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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평점 :
그러고 보면 내가 나인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런 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지금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 무언가에 휘둘려 그것마저 놓쳐버린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도데체 뭐가 남아 있을까.....
번지점프를 하다 중에서..
그저께 대대적으로 책정리를 했다.
집 근처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생기고 제일 활발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중고 서점에서 싸게 책을 구입....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끌고 다니던 책을 하나씩 둘씩 야금야금 파는 재미에 들려서 모든 책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집에 뭔가를 두고 싶지 않고 콘도같은 집을 지향하는 나로서는 두손들고 반길 일이긴 하지만 사는 사람 생각은 안하고 낡고 이미 오래전에 나온 책을 무지 좋은 책이라고 꾸역꾸역 팔아야 한다고 우기는 남편을 말리는 건 힘들었다. 나에게 좋은 책이라는 것고 팔리는 책은 다른 거니까.
각설하고 책을 정리하다가 옛날 편지를 발견했다.
친애하는 **에게.. 라고 쓴 짧은 한장짜리 편지였는데
누가 썼는지 이름조차 없어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애정을 가지고 쓴 편지라는 것 (사실 애정이 없이는 손편지를 누구에게 쓰겠는가) 그리고 그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이미 15년 가까이 흐른 후 받아든 그 편지가 참 새삼스럽고 설레었다.
짐작컨대 결혼전 활동하던 동호회의 누군가가 내게 책을 보내면서 함께 보냈던 편지라고 짐작된다. 책을 보낸다는 글귀로 보아..
뭐랄까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문장들로 이어진 자기 신변 이야기뿐인 짧은 메모같은 편지지만 그래도 행간에 보이는 배려랄까 애정이 느껴진다면 너무 오바스러울까
아주 늦게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한때 사귀었다기보다는 몇번 만났던 사람이었고 모임에서 몇번을 보다가 조금은 친해지다가 그냥 흐지부지 되고만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편지가 그때의 기억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사실 별 연애감정도 아니었고 사이도 아닌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싫어서 멀리 했던 기억도 있고 뭐랄까 세삼 그리울 것도 없는 상대지만 그때 내가 받은 편지를 다시 보는 건 또 다른 감정이었다.
아... 나도 한때 이런 적이 있었구나.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나였고 거기에 대책없이 당당하고 자유로웠떤 나를 떠올리게 했다.
괜히 좋아서 딸에게도 보여줬지만 별 관심이 없다.
뭐 절절한 사랑표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지하게 건조한 내용이긴 하다
받은 사람만 보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결을 꺼집어 낼 수 있는 거니까 누군가가 공감하기는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인물건이니까.
그래도 편지를 발견한 그 며칠 내내 기분이 좋았다.
까맣게 잊어버린 내 청춘을 느닷없이 발견한 기분
풋풋하다고 하기엔 모자라지마 그래도 뭔가 설레고 기묘한 감정의 되새김질도 좋았다.
그래서 기분좋게 정미경의 소설집을 읽어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팍.. 나를 닮은 감정의 결을 다시 느껴본다
어쩌면 비루하고 대책없는 청춘들의 허우적거리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 참 빛난다는 걸 그들은 알까? 내가 오롯이 나일 수 있는 순간을 찾아 다니는 그 청춘들이... 골뱅이 처럼 배배 꼬인 뒤끝을 가지고도 다음날이면 다시 헤헤 거릴 수 있는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건지
모든 작품을 읽고 책을 덮으면서는 조금 마음이 아리고 허무하고 하긴 했지만 여전히 한장의 에상치 못한 편지의 감흥은 지속되고 있었다.
결국 이 글은 리뷰가 아니라 책을 읽는 도중 어떤 편지를 발견해서 책은 뒷전이고 그 편지가 주는 감상에 취해서 홍해옿애거린다는 이야기일 뿐인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 되겠다...
고로 같은 작품을 읽어도 그 순간의 상환이나 감정상태에 따라 지극한 비극도 희극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는 것... 아 챙피