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을 옹호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나는 모든 불평등에 분노한다, 차별, 그리고 그로 인한 불편과 피해 고통 억압은 저항의 대상이며 교정되어야 한다,

이것과는 별개의 논의다, 다만 이 글에서 문제 제기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차별 기준이나 개념 자체가 차별을 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차별을 시정하는 것만큼이나 차별 현상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작업의 '해방적' 의미에 대해서이다,

차별은 불평등이 아니라 다름으로 재개념화 하는 것은 차별의 기준과 내용을 누가 정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상대방이 차별한다 해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억압자가 의도한 차별의 효과는 이익을 보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차별에 대한 다양한 실천도 가능하다, 차별 가해자에게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투쟁도 필요하지만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한 저항이다,

일상에서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세게 공용어가 영어라서 미국사람들은 행복할까? 요즘 미국인에 대한 정의는 1개 국어를 쓰는 사람이다, 미국의 문맹율이 전 세계 최고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이 살벌한 글로벌 경제에서 1개 국어만 해도 먹고 사는데 별 지장 없는 무식한 사람들은 미국인 밖에 없다,  (중략)

한국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노동자는 대개 모국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보통 한국인보다 언어능력이 뛰어난 그들을 우월하다거나 지식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어는 구경도 못해본 대개의 미국인이 영어잘하는 한국인을 대하듯 말이다,

탈 식민 햏방이란 지배 세력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정의하는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의 시선으로 나를 정체화하고 그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상대화 하는 것 서울을 기준으로 삼지 않은 것 서울을 안식의 참고문헌에서 제외하는 것 서울을 왕따시키는 것 서울과의 거리로 지기 지위를 판단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사실 중의 하나는 "평등"이 대개는 흡수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울이든 미국이든 남성이든 후리가 흔히 중심이라고 불리는 경계선 그 집단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집단 내부는 결코 균질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이 다 같은가? 미국 내부의 차별이 얼마나 많은가? 남성 내부의 차이는 남녀간의 차이보다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같아짐을 의미하는 평등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 이전에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다,

 

                                          - 차별의 효능- 중

 

 

 

저항이란 무엇일까 이기는 것인가? 인간다운 것인가? 정의인가? 단도직입적으로 약자가 저항하면 이익을 보는가? 아니면 약자는 도덕적이어야하므로 이익보다 대화를 추구해야하는 가? 윤리적 사법적 문화적 차원에서 저항의 개념은 모두 다르다, 이 불일치때문에  피해자들은 저항하면 할수록 2차 3차 피해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약자들이 저항할 줄 몰라서 저항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저항하면 더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저항해서 자존감이 회복되거나 실질적 보상을 얻는 경우는 드물다, 저항과정의 사소한 문제가 가해의 본질보다 더 문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갑질'은 하지 않지만 ' 있는 자;들은 이 억울함을 모른다, 없는 이들의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된다, 하회불안 조정세력이 되거나 허수아비 취급을 받으면서 누가 시켰느냐며 배후를 조사받는다면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사라지고 양비론에 사생활까지 파괴된다,.... 저항해도 저항하지 않아도 비난받는다, 부정의는 끝이 없다, 유명진보 인사나 강남좌파가 저항하면 명에든 실질적 힘이든 얻을 확율이 있지만 없는 이들이 저항하면 박수보다 뭉개진 억장에 다시 억장이 덮친다, 저항하지 않았다는 누구의 시선인가? 그들은 저항했다,

 

                -그들은 저항했다- 중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만 식구이거나 심지어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도 정상 가족 규볌에 부함하면 가족으로 간주된다, 장레식장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가족간의 갈등이나 주먹다짐은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부고란은 이성애제도와 중산층 중심의 일부일체제를 생산 유지 상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만들어 보도한다, 인위적 제도가 자연스러운 인생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삶이 불공평하듯 죽음 역시 그러하다, 애도의 위계는 말할 것ㄷ 없다, 애도를 서열화 하는 사회 제도와 문화적 인식은 매우 다양하다, 누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념할 것인가? 죽음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다,

 

 

보편적이라고 여겼던 것들

상식이라고 믿어버린 것들에 대해 뒤집어서 다르게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어쩌면 누군가가 자기의 혹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것이 보편적이고 상식이며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이라고 지칭한 것들에 대해 나는 (우리라고 하고 싶지만 일단은 나는) 아무런 고민없이 의심없이 받아들여왔다,

그냥 뒤집어 볼 생각없이

뭘 그런 엉뚱한 질문을 하냐고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도 안되고 논리도 없이 믿고 살아왔다,

세상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고 권리도 제각각 다르다,

모두가 나의 정의를 세우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며 나의 평등을  내세운다면

세상은 지옥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누구와 같지 않고 욕구도 감정도 다 다르다,

그 다름이 매일 매시간 매 초 부딫지지만 우리가 그나마 안전하고 평화롭게 사는 건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 몸속 어딘가 간직하고 있는 양보와  주저함 그리고 믿어주는 유전자때문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정의라고 하니까 상식이고 보편이라고 하니 그렇게 믿고 내가 조금 고치면 되겠지 내가 조금 양보하고 불편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그나마 세상이 굴러가고 있는게 아닐까

세상을 뒤집어보고

마땅하다 믿었던 것들이 사실 말 하지 않았지만 몹시 불편했었다고 한다면

또 어디선가 나같은 사람이 사실은 나도 그랬어 라고 소심하게 말할지 모른다,

 

내가 까다롭고 성질이 못되서 불편했었나 싶었던 것들이 나만이 아니었음을....

비록 내 판단이 틀릴 수 있을지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말고도 있음에 반가웟다,

주저하지 말고  그럼에도 예의있고 이런거 불편하지 안나요? 하고 말을 거는 행위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편하게 여겼던 어떤 관행들 일상들 언어들 표현들이 누군가에게는 따끔하게 다가갈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한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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