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꾸역꾸역 우겨넣은 기억은 저 무의식의 바닥에 가라앉아있지만 불쑥 나도 모르게 그 기억이 떠오를때가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말하고 싶지 않고 그저 꾸역꾸역 우겨넣었지만 잊고 싶지도 않고 지우고 싶지도 않다.

 

헤더는 결혼을 생각하는 콜린이 있지만 로버트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이 두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응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을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따고 믿는 나의 일부이다. 로버트는 거의 10년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누구에게 드러내놓고 보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도 외면할 수 도 있는 부분을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고 너무나  사소한 것이지만 그래서 안타깝고 나조차 이제는 마주하고 바라보기 두려워진 기억들

머리로 아는 기억이 아니라 어쩌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때의 바람 그때의 냄새 그때의 감촉이 있을 것이다

헤더에게 로버트는 그렇게 꾸역꾸역 우겨넣고 가라앉혔지만 아무때고 불쑥 불쑥 떠오를 그런 몸이 기억하는 한 부분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모두가 그런 한조각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명확하지 않고 정확한 사실이 아닐 때도 있고 별거 아니잖아...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본인에게는 깊이 새겨지고 몸에 익어버린 기억들이다.

구멍에 빠진 친구에 대한 기억  무언가 잘못된 일을 저지른 형에 대한 기억 부모가 어떻게 헤어졌는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때 나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엄마의 부정하고 비윤리적인 애정행각을 목격한 아들의 복잡하고 어쩔 수 없는 감정들.. 이미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어쪄면 사소한 일이었고 이해못할 일도 아니지만 그땐 심각하고 두려웠다.

 

초등시절 지금과 다르지 않게 물건을 깜빡 깜빡 자주 잃어버렸다. 내가 잃어버린 우산은 이미 두자리 숫자를 기록했고 어딘가 벗어놓고 잊어버린 웃옷도 있고 잃어버린 돈도 합치면 꽤 상당한 액수였다. 잃어버린 물건들은 기가 막히게도 집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조금 더 걸리면 신발을 벗는 순간 생각이 났다. 아차....

몇번을 혼나고 맞아도 고쳐지지 않았다. 어느날 모든 우산을 다 잃어버리고 엄마가 아끼는 우산을 들고 피아노 학원에 갔는데 그만 두고와버렸다. 그날따라 그날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엄마도 잊어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 그 우산이 없다는 걸 우리 모녀는 기억했고 그 당사자가 나라는 것도 알았다. 그때도 혼났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하는게 그때라고 엄마가 더 심하게 야단치거나 한것도 아니었는데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이렇게 모든걸 잃어버리고 다니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고 다시 피아노 학원에 가서 우산이 없냐고 물어볼 용기도 없는 내 바보같은 성격도 너무 싫어서 그냥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 너무 심각하게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고민했다는 것이다.

바다에 빠져버릴까 높은 데서 떨어져 버릴까 아니면 숨을 오래 참으면 죽지않을까하는 생각까지

그 고민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누구에게도 그때 그런 일이 있었고 죽고 싶었다는 말을 하지않았다.

그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테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사소한 일로 죽고 싶었나 싶은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때 내가 얼마나 절절하고 진심으로 죽음을 생각했는지를 삶을 놓고 싶었는지를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잃어버린 우산이나 겉옷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다른 것이 있는데 그건 내 기억 저 바닥으로 깊이 밀어넣고 절대 떠오르지 않도록 꾸역꾸역 누 르고 있었던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그 기억을 하면 아직도 부끄럽게도 나는 몹시 아프다.

어린 나이에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죽을 결심을 누구도 모르게 외롭게 다짐한 나 자신이 부끄럽고 동시에 짠하다.

그런 거다.

내가 간직한 기억은 말로 꺼내고 누군가에게 말하면 피식 웃음을 흘리게 만들고  별거 아니잖아~ 하는 반응을 얻을 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절대 잊을 수 없다.

확실하지도 않고 내가 모든걸 알지도 못하지만 어떤 이미지 하나 어떤 말소리  하나가 깊이 박히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박힌 말과 모습은 유리조각이 피부에 박히는 것처럼 아프고 서럽고 그리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표제작인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가장 좋았고 말할 수 없는 나의 무언가를 건드리기도 했지만 " 폭풍"과 " 구멍" 이 주는 미묘한  감정도 오래 남는다.

사실이란게 드러나면 별거아닌 민낯을 가지지만 그 민낯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몹시도 두 렵고 불안하다. 사실이라는게 그런거다.

당신의 기억은 당신이 가지고 있으라.. 그건 당신속에서만 보석처럼 빛날 것이고 유리조각처럼 아플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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