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한 번 넘어진 모퉁이에서 다시 넘어지는 일이 빈번하다.

한 번 경험했다면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은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행동이겠지만

한 번 이상 모퉁이에서 넘어졌다면 이제 모퉁이만 보면 넘어질지 모른다고 긴장하고

그 긴장감이 다시 넘어지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이가 매번 같은 모퉁이에서 넘어지고 있다.

다만 이젠 그 모퉁이를 주의해야 한다는 걸 안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다만 살아가면서 그 모퉁이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니까....

왜 그 모퉁이를 지나가냐고 다른 길은 생각하지 않냐고 아이를 탓하기도 했고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거나 그 모퉁이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다른이들과 비교하며 윽박질렀지만 그건 정말 소용없는 짓이다.

그저 그 모퉁이를 돌때 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고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미리 무릎 보호대라도 준비해주는 것밖에...

살면서 몇번의 모퉁이를 돌아야 할테고 늘 혼자 그 곳을 돌아야 할테고

그 모퉁이를 없앨 수도 없다.

아이가 크면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 뿐이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예쁜 표정을 유지하면서...

괜찮다고 하면 괜찮다고 같이 말해주고

괜찮지 않다고.. 괜찮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래도 된다고 하고

모퉁이를 미워 어쩔 줄 몰라하면  함께 미워하고 욕하지만.. 그래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책을 읽을 뿐이다...

 

 

 

 

 

 

 

 

 

 

 

 

 

 

 

저자가 제각각 관심분야를 독립영화로 찍는 다른 동료들을 인터뷰해서 책을 엮었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노동자 군대문제 동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했던 나름 분야에 대해 전문가이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나는 그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는데

책의 구성은 저자가 자기 생각을 풀어나가면서 인터뷰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처럼 들어간다.

저자의 생각도 건강하고 좋지만  인터뷰를  했다면 그들의 생각들을 조금 더 깊이 듣고 싶었다.

                                                                                 

우리가 혐오를 반대하는 잉는 자명하다. 혐오는 인간의 존엄성을 사산조각내고 그 사람을 하찮게 여기도록 한다. 차별과 혐오는 바늘과 실이다. 누군가를 차별하면 그 대상을 혐오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차별당하는 사람을 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차별과 혐오는 악순환이다.

우리가 혐오에 짐식되지 않고 혐오와 싸워 이길 유일한 방법은 타자에 대한 공감뿐이다. 고감이란 내 주변에 항상 있지만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혐오하는 사람들이 낯선 타자나 이방인이 아니라 실은 나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개우치는 것이다. 공감할 수 있다면 소통할 수 있다. 소통하면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면 더는 혐오할 수 없다. 그런데 고감 없는 이해는 오만한 해석이 되기 쉽고 이해없는 공감은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므로 공감하려면 알려는 의지가 즉 상대방을 이해햐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머릿말에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과 누군가를 혐오하는 일은 다르다.

사람이 세상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을 뒤집어 말하면 모두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다. 내 감정에서 내 정서에서 내 상식에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기도 한다.

그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다만 내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공공연하게 떠들면서 누구든 그 대상을 미워하도록 만든다면 그건 혐오가 된다.

사실 나는 아직 불법 이주노동자가 두렵고 개인적 양심때무에 병역을 거부한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여자가 다 성녀이거나 창녀가 아니듯이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이 한남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사람이 아니듯 외노자라고 다 흉악범죄자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인식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

요즘 많이 언급되는 "청년경찰"에서의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문제라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대림동을 가거나 외노자와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그럴 기회도 많지 않겠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그들이 무섭다

책에는 중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시끄러워지고  다툼이 일어나고 그 다툼이 그냥 주먹다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칼부림으로 이어진다면서 그렇게 사건이 일어나도 순식간에 피해자도 가해자고 그리고 뿌려진 핏자국도 사라진다고 했다. 그만큼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불법 체류자이기때문에 집혀가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차별받아서 내면에 두려움이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왜 하필 소소하다는 다툼조차 칼부림이 나야하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외노자에게 쉽게 "니네 나라로 가라"고 하거나 외국인 신부들의 주민증 발급을 거부하는 남편들의 이기심등을 들으면 참 인간으로 할짓이 아니다 라고 분노한다. 외국인이라고 피가 붉지 않은게 아니라는 말처럼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반응은 오원춘 사건이나 떠도는 장기밀매 이야기들이 더 가깝다. 그들로 인해 거리가 더러워지고 다니기 두려워지는 일이 우선이다. 이것조차 혐오라고 생각을 하면서 쉽게 그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군대문화는 이미 군대만의 문화가 아니다. 그건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모두 통용된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군대 경험 혹은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가 가장 지루하고 거부감드는 주제라는 것에 동의하고 세상의 질서가 군대처럼 억압적이고 상명하달이라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낀다. 군대가 인간성을 말살할 수 있고 폭력적인 문화가 어쩔 수 없이 강하다것도 안다.그럼에도 나는 개인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누구도 자진해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군대다. 연예인 누구누구가 해병대를 가고 어린 나이에 군대를 자원했다는 이야기가 미담처럼 나올 수 있는 것도 그만큼 가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 더 크다는 반증이 아닐까 . 할 수 있다면 누구나 거부하고 싶지만 병역의 의무라는 것때문에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하는 거라는 것때문에 누구나 참고 기왕이면 좋게 가고자 할 뿐이다.

누군가의 종교상의 이유가 그리고 폭력과 군대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양심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가고 싶지 않아도 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음도 존중받아야 한다. 나도 가서 2년을 뺑이 돌았으니 너도 가야한다. 너만 빠지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폭력에 무감해서 그 문화애 대한 예민함이 없어서 갈 수 밖에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양심이 나의 의무와 충돌할 때 결국 병역대신 처벌을 받아 감옥에 가는 것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지 ,,, 사실 여자라서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 군인아저씨가 아니라 군대간 아들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면서 누군가는 가장 빝나는 시기에 혹은 내가 가장이 되어야 하는 그 사간에 그냥 오롷히 흘렬 버리도록 감내하는데 누군가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든다.

 

나는 혐오가 어떤 것인지 잘 안다.

나보다 약한 대상에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혐오다.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이나 제도는 다른 것인데 그 적확한 대상에게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가장 만만하고 쉬운 상대에게 그 화풀이를 한다. 죽어라 한놈만 패는 것처럼 그렇게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대상을 미워하고 증오한다.

내가 취업을 못하거나 모든 욕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건 잘못된 경제의 흐름이거나 제도의 부재때문일텐데 그건 너무 어렵다. 다만 내 옆에 그저 남자 말이나 듣고 고분고분해야할 여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나와 경쟁하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희 나라에서 살지 왜 이 한국까지 기어와서 일하려는 외노자들이 나의 경쟁상대가 된다.  내가 가진건 신체 건강한 군필자라는 것  사내라는 것인데 이제 세상은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들을 원한다. 남자라는 존재가 더 이상 한가지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이 역겹고 성소수자의 취향은 변탵스럽고 병적인 것이 된다. 장애인은 그저 돌봐주어야 하고 복지예산을 가져가는 짐스러운 존재다.

그들이 내 앞길을 막는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나를 화나게 한다. 그래서 밉다

그래서 싫고 사라졌으면 내 앞에 납작 엎드렸으면 한다. 그런 마음이 나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좀 더 과격하게 드러내고 공격한다.

그 모든 약한 존재가 사라지면 나는 편할까?

외노자가 사라지고 모든 아들들이 군대를 가고 나면 내 마음은 조금 더 편해질까?

모르겠다.

 

혐오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금의 교양과 상식만 있다면 세상에 많은 혐오를 알 수 있거 거부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교양있는 사람이니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금 더 진보적이고 조금 더 꺠어있는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내 마음은 조금 불안하다. 그들이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는 욕심과 알고 이해하지만 그건 나와 그들이 다른 바운더리에 있을때 이야기이지 나와 함께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나누어야 하는 순간이랴면  비겁하게도 나도 자신은 없다.

그래서 자꾸 이런 책을 읽는다.

모두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진부해져버렸지만./ 그래도 읽어서 자꾸 내 마음을 다시 다독일 필요가 있다.

내 속의 미움이라는 감정이 언제 불쑥 혐오가 되어 튀어나올지 나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사회를 인간 이상으로 확장해서 동물권에 대해 이야기해 준 6장은 새로운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누구나 다 아는 유괴사건이 있었다.

아이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의 비명소리 아이의 겁에 질린 표정이 찍힌 사진이 집으로 오지만 아이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범인도 알 수 없었다. 친구 아버지가 용의자로 몰렸지만 정황이 충분하지 않다.

49일 후 아이는 돌아왔다.

아이는 49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두가 아이에게 그때의 일을 묻지만 아이는 그저 집을 나가기 전 토요일에 본 주말의 명화가 기억의 끝이고 중간의 49일은 통째로 사라졌다.

아이는 자기가 기억못하는 그 49일을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주위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이 더 두렵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할지 이미 답을 정해놓고 다그치는 사람들이 무섭다. 아이네는 이민을 갔고 성인이 되어  모두가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아이가 유괴된 49일간 사라진 또 한명의 아이가 있었다.

 

이야기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아는 사건안에 아무도 모르는 기억이 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내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단지 살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기억을 지운다. 없던 일처럼 만들어버린다.

어른이 된 두 소녀는 가장 아픈 그때의 기억이 없다.

그러나 그 기억은 예고도 없이 돌아온다.

그것도 완전한 형태가 아닌 퍼즐조각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조각난채로 내게 두서 없이 돌아온다.

소녀들은 용기를 내어 기억을 직면한다.

아파서 잊었던 기억을 아프지 않게 위해 다시 꺼집낸다.

살기 위해 잊었던 것을 이제 살려고 기억해내려고 한다.

직면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그 깊은 망각속에 어떤 괴물이 어떤 모습으로 숨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 망각이 내 것이지만 내 속에 숨은 깊은 우물이지만 나는 나의 우물을 들여다 보는것이 제일 무섭다. 그러나 봐야 한다. 내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걸어가고  빛을 향해가기 위해서 봐야 하는 것이 그 우물이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속에는 괴물도 있지만 그 괴물은 생각만큼 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젠 작은 개구리가 되어 내가 충분히 마주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기억하지 않은 나는 내가 아니다

군데군데 지워져 버린 모습은 나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다.

나를 구성하는 건 뼈와 살과 피와 함께 나의 기억들이다.

누구도 이젠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만은 나를 알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모른다면 나는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 힘든 고통은 잊고 싶다.

사라져서 아무도 아니 적어도 나만 몰랐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다면 깊이 쑤셔 놓아도 괜찮다

다만 너무 늦지 않게 그렇게 방치하고 감춰둔 것을 다시 꺼내야 한다.

그건 괴롭고 무서운 것만 있는게 아니라 가장 여리고 보드라운 내가 함께 견디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일이 기억하는 일이다.

단순하지만 몰입감있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청춘시대2>의 등장인물 중, 데이트 폭력 피해자 예은이 있다.

전편에서 폭력을 경험하고 생존했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학교를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밤길 남자. 혼자 다니는 것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 모든게 두렵지만 무엇보다 그런 피해를 당한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빴기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다.그건 타인이 쉽게 내뱉는 말일 때도 있고 나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피해자인데 내가 가장 상처입고 폭력을 당했고 살아남았는데 그는 멀쩡하게 죄값을 치르고 캐나다로 가버렸고 나는 여기서  두려움을 눌러가며 타인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한다. 게다가 험한 뒷담화도 내몫이고 남들의 편견이나 의심도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한다

폭력자체도 두려운데 그 폭력에 젠더가 개입하고 남녀 관계가 얽히면서 문제는 이상하게 꼬여간다. 때린놈은 나쁜 놈 맞은 놈은 당한 놈이라는 칼로 딱 잘라버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도데체 어떻게 행실을 했길래..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의심부터 이제 남사스러워 어떻게 살래? 이제 걸레잖아. 하는 혐오까지 모조리 피해자의 몫이다.

폭력을 당해서 살아남아도 또다시 잔펀치들이 훅훅 들어온다. 그땐  배려라거나 관심이라거나 충고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오지만 그것도 폭력이다.

드라마 흐름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은이 언제나 겁에 질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메들과 웃고 똑 소리나고 얄미운 조언을 하기도 하고 괜찮아 보일 때도 많다. 이제 시간도 제법 흘렀고 잊을 만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참 많이 애쓰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닌척 괜찮은 척...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남들에게 폐끼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강화길의 소설들을 읽으면 모든 인물들이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

모두가 아프다. 과거 폭력의 경험이 있고 버림받은 기억이 있고 남들에게 뒤쳐졌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더이상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고 내 자식에게 그런 낭패감을 물려주고 싶지 않고 관계에서  소외받고 싶지 않다. 모두가 힘들고 아픈데 관찮은 척 한다.

아무렇지 않은 말간 얼굴고 남의 일인것처럼 그림자를 못 몬척 하고 애를 쓴다.

모두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아프다고 악! 하고 소리지르며 주저앉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괜찮지 않고 남들보다 뒤떨어지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어버릴테니까 절박하게 괜찮은 사람인양 미소짓는다.

그 미소가 슬프다.

사실 단편들을 모두 읽지 못했다.

처음 나온 <호수 - 다른 사람> 을 읽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 읽고 싶었다.

이후 몇편을 더 읽었지만 모두가 너무 힘든 인물들이었다.

괜찮다고 위로하기엔 그 위로가 어줍잖아질 것같이 모두가 제 고통속에서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웃고 있었다. 위로를 거부하는 얼굴들이다.

<호수- 다른 사람>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해야할 일을 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순응이 아니라 차라리 폭력일지언정 세상을 향한 저항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들이 아프다고 말하고 나를 치료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건 강화길보다 더 강하다.

첫 단편부터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럴거야.... 이럴지도 몰라.... 이러지 말았으면..... 그것만 아니었으면..

하는 사건들이 쉴 틈도 주지 않고 훅훅 치고 들어왔다.

여자가 당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종합셋트처럼 펼쳐진다.

감금 강간 폭력  비하. 혐오. .....

그러나 록산 게이의 여자들은 그 모든 상처를 직면하고  다시 일어선다.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고 그대로 주저 앉아도 그만일 상황에서 모두가 다시 일어서고 현실을 마주한다. 모두가 약한 여자들이었지만 동시에 강한 여자들이다.

어려운 여자란... 어려운 일을 경험한 여자들이지만 어떤 폭력에도 쓰러뜨리기 어려운 여자들 강한 여자들이란 의미였을까?

마지막 단편은 저자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에서도 봤던 에피였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멋진 책을 써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약하고 쉽게 부서질수 있는 존재지만... 무언가 부서줬다고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리는 존재는 아니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내가 경험한 기억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직면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누구를 미워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따돌리는 혐오는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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