이라고만 생각했던 씨바와 졸라가 아이들에게는 공감이 신호였다. 이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못알아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와 아이들의 고악ㅁ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뜻을 가지고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뜻이 같아야 공감을 한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난 다음에 ㅡㄴ히 동의한다고 맗ㄴ다 공감이라는 말을 쓸때도 말을 하는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한닥보다는 대부분 말뜻을 이해한다는 의미로 쓴다. 하지만 아이들이 쓰는 씨바와 졸라는 뜻을 통ㅎㄴ 공감이 아니다. 감정의 강도에 대한 공감이다. 내가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재수 없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씨바와 졸라를 통해 드러낸다. 이들에게 공감은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참여한다는 건 의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강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데 유ㅜ리는 이 강도의 문제를 늘 놓쳐버린다.

 

 

현재 젊은이(대학생)들에 대한 비난은 딱 한마디로 정리된다. 비겁하다는 것이다. 청춘의 핵심은 용기인데 도무지 현재의 청춘들 특히 자유까지 특혜로 받은 대학생들이 용기를 부리기는 커녕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말은 곧 이들이 비겁하다는 비판이다. 나는 대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에는 바로 이 "용기와 비겁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이 혼란스러운 불한당 같은 시대에 누가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용기는 영웅적인 개인이 내는 걸까 아니면 집단이 뒷받침될때 낼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우리 시대에 개인 영웅의 출현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용기는 아마도 집단이 ㅂㅇ쳐주는 용기 동지 동료가 있기에 생기는 용기일 것이다. 용기는 서로 부추기는 것이지 개인이초인같은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초인같은 용기는 역사에 전태일 열사처럼 극히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용기란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통해 최소한 아지트라도 있을 때 일어난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학생들이 시위에 나갔다가 최루탄을 맞고 물대포를 맞아 쓰러지면서도 도망가지 안았던 이유는 결코 그들이 용감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나와 팔짱을 끼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놓아주지 않았기때문이었다. 그녀석 역시 내가 팔짱을 끼고 있어서 물대포와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데모가 끝나면 서로 할 말이 있었다. 함께 견뎌냈기 때문이다. 용기란 이렇게 내 옆에 팔짱을 같이 낀 사람이 있을 때 내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에게 공부하는 과정은 공동의 용기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개인적인 고립과 비겁함을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공부하는 것이 동시대성을 사유하고 옆 자리 친구를 동료로 초대하고 더불어 용기를 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우리는 동료를 만나야 할 공간에서 경쟁자를 만난다. 용기를 내야할 순간에 비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한 교실에 앉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서로 두려워하고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면 더 이상 이 곳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함께이기에 용기를 내야하는데 함께여서 나의 비겁함을 감출 수 있게 되었다.

나만 비겁한게 아니라는 것 나만 잘못한건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된다는 거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모두가 침을 뱉을때는 그것이 더럽거나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편리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환경이 더러워지고 누군가가 혐오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심지어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을 우리가 오히려 비난하고 쫓아낸다. 우리는 우리가 되어 힘이 쎄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되어 용기가 생기고 우리가 되어 우리는 일그러져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일그러진 괴물이어서 우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현장의 비참함과 세상의 사악함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가 아니라 공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분노하고 행동할 때는 여럿이 함꼐 하는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때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적이 너무 거대할 때 내 주변엣 나의 분노를 공유할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분누하기보다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혼자라도 살겠다는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예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예상과는 전혀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위에서 말한 학생처럼 말이다. (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역시 세상은 정의고 뭐고 힘을 가지는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저는 더 노력해서 부와 권력을 가지겠습니다.) 내가 이 책에서 공감과 동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동료가 있을 때 마음은 공포가 아니라 분녹 될 수 있다.

동료가 없다면 우리는 각자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 곳에서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찍히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았다면  일단 모른 척 하고 본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금이라도 늦게 비겁해지고 조금이라도 늦게 용감해지기를 바란다. 나는 적어도 비겁이든 용기이든 어디에서건 앞장을 서고 싶지는 않다. 모두가 한마음이다. 그래서 누군가 희생양이 생기면 한숨을 돌리고 모른 척한다. 다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모두에게 공포를 주고 더이상 튀지않고 용기를 내거나 어설픈 정의를 휘두르지 않는다. 납짝 엎드리고 이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중얼거릴 뿐이다.

함께 분노할 필요없다. 괜히 어설프게 나서다가 찍히면 나만 손해아닌가

그러나 변화는 재빠르게 잡아  챌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 모두가 분노하고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임을 느끼거나 그 권력을 쥔 누군가의 힘이 다 빠져버린 걸 느끼는 순간 내 행동을 빠르게 결정해야한다. 지금은 뒤집고 분노하고 함께 손가락질 할 차례다. 내가 말을 안하고 있었지 아는 건 다 안다고.. 나도 생각을 하고 있었노라고 얼른 증명하고 보여야 한다.

비굴하지만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하면 괴롭다동료는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큰 딜레마이다.

관계에는 세심한 배려가 있다, 상대의 아픔이 무엇이고 고민이 무엇인가를배려한다. 그래서 침묵해야 할 것 떠들썩하게 웃어야 할것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것을 현명하게 구분한다. 겉으로 뵈에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겉도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말을 주고 받는 태도에 배려이 에너지가 담겨 있다. 너무 진지하게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움이라고 말하듯 오히려 의도적으로 무의미한 이야기와 농담과  엣일을 다시 끄집어 낸다. 에로티시즘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다. 배려다 무의미를 견뎌내고 즐거워해야하는 배려 말이다, ................... 관계를 만드는 것으 의미가 아니라 의례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라 의례의 공동체 몸의 공동체가 더 오래간다. 살은 의미가 아니라 무의미 안에서 의례처럼 반복된다.

 

세상의 모든 의미가 중요한건 아니다.

무의식적인 것, 가벼운 것 건성건성 건들거리는 것 그런 것들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충분하다. 매사가 진지하게 무언가 도움이 되거나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건 강박일 수 있고 상대도 부담스럽다. 그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편하게 지내는 것 부담이 없는 것 그리고 어제가 오늘 같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오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무의미함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힘을 빼는 것.. 준비하고 긴장하는 마음을 푸는 연습이 필요하다. 살아가려면..

아이의 이야기에 매사 의미를 찾고 내가 도와 줄 것이 없는지 진지하게 대하지 말아야겠다.

아이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상대가 너무 진지하게 들어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었나.. 그 때의 내 행동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어쩌면 아이를 진지하게 성실하게 대하고자 하는 내 행동이 아이를 더 움츠려드고 소심하고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냥 편하게 흘려듣듯이 하지만 모든 걸 다 듣고 있다는 태고를 갖는것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는 건 매사가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오늘은 실수 하더라도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

 

 

삶의 종말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당연히 삶이 있다. 담ㄴ 그 삶이 우리가 알던 삶과 차이같지 않은 창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차이 같지 않은 차이에 실망하는 대신 그대로 우리 삶에 충시라면 된다. 스스로 삶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대하다 삶이 비참하기에 삶은 더 없이 위대하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비참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진짜로 비참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힘들고 괴로워도 바짝 엎드려라도 살아있으라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유령이라고 여기더라도 비굴하게라도 견뎌라..

그 끝이 비록 그 앞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견딘 시간 만큼의 무언가 달라진 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허무하게 용기를 내는 것 보다 가끔은 비굴하고 비겁하게 비티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버티면 이긴다. 단순무식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일은 분명하다. 우리 살을 바꾸려고 하지 말자. 다만 우리 살을 옹호하자 무엇보다 비참하지만 이 비참함을 같이 껴안을 동료가 이다면 삶은 위대하다 아니 삶은 끈질기기에 위대한 것임을 이 삶의 끈지림에 충실하자 두더지의 힘은 충실함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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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를 키우는 철학자가 늑대와 함께 생활한 10여년간을 되돌아보며 쓴 책이다.

늑대를 키우며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철학자답게 철학적으로 풀어놓으면서 영장류중의 영장이라고 여겨지는 인간과 늑대를 비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미개하고 야만적이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야생의 늑대에게 존경할만한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해주고 인간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책을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추천을 받고 읽었다.

 

예전 어떤 인터넷 카페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바닷가로 놀러갔는데 어떤 무지하고 생각없는 사람이 개를 데려와서 함께 해수욕을 하더라

사람이 노는 물에 어떻게 개를 함께 데리고 와서 함께 해수욕을 할 수 있느냐 는 글이었는데

그 댓글에는 놀랍게도 그 사람이 파렴치하다 너무나 공중도덕을 모른다. 어떻게 사람이 맨몸으로 들어가는 물에 동물이 감히... 뭐 그런 글이 많이 달렸다.

순간 갸우뚱했다.

바다가 사람만의 것일까? 물론 사람이 개발하고 가꾸고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하게 한 점도 있겠지만 태초에 바다가 생겼을 적에는 이곳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정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적인 수영장도 아니고 바다라면 개가 들어온다는게 뭐 대수란 말인가

설령 그 개가 떠돌이라서 너무 더럽고 비위생적이라 함께 도저히 즐길 수 없다는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사람이 키우던 반려견이라면 그 사람들이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나름 씻고 닦고 하며 키우던 개가 아닐까 그런데 사람은 되고 개는 안된다?

나는 동물 애호가도 아니고 개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리고 내가 노는 바닷가에 개가 오면 조금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렇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그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하지는 않을것이다. 개도 바다에서 노는구나 하고 처다보긴 했을 것이다. 아 나는 개만도 수영을 못하구나 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고 내옆으로는 안오길 내심 바라며 조금 떨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가 못들어오는 바닷가라...

하긴 캠핑을 가도 물놀이하는 계곡에 개가 들어오면 기겁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감히 개가..

그때 문득 생각했었다 이 지구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주인이엇던가?

누가 사람이 주인이라고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는 부수적이며 사람에게 맞추지 않으면 혹은 위협을 가하게 되면 가차없이 멸종되고 이용되는건가? 왜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람이 되었나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부끄럽지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늑대를 키운다

그러니 늑대라니.. 늑대를 키운다는 건 더 터부시할 사람들이 많지 않겠는가.

게다가 야생의 늑대를 개처럼 키운다는 건 늑대의 권리를 박탈하고 몬능을 억제하는 비인간적인 처사가 아니냐는 말까지 듣게 된다. 하지만 이미 문명화된 현대에서 늑대의 야성을 제대로 발휘하고 보호받을 곳이 지금 어디 있을까 자연방목이라는 이름하에 아예 울타리밖으로 세상밖으로 쫒아 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저자는 거기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이해시킨다.

늑대 브레닌의 행복이라는 명제하에 그도 훈련을 받고 문명에 적응하며 사는 것 그리고 그의 행복을 공생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지켜주기만 한다면 브레닌도 사람도 함께 행복할 수 있다.

 

다음은 본능적으로 토끼 사냥을 하는 브레닌을 묘사한 것인데 .. 사실 여기서 나는 보통의 인간보다도 더 숭고한 늑대를 보았다. 

 

..........브레닌의 인내심은 정말 놀라웠다 대부분의 시간을 땅에 엎드려 있었고 근육은 긴장시켜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한 채 주둥이와 앞발은 토끼에게 향해 있었다. 토끼가 한눈을 파는 사이 몇 센티미터쯤 다가간 뒤 가만히 엎드려 다음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다음 단계로 진행되지 않는 한 얼마만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브레닌이 15분 동안 기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은 엄청난 단거리 가속력과 급습에 능한 자기 장점이 토끼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는 장점보다 더 크게 작용하도록 상황을 정비하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토끼는 그보다 휠씬 앞서 브레닌이 접근하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토끼가 눈치 챈 것을 꺠닫는 순간 브레닌은 전광석화와 같이 토끼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대부분은 빈 손으로 돌아왔다.

브레닌이 사냥을 할때 행복했다면 녀석에게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사냥에는 긴장의 고통과 정신과 신체의 의도적 경직 공격하고 싶은 열망과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갈들이 존재한다. 가장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억제해아 하는 것이 사냥이다. 브레닌이 느꼈을 고통은 토끼를 항해 은밀하게 접근할 때 부분적으로나마 완화됐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멈추면 똑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이거시 행복이라면 행복은 황홀경이라기 보다 고통인 것이다. .......................................................

행복은 즐겁지만은 않다. 동시에 매우 불편하다. 이것은 내게도 브레닌에게도 마찬가지다. ...고생해보지 못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그 가치를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불편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행복 자체가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이는 행복의 필요조건으로서 다른 방식으로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 즐거움과 불편함이나 하나 되어야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한쪽을 헐어내면 모두 허물어지는 구조물처럼 말이다.     p 214-216 

 

 

 

나는 길게 펼쳐진 잔디ㅣ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쫒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삶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쫒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도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현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하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이후 무수히 많은 불편한 순간들이 내 앞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삶이란 하루하루 일상이 반복되는 그 지루하고 변치않음에 가치가 있다. 행복하냐 불행하냐는 감정은 그 안에 포함되어있는 일부인 감정일 뿐이다. 하루를 살아내고 그 안에서 경험하고 판단하는 것 느끼는 감정 등등의 소소한 것을이 쌓여가면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살아내는 일상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위대하다.

어쩌면 나도 하루하루 행복한 걸 알지 못하고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감정이 좋지 않고 즐겁지 않다는 이유로 지금의 곤란함과 귀찮음 불편의 가치를 모르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고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 언제나 어제와 다름없는 평온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걸 늑대가 혹은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동물들이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다른 동물과 비교해보면 인간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의 모습에 대해 어떤 비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그에 따라 얻게 되는 경력에 열심인 이유이다. 우리는 투자한 교육에 비해 일을 해서 얻는 보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고 있다. 전문 교욱자인 나 자신만 해도 배움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인양 연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와 경력쌓기에 열심이다. 어떤 특정한 것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욕망들은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는 충족될 수 없지만 능력이 있고 운이 따르고 열심히 한다면 특정한 시간내에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공부이든 직업과 관련이 있건 없건 비젼있는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행위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간다. 이 같은 욕망을 가지려면 미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미래를 미래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우리가 죽을때  잃는 것은 우리 삶에 투자된 것들로 설명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에 원하는 미래상을 그리며 인내하고 갱신하고 전진하고자 현재의 삶에 다른 동물들보다 더 많이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보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인간에게 죽는 다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더 가혹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읫 ㅏㄻ은 다른 어떤 동물들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기 때문에 인간이 더 우우얼하다는 결론인 것이다.

.............................................................................................................

.................................................................................................

죽음은 인간이 늑대보다는 더 큰 비극일 것이다. 여기서 저지르는 실수는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 인간의 생명이 동물들의 생명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이다. 죽을 때 더 많이 잃는 다는 것은 우월성에 대한 징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저주받은 것이다. 왜나하면 이러한 의미의 죽음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개념 속에는 삶의 의미를 쫒는 우리가 있다.

 

에니메이션 "늑대아이" 가 있었다.

반인반수인 늑대인간이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두 아이를 남기고 죽음을 맞는다. 영화 전반부에 등장하는 그 늑대는 정말 멋있었다.

뭐랄까 인간중에도 그만큼 고귀하고 진실한 남자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

어떤  속임수나  눈속임 없이 (하긴 늑대인데 인간으로 살아가는것이 속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희노애락을 순수하게 표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한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인지 사냥을 하는 본능때문인지 한마리의 새를 잡으려다 죽게 되지만 그 죽음도  하천에 빠지는 죽음이지만 찌질하지 안고 당당하다.

그리고 두 아이 중 늑대의 본성을 따르는 아메도 아비를 닮았다.

인간이고 싶어하는 유키가 어쩔 수 없는 거짓 예의를 위한 속임을 이용하면서 괴로워하지만 아메는 늘 잔잔하게 자기의 본능에 충실하다.

그 에니메이션의 아빠 늑대나 아메가 브레닌과 닮았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했다.

아메가 제어미를 하여금 아이를 놓아주어야 하는 순간을 꺠닫고 마음을 비우는 걸 배우게 했다면 브레닌도 저자에게 인간의 한계 그리고 언제부터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하며 인간이 가지는 인간 시선의 여러가지 성품이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살아가는 늑대

기쁨과 괴로움이 공존하는 행복을 인지하고 그걸 즐기는 늑대

아무런 속임수도 어떤 수도 쓰지 않는 순수한 늑대의 모습을 보이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면서 여기에 몰입하는 것 그리고 내 마음에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어떤 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잇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의 가장 약자까지 아우를 줄 아는 선이고 도덕이라는 것을 배운다.

 

세상의 어떤 멘토보다 한마리의 정직하고 순수한 동물이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것도

 

 

 

늑대 한마리가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야성이 아니라 문명에 익숙해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고 믿는다.

브레닌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졌고 문명에서도 야성을 잃지 않고 살았고

아마도 행복했을 것이고 주인 (혹은 알파 수컷)을 좋아했고

행복이라는 것이 감정적인 긍정상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어떤 계략도 속임수도 없이 순수하게 본능에 충실한 행동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늑대

나도 그런 늑대 한마리를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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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다고 인생이 변하거나 뭔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일은 절대 없지만

그래도 뭔가가 조금씩 조금씩 내면에 쌓이면서 무게를  가지는 일은 생기지 않을까

내가 책을 읽고  내 아이들이 책을 읽기를 권하는 건

그것으로 논술을 잘 써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점수를 받고 성공했으면 하는 속물적인 욕심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혼자만의 위안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고 외로울때 뭔가 위로가 필요할때 누군가 없을 수도 있다.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견디고 용기를 내고 숨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외 다른 여러가지 다른 것들이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겠지만 그래도 책읽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책읽는 시간만한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한창일때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인문학을 뒤집어쓴 자기계발서겠구나.싶었다.

그의 전작 "책은 도끼다"를 읽었는데 누구나 하는 평처럼 참 좋다기보다는 참 자기 주관을 소신있게 그러면서 설득력있게 썼구나 싶었다. 그 책을 읽고 예전에 읽었던 김훈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았다는게 나름 수확이었다. 역시 김훈이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책을 많이 읽기보다는 한두권이라도 꼼꼼히 읽고 다시 읽고 내 영혼을 흔들어주는 책을 가지는게 좋다는 그런 교훈(?)을 얻기는 했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보다 하나라도 깊게 알고 공감하고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테니까

 

그리고 "여덟단어"를 읽었다.

전편도 그러하듯이 강연을 엮어서인지 책이 쉽게 읽히고 잘 넘어간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왠지 이렇게 말할거 같은 말투가 느껴지면서 그의 강연에 가있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자존

본질

고전

현재

권위

소통

인생

 

솔직히 마흔넘어 더 이상 어디서 교훈을 찾으랴 싶었는데  나는 읽는 동안 참 착한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고 감동했다. 부끄럽지만

내가 좀 더 나이를 덜 먹었을 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조곤조곤 (왠지 말투가 조곤거릴거같았다) 이야기 해주고  조언했더라면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까? 뭐 대단한 것이 바뀌진 않았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라든가 작은 습관하나쯤은 바뀌지 않았을까 싶었다.

사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라

껍데기나 누군가 나밖의 세상이 세운 기준이 아닌 나 스스로의 중심과 본질을 찾아 집중하라

고전을 읽고 들어라

세상을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보라

현재를 즐겨라

동의되지 않은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돈의 힘에 복종하지 말자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소통하라

인생은 하루하루 작은 완성

이 만들어내는 큰 그림이다

등등  누구나 알지만 그래서 사소하게 여겨지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혼자 감동했다.

왜냐하면 이건... 내가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내가 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내가 잘 행하지 못하지만 내 아이들은 하기를 바라는 조금 모순된 일이지만 그만큼 보편적이고 꼭 필요한 삶에 대한 자세라고 생각했던 것이니까

책의 세부적으로 들어가 몇몇의 예들이나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등은 작가의 주관적인 면이 많이 들어가므로 조금 불편한 것들도 있었다. 클래식을 몰라도 그림을 잘 알고 즐기지 않아도 그래도 무언가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있을거라고 생각하기때문이다. 만화를 보고 잡지를 뒤적이면서 혹은 공원길을 걷고 아이의  엉성한 그림속에도 감동할 수 있고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유명한 그림을 알고 클래식을 듣지 않아도 느끼는 정서는  있고 그것이 더 천하거나 낮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세세한 점은 두고 전체적으로 저자가 하고싶은 말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리고 읽기도 어려운 편이 아니므로 누군가 부모대신 또다른 멘토가 있어 내게 이런 조언을 해준다는 기분으로 내 아이에게도 권하고 싶다.

어쩌면 지금은 무슨 이런 고리타분한 말을.... 하면서 몇줄 읽고 내팽겨칠 수도 있다.

(어제밤에 꼭 읽어보라고 줬더니 소파위에 던져놓고 들어가더라)

아직은 와닿지도 않을 것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렇게 멋지지 않은 내부모와 비교하며 우울해하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살았던 경험으로 이런 조언을 조금 일찍 듣는게 어쨌거나 도움이 될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를 존중하는 것 본질에 충실하는 것 권위에 눌리고 두려워하지 않는것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가장 좋은 말은 인생편에서 제발 꿈을 꾸지 말라는 말이었다.  대입이든 고입이든 자소서에 나의 꿈을 정하고 그에 맞추어 여러가지 스펙들을 꿰어나가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린 지금 아직 하고 싶은게 없고 되고 싶은 게 없다는 것만으로 기가 죽고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내 아이에게 혹은 나에게 뭔가가 되고 싶은 꿈보다 하루하루 알차게 메워나가는 일이 더 조중하다는 말 꿈은 다양하게 바뀔 수도 있다는 말 그리고 차선책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말을 아이가 이해하면 정말좋겠다)

 

빌려읽었는데 사야겠다고 생각했다면 괜찮은 책인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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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친정에서 책정리를 했다. 아버지 유픔을 정리하면서 책들이 처치곤란이라는 엄마 하소연에 하루 다니러 가서 나름 정리를 했다.

많은 전공서적은 어쩌지 못하고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아버지가 모았던 그리고 우리가 보다가 남겨둔 책들을 정리했다.

왠만하면 내가 다 챙겨오고 오래된 백과사전이나 다시 볼거같지 않는 책들은 정리해서 버렸다.

하나하나 정리하는 중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왔다.

 책표지를 싸고 있는 " 이화서적" 포장지.

이미 누렇게 변한 곳이 군데군데 보이는 그 책은 내가 87년 대학에 들어가 첨 산 책이었다.

이걸 수업중에 들었던 기억은 없다.

참고문헌 맨 위에 있었고 학회 공부하는 목록에도 있어서 함께 읽었는지 혼자 읽었는지 기억도 가물한... 그저 기억하는 건 " 역사는 과거의 현재의 대화다"뭐 그런거...

한참 고민하다가.. 이제와서 뭐... 하고 과감하게 정리했다.

 

대학와서 처음 산 책이 "역사란 무엇인가" 였고 처음 리포트를 쓴다고 읽었던 책 그래서 첨으로 썼던 리포터가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쓴 것이었다.

그때 어떤 느낑믈 가졌고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다.

생각보다 책은 재미있게 넘어갔고 머리속에 들어오진 않고 이마에 붙여놓는 수준의 이해나마 남북분단이나 이념에 대한 것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회색인간 주인공이 생각날 뿐이다.

 

읽기 시작한 책에서 나도 그렇게 나의 푸른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책 사고 펼쳤던 그래서 조금 지루하고 어렵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읽어내렸던 그 책들을 다시 만났다.

그는 이 책들을 어떻게 만났는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서평은  서평을 읽고나면 그 대상이 되는 책을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읽은 책이라도 다시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책이 또다른 책을 부르고 또다른 생각거리를 만들어내고 또다른 감동을 갖게 하는 것

 

나쁜 서평은 그냥 아하.. 이런 책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책장을 덮으면 끝

그리고 내가 읽은 책이 나오면 스킵하는 것

 

이 책은.. 조금 위험하다.

누구나 이야기하듯 서평의 독후감의 최고봉이라는 건 인정한다.

흔히 말하듯 고전이란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래서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이란다.

너무 잘 알아서 마치 읽은 듯이 착각하게 만드는것

많은 해석이 있고 인용이 있고 여기저기서 줏어 들은 게 많은 책이라 마치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하지만 한번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것

저자는 자신이 젊었을 때 읽은 책을 다시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경험치나 사고가 너무나 이해가 쉽고 공감이가고 쏙쏙 정리가 되어서..

사실... 이것만 읽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다.

굳이 원서를 읽지 않아도....

어렵고 지루하기만 한 사기나.. 종의 기원 따위를 읽지 않고 이렇게 지나다고 어디가서 잘난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드는 것이...

그래서 위험하다.

책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고액의 쪽집게 괴외를  받고난 직후같은.. 이제 모든 걸 알아서 하산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수만 떠오른다.

고로 참 좋은 책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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